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미국의 일본 점령은 놀랍도록 순조롭게 이뤄졌다.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가열찬 전투 행태를 근거로, 점령군에 대한 실력 행사를 포함한 끈질긴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경계했으나 막상 점령이 시작되자 그런 저항은 전혀 없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천황이 일본 국민을 상대로 전쟁 종결 선언(옥음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중략) 천황 자신이 "전쟁은 끝났다"라고선언한 것 그 자체가 귀축미영‘, ‘성전 완수‘, ‘일억 불덩어리‘ 등등을 외쳤던 사람들로 하여금 돌연 모든 전투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 P126
패전 뒤 일본인은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귀축‘이라고까지 불렀던 적에게 저항은커녕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동포를 죽인 적에게 말이다. - P127
피지배란 바로 부자유다. 지배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자유를 지향하는 탐구가 시작되는 만큼, 지배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희구도 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 즉,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체제는 지성의 발전과 자유를 향한 욕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 위에 성립돼 있다. - P132
맥아더가 보기에, 일본인은 진정한 민주주의 또는 진정한 인민주권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만큼, 전후의 일본에 ‘천황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결한 일이었다. 일본인은 천황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는 경우에만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국민성에 대한 이런 보수적인 견해 때문에 맥아더는 몇 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천황의 ‘대은인‘이 됐다. - P132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전후의 일본에 미국 입맛에 맞는 민주주의 비슷한 체제를 구축하려면 천황이 필요했기 때문에 천황을 무죄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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