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실상>은 초보자에서부터 깊이 있게 공부하시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르침을 주는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제가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알리고 싶은 글과 공부는 여러 도반님들께서도 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사람의 근기는 각각이며 취향도 각각이라 다양한 분들의 말씀을 소개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타이핑한 부분도 있고 다른분의 사이트에서 퍼온것도 있습니다. 긴글이 되겠지만 뜻있는분들에게는 읽고 도움이 될것같아 <생명의 실상>을 종종 올리려고 합니다. 이번것은 와우선원이란 곳에서 퍼왔습니다. 생명의 실상이 뭐야?하시는 분들은 제가 올린 조촐한 리뷰가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으실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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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제1장

종교상의 <죄의 사함>에 대하여

 

1.내 실상속에 이미 모든 것은 있다

모든 것은 지금 현상계의 내 손에 없어도, 성신의 손에 있는 것은 모두 상속자인 우리들의 자유 사용에 맡겨져 있으므로, 이미 모든 것을 우리 손에 주고 있는셈입니다.

부富를 바바라는 자는 무한한 부를 나의 실상으로부터 끌어낼수 있으며, 생명을 바라는 자는 무한한 생명을 내 실상으로부터 끌어낼수 있으며, 능력을 바라는 자는 무한의 능력을 자신의 실상으로부터 끌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부는 동시에 상속자의 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첨하며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는 인간처럼 기도했다고 해서 마음을 움직이며,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벌을 주는 분은 아닙니다. 신을 그처럼 아첨하여 따르는 자를 기뻐하는 경박한 인간 정도로 생각함은 성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경不敬한 생각이지 하나님을 받드는 생각이 아닙니다.<마태복음>제5장45절에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햇는데, 이'하늘'이란 '실상의세계'이며, '아버지'란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늘의 아버지'즉 실상의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만 이익을 주고,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편협한 분이 아니시며 태양은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비치며, 비가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내리듯이,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도 기도하지 않은 자에게도 이미 은혜를 주고 계시다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기도의 공덕功德

그렇다면,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분도 계실겁니다.

기도는 결코 '실상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는 현상세계가 실상세계로 화하고 방향전환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진 찰영에 비유한다면 현상세계에 '실상세계'의 그림자를 비추기위해 렌즈의 방향을 바꾸고 핀트를 맞춘다-말하자면 이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의 기도가 현상세계의 실현되지 않는 것은, 광선이 희미하거나 핀트가 맞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진에 안성마춤으로 물체의 모습이 비치지않는 것은 실상세계에 있어서 그것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깨우침의 광선이 희미햇거나 마음이 실상세계와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이므로, 깨우침의 광선을 밝게 하여초점을 꼭 맞도록 하면, 그 바라는 사물이 외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깨우침의 광선을 밝힌다는 것은 이미 실상세계에 모든 좋은 것이 주어져 있다는 실實을 안다는 것이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실상세계로부터 투영하는 광선을 적당히 집중하기 위해 신념을 강하게 하는 일입니다.

 

3.이미 이루어져 있는 천국

"기도"는 이 신념을 강하게 하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늘'곧 '실상의 세계'에 있어서는 성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실상의세계'를 기도로 변화시킨다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실상의 세계'는 이미 개조한다거나 개조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이 이미 하나님의 마음대로 완전히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성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아는, 하나님의 무한능력을 아는 사람은  "신이 만든 실재의 세계는 이미 완전합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신이 만든 실재의 인간은 이미 완전합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다만 이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말도 이론도 필요없읍니다. 단지 예, 예 하고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너는 성신이 창조한 성신의 아들이다. 성신의 아들은 병에 걸리지 않아!"라고 말하면,

"예, 예, 감사합니다. 성신의 아들인 난는 병에 걸리지 낳느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습니다."하고

순순히 대답하는 것이 "참다운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줄것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므로 소리내어 때때로 하나님에게 주의를 줄 생각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는 따위의 일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무시한 것으로, 신심이 없다하겠습니다.

 

4.신상관神想觀의 비법

"너는 성신의 아들이다" 라고 자기 마음에 이르고

"예, 예, 나는 성신의 아들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받는 행사가 신상관 입니다.

신상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에게로 흘러 들어가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된다고 느낀다면서 조용히 숨을 들이쉬는 것은, '너는 성신의 아들이다'하고 자기 자신에게 이르고, 그사실에 대하여 주의를 촉구하고 잇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다음에 조용히 배 속에 숨을 모으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차 있다. 사는 힘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예, 예, 나는 성신의 아들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아무런 이론도 의혹도 없이 오직 사실의 실상을 자기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그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구해주자'고 생각하는 데 대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외운다-즉 '아미타불님 감사합니다' 라고 받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성신의 아들이다' 라고 염念하는 것은 아미타불이 '구해주자'고 생각하는 것을 받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철저한 받음이어서

"이미 구함을 받았다. 이미 성신의 아들로서 구한다. 하지 않는다고 따질 것도 없이 본래 부터 하나님의 상속자이다"라고 창조의 우주신이 하시는 말씀을 "예, 예, 감사합니다"라고 확인하여 실상을 받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털끝 만한 틈도 없으며 지금부터 부탁하여 구제받는다면 부탁하는 법이 나빠 구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구제받은 것이며 마음 속은 실상의 세계에 이미 이루어져 있어 이미 '일이끝난'것입니다.

불교에서라면,

벌써 법장보살의 구제의 본원력은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이면,

이미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죄를 없애버린것입니다.

이미 죄가 있나 없나를 물어보거나 죄인이라고 인간을 부르거나 구제받지 못할까 하고 걱정하거나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너는 성신의 아들이며, 무병無病, 무죄無罪, 불고不苦, 불뇌不腦이다" 라는 신시神示를 "예, 예, 감사합니다"하고 순순히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힘에 의해 절대적 신뢰를 가졌다는 식의 외부장식으로서 어떠어떠한 수행을 하여 구제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기도에 의한 그 공덕 때문에 구제해 달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5.신심信心이란 무턱대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신심이란 하나님의 선함과 사랑과 지혜와 힘을 절대로 믿는 일입니다.

불신이로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벌을 준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사랑은 털끝 만큼도 늘거나 줄거나 할 수 없읍니다. 다만 현상계는 우리의 신념이 형상화한 세계이므로 믿는 정도가 적을수록 비례하여 그 사람이 현상계에는 좋은 일이 적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신상관을 하여 '너는 성신의 아들이다'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여, "예, 예, 저는 성신의 아들입니다. 감사합니다"고 받는 것은 우리 인간 쪽이 성신을 잊지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하나님에게 '나를 잊지 마옵소서'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더 명료하게 자기의 실상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기의 실상' 이란 육체로 보이는 모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의 아들로서 창조되어 있는 내부 실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실상의세계'와 그속에 풍부히 담긴 참다운 은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아, 당신의 실상은 신의 아들인 것입니다. 내가 사는 세계는 이미 실상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무한한 생명과 지혜와 사랑과 공급을 수여받고  있는것입니다. 이 부인하기 힘든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이제부터 부탁하여 그 결과 은혜를 나누어 받는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지금 나타나 있는 현상계의 은혜만을 보고 이에 감사하는 피상의 고마움과는 달라서, 참으로 깊은 실상의 고마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6.성신에 참으로 감사하게 되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려면 하나님이 자신과 일체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며, 자기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내 자신으로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내자신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하나님과 자기와의 일체감을 깊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와 하나님이 불가분의 일체라는 것이 실감적으로 깊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의 생명이 나에게로 흘러 들어와 내 생명이 되도다" "나는 신으로 충만되어 살며 성신과 불가분의 일체이다"이런 느낌을 따지지 않고, 현재 의식만이 아니라 잠재의식의 밑바닥까지 집어넣는 것이 신상관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기도법이 있지만 신상관보다 나은 기도는 없는 것입니다.

 

7.죄를 없애는 길

<감로의 법우>속에, "죄와 병과 죽음은 신이 만드신 바가 아니므로, 실재의 가면을 덮어썼지만 비실재이니라, 허망이니라. 나는 이 가면을 벗겨 죄와 병과 죽음과의 비실재를 밝히기 위해 왔노라... 죄는 비실재이며 미망의 그림자이므로 십방十方의 제불諸佛도 중생을 섭취하여 자주 죄를 소멸하였노라. 예수 그리스도 단지 말로서 '그대의 죄 사함을 받았노라'로 말하여 종종 죄를 소멸하였노라. 나도 말로서 '생장의집'의 노래를 쓰게 하여 말의 힘으로 죄의 본질을 폭로하여 죄로하여금 본래의 無로 돌아가게하노라. 내말을 읽는 자는 실재의 실상을 알기 때문에 일체의 죄가 소멸되느리라. 내말을 읽는 자는 생명의 실상을 알기 대문에 일체의 병이 소멸되어,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리라고 되어 있읍니다. 이것은 생장의 집 대천사사의 계시이지 이치가 아닙니다.

 '죄'는 죄를 붙잡아 하나씩 처벌하라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컨대, 당신이 암흑 속에 있으면서 어둠을 버리려고 생각하여, 어둠을 쥐고 집어던져 내버려도 암흑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암흑이란 곧 '빛이 없는것'- 본래 '무'이므로 암흑을 쥐고 내버릴 수는 없읍니다.

죄도 본래 '무'이므로 '죄'를 붙잡아 하나씩 처벌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을 없애는 데는 다만 빛을 켜면 됩니다. 죄를 없애는데는 다만'생명의 실상'으로 귀입歸入하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종교상의 의미로 '죄가 사해진다'는 것은 죄 자체가 파괴된다-죄자체가 본래의 '무'로 돌아가서, 성신의 아들 본래의 실상의 즐거움이 나타난다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인간은 '성신의 아들'이며 상락이 나의 참다운 모습, 실상입니다. '성신의아들'인 실상이 나타나지 않고는 넋의 끝없는 즐거움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저질러 기쁨을 얻어 보려해도, 결국 그사람은 괴로움을 맛볼 뿐입니다. 죄인은 잡히지 않고 도망다닐 동안이 오히려 괴롭고, 죄수는 최후의 판결이 내려질 동안이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죄의 실상이 고통이며 불행인 것은 상락의 '성신의 아들의 실상'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사랑이므로 우리가 신에게 기도해도 신은 죄를 그대로 둔 채 용서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불행인 채 참고 견디라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나를 죄지은 채 용서해주십시요. 죄인 채로 행복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은 '제발,눈을 감은 채 빛을 보여주십시도' '제발, 좁은 구멍에 쳐박힌 채 넓은 세계를 맛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신은 '빛을 보고 싶으면 눈을 뜨십시오. 넓은 세계에 나가고 싶으면 좁은 구엉에서 빠져나오시오' 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죄인 채로 행복을 얻고 싶다는 자에게는 신은 "그대가 상락의 행복을 얻고 싶으면, 본래 '죄'없는 그대의 실상을 보라"고 말씀하실겁니다.

  

                                                                

ps : 여러 훌륭한 분들의 말씀은 다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도, 인도성인들의 말씀도, 티벳수행자들의 말씀도, 뉴에이지분야에서 고차원 스승, 신과의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말씀도 다 똑같습니다. 큰스님의 말씀도 다 같습니다.  마하리쉬가 말씀한것처럼, 자기탐구와 신에게로 헌신의 두길중 각자의 성향에 맞게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로 불교식 방법은 자아탐구쪽에 가깝고, 다른 방법들은 신에게 헌신을 통해 에고를 소멸하는 방법입니다. 생명의 실상에서나 대행선사님의 방법도 처음에는 신 또는 주인공 또는 성신등을 일단 세우고 거기에 모든것을 녹여버리고 나갑니다. 그후에 에고가 사라지면 궁극의 참나를 찾게 되는것입니다.  물론 그후에도 공부는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말씀만 더 하면 자식도 결국 부모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커서 아버지가 되고, 자식은 커서 부모가 된다는 것입니다.

ps 2 : 내가 신을 보는 눈이 바로 신이 나를 보는 눈이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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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5-02-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허급지급 많은 책을 읽기 위해 서둘렀는데, 요즘은 그냥 고요합니다. 읽을 책이 밀려있어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보는 것은, 새롭게 아는 것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님께서 올려주시는 새로운 글은 늘 힘이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바람이되다 2005-02-24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行이 어렵고 行이 핵심입니다. 그냥 行하는 것이 ...그것이 어려운것.
혜덕화님 감사합니다. ^^

박재범 2009-12-2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교에서 정진바라밀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진이라고 하면 백척간두에 진일보하는 것으로만 알면 싫고 힘든 마음을 눌러 참게 되지만

<수도는 생활의 필요>라는 것을 아는 것. 우리의 생명과 같은 것. 정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안다면 행이야 말로 얼마나 감사한가 ! 하고 생각하고 기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지는 것이 정진바라밀이라고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