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자위대가 되는 무력 집단의 창설은 포츠담 정령政令에 따라 이뤄졌다. 전후 일본의 비무장을 결정했던 권력과 동일한 권력이 어떤 민주주의적 프로세스도 거치지 않고 이번에는 재무장을 명한 것이다. 그때 사실상의 군사 조직과 헌법 9조가 서로 모순되는 정합성 문제를 방치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자위대를 둘러싼 헌법 논쟁의 기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P155
한마디로 정리하면 포츠담선언 수락에서 점령,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서 주권을 포기하는 대가가 바로 국체호지였던 셈이다. - P159
그러나 이미 살펴봤듯이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국체는 변경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호지됐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주관 (지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주권을 내주고 얻은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국체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의 권리이며, 바꿔 말하면 국체의 개념에 대해 일본인이 투영했던 관념을 향후에도 계속 투영할 수 있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해석은 당연히 ‘포츠담선언의 내용에 명백히 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라는 제한을 받는다. - P160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전쟁에 져서 다행이다‘는 속내를 전후의 일본인들은 자주 내비치곤 한다. 본래 있을 수 없는 이런 말이 절반쯤 상식화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새로운 국체‘를 얻어낸 덕이라고 생각한다면, 꽤 납득이 간다. - P162
오늘날 오키나와는 나고시 헤노코의 앞바다에 새 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국민 통합의 위기가 가장 명료하게 가시화된 장소다. 이곳은 ‘전후 국체‘의 역사적 기원이 최종적으로 다다른 도착지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천황제의 존속‘에는 헌법 9조에 의한 절대적인 평화주의가 필요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천황제의 존속을 위해서 미일 안보 체제, 즉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또 쉬지 않고 전쟁을 지속하는 군대가 평화국가의 영토에 항구적으로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같은 모순을 감추는 역할을 강요당한 곳이 오키나와다. - P165
천황제 존속과 평화 헌법과 오키나와의 희생은 삼위일체를 이뤘으며, 그 삼위일체에 붙여진 이름이 미일 안보체제(= 전후 국체의 기초) 였다. ‘오키나와 메시지‘는 국체호지의 명줄이 바로 이 삼위일체에 달려 있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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