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권 교체기 때마다 새롭게 등장한 실력자와 기존의 천황 간에 이루어진 협력이다. 장차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는 실력자는 권위의 원천인 천황을 폐하고 그 자신이 모든 권력과 권위를 독차지하는 대신, 어디까지나 천황의 조정이 설정한 관위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려 했다. - P168
정이대장군의 일은 ‘이적(오랑캐)‘을 토벌하는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는 평화주의자인 천황에게 억지로 전쟁을 시작하도록 강요한 전쟁광 군인들을 굴복시켜 천황을 그들의 포위로부터 구출해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맥아더와 천황의) 회견 장면은 쇼와 천황이 맥아더를 정이대장군에 임명한 순간이 되는 셈이다. 전쟁광 군인들이 재판에 넘겨져 처벌받은 뒤 그를 대신에 ‘이적‘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였다. 그 위협으로부터 천황을 지키는 것이 쇼군의 임무다. - P170
자기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절대적 존엄을 인민에게 요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이 천황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천황을 신격화하고, 그것을 인민에게 강제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천황의 옹립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서 천황 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자신이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천황의 존엄을 인민에게 강요했으며, 그 존엄을이용해서 호령을 했다. - P175
미국은 국체호지의 신화를 만드는 데 협력하면서 (천황 숭배),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천황 모독)을 은폐했다. 한편 민주주의자로 전향한 일본인들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면서(천황(미국) 숭배), 이미 살펴봤듯이 그 실체가 국민주권과는 동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았다(천황(미국) 모독). - P176
전후 이른바 친미 보수 지배층은 (중략) 대미 종속 레짐 = 안보 국체를 천양무궁의 것으로 호지하려 하는데, 그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념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복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그들의 현실적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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