직업혁명가는 대다수가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었다. 그들이 공산당에서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학회활동을 축으로지금까지 추구해오다가 그 한계를 깨달은 아나키즘에 입각한 사회변혁의 경험을 발전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구원의 길을 공산당에서 발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좀더 설명하면, 그간 소중히 키워온 새로운 가치 - ‘평민‘을 발견해 윤리적 쇄신과 정치권력의 정당성 재해석의 논리적 근거를 확보한 새로운 삶의 자세 - 를 손상시킴 없이 기왕의 학회 조직의 연장에서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자원 곧 이념 (당시 유행어로 ‘주의‘)과 조직이 제시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서구로부터 배워야 할 근대화된 방식으로 간주된 조직 중 (혁명)당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 P87

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은 경제적인 어려움 등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문제가 근원적으로 제국주의와 군벌에 기인하는 만큼 ‘반제 반군벌‘이란 국민혁명의 ‘신주의(新主義)‘를 통해 총체적으로 해결할수 있다는 인식과 정서를 갖게 되었다. 실제로 국민혁명에 참여하여 개인사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적지 않은 남녀 청년 · 학생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겐 학교뿐만 아니라 이제 정당이 이끄는 (국민) 혁명에의 참여도 전통적 가족제도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이자 은신처로 떠올랐다. - P88

국민혁명에 참여해 직업혁명가의 길을 걸을 만한 인생의 길 (혁명인생관)로 선택한 청년들의 공통점은 더이상 학생으로서의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노동대중과의 일체감을 느끼고자 애쓰는 자세이다. - P95

5·4운동을 둘러싼 또다른 쟁점은 개인주의, 국가주의(또는 애국주의)및 세계주의의 관계이다. 당시 중국 지식계는 ‘국가‘나 ‘국가주의‘ 또는(정당과 의회 중심의) 낡은 정치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왜냐하면 민족국가 관념이 제1차 세계대전을 야기한 직접 원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해혁명(곧 공화혁명)의 굴절, 특히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황제제도 회귀(1916)까지 겪었기에 (낡은) 정치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침략형 국가 관념‘을 비판한 것이었지, ‘구망형(救亡型)국가와 사회‘ 및 ‘인류문명 진보적 애국주의‘나 ‘세계주의적 국가‘에 대한 이념은 중시했다. - P108

중국인들은 세계문화를 서양문화와 중국문화로 양분하고 둘 사이의 대립과 경쟁으로 파악함으로써 서양문화의 몰락은 곧바로 중국문화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보고 싶어하였다. - P116

5·4운동기는 "정말로 절박한 위기라는 감각, ‘구국‘을 향해 경쟁하는 다양한 사고방식, 그들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논의하여 현실에 적용하려는 지지자들"이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어 분열된 -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상의 자유를 누린 - 틈새에 대두한 시대였다. - P120

5-4는 100년간 줄곧 "사회주의적이든 자유주의적이든 모든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약속에 그림자를 드리워온 것으로 보인다." 좁은 의미의 정치를 넘어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사회를 문화와 연결해 문화를 (재)정치화하려 한 5·4운동 주체의 ‘운동‘은 "(대중)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제요 약속"으로서 지금도 살아있다.
- P121

대륙에서 추진된 신문화운동의 핵심인 백화 운동도 5·4운동의 영향 속에 추진되었으나, 식민지 ‘타이완에서의 5-4‘는 지역화된 특성을 보였다. 백화문은 발음체계상 타이완 민중의 일상어와 거리가 있어 문학언어로 부적절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강요하는 식민 당국에 맞설 저항의 언어로 토착적인 타이완어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1930년대 들어가면 백화문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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