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위정자가 상서를 장려한 측면이 강하다. 18세기 후반부터 각 번 정부들은 재정 위기와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을 번사(士)들뿐 아니라 민중에게까지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일반 사무라이와 상층 영민(民)들이 봇물같이 의견을 내놓았다. 애초에 상서 요구는 번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것이었지만, 한번 인정받은 이들의 발언권은 다른 분야로까지 확대되었다. 정책과 인사에 대한 비판이 행해지더니 급기야 로주 등 번 정부 수뇌에 대한 비판과 때로는 번주에 대한 비판도 행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기 시작한 상서 붐은 유학적 정치사상에서 강한 정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를 노골적으로 억누를 수없었다. - P196
이제 개혁파 사무라이들은 스스로를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는 일개 역인이 아니라 국가 대사(여기서 국가는 번)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일개 사무라이를 넘어 천하 대사를 책임지는 사대부, 나아가 ‘지사(志士)‘ 탄생의 출발점이었다. - P199
사무라이들도 점점 군인이 아니라 행정 관료, 서리가 되어 갔고, 이에 따라 쇼군도, 다이묘도 전쟁 지휘관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희미해졌다. 그렇다면 이들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에 18세기 초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쇼군을 유교적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 P210
메이지 초기 정당론도 정당 무용론과 ‘올바른 유일 정당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판자들은 정당이 공익과는 관계없이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결국 공적 이익을 해친다고 보았다. 그리고 정당 간의 투쟁은 사회적 낭비이며, 나아가 사회를 동요시키는 불안 요소로 파악했다. 이런 관점은 현재 한국이나 일본의 시민이 정당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동아시아의 정당들은 100여 년 동안 이런 자신들에 대한 혐의를 불식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 P220
정당 도입의 초창기에 정당을 부정하거나 유일 정당을 지향하는 관념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은 정당에 대한 이후 일본인의 태도를 크게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의 다이쇼(大正) 정당정치가 그토록 맥없이 무너지고 독일 나치당을 모방한 대정익찬회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탄생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전후 완벽한 민주적 선거가 보장된 상태에서도 유권자들이 자민당의 일당 지배를 약 50년 동안 용인한 점, 그리고 현재의 정당정치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점 등도 이런 맥락에서 보고자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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