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부가 소재한 베이징에서는 외교문제로 정부의 정당성이 손상당한 반면에 텐안먼에서 열린 정치집회의 정당성이 획득되는 단초가 열렸다. 그 특징은 앞으로 계속될 베이징에서의 정치적 집회 패턴의 모형으로서 주목된다. 즉 정치적 이슈가 발생할 때, 민간이 각 단체별로 결집해 텐안먼에서 대규모 국민대회를 열고 뒤이어 주요 거리에서 시위를 하여, 자신들의 정치석 주장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뒤집으면 베이징정권의 정당성이 취약함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된 담당세력은 바로 학생이었다. - P36

베이징정부의 국가권력으로서의 정당성이 공개적으로 비판되고 있고 그와 동시에 텐안먼집회와 같은 민간운동의 정당성이 옹호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톈안먼집회의 정당성이 당장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 것은 물론 아니다. 텐안민집회는 1919년 5월의 사건으로 갑자기 새로운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민간 축제와 정부 행사의 장이었다가 중앙정부 비판의 장으로 변하면서, 그리고 집회를 둘러싼 경쟁과 타협, 집회의 급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 P38

신해혁명이 가져온 절대권위의 상실은 ‘해방의 공기‘를 확산시켜 새로운 사회·문화로의 지향이 다방면에서 표출되도록 했다. 변발 자르기, 전족 풀기, 자유결혼 풍조가 나타났고, 젊은 유학생들이 다수 사회엘리트층으로 부상했다. 이 해방의 징표들의 점증적 축적이 바로 신문화운동의 밑바탕을 깔았다. - P48

헌정은 국민국가의 ‘화려한 표징‘으로 보였고 세계체제 속에서 중국의 지위를 높여줄 것이란 믿음을 줌과 동시에 정치엘리트에게 즉각적인 편의를 베푸는실용적인 기능-그들의 정치적 참여를 정당화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 아래 존재하는 하층민에게는 정치 공간을 열어주지 않은 점에서-을 했던 것이다. - P49

대립과 타협의 정국은 제도로서의 공화의 효율성에 회의하게 만들었고, 일부 지식인에게는 심지어 국가담론에 대한 환멸까지 조성했다. 공화의 보편적 가치가 상당히 훼손당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공화란 추상적 어휘는 그 시대의 열쇠말로서 이를 사용하는 모든 세력을 압박하면서 그것이 제시한 일정한 방향으로 논쟁하도록 이끌었다. - P49

정권교체에 불과한 무장혁명인 신해혁명을 넘어선 좀더 철저한 혁명인 ‘정신혁명‘에 대한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신문화운동은 바로 이에 부응해 새로운 도덕과 주체(곧 신청년)를 동원하여 공화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었다. - P51

「까라한선언」이라고 흔히 불리는 「제1차 중국에 대한 선언」이 전해지기 직전까지 혁명 소련을 모델로 삼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소련정부가 발표한 이 선언, 즉 이전 러시아정부가 중국에 대해 가졌던 제국주의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반년도 더 뒤늦은 1920년 4월경 중국에 도달하면서 소련이 미국을 대신한 모델로 격상되었다. 때마침 베르사유조약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며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실망하던 당시의 중국인에게 소련의 태도는 ‘공전의 충격‘을 가져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전과 같은 러시아혁명의 내정 차원에 대한 호감을 넘어 세계질서관에도 긍정적으로 호응하게 되었다. - P57

20세기 초 중국이 직면한 공화의 위기와 문명의 위기라는 위기의 이중구조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를 제공했다. 신해혁명이 굴절되는 공화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공화의 실질을 ‘국민심리 개조‘를 통한 길과 ‘대항세력의 조직화‘ 라는 길에서 찾았고,1차대전이 초래한 문명의 위기에서 해방의 ‘신기운‘과 대안적 문명의 가능성을 길어올렸다. 이 위기의 이중구조에 대응하는 방식이 5-4의 주체 및 목적과 의미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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