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박스 셋트 - 거울, 이반의 어린 시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 알아두셔야 할 게, 이 끄적임을 읽으시다 보면 거의 끝부분에서 실제 사람의 시신이 담긴 기록 필름 쇼트가 있습니다. 예. 맞아요. 제가 그걸 또 캡쳐를 해 놨어요. 나쁜 놈이죠. 심하게 잔인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실제 사람이 죽은 거니까 혹시 거부감 있으신 분들은 독일 시퀀스 운운하는 장면이 나오면 스크롤 바를 빨리 내리시라고 적어놓습니다. ...그냥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하드코어한 면이 있다면서 누명 한 번 씌어보고 싶었어요. *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반은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버드나무가 자라 있었던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그 누구도 왜 이 나무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것이 이반의 버드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에서 죽어서 우의를 관뚜껑마냥 덮어쓴 채,

이반이 버드나무 아래 그늘로 돌아왔다

 

이반의 버드나무

이반의 버드나무

하얀 배를 닮은 그것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주연: 니콜라이 부를라이예프, 발렌틴 주브코프, 니콜라이 그린코, 예브게니 자리코프, 스테판 크릴로프, 발렌티나 말야비나,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블라디미르 마렌코프

음악: 바야체슬라프 오프치닌코프

촬영: 바딤 유소브

18세 관람가 / Black & White / 95분

원제: Ивано детство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 버리는 경험을 꽤 민망하게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사람이다. 이전에 <솔라리스>와 <스토커>를 본 상태였고, 그 다음이 <희생> 이었다. 이 작품을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초등학생 때 처음 그 작품의 VHS 커버를 보고는 관심이 가서 대여해보려 했지만 당시에 그 작품의 관람 등급이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였다. 우일 비디오에서 발매된 그 VHS는 내가 처음 비디오 대여점에서 발견했을 때도 포장이 뜯기지 않은 상태였는데, 당시에는 보지 못했고 그 곳 주인이 15세에 근접한 나이가 되면 대여를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줬다. 그리고 14세가 되던 해인 2002년에 마침내 그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작품이 한국에 개봉했을 때가 95년이었는데 7년 동안 대여 해 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희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문으로 들어왔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본다는 생각에 흥분했던 당시의 홍준호는 작품이 진행된지 50여분이 넘어 스르르륵 잠들고 말았다. 지루해서 그 고통으로 몸을 배배 꼬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르르륵.. 그렇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작품을 볼 때 매혹적인 영상에 눈길이 가는 내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선사하는 영상미학은 단숨에 매혹 될 수 있을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선보이는 모습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가령 <희생>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긴 롱테이크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수다 장면들에 매혹된 듯한 그런 상황인데,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은 날 한 번도 잠들게 만든 적이 없는데 왜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날 꿈꾸게 하고', 꼭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에 꿈에서 깨게 만들었던가? 사실 지금이야 왕빙, 라브 디아즈 감독 같은 영화인들이 있으니 '아. 타르코프스키는 그 감독들에 비하면 마이클 베이구나.' 하면서 느끼지만 어쨌든 그 때는 그랬다.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내겐 너무 거대한 생각이었고, 그냥 한 편의 작품이라도 잠들지 않을 정도의 깊은 공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데뷔작으로 가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반의 어린 시절>의 도입부는 <희생> 등의 작품보다 시각적으로 더 강렬하게 감상자를 사로 잡는다. 사실 강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이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장르의 작품이고 주인공이 어린아이라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독의 작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어떤 자극의 정서가 존재한다. 그것이 은유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어머니. 뻐꾸기가 있어요."


작품의 첫 시작에서 ,이반은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 지대에서 어머니가 떠다주는 물을 마신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던 이반은 어떤 소리와 어머니의 시선 하나로 산산조각 나버린다. 악몽이 침범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갑작스럽고 급격하게 줌 아웃하며 이반을 깨운다. 과거를 회상하는 꿈이었던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에 관해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것이 섬뜩하든 아름답든 간에 기본적으로 '차분함' 이 연상되는 것인데, 도입부 시퀀스는 그 기본적인 선입견을 날려버릴 정도로 상당히 자극적인 감흥을 던져준다.


정말 가히 ' 아, 씨발 꿈' 이라 할만하다.*

 

이건 사실 카메라 움직임과 배경의 전환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까 전만 해도 러시아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엘프같았던 꼬마가 갑자기 황폐해진 눈동자와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을 한 채 돌아다니니 당시 자국의 관객들은 어떤 감흥을 느꼈을까. 확실한 것은 당시 정부는 <이반의 어린 시절>을 제작하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방식을 굉장히 싫어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창 작품이 촬영되고 있을 때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서 줄거리가 끊기지 말고 진행되어야 하며, 줄거리를 비롯해서 작품의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어져야 한다고 항의했다. 말이 항의인 것이지, 영화 만들겠다는 데 정부가 간섭하고 통제 하겠다는 것도 웃기지만 단 한 순간의 은유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단 한 순간의 '다른 생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런 항의전화는 작품 촬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됐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빌어먹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도입부를 포함하여 작품의 전반부에서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달리 굉장히 날이 서 있는 듯한 이반과 젊은 중위인 갈제프의 만남이다. 이반은 혼자서 독일군의 총격을 피해 드네프르 강가를 헤엄쳐 왔다. 그래서 처음엔 어떻게 죽지 않고 헤엄쳐 왔는지를 궁금해하던 갈제프는 이반을 심문하려고 한다. 그러나 곧 소년이 러시아 부대의 척후병으로 활동해 왔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놀란다. 왜 이런 아이까지 전쟁에 개입해야만 하는 것인가.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느껴진 그는 그라즈노프 대령이 있는 군대에게 전달해 줄 비밀 암호를 적어 내려나가는 이반을 병사가 아닌 '소년'으로 대접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반 역시 잠시 진심을 느꼈는지 경계심을 거두고 순순히 그의 배려에 응하고, 곧 잠이 든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꾼다.

 

들리는 말로 러시아 정부는 이런 식의 전개와 영화화된 작품의 최종 결과물을 보고 많이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명확하지 않은' 전개방식도 그렇거니와, 그들은 전쟁 승리와 혁명 (시도 때도 없이 혁명이다.) 을 위해 겁없이 전장으로 뛰어드는 소년 전쟁 영웅의 캐릭터가 등장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화된 작품의 초안 시나리오가 실제로 그런 식의 전개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그런 입장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 작품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겁없이 뛰어드는 소년 병사가 등장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뭔가 그들의 입맛에 맞게 확실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감독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최고의 영화인 중 한 명이자 인재였지만,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와 체질적으로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무리 스탈린이 죽고 난 뒤에 조금이나마 사회 분위기를 완화한 상태일지라도 말이다.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단편소설인 <이반>을 원작으로 한 <이반의 어린 시절>은 원래 제작사인 모스필름 측에서 의뢰한 감독이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에두아르도 아발로프 감독. 그러나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신통치 않았나보다. 제작은 중단되었고, 모스필름 측은 그가 찍어뒀던 필름들을 폐기하고 1년간 영화화를 중단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그렇게 누군가가 만들다 만 결과물을 대신 이어받는 식으로 시작됐던 것이었다. 데뷔작부터 온전하게 자신의 의사와 창작적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은 상태로부터 시작한 것이, 그로 하여금 더 기를 쓰고 자신의 스타일을 처음부터 확립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감독은 의외로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소설이 가지는 몇몇 요소들에 매혹되어 있었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과  어떤 극적전개 없이 마치 냉철하게 보고서를 작성하듯 사건을 서술 하는 점, 그리고 이 아이가 죽음을 맞이할 때도 위치가 추적되어 보고 된다는 설정이 그랬다. 하지만 매혹만 되어 있을 뿐, 소설의 전개방식과 중점요소들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감독에게 있어 영화는 '정서적인 연결과 시적 서정성'의 집결체였기 때문이다. 감독은 작품을 촬영할 때 제작진들이 소설을 철저하게 고증해서 만들어 놓은 사실적인 프로덕션 디자인들을 보고는 아무런 영화적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은 모스필름 측에서 준 시나리오를 자신의 방식으로 수정하기 시작한다. 과연 '전쟁'과 '꿈'은 어울리는가? 감독은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의 정서적 연결과 시적인 서정성의 합일을 위해서 과감하게 두 가지 요소를 결합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현실의 잔혹함과는 또 다른 방식의 잔혹함을 목도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웃기지 마! 지금 애, 어른이 어디있어!? 전쟁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아!

나 되게 쓸모 있는 사람이야! 뭐든지 잘 할 수 있다고!"

 

작품을 처음 본 지도 꽤 됐고 (그 때는 러시코에서 출시된 DVD를 통해서 봤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DVD로 다시 본 것도 꽤 오래 되어서 이 대사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흐름 상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훌륭하게 척후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이반은 포상을 기대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군사학교로 가는 게 좋겠다는 '어른들'의 대답이다. 이쯤 되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겠지만 이반은 전쟁고아다. 그리고 이 소년을 척후병으로 보낸 군인들은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군사학교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반은 끝까지 자신은 쓸모가 있으니까 계속 이용하라고 어필한다. '이용' 이라는 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용이라는 단어만큼 편하면서도 무서운 말은 없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순수한 분노의 의지로 이용하라고 외치는 말처럼 이용하기 좋은 수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써 놓은 이반의 말은 어른이 듣기에도 꽤나 매섭다.

 

실은 위의 대사와 장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반이 또 꿈을 꾸는 장면이 있다. 총 네 번 등장하는 작품의 꿈에서 두 번째 꿈을 꾼 것인데, 이번에는 이반과 어머니가 우물에 물 뜨러 와서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반에게 우물이 깊으면 낮에도 별이 보인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정말로 우물물에 무언가가 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반사인 것 같기에는 우물에 비친 대상이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호기심이 생긴 이반은 우물 밑으로 내려가서 반짝이는 뭔가를 잡으려 한다. 바로 그 때 위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이반의 시야에서 어머니가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작품이 물의 이미지를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에서 물의 이미지는 자주 출현했다. 그 중에서도 <거울>이나 <스토커>에서 보여준 물의 이미지는 그의 작품들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솔라리스>나 <희생>에서의 물은 생물을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내는 지루하게 감상한 사람이라도 그 장면들은 아예 포스터로 만들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지. 금승훈 감독의 글 중 하나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 에 적힌 일화를 조금 인용하자면, 감독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할 때 동시에 해저 탐사반에 자원해서 심해 탐사를 했던 경력이 있다고 한다. 아마 그의 작품세계에서 물이 자주 연관이 되는 건 감독 본인의 이런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심해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해저의 물결을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 물의 이미지가 가장 직접적으로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이반의 어린 시절> 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작품에서 이용되는 물의 이미지는 죽음을 삶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반이 가장 생기발랄했던 시절에 어김없이 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삶의 기억들은 현재의 자신이 산 송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원인이 된다. 작품은 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속성들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가령 음식물 쓰레기가 물과 어울렸을 때 더 심하게 풍기는 냄새, 물에 잠긴 사람의 시체가 보여주는 흉측한 몰골과 썩은 냄새. 그 냄새... 물에 불어버린 뭔가를 만질 때 느껴지는 물컹함과 파편화되는 요소들 같은 것들 말이다. 이반이 꾸는 두 번째 꿈에서 총에 맞은 어머니는 우물 옆에 쓰러져 있고, 그런 그녀의 몸에 물이 세차게 끼얹어진다. 죽은 사람에 몸에 물을 끼얹는 것은 더 불어터지고 썩은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과거의 회상이기는 하지만, 꿈으로 표현된 이 시퀀스를 통해서 과연 정말로 이반의 어머니가 이런 방식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이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어머니의 죽음은 이반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물은 몸의 기억이다. 축축히 젖어드는 물방울이 예전의 일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후로 작품은 꿈에서 깨어난 이반의 단독 쇼트가 등장할 때마다 끊임없이 조그맣게 낙숫물 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 속 대부분의 장면에서 굉장히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반의 모습을 납득 시키는데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듯 내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자연적 요소들을 마치 영화 속 미술처럼 이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들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놀라운 로케이션 촬영 능력도 있는데, 이는 자연적 순간들을 잘 이용하는 데이비드 린이나 홍상수 감독같은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치 헐리우드에 있는 ILM 같은 특수효과 회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구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상력을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서다. <스토커>에서 천장 뚫린 방에서 비가 쏟아지는 장면 같은 것. 아니면 <노스탤지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도 될 것 같다. 주인공이 집 앞에 주저 앉아 있는데 그 뒤로 교회인지 사원인지 모를 옛날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들 말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제 막 컴퓨터 그래픽이 그 질감을 조금씩 극복하고 초보적으로나마 이용되고 있을 때였고, 광학 특수효과가 애니매트로닉스와 조합하여 구식 특수효과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지금의 눈으로 냉정하게 따진다면 그 당시의 특수효과 합성 쇼트는 뭘 해도 티가 날 때였다. 단지 티가 나도 당시 시대에 이뤄낼 수 있는 성취에 감탄한 것도 있고, 또 예의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봤을 뿐이지.   

 

그런데 이 감독은 <이반의 어린 시절>만 한정지어도 그 당시의 헐리우드가 '평면적으로' 구현해왔던 영화적 세계 (헐리우드의 매트 아티스트들이 감쪽같이 그림을 그려놨지만 어쩔 수 없이 실제 세트와 따로 노는 모습을 종종 보지 않았던가.) 를 능가해 버리고, 스크린을 캔버스 삼아 실재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려낸다. 어떤 '공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미학적으로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과 더불어 감독과 여러편을 함께 작업한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의 공로가 크기도 하고. 이런 아름다움은 주로 이반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 장면들에서 빛을 발하는데, 도입부의 첫번째 꿈에서 나무를 만지작거리던 이반의 얼굴을 클로즈 업 한 상태에서 카메라가 이동하는 장면이 있다. 당연히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있기 때문에 딱히 뭔가 놀라운 것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제 보니 그 장면은 이반이 하늘을 날고 있음을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감독은 꿈이라는 것을 표현해주기 위해 별 설명도 없이 능청스럽게 이 소년을 날게 만든다. 그러나 '난다'는 행위에 중심을 두지 않고,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시각 기술 요소가 관객에게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정서적 공허함의 여지를 애초에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는 도대체 저런 배경을 어디서 찾아냈을까 하는 로케이션의 대단함도 있다. 가령 작품 속에서는 갈제프 중위와 그라즈노프 대령과 더불어 이반을 보살펴 주는 크롤린 대위라는 인물이 나온다. 작품은 주로 이반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도 간간히 이반을 둘러싼 주위의 어른들의 시점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드물게 이반이라는 아이의 존재와 정서가 범접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루는 독립적인 시퀀스를 하나 보여준다. 바로 크롤린 대위의 사랑 시퀀스인데, 이야기 진행상으로 보자면 이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잠시 다른 데로 튀는 셈이니 그닥 좋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작품과 별개로 시퀀스 자체는 굉장히 강렬하다. 그것이 잠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것은 문제겠지만,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자작나무 숲의 전경은 감탄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흑백으로 촬영됐기 때문인지 하얗고 빼빼 마른 자작나무숲이 유독 창백하게 느껴져 죽음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것이다. 갈제프 중위는 마샤라는 이름의 간호장교와 숲에서 밀고 당기기를 한다. 아. 참고로 여기서 밀고 당긴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삶과 죽음이 쉽게 오고 가는 전쟁터에서 이 남녀는 감독의 작품치고는 드물게 커플이라면 한 번 쯤 따라 해 보고 싶은 장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바로 참호 위에서 키스 하기. 크롤린 대위의 감정은 이미 마샤에게 향해있고, 그녀는 남자의 명령인지 구애인지 모를 이 행위를 받아 들여야 하는지에 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녀는 결국 체념한듯 그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작품의 카메라가 크롤린과 마샤의 키스 장면을 담아내는 방식이 아주 독특하다. 본디 참호라는 것은 총알을 피해 사람이 걸어다녀야 하므로 깊게 파서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참호의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가 집중하는 것은 바닥을 볼 수 없기에 더욱 막연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참호의 깊이다. 그리고 얼만큼 깊은지 모를 참호 위에서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다. 작품은 결론적으로 참호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해 파는 무덤처럼 촬영해내고 있다. 만약 키스를 하고 있는 와중에 이들이 총을 맞는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참호는 곧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작품은 여기서 전쟁에 관한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이 오히려 외면적으로는 얌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데,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다루는 전쟁이라는 것은 어떤 요소로도 중화되거나 혹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원될지라도 말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아무리 고차원적인 사상을 보여준들 무엇이든 당대의 상황에 맞게 끼워맞춰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의 저서인 <봉인된 시간>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의 장면 몇몇을 연출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확히 어떤 장면들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작품의 이 시퀀스는 어떠한 타의적 해석을 거부시킨다. 사랑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작품들이 연상시키는 고요하고, 어떻게 보면 얌전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감독 본인은 꽤 담대했는지도 모른다.

 

 

* 인상적인 순간 하나 더. 이반은 군사학교로 보내려는 그라즈노프 대령의 결정에 반발해서, 홀로 부대를 떠나 적진을 정찰하러 떠난다. 가는 길에 이반은 폐허가 된 집에서 사는 정신나간 노인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실제 폐허를 찾은 것인지, 아니면 프로덕션 디자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의 전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아궁이와 굴뚝, 문만 남은 모습이 굉장히 기괴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리고 이런 프로덕션 디자인은 극도의 사실성을 추구했다는 보고몰로프의 소설과는 반대의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 어쨌든 작품 속에서 노인은 그 곳에서 마치 집이 정상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반은 그 노인에게 말을 걸다 그가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반은 군인들에 의해 다시 돌아가게 됐을 때 그를 위해 음식들을 놔 두고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반을 데리러 온 군인들은 노인을 노망 났다고 취급하거나,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인의 모습에서 비극성을 느끼고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은 이반 뿐이다. 차가 떠난 뒤, 노인이 한 마디 한다. 오히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미쳐버린 노인이야말로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신이시여.. 이 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입니까..." *

 


그리고 그런 담대함은 완성본을 본 당대의 정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소년을 용맹하게 적진에 뛰어들게 하는 영웅으로 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은 후반부에 이르러 아예 이반을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있는 소년으로 만들어 버린다. 억압하는 사회에서 예술가는 극단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동조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얽매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첫 시작부터 명확했다. 그는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하나의 회화를 보여준다. 이반이 다시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자 갈제프 중위는 그림책을 하나 보여준다. 그리고 이 중 이반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독일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묵시록의 네 기사들' 이다. 그림 속에서 두 번째 기사가 전쟁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작품 속에서 '적국'이 되어야 할 독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경계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반은 베를린에 잠입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독일놈들은 잔혹하고 무식해서 이런 판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서 광장에서 책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을 봤다고 말한다. 그러자 갈제프 중위는 이반에게 뒤러는 독일인이긴 하지만 500년전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물론 나치즘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다. 아무리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과가 있을지언정, 그로 인해서 나치즘이 '유태인들에 대한 히틀러의 신의 한 수' 운운되며 납득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공산주의 시기의 러시아가 독일을 비판하고 자신들이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을 증오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당대의 러시아가 완벽한 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용맹한 소년 전쟁 영웅은 중위가 호신용으로 준 칼을 이용하여 혼자 있을 때 전쟁 놀이를 한다. 나름의 위악을 부리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관객이 알 수 있게 되는 부분은 이 소년이 얼마나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로 가득 차 있는가다. 마치 무성영화 시기를 보는 듯, 작품은 극한의 어둠 속에서 조명만으로 이반의 가족들이 그 날 몰살당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과거이자 환상의 일부를 보여준다. 이반은 그 날 이후로 우물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 우물의 어두움 속에서 악몽을 마주하며, 그것에 매몰되어 살고 있다. 감독은 진심으로 그들을 동정한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입장보다도 예술가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무래도 데뷔작이라서 그런 것일까? 감독이 작품을 영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다소 직접적이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갈제프 중위가 독일의 나치당 본부에 진입했을 때, 작품은 실제 패전 직후의 독일의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을 삽입한다. 기록 필름의 삽입은 <거울> 에서도 이용됐던 적이 있는데, (러시아군이 겨울에 강을 건너는 장면이었다.) 그 작품에서의 영상은 감독과 제작진 측에서 처음 발굴하여 보여준다는 의의로라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의 기록 필름은 상당히 공포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패전하여 자살하고 사살당한 인간들의 시신이 가감없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앞서 나오는 후반부의 시퀀스는 앞서 나왔던 상징적 이미지들이 선물세트처럼 총동원된다. 밤에 적진에 침투하기로 계획한 등장인물들은 조심스럽게 강을 건넌다. 감독과 제작진들은 당시 러시아에서 물에 잠겨버린 숲을 찾아내 그 곳에서 촬영했다. 마치 전쟁으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상징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곳은 생명이 깃든 늪지도 아니고,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의 흑백영상 덕에 어둠만 가득한 죽어가는 숲이 되어버렸다. (초반부, 평화로운 시절의 이반이 지냈던 바닷가 주변의 숲과 닮았다.) 군인들은 이반의 잠입을 위해 길을 터 주고, 쉴새없이 날아드는 적진의 조명탄과 총탄들은 강물로 떨어져 가라앉는다. 물은 끈적하게 바닥 밑으로 가라앉은 조명탄 파편과 총탄의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이 밤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갈제프 중위의 얼굴에도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이 새겨진다.

 

그리고 독일로 온 그는 빨치산으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이반의 마지막 사진을 보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앞으로 이어질 작품연보를 생각하면 독일 시퀀스는 사실 과장된 느낌이다. 이런 점을 보면 데뷔작답다 싶다. 직접적으로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던 이반의 사형 장면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알고 보면 자비가 없다!) 굳이 연출해가며 잘린 목이 굴러가는 묘사까지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 정부를 향해 자긴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 한다면,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자 했다면 성공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대지를 탐구하는 지질학을 전공하고, 심해의 물결을 영상화하기 위해 고민했던 것. 그것을 영화적 목표로 삼았다면 독일 시퀀스는 어찌보면 사족이고 실패다. 폐허가 된 수용소의 빈 공간을 유려한 움직임으로 훑고 지나가는 바딤 유소프의 카메라는 끔찍하리만큼 아름답지만,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작품에 관해 칭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내게는 이반의 사형 장면이 두 번째 작품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타타르족이 사람 죽이는 장면보다도 더 끔찍했다.

 

 

 * 되도않은 소리지만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는 많은 "우리가 국민들한테 뽑으라고 강요한 적 없어. 국민들이 우리한테 위임한거지. 그리고 지금 그들은 댓가를 치루고 있는거야." 란 말을 했다던 요제프 괴벨스의 불 탄 시신이 찬조출연 *

 

오히려 후에 만들어질 작품들의 연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결말이다. 아무 일도 없던 과거의 시절, 놀이를 하던 이반은 아리따운 소녀를 보며 호감을 가지며, 곧 둘은 활기차게 뛰기 시작한다. 밀물과 썰물을 볼 수 있는 바닷가에서 촬영을 했는지, 그 덕분에 작품 속에서 이반은 마치 물 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반이 가지고 있는 몸의 기억 중 물이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물의 기억은 죽은 고목나무 안으로 들어가며 암전되어 버린다. 끔찍하고 끈적한 물의 기억이 송장같은 고목 속으로 들어가니 오히려 더 썩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수생도 가능한 나무 종이 있으니 저것이 일반화가 될 수는 없지만, 나무뿌리에게 생명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물과의 관계를 동시에 죽음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은 시적인 심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동시에 우리가 그에게 가장 감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서를 표현해내는 능력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변형의 가능성을 보고 각각 견디거나 흐르게 만든 시간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행복한 기억이든 끔찍한 기억이든간에. <이반의 어린 시절>은 어쩌면 데뷔작이기 때문에 가끔 덜컹거리기도 하지만, 어느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초장부터 완벽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든 명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석권한다. 그러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이 작품 이후로 4년간 침묵한다.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해 4년의 시간이 걸렸다면 꽤나 길다. 당시 정부가 그를 고깝게 봐서 압력을 행사한 것도 있겠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그 스스로가 자책하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여 시간을 그만큼 보냈다고도 하더라. 그래도 사람인데, 어떻게 누군가에게 영향받지 않고 이렇게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나! 궁금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DVD의 북클릿에는 그런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재밌는 작품이 하나 있다. <봉인된 시간>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시인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 한 편을 머리 속에서 영화화 했다고 써 놨다. 그리고 <거울>이나 <스토커> 같은 작품은 아예 직접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시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 정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반의 어린 시절>을 만들 때 그 시가 영향을 줬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 끄적임을 읽을 때 가장 위에서 본 것이 바로 그 시다. 이제는 안드레이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a possible source of influence' 란 표현답게 연관의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는 있겠다. 기억..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기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 하다못해 자신이 살지 못한 시대의 '묵시록의 네 기사'에 대한 기억, 혹은 차기작에서 등장하는 '삼위일체' 같은 성당벽화에도 기억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특정 작품에 영향을 받든, 받지 않았든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런 기억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반은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버드나무가 자라 있었던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그 누구도 왜 이 나무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것이 이반의 버드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에서 죽어서 우의를 관뚜껑마냥 덮어쓴 채,

이반이 버드나무 아래 그늘로 돌아왔다

 

이반의 버드나무

이반의 버드나무

하얀 배를 닮은 그것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이반의 버드나무 (Ivan's Willow)(1958)

(지은이: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

 

 

p.s.1 - "야, 이 자식아! 러시아는 91년까지 소련 연방이었다고! 너 신문도 안 보고 사냐!?" 는 말이 있을 수 있는데요, 예. 91년 당시 세 살이었으니 신문은 보지 않았습니다. 남들한테 개그 칠 때는 '소련'이란 표현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데 이상하게 여기서 끄적이려니 잘 안 되네요. 그래서 그냥 러시아로 표기했습니다. 근데 지금 하려는 이야기에서는 소련이란 표현을 쓰긴 써야겠네요. '러시아 카메라' 라고 하면 뭔가 어감이 잘 달라붙지가 않아서..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항공 촬영을 시도하다 당시 제작진 중 한 명이 추락사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장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도입부의 꿈 장면에서 보였던 버드 아이 뷰 쇼트를 찍다가 일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정부에서 영화를 찍을 때 감독들에게 필히 80kg 가까이 하는 '소련제 카메라'로만 찍으라고 권고 했었대요. 그걸 사용해서 항공 촬영을 하다가 일이 난 것이지요. 뭔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후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할 때도 정부가 '소련제 카메라'를 들고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베니스 영화제 풍경을 찍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하기 위해서 들고 가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네요. 어찌됐건 참 끔찍한 일입니다.


p.s.2 -  작품이 굳이 공포스러운 연출을 하지는 않지만 이반에게는 마리오 바바 감독님의 <블랙 사바스>에서 가장 살 떨리는 에피소드인 '물방울' 만큼 낙숫물 소리가 무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p.s.3 - 의외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님과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님은 촬영을 할 때마다 많이 다퉜다고 합니다. <이반의 어린 시절> 같은 경우에는 위에서 설명한 추락 사고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후 이 작품으로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님도 정부에 의해 징계를 받았다는 일화를 보면 그래도 뭔가 인정을 하니까 그렇게 협업을 지속했겠거니 싶습니다. 실제로도 이렇게 말을 했다더군요. "처음 찍어보는 사물을 이렇게 긴장감있고 황홀하게 찍은 사람은 타르코프스키 이외엔 없었다." 라고요.

 

p.s.4 - 이반이 혼자 전쟁 놀이를 하다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시퀀스의 결말은 마치 구해달라는 듯, 혼자서 종을 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님의 작품에서 등장한 종! 뭔가 낯설지가 않죠? 개인적으로는 그 시퀀스에서 <안드레이 루블료프>에 대한 영감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이반을 연기한 배우인 니콜라이 부를라이예프 님이 이후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종 만드는 소년인 보리스카를 연기하게 되니 분명 연관성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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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트 H - 미니앨범 Fly High
인피니트 H (Infinite H) 노래 / 울림 엔터테인먼트(Woollim)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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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S

1. Victorious Way
2. Beautiful Girl (Featuring by Bumkey)
3. 니가 없을 때 (Featuring by Zion T.)
4. 못해 (Featuring by 개코 ('다이나믹 듀오'))
5. Fly High (Featuring by 베이비 소울)


1CD / 18:08 Mins  / 레이블: 울림 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유닛 음반에서 맡아보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프라이머리 향'


- 자신들의 EP 앨범인 에 관해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무엇이냐는 E뉴스의 질문에 대해 인피니트 H의 듀오, 장동우와 이호원이 한 답변


...


막상 해보려고 하니 선뜻 잘 되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EP 앨범 (사실 EP, 싱글 등으로 분류하기가 좀 애매해서 그냥 묶어서 불러본다.) 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개개인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이 정도 되는 음악을 도저히 싱글값을 지불하고 사기가 좀 그렇다든지.. 하여간 나는 그렇다. 이건 아마 음악적 문제보다는 돈에 얽매여있는 홍준호의 세속적인 구질구질함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20분도 채 안 되는 음악이 담긴 EP 앨범을 돈 주고 사라고 한다면 이건 팬심으로 사라고 해도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만든다. 몇 번 사 보고 나니 느낀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팬일지언정, 아무리 그 속에 담긴 음악의 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고 할지언정, EP라도 20분 정도 되는 음악을 담은 앨범도 많은데 그 이하로 담으면 지갑 속에서 배추잎을 꺼낼 때 손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잘 못 꺼내겠다는 이야기다. 하여간 그게 내 마음 속의 마지노선이구나 싶다.


이럴 때 새삼 디지털 음원의 장점을 체감하게 된다. 특히 아이돌 가수들의 경우에는 CD로 구매할 때 화려한 화보집을 동봉해서 소장가치를 높이겠다는 야망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브로마이드, 스티커같이 자잘하고 외적인 것들에만 힘을 주는 듯하여 그닥 구매욕구가 샘솟지는 않는다. 정규앨범이라면 모를까. EP 앨범으로 보고 있으면 어째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만 드는 것이다. 냉정히 보면 스티커, 포토 카드 같은 것들은 아무 데도 쓸데없는 장식품이니까. 그러다 보니 음원만 적절하게 구매할 수 있는 디지털 시장이 이럴 때는 쓸모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 중 인피니트에서 새로운 EP가 등장했다. 한 팀으로서 발표한 것이 아닌 두 명의 멤버로 구성된 인피니트 H란 이름의 유닛 그룹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미 정규앨범의 트랙 리스트에도 이름이 있었고 또 아이돌 중에서 개인적으로 인피니트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콘서트에까지 가보지는 못했는데, 가끔 갔다 왔다는 팬들의 후기를 구경 삼아 읽다보면 인피니트 H의 활동은 리더인 김성규의 솔로 앨범과 더불어 꽤 예전부터 미리 계획되고 선을 보이고 있었던 것 같다.


가끔 팀 활동을 하는 아이돌들이 한 명, 혹은 두 명 정도로 뭉쳐서 개별 활동을 하는 것이 본인들의 소망인지, 아니면 소속사 측에서 이벤트성을 기획하는 것인지에 관해 궁금할 때가 있다. 뭐,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볼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만 결과물이 꼭 다 좋다거나, 혹은 나쁘기만한 것은 아니라서다. 가령 개인적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생각은 별로 해 본 적 없는 빅뱅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멤버들이 솔로나 듀오로 활동할 때 훨씬 더 재밌고 기억에 남을만한 앨범들을 많이 내놓았다. (태양의 1집인 나 GD & TOP 1집은 정말 듣는 재미가 있다. 가사가 좀 심하게 유치하다만 승리의 1집인 도 편곡만큼은 귀 기울일만 했고.) 인피니트의 경우에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작년에 복귀하면서 발표한 EP 앨범인 를 듣고 조금 걱정이 됐지만, 개인적으로 보기에 인피니트는 한국에서 몇 년 뒤에 들어도 기억에 남을 아이돌 음악을 만들어내고 또 부르는 보이 밴드다. 몇 년씩 활동해도 자신들이 부르는 음악의 색깔이 뭔지 파악조차 못하는 아이돌들이 만만찮게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아예 첫 등장부터 우리는 이런 음악을 한다는 것을 선전포고 하듯 등장한 인피니트는 그만큼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들에게 곡을 주는 작곡팀인 스윗튠의 공로가 굉장히 크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음악 장르에 관한 관심과 탐구를 대외적으로 적극 어필하고 (남우현의 라틴 댄스가 그렇다. 나는 보기 좋던데 그거 금지 영상이라데.), 아예 '군무돌' 이라는 칭찬에 걸맞게 섬뜩할 정도로 안무를 딱딱 들어맞게 추는 멤버들 개인의 노력도 존재한다. 


이 중 는 인피니트 내에서 랩과 보컬을 맡고 있고 때로는 안무 코디네이터도 하는 이호원과 장동우의 듀오 앨범이다. 그러나 김성규의 솔로 앨범인 와는 반대로 이 앨범은 걱정이 됐다. 다름아닌 굉장히 화려한 피처링 아티스트들의 명단 때문이다. 타블로의 <열꽃>, 혹은 GD의 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 범키라든가,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 그리고 자이언 T. 게다가 앨범 제작은 DJ 프라이머리. 힙합이나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음악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어디서 목소리를 들었거나 음악을 들어본 사람들의 모임이다. 걱정되는 것은 그들이 철저히 해당 아티스트를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역 이상을 넘지 않을 것인가, 아님 본의 아니게 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이라면 자기 색깔이 있는 법이라, 본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가 자신을 맘껏 이용하라고 와 준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를 한다면 앨범의 정체성이 모호해진다. 특히 이것이 눈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 귀로 듣는 음악이라면 더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인피니트 H는 자신의 첫 EP를 다소 삐걱대면서 출발하고 있다. 어쩌면 미리 예측을 해야 했던 것일까? E뉴스에서 인터뷰를 했다길래 읽어보다가 위에서 끄적인 '아이돌 유닛 음반에서 맡아보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프라이머리 향' 이라는 표현을 봤을 때 미리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솔직히 개별 트랙에 관해 뭐라 말하기가 참 난감하다. 실질적으로 장동우와 이호원의 색깔이 묻어나오는 트랙은 1번 트랙인 'Victorious Way'와 3번 트랙인 '니가 없을 때' 정도이기 때문이다. 5번 트랙인 'Fly High'도 여성 보컬인 베이비 소울의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 덕에 장동우와 이호원의 목소리를 잘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곡 자체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그냥 어느 누구한테 줬어도 질적인 면에서 그만큼 뽑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보이 밴드에 대한 자부심, 불러만 주면 어디든 가서 팬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가사는 어느 가수에게 대입시켜도 무방하다. 4번 트랙인 '못해'는 앨범을 통틀어 가장 처참하다. 정말 완벽하게 주객전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의 곡이나 다름없고, 인피니트 H는 아무런 빛도 내지 못한다. 일말의 빛도 말이다. 김성규의 솔로 앨범인 가 마냥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줬던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정말 '못해'를 들을 때는 PC에서 듣고 있던 플레이어를 끄고 싶었다. 어찌됐건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한 것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걸 제외하면 나머지 두 트랙은 들을만한 편이다. 다섯 곡 뿐이면서 뒤로 갈수록 실망감을 주는 것과 반대로 1번 트랙인 'Victorious Way' 는 약간 밋밋할지라도 앞으로 진행될 앨범에 관해 꽤 기대를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모든 음악에서도 그렇지만, 내가 이쪽 음악에 대한 소양이 깊지 않지만 이미 IZM 같은 사이트에서는 턴테이블 스크래칭마저도 DJ 웨건의 것이라는 따끔한 지적을 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적어도 장동우와 이호원은 그 스크래칭에 짓눌려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못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 트랙만큼은 말이다. 이미 아이돌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듣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이 두 사람은 힙합 장르의 음악이라고 해놓고 막상 들으면 도대체 무슨 장르인지 모를 정도로 발만 잠시 담궜다가 빼거나 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스크래칭 효과가 주는 아우라가 정말 절대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들으면 누자베스의 'Battlecry'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돌의 컨셉이야 사랑에 관한 이야기, 혹은 스스로 전사가 되는 이야기로 나눠지곤 하지만 앨범에서 후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곡은 이 1번 트랙 하나 뿐이기 때문에 단연 돋보인다.


3번 트랙인 '니가 없을 때'는 어차피 잘 불렀어야 했을 곡이었다. 찾아보니 2012년 8월에 했던 인피니트의 콘서트 '그 해 여름'에서 이미 선보였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선보였던 것 같은데, 그만큼 열심히 했어야 할 것이다. 의외가 있다면 가사를 읽어볼 때 다소 강한 톤의 랩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곡 자체를 다소 무심하게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피니트로 활동할 때 문득 이 '래퍼 라인'이 등장하는 순간은 언제나 강렬했다는 기억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다소 의외다. 그래서 든 생각이, 어쩌면 피처링 아티스트들의 면면이 이렇게 화려한 건 인피니트로서 활동할 때의 기시감과 더불어 앨범에 대한 완성도에 더 신경을 쓰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의도는 좋고, 어차피 그리 해도 팬들은 앨범을 사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독이 되었다. 굳이 랩이 현란하고 격렬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귀에 착착 감길 정도로 좋다고는 생각치 않으나, 인피니트 H 본인들이 자신들의 음악성에 관해서 다소 확신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의 랩에 관해서는 사실 팬들도 일관되게 옹호를 하지 못하고 있기도 한데, 특히 이호원의 랩 실력에 관해서 다소 그런 부분들이 존재한다. 만약 피처링 아티스트들이 없는 상태에서 프라이머리 만이 제작을 맡고, 장동우와 이호원의 목소리로만 채워서 앨범이 나왔다면 아마 앨범에 대한 평가는 더 나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앨범의 질이 나빠질 지언정 오히려 그런 방식을 더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하게 나빠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협업이라고 해도 해당 아티스트가 작사, 작곡에 함께 관여하는 경우도 많은데 인피니트 H의 경우에는 모든 곡을 받아서 작곡했다. 인피니트일 때는 스윗튠이 곡을 주더라도 적어도 곡 자체에 관한 작사나 랩 작사에 관해서는 멤버들의 의사가 반영됐던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는 아닌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곡에 대한 장동우, 이호원의 해석은 꽤 재밌다. 그리고 여기서 이호원의 보컬은 <응답하라 1997>에서 보여준 연기 덕이었는지 팀 내의 '상남자'라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애수가 느껴지는 정서를 어색함없이 전달해주고 있다. '못해' 에서와는 다르다. 확실히 이호원은 보컬이 매력적이다. 랩은.. 음.. 그냥 노력한다는 점에서 좋게 들어줄만한 점이 많고.

 

음악을 '눈으로 봐야 할 때'의 딜레마라는 게 다시금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다. 인피니트 H 는 방송에서 'Special Girl'과 '니가 없을 때' 를 라이브로 불렀고, (아. 물론 MR은 깔고.) 쇼케이스에서는 전곡을 모두 직접 부르고 피처링도 가능하면 모두 소화했다. ...'못해'는 빼고. 일곱명이 보여준 조화로운 팀워크가 두명이 되고 안무의 활용도 그리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빛이 바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의외로 춤과 어우러지는 그들의 랩과 보컬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앨범으로 들을 때는 별로였던 'Special Girl' 도 괜찮게 보였으니 말이다. 그것이 귀로 들어야 하는 앨범으로 가서 매력이 반감하게 되는 건 결국 음악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무대를 보고 있으면 이 듀오가 분명 안무와 랩, 보컬로 곡을 나름대로 자신에게 체화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이번 앨범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안전한 길로 가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 장동우의 랩 작사에 관해서 뭔가 끄적이려 했는데 깜빡했네. 인피니트가 'Before The Dawn' 을 발표했을 때 나는 그 제목이 상당히 뭔가 있어 보인다고 느껴졌다. 나름의 철학이 있다고 생각했달까. 이것은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에서 하비 / 투 페이스가 "동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습니다." 라는 멋있는 대사를 날려줬던 덕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누가 말했더라.. "예! 제목 'Before The Dawn' 의 의미는, 새벽이 오기 전에 그녀를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아. 맞다. 얘네들 아이돌이었지. 그런 걸 감안하고 보니 눈에 띄었던 것이 장동우의 랩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랩 작사는 큰 의미도 없는 외래어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 같지도 않고, 굳이 라임 맞추기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장동우는 기껏해야 자기네 팀 이름 넣고 활동 종료한지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도 않은데 다시 돌아왔다, 아니면 지 자랑인 홍보성 랩 (그것도 한두번 들을 때가 좋지, 계속 들으면..) 대신 원곡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랩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꽤 듣고 읽어보는 재미가 있다. 가령 'Crying' 이란 곡에 나오는 '일상을 꿈의 연속으로 안겨 줬던 / 사진속 갇힌 미소만이 반겨 / 유리심장 깨질까 포장해 감싸고 / 이세상 별빛과 어우러진 너를 보면 / 무한히 지연된 아픔에 얼룩 절대 지우지 못해 절대 비우지 못해' 라든가, '추격자'에 나오는 '잊어버려 이별의 말 앞에 멈춰가는 가슴 치고 무릎 꿇어본 나 / 꺼져버려 썩은 장작 같은 슬픔에 타버린 날 끌어본다'  같은 랩들. 의외로 시적인 감흥이 존재한다. 랩의 비중은 인피니트의 곡에서 그리 많지 않지만, 오히려 이것이 상대적으로 빈약할 수 밖에 없는 아이돌 곡의 기본 토대에 미장 작업을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이번 앨범이 괘씸한 것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이돌 중에서 스스로 이번 앨범에 자신들의 정체성이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예도 없던 것 같다. 분명히 자신들의 음악적 세계관이 담겨 있다고 거짓말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고. '프라이머리 향'. 인피니트 H는 욕을 먹든 안 먹든 그를 안전하게 따라 왔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리고 EP 앨범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번 것은 분명 본전은 뽑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 솔직함이 역설적으로 다음 활동에 대한 기대를 하게 만든다. 여기 이호원의 말이 있다.


"인피니트H가 이벤트성으로 나왔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절대 아니에요. 길게 보고 나왔거든요. 센 음악을 기대했는데 실망했다는 분도 있으시던데, 이번에 우리가 다 보여준 게 아니란 걸 알아주세요. 이제야 막 첫 단추를 끼운 거죠. 앞으로 보여줄 게 한참 더 많이 남아있어요. 정말로."


나는 솔직히 인피니트 H의 결성이 팬들 사이에서 퍼진 '야동 커플' (여기서 야동이라 함은 호야, 동우의 이름을 줄여서 칭한 것이다. <깨알 플레이어> 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들은 이미 '래퍼 버전 <우리 결혼했어요>' 스러운 상황들을 찍은 바 있다.) 을 보고 소속사 측에서 요거 장사 되겠다 싶어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지만 의외로 저런 말을 들으니 기대가 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앨범의 완성도를 다음에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하는 기대. 아마 다음 앨범에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앨범을 만들 듯한데 어찌됐든 지금 것보다는 나아질거라 생각한다. 분명 명확한 자신들의 주관이 들어가면 괜찮아질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뭔가 배운 것을 토대로 하여 다음을 기대해본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 앨범과 차이점이 없다면? 그럼 곤란하다. 정말로.

 


p.s. - 앨범 커버 컨셉이 괜찮습니다. 두 멤버가 흰색 양복을 입고 있고 다채로운 색깔의 페인트칠로 범벅이 되어 있는 건데, 여러가지 것들을 자기 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거겠죠.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 니가 없을 때 *

작사: Zion.T, Lil Boi, Louie
작곡: Zion.T

 

니가 없을 때도
내 속이 타네 시간 없을 때에도
계속 기다려 니가 없을 때엔
다 큰 나인데도 어리숙해


널 바래다 주고 홀로 밤길을 거닐 때
잘 가라는 니 문자에 또 웃게 돼
니가 너무 보고 싶어 전화를 걸 때 마다 통화음이 참 길게만 느껴지던데
지쳐 기댄 곳에 니가 없을 때
너무도 화창한 날에 너를 못볼 때
무심코 펼친 지갑 속에 니가 웃을 때
너무 많이 생각나 니가 없을 때면
없을 때면 보고파
너도 나와 같은 느낌인지 묻고파
요즘 이런 내게 제일 슬픈 말
니가 보고픈데 니가 없을 때


니가 없을 때


니가 없을 때 홀로 tv를 보고
니가 없을 때 나 산책해봐도
뭔가 적적해 너와 걸을 때야 난
비로소 맘이 놓여 얼음 땡
You really feel so nice
But 아차 한 순간 너와 멀어질까 봐
난 문자 하나하나도 신경쓰게 돼
역시 바보 같아져 니가 없을 땐


Baby Baby 내게 말해
Baby Baby 속삭여줘
Baby Baby


너도 나와 똑같이 느낀다면 내 손을 잡아봐 girl
내게 니가 없을 때처럼
너도 내가 없을 땐
Baby 내 목소릴 키워줘
plz let me be ur love


니가 없을 때
I wanna feel you
We're getting stronger
I wanna listen to
Cuz I love you so much
I wanna feel you
We're getting stronger
I wanna listen to
Your voice, Song, My honey


지금 뒤를 돌아보면 니가 있을 것 같고
주머니엔 귀여운 니 손이 있는 것 같아
껴안고 자는 베개가 꼭 너 같고
뭐 그래, 어딜 봐도 다 너뿐인 것 같아


와락 하고 등을 안아줄 것 같고
목소리만 들어도 함께 있는 것 같고
힘들 때는 내 이름 부르는 것 같아


니가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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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기타노 다케시 감독, 기타노 다케시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 아. 맞다. 알고 계시죠? 이 작품 좀 센 거. 모르신다구요? 그럼...유의하면서 보세요. *

 

 

감독: 기타노 다케시

주연: 기타노 다케시, 쿠니무라 준, 코이나타 후미요, 미우라 토모카즈, 가세 료, 시이나 에이히, 시이나 갓페이, 츠카모토 타카시, 이시바시 렌지, 와타나베 타오코, 이타야 유카, 기타무라 소이치로

음악: 스즈케 케이이치

촬영: 야나기시마 카츠미

18세 관람가 / Color / 109분

원제: アウトレイジ

 

(2012, 9, 7 - 02:09 a.m.)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언젠가 작품을 위해 야쿠자 사무소에 갔었던 일화를 생전에 얘기한 적이 있다. (야쿠자 관련 작품이니 당연히 <의리없는 전쟁> 5부작을 위해서겠지만 이 이야기를 어디서 봤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배틀 로얄>을 DVD로 보다 거기 서플먼트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사무소에 가니 그 곳 야쿠자의 보스가 굉장히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자신들을 자랑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있던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찬찬히 그의 뒤에 놓여진 것들을 훑어봤는데 뭔가 여러 것들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방부처리를 한 사람들의 잘려진 새끼손가락이 담겨진 거대한 투명단지들이었다. 외부인들하고 얘기하는데 눈에 띄는 위치에 저걸 갖다 놨다는 것은 자기가 모은 손가락에 관해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은 그 일화를 능청스럽게 회고하고 있었다. 야쿠자는 결국 그런 족속들이라면서.

 

 

 

 

* 그런 족속들. 상위 서열 앞에서 웃음 지으며 가식을 떨던 한 야쿠자는 곧 굳어진 표정으로 바뀐 채 자신의 부하들과 동료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 지를 논의한다. 야쿠자들의 차가 일제히 지나간 뒤, 저 멀리서 하나의 차가 뒤따라 오는데 거기서는 그런 논의를 하는 이케모토와 오토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차량의 색깔은 같고 그들 모두 하나의 대상에 충성하는 듯 하지만, 속내는 이리도 다르다. <아웃레이지>의 도입부다. *

 

언젠가 몇 년 전에 야쿠자란 단어의 어원을 화투패에서 찾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실제로도 이 표현에서 따 온 언어겠다 싶어서 복사를 해 뒀었는데, '야쿠자'란 숫자의 조합으로 일본어로 8(야),9(쿠),3(자) 를 합쳤을 때 총 합계가 20, 끝자리가 0이 되어버리는 최악의 패를 뜻한다. 도박에 관한 것이니 원래 야쿠자는 허구한날 도박만 하는 놈팽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세계에 일본을 알릴 때 크게 공헌한.. 그러니까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 크게 공헌한 범죄집단을 일컫는 말로 변화되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에도, 안보투쟁이 일어났던 60년대와 정치, 사회적 안정을 바라는 단계였던 70년대에 이르면서 야쿠자는 일본사회의 어두움을 상징하는 한 축으로서 실제로도 많은 일들을 저질러 왔다. 전공투 세력이 아사마 산장에서 자폭하듯 서로를 죽고 죽였을 때 일본의 어두움은 그 광경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을지 모른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특이했던 것은 그런 야쿠자라는 소재에서 고유의 독특한 감수성을 찾아내서다. 잔인하기만한 줄 알았던 이들에게 아이같은 순수성이 있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주저하다 끝끝내 자폭하고 마는 순간들, 그냥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에게서 다양한 주제를 이끌어내는 순간들은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일본 쪽에서는 그를 영화감독보다는 거의 유명 코미디언으로서의 '비트 다케시'의 자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생전에 '일본영화계의 미래이며 잘 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 것이나 서방세계에서 환호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실질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 중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될 <아웃레이지 비욘드> 까지 포함해 17편의 작품 중 야쿠자의 세계를 중점적인 주제로 다룬 작품은 <3X4-10월>, <소나티네>, <브라더>, <아웃레이지>, <아웃레이지: 비욘드>, 딱 5편 뿐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야쿠자는 나오지만 그냥 부수적인 등장인물이나 설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기타노 다케시와 야쿠자라는 단어를 동일시한다. 그 이야기를 다룬 것 중에서 걸작이라 불릴만한 작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매혹된 것이 바로 '야쿠자'라는 테마를 다룬 작품이라서 였을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지금도 과대평가의 단초가 되었다는 논쟁이 존재한다.

 

<아웃레이지>는 '오피스 기타노'의 로고보다 워너 브라더스 사의 로고가 먼저 뜨는 신기한 광경이 이어진 뒤 시작된다. <브라더> 이후 10년만에 야쿠자 장르의 작품으로 돌아온 기타노 다케시 감독에 관해 많은 기시감과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데, 어째 <소나티네> 등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작품은 도입부에서 관동지방의 최대의 폭력조직인 산노우회의 모임을 보여주면서 두목인 이케모토가 본부에게 무라세 조직과 너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지 말라며 타박을 듣는 장면을 보여준다. 오프닝 타이틀 등장 전 초반 10여분의 시간을 굳이 이 야쿠자 세계의 디테일을 너무나 세세히 제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점이 이전 작품들과 뭔가 다르다. 감독의 이전작들은 사실상 음모 (conspiracy) 가 발현하는 지점을 잡아내는데는 무관심했다. 야쿠자 세계에서의 음모는 일상다반사처럼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덤덤하게 대처하는데, 이 작품은 굳이 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부분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본부에게 한 소리 들은 이케모토는 산노우회에서 나와 자신의 구미(組) 로 돌아가면서 부하인 오토모와 이야기를 나눈다. 오토모는 이리 묻는다. "..무라세 놈들 사무소에 가서 총알 몇 발 좀 박아주고 올까요?" 이케모토가 지시한다. "아냐. 일단은 무라세 구미 쪽에다가 사무소를 하나 열어 놔." 그제야 작품이 시작된다. 여태까지 내가 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 중에서 앞으로의 전개가 가장 궁금해지는 시작이다. 일을 좀 만들어서 사실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보고하자는 의도임에 분명한데, 자칫하면 상황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궁금증이 흥미로웠던 것일까. 2010년의 칸 영화제에서 벌어진 <아웃레이지>에 관한 외국 쪽의 반응과 극장 개봉 이후 일본 쪽의 반응은 참 재밌게 느껴진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귀국해서는 '내가 칸에 가서 관객들 전부 다 넉다운 시키고 왔다'는 멋진 말을 한 바 있지만 사실 그건 멋진 자학개그에 가깝다. 실제 이 작품은 무시무시한 야유와 더불어 그 해 칸 영화제 최악의 평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이 점수 면에서 이 작품과 비교되기는 하지만, <돈의 맛>의 1.4점과 이 작품의 0.9점은 사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느 외국 기자는 화장실에서 만난 한국 기자에게 도대체 이 작품이 어디가 우수한건지 말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서방세계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 열광한 것은 '필름 코멘트' 지의 표현대로 일본영화의 두 가지 전통이 지닌 균형을 지녀서였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보여줬던 정갈함과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보여준 격렬하고 날것에 가까운 에너지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미학적 성취에 있어서는 이 두 감독에 비해 많이 떨어지며 정치나 사회적 의식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의 경우에는 감독이 그의 작품인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비중있는 역을 맡은 적도 있으니 약간의 영향도 있을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가 코미디언인 비트 다케시로 활동할 때는 빠른 어조로 독설을 날리는 것이 트레이드마크 였다. 그런데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그에게 코미디언의 특성을 버리고 무표정한 동시에 과묵한 연기를 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는 이 어울리지 않는 극단의 전통을 합쳐서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감성을 만들어냈다. 이건 독특한 그의 작품 특유의 리듬이며 새로운 개념이다.

 

 

 

 

 

조금 적나라하고 단순하고 무식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웃레이지>가 마음에 든 건 감독이 작품을 만들 때 정했던 컨셉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의 진행과 장면구성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공포영화 장르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가진 악취미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니 그런 혐의도 없잖아 있다.) 더 놀란 것은 그의 작품이 여태까지 보여줬던 폭력성과 서정성 중, 뒤의 것을 내던져 버리고 만들었다는 시도에 있었다. <자토이치> 이후, '자기반영' 3부작을 만들고 그가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작품의 한국 버전 포스터에 적힌 태그라인에 되어있는대로 '폭력 엔터테인먼트' 라면 그것이 이전 작품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는지는 봐야할테니 말이다.

 

애초에 정한 컨셉대로 이 작품에 관해서 얘기를 하자면 안타깝게도 솔직히 할 말이 별로 없다. 이후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이만 조금 좋지 않게 하자고 시작한 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 죽고 죽이는 이야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은 드물게 이야기 전개에 많은 공을 들인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 5부작의 아우라를 재현하기 위한 발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서는 이야기가 특출나게 눈에 띈 적도 없었고 그것이 흥미롭게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나름 이야기의 전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는 걸 드러내는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컨셉은 완전히 '악인들의 배틀로얄' 인데 그는 폭력의 스타일, 물고 물리며 그 사이에 배신이 존재하는 야쿠자들의 생태를 나름 복잡하게 그려내려고 애쓴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모두 하고 있습니까?> 이후 처음으로 주변인으로서의 기타노 다케시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초반부에 그가 연기한 오토모가 이케모토와 얘길 나누는 것을 보면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겠다고 짐작하겠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그의 비중이 조금 커질 뿐, 그 역시 일종의 조연이다. 어둠의 세계 특유의 성질 더러운 다툼이 곧 살인으로 이어진다. 오토모가 마치 이케모토의 수족이 되듯 앞장서서 무라세 구미의 일원들과 무라세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최종적으로 그들이 일하던 세력권들을 물려받는다.

 

 

 

 

 

"형님. 정말 그 대사 놈한테 얼마나 주는 겁니까?"

 

"니가 상관할 거 아니야. 등신같은 새끼야."

 

"형님. 형님이 다루시는 비자금에 대해선 별말 안할 테니까, 그 돈 저한테도 좀 나눠 주시죠?"

 

"너 이 자식.. 나보다 더 한 놈이잖아."

 

"야쿠자가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위의 대사는 오토모의 부하인 이시하라가 자신의 부하 야쿠자와 나누는 대화다. 일본 공개 포스터에 쓰였던 태그라인인 '전원악인'에 걸맞는 대사다. <아웃레이지>에서 작품과 감독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개인과 풍경이 아니라 조직의 구조다. 여기서 돋보이는 건 실제 야쿠자들이 이리 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세심한 묘사인데, 오토모 일당들은 미국 대사관의 대사를 협박해서 그 장소를 불법 카지노로 개조한다. 오토모를 마냥 자신의 부하라고 생각하는 이케모토는 칩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서 불법 카지노의 운영을 원활하지 못하게 만들고, 분노한 오토모는 그를 잔혹하게 죽인다. 전부터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오토모에게 산노우회의 두목은 몰래 불러다 친근한 관계를 맺는 '사카스키' 의식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방법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피로 맺어진 형제라고도 하여 좀 오버하면 자신들의 피를 서로 먹게 하는 극단적 방법도 서슴치 않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저 언급만 될 뿐이지만 실제로 야쿠자들의 세상이 이런 식이다. 그 세상에선 오직 두목과 부하 뿐이며, 그 외에는 동료라 불리는 교다이붕 (兄第分) 만 존재하고 있다.

 

 

 

두목과 부하라는 수직적인 관계와 동료가 가지고 있는 수평적인 관계, 여성은 그저 성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한 노리개에 불과하며 부하와 동료를 대하는 태도는 전국시대적인 사고방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득이나 입막음을 위해, 혹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하를 죽이는 건 우스운 일이며 사카스키 의식을 맺은 동료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감독은 인물 대신 멀찍이서 이 구조를 다루는데 힘을 쏟고, 이런 의식이 현재로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런 배신의 관계 속에서 인물들은 오토모를 포함하여 대부분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

 

그 비참함. 그의 작품들이 원래 어느 정도의 폭력성을 동반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거의 고어의 경지를 넘보는 듯한 무지막지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건 일종의 양념이다. 문제는 만약 후카사쿠 킨지나 고샤 히데오 감독이 지금까지 살아서 만들었다면 남성적인 터치가 더해져 더 잘 살아났을 이야기들이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손을 거치면서 허무의 기운이 너무 과하게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흥미로워야 할 장면들이 흥미롭지가 않다. 대표적으로 무라세 구미의 일원인 기무라가 복수를 하려 이케모토 구미의 일원들이 탄 차를 뒤쫓는 장면이 있다. 한밤중에 좁은 길에서 벌어지는 두 차 사이의 미행, 혹은 자동차 추격전인데다 화끈한 충돌 장면, 그리고 총격 장면들까지 있는데 감독과 촬영감독인 야나기시마 카츠미는 되게 재미없게 이 장면을 연출한다. 카메라는 움직이지도 않고 고정된 채, 몇 장면을 빠르지만 단순한 편집으로 보여주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폭력 장면들은 듣도 보도 못한 식이다. 치과 기구로 마구 쑤시는 장면이나 바깥에 세워진 봉과 차에 탄 사람에 줄을 묶고, 자동차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사람이 거기서 목이 거의 잘려나가는 수준으로 튕겨나오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기발한 살인방법들이 출동하기 때문에 사실 존재 자체만으로 자극적이다. 하지만 자동차 추격전 같은 경우엔 남의 의사를 묻지 않고 미행하는 금기의 자극만으로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는 관객이 직접 추격을 하는 듯한 체감을 동반하는 연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감독과 작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무시한다. 이상한 일이다.

 

 

 

 

* 캡쳐로만 보니 그럴 듯해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전체적인 연출이 상당히 긴박감 '없다'. *

 

문득 몇 가지 생각들이 겹쳐졌다. 사실 쇼치쿠 영화사의 제안을 받고, 그 곳의 제안을 적절히 수용하며 만들었다는 <자토이치>를 보고 짐작했던 것이지만,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칭송받아온 그 세계에 침식당할 뻔 한 것 같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없었다면 심히 밋밋한 감흥만을 전해줄 뻔 했던 <브라더>를 봤을 때 그런 우려가 들기는 했지만. 원래 자기반영 3부작의 마지막편인 <아킬레스와 거북이> 이후 차기작은 이 작품이 아니라 시대극이 될 뻔 했었다. 감독은 주연으로 이미 <자토이치>에 출연한 적 있는 배우인 사오토메 다이치를 점찍어 놨었는데, 주변의 반대로 계획이 엎어졌다. 역사극 소재에다 그 배우가 이름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그리 유명하지 않으니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결국 그는 <아웃레이지>를 만들게 됐다. 작품을 만들면서 그는 또 새로운 요구조건에 부딪쳤는데, 그건 바로 작품의 투자사인 반다이 비주얼 측에서 더이상 '기타노 군단'은 출연시키지 말자는 의견을 내놨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은 이전에 같이 작업했던 익숙한 배우들을 대부분 출연시키지 않고 고히나타 후미요, 미우라 도모카즈, 가세 료, 시이나 깃페이처럼 지명도 높은 새 배우들로 출연진을 교체해야만 했다. 연기 면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들이지만 감독에게 익숙한 이들이 아니며, 또 다들 인상이 야쿠자 장르의 작품에 어울리지 않게 선하고 유약한 면이 돋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악역을 연기할 때 관객은 몇 배의 잔혹함과 교활함, 그리고 비열함을 체감하게 되는데 이는 여지껏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기도 하고. 예전 기타노 사단의 배우들이 보여줬던 몸과 대사의 리듬은 찾을 수 없고, 이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사태를 파악하며 머리를 굴리기에 바쁘다.  인간의 감수성이 느껴졌던 표정과 순간, 대사들은 모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인위적인 감정들로 채워지며 결과적으로 이 작품에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 외엔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배제된 채 건조함만이 남는다. 아. 물론 건조함은 사실 2002년에 만들어진 <돌스> 이후부터 더이상 히사이시 조와 음악작업을 하지 않는 것도 이유에 포함될 듯 하다. (이후로 감독은 나기, 이케베 신이치로 같은 다양한 음악가들과 작업했는데 그나마 그 중에서 록 그룹 '문 라이더스'의 멤버이자 배우이기도 한 스즈키 케이치와의 작업이 이 작품을 포함해서 두 편으로 가장 많다.) 

 

감독이 전부터 보여줬던 건조함은 묘하게 샘 페킨파 감독의 걸작이자 기타노 다케시 감독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를 떠올리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루시엔 발라드 촬영감독의 황토빛 영상이 유독 탁하고 건조하게 보이고 주인공부터 시작해서 작품의 모든 순간들이 굉장히 무기력했던 그 기괴한 작품의 정서가 이 작품과 공유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샘 페킨파 감독의 그 작품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예전 작품들의 감수성과 더 잘 맞는다. 요컨대 <소나티네> 같은 작품.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에서 워렌 오츠가 연기한 주인공 베니는 의뢰를 받고 알프레도 가르시아란 남자를 죽이러 애인과 함께 간다. 그 일만 하면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걱정없이 살 수 있는 돈을 받기 때문에, 이미 반 쯤 성공했다 치고 애인에게 반지까지 주면서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작품은 곧 애인을 죽이고 베니를 도망자로 만든다. 많은 걸 잃은 베니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이미 잘려진 채 파리만 드글거리고 있는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통 뿐이다. 작품이 기괴해 지는 건 베니가 가르시아의 머리에 얘기를 건네는 순간부터다. 실수로 머리를 든 자루를 놓쳐서 떨어지니 그걸 주워 "미안하네, 알." 이라 말하고, 드라이아이스에 담궈주면서 시원하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관객이 봐도 뻔히 죽을 법한 마지막 장면 이전에는 모두 감독 특유의 액션 장면들과 한 남자가 잘린 머리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순간들은 꼭 야쿠자들의 내분으로 인해 오키나와로 쫓겨갔던 <소나티네>의 무라카와 일당들을 연상케 한다. 베니와 잘린 머리, 야쿠자들이 오키나와에서 평화롭게 노는 한 때는 기묘한 유머로 작품에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 번 망가지자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마지막 순간을 자폭하듯 끝내버린다. 이렇게 보면 참 닮았다.

 

 

 

 

 

하지만 같은 감독에게서 만들어진 <아웃레이지>는 그런 작품들과 어지간하면 거리를 떨어뜨려 놓으려 든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와의 연관성을 최소로나마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이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 이제 더이상 90년대에 보여줬던 이미지들이 보여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전자의 경우, <다케시즈> 같은 작품은 이전에 만든 그의 작품을 총결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토이치> 같은 경우엔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한 사무라이가 병약한 아내의 치료를 위해 원치않는 요짐보 일을 하고, 원래는 관직에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비>의 니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니시도 원래 경찰관이었으나 아내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갚아야 할 상황이 오자 은행강도가 되어 돈을 훔쳤으니 말이다. 그런데 후자의 얘기를 하자면 그냥 그 정도의 연상에서 끝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건 이미 만들어 버린 과거의 필모그래피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인장으로서 남겨놓는 것과 같다. 이 작품도 이전 작품들과 영 동떨어진 것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는 듯 특별한 한 장면이 존재한다. 한 차례의 잔혹한 살인장면 이후, 야쿠자의 차가 죽음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체 옆을 느리게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그 다음 작품은 원경에서 파도가 세차게 치고 있는 바다의 풍경 옆으로 차가 달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청명하게 빛나는 푸른 색감, 잠깐이긴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거론하던 '기타노 블루' 의 세상이 다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다른 세계의 색깔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성취한 색깔을 비교적 최소한도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교적 최소한' 이란 표현이다. 감독과 작품은 거기서 어떤 접점을 찾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1997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자신을 일본영화계의 암이자 에이즈라고 비유한 바 있다. 베테랑 코미디언 다운 발언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말이 은근히 슬프게 들린다. 감독은 야쿠자 장르 외에도 청춘, 로맨스, 코미디, 시대극, 드라마 등 비교적 다양하게 스펙트럼을 확장 시켜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영화평론가인 요노타 이누히코의 말에 따르면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국에서는 난해하다고 평가받고 외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 그의 작품이었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후기 커리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들의 완성도에 관해선 호불호가 갈리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가 다양한 장르를 통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미 오른 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 감독의 입장에서는 불안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영역을 정복하고자 한다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노력 덕분이었을까. <아웃레이지>는 일본 내에서 남성관객들의 호응 속에서 예전 작품들보다 다섯 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거두기에 이른다.

 

 

 

 

감독은 결국 자신의 작품이 자국 내에서 트렌드가 될 수 있었는지를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예술적 성취로 따진다면 이 작품은 결국 몇 발짝 더 앞서나갈 수 있었으면서 적당히 안주하고 맞춰갔던 작품이란 혐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린 예전작들이 자국의 관객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가 대중적 성향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다는 의도가 불만족스럽다면, 오로지 그의 '잘못'이라고 얘기하기 보다 동시에 현재의 관객들이 원하는 트렌드가 그런 것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퀄이 아닌 이상 절대 속편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버린 <아웃레이지>의 결말은 현 일본, 혹은 현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객은 결과물이 설사 아쉽더라도, 그걸로 바로 단정 짓지 않고 앞으로도 작품을 만들어갈 예술가를 계속 주시 할 필요성이 있다. 예술작품은 당대의 사회를 일정부분 반영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사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사람들이기도 한 관객들은 그런 덕목 하나 쯤 가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안주하기만 한 뻔한 작품이었나? 아니. 그는 관객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며, 그것을 '시도' 했다는 것에 있어 이 작품 역시 또 하나의 경지다. 그리고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내가 마냥 농담 조로 우습게 생각했던 말들이 실제로는 굉장히 기분 나쁠 수 있고, 위협적인 상황을 조장할 때 사용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체감케 해줬기 때문이다.

 

일본에 갔을 때, 지인과 함께 전철 안에서 <아웃레이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 작품 속의 야쿠자들은 다들 입에 'お前(오마에: 너 이 놈)', 'このやろう(고노야로: 이 새끼)' 혹은 'うるせ, 馬鹿やろう(우루세, 바까야로: 닥쳐라, 바보자식아)' 같은 말들을 달고 살더라고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말을 하자마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쉿!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하지 말아요." 라고 조심스럽게 경고의 답을 해줬다. 사실 위의 두 단어가 한국에서는 몇몇 드라마를 통해서나, 혹은 인터넷에서 유머를 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기에 저 말을 들으면 웃음부터 먼저 나온다. 단도직입적으로 '바가' 라는 말만 들어도 스브스 방송국 드라마인 <야인시대>에서 분노에 가득찬 표정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미와 경부가 떠오르는데 웃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니지. 웃어야지.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위협적인 욕이며, <아웃레이지>에서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야쿠자들이 저 말을 쓴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는 저 말들을 한 이후 대부분이 끔찍한 살인이나 생사를 넘나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야쿠자들은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악랄한 인간군상들이다. 멋있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이 작품은 저 말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고 위협적이며, 그리고 저 말을 애용하는 인간들은 몇 배는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엔터테인먼트의 필터를 거쳐서 일깨워준다. 그래서 재밌게 보다가도, 결국 마지막엔 장난 아니라는 말을 연발하고 마는 것이다.

 

 

 

 

 

p.s.1 - 베니스 영화제가 한창 개최 중인데, <아웃레이지: 비욘드>도 상영 됐을라나요. 전작이 꽤나 악명 높았으니 <하나-비> 때처럼 황금사자상 한 번 타 줬으면 싶지만 가능성이 별로 없겠지요.. 오히려 김기덕 감독님이 베니스에서 하나 수상하실 거 같은데.


p.s.2 - 그냥 큰 상관없는 일화 하나. 일본에는 <담뽀뽀>, <민보의 여인> 같은 걸작들을 만든 이타미 주조라는 감독님이 있습니다. 이 중 <민보의 여인>은 야쿠자가 작품의 중요요소로 등장하고 있는데요, 개봉 이후 야쿠자 쪽에서 자신들을 왜곡했다면서 이 감독님께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는군요. 하지만 굴하지 않고 작품을 계속 만드신 감독님이 어느 날 97년에 44세의 나이로 자살을 했습니다. 한 황색 타블로이드로부터 스캔들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는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려면 죽음밖에 없다는 유서를 써놓고 8층 건물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님에게도 약간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요, 1986년에 고단샤가 발행하는 주간지인 '프라이데이'의 기자가 감독님의 애인에게 (그런데 여기서 진짜 애인이었는지, 아니면 애인이라는 소문이 도는 여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밀착취재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성이 취재를 거부하니 기자가 집까지 따라와서 소리를 지르며 위협하고, 손을 잡아 완력으로 취재에 응하게끔 시도를 했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들은 감독님은 ...소화기를 들고 프라이데이 사무실에 난입해서 뿌린 다음 편집장과 편집부 사람들을 폭행하고 기물을 때려부수는 방식으로 되갚았다고 합니다. 아예 '개박살'을 내버렸다고 하더군요.

 

문득 이런 걸 적은 게, 야쿠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보면서 '이 감독님이 야쿠자랑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거든요. 이 작품을 볼 땐 더욱 그랬구요. 만약 그랬다면 타블로이드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80년대 일본 타블로이드의 행태는 정말 경악스러운 수준이었으니까요.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10대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 님이 1986년에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을 때, 사진 찍으려고 숨어있던 기자가 뇌수가 터져나온 자살 현장을 발견하곤 그걸 그대로 찍어 신문에 내보낼 정도였죠. 심지어는 엎어진 자세의 시신을 건드려 얼굴이 다 드러나는 정면 사진을 찍었다고도 하니까 (그 정면 사진은 소속사가 입수해서 금고에 극비문서로 보관 중이라더군요. 신문사가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참.. 야쿠자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족속들이 황색 타블로이드였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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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수 - 자유혼 (自由魂) [디지팩]
김두수 노래 / 드림비트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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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S

1. 들꽃 (One-Point-Stereo Live Recording)

2. 기슭으로 가는 배

3. 나비

4. 해당화

5. 보헤미안

6. 새벽비

7. 19번지 Blues

8. 산

9. 시간은 흐르고

10. Romantic Horizon

11. 추상 (追想)  

12. 저녁강

 

~ BONUS TRACKS

13. 방랑부 (賦)

14. 들엔 민들레

 

~ 7" Singles (Available Only In Limited Deluxe Edition LP)

Side A. 나비 

Side B. 새벽비 

Side C. 19번지 Blues 

Side D. 산

Side E. 들꽃 

Side F. H.H에게 헌정함

 

2LP + 3 45 R.P.M. (Limited Deluxe Edition LP), 1CD / 68:03 Mins (1CD) / 레이블: 드림비트 레코드, 리버맨 뮤직

 

 

 

"김두수 분명 대마초꾼일거야." 


- 어떤 음반 제작자가 그의 앨범 수록곡들을 들어보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음유시인이 아프다. 몸도 마음도 모두. 몸의 경우는 2집인 <약속의 땅>을 발표할 당시였다. 경추결핵 3기. 생사를 넘나들게 만든 이 병마때문에 김두수는 2집을 제작한 음반사인 동아기획의 바람과는 다르게 홍보를 위한 방송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고, 이후 현대음향을 통해서 겨우겨우 몸을 추스려 1991년에 3집인 <보헤미안 / 강변마을 사람들>을 발표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 3집의 수록곡인 '보헤미안'을 듣고 부산에 사는 한 여자 감상자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정확히 이 곡이 'Gloomy Sunday' 만큼 사람의 감정선을 충동적으로 지배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인지, 아니면 전부터 자살할 의지가 있었는데 이 곡이 모티브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듣고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나오면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임에는 확실하다. 90년대 후반까지 음악에 관한 사회의 인식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필승'에서 '내 속에서 살고 있는 널 죽일거야' 란 가사가 있다고 그게 공영방송국 뉴스 프로그램에 문제 된다고 나왔었던, 그런 시기였다. 2, 3집은 다행히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티스트 본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이 환멸을 만들었고, 11년간의 은둔을 만들었다.

 

3집의 발표 이후가 김두수에게는 큰 기점이 된 것 같다. 그의 이미지는 분명 '통기타를 든 음유시인' 이지만, 이전 음악들은 사실상 프로그레시브에 가깝다. (가령 내 블로그 배경음악 중 하나이자 3집 삽입곡인 '청보리 밭의 비밀'을 위에 클릭해서 한 번 들어보시라.) 신디사이저 음향과 약간의 잔향이 더해진 당시 김두수의 목소리로 완성된 곡들을 듣고 있으면 마치 우주를 경험하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자유혼>부터 이후의 <열흘 나비>, 그리고 2009년작이자 현재까지는 그의 최근작인 <저녁강> 앨범의 김두수는 악기 편성이나 본인의 보컬에도 상당히 간결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 가서 헛돈 쓰미스트' 했다는 어느 누구와는 반대로 간결해 졌다고 완성도에 하자가 있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자유혼>이 그런 변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텐데, 1번 트랙인 '들꽃'은 원 포인트 스테레오 마이크를 이용하여 김두수의 자택에서 한 번에 동시녹음됐다. 그리고 다른 곡들의 경우엔 역시 집에서, 그리고 8 트랙 레코더로 연주하고 코러스한 것을 녹음, 마스터 테이프로 만든 뒤 서울의 스튜디오로 가져가 세션들의 악기연주를 더빙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원 포인트 스테레오 마이크 녹음은 여섯곡 더 녹음됐다고 하는데, 자연의 소리가 잡음처럼 들어간 이 녹음분들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져 최종 앨범에서는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동시녹음에 대한 세션들과의 의견차 때문에 최종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런 녹음 방식은 앨범이 발표된 당시에도 그랬지만 11년이 지난 현재에 와서는 더욱 보고 듣기 힘들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의도라기 보다는 시간과 기술의 흐름과 효과에 굳이 영향받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잘 전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찾은 아티스트의 접근 자세라 보는게 옳을 것이다. 

 

그렇다고 음향 자체가 후지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다음 앨범인 <열흘 나비>가 5년 뒤에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CD로 들으면 다소 둔탁해서 한 번에 가사를 잘 들을 수 없다는 단점이 존재하는 반면 (이것에 관해서 찾아보긴 했는데, 내 자료 찾는 능력이 모자라서인지 마스터링이 왜 이렇게 됐는지에 관해서 끝내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물론 김두수의 보컬이 다소 굵어졌다는 느낌도 있다. 몇 번 들으니 익숙해지기는 한데, LP로 들어보질 못했다. 들으면 또 다르려나?) <자유혼>은 편성된 악기의 소리, 그리고 김두수의 목소리도 또렷하다. 단순히 준비가 소박해서 마스터링을 하는 것이 쉬웠다기 보다는, 그것이 감쪽같이 위화감 없게 자연스럽고 편하게 귀에 전달되는 과정을 준비하는 능력이 아티스트와 엔지니어들에게 있어서일 것이다. 성능 좋은 장비를 이용해 정성을 들이기는 커녕 PC용 스피커로 듣고 적당히 작업해서 오디오 시스템보다 mp3 플레이어에 최적화되는 앨범을 만들고 있다는 요즘 음악업계 종사자들의 작태를 생각하면 '무려 10년전에 발표된' 이 앨범은 음악 관련 기술에 관해 구체적인 지식이 없다고 해도 그 내공을 절로 느낄 수 있는 경우이다. 내가 그렇다.

 

나는 언제나 김두수의 목소리에 매혹 되어왔다. 3년 전에 3집인 <보헤미안 / 강변마을 사람들>의 리뷰를 끄적일 때도 했던 것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음악 감상자에게 가수의 목소리가 곧 악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사례가 되곤 했다. 그런데 이 앨범은 악기 편성의 간소화라는 사실이 주는 첫인상과 달리 들을수록 상당히 과감하다는 인상을 준다. 가수가 보코더 같은 것들로 자신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어찌보면 내 편견이다. 작가적 의도로 보코더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어찌보니 뭔가 쉽게 예시를 들고 싶어 이렇게 한 것인데, 앨범에서 세션들의 연주와 김두수 본인이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통기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의 참여는 말 그대로 뒤를 든든하게 받치는 것이며 진짜 승부는 김두수의 목소리다. 그리고 이것은 3집보다 더 직접적이다. 그는 발표 당시, 이 앨범을 두고 자신의 실질적인 데뷔 앨범이라고 얘기한 바 있는데 이것은 어떤 발전, 혹은 실패를 해서 리부트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과 달리 정말 '시작'이라 할만하다. 1집인 <시오리길 / 귀촉도>는 검열과 음반기획사의 상업적 논리로 인해 아티스트의 본래 의도가 온전히 담겨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8~90년대의 그의 음악경력은 애초부터 '원치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약속의 땅>에 있었던 '나비'와 <보헤미안 / 강변마을 사람들>에 있었던 '보헤미안'이 이 앨범에서 다시 불려졌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소박한 포크 음악이다. 2집과 3집을 만들 당시의 김두수는 자신이 부르고자 하는 곡을 감상자의 머리 속에서 어떻게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해서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비'를 부르던 1988년의 김두수는 한 손에 술병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피리를 부는 쾌활한 우울증 환자처럼 경쾌한 톤으로 곡을 부르고, '보헤미안'을 부르던 1991년의 그는 비어버린 세상을 향한 '공허한 메아리'의 느낌을 음악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데 마치 과거의 것을 정리하겠다는 듯, <자유혼>에서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곡을 새로 부른 것이다. 곡은 더욱 간결하고 원숙하며 동시에 이전의 것들에 비하면 많이 메말랐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이 앨범에서 두 곡에 대한 선호는 그리 크지 않다. '나비'는 분명 다른 맛이 있지만 '보헤미안'의 경우에는 3집에서 부른 방식이 내 취향에 더 맞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다. (물론 4집 버전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들꽃'을 비롯해 2번 트랙인 '기슭으로 가는 배', 4번 트랙인 '해당화' 까지 인상적인 곡들이 포진해 있지만 새롭게 부른 두 곡, 그리고 그의 앨범에서 드물게 번안곡인, 고든 라이트풋의 'Early Morning Rain' 을 번안한 6번 트랙 '새벽비' 를 생각해보면 6번 트랙까지의 인상은 이전의 그의 모습을 완벽히 지우기 위한 것같다. 

 

물론 <자유혼>은 버릴 곡이 없는 앨범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 정수는 7번 트랙인 '19번지 Blues' 부터 줄줄이 이어지는 명곡들에 있다고 본다. 진짜배기 블루스인 이 트랙에 빠져 블루지한 기분을 느끼고 8번 트랙인 '산'을 넘어가면 9번 트랙인 '시간은 흐르고' 와 만나게 된다. 3집에서 들었던 '보헤미안' 에서도 그랬고 이 앨범의 '시간은 흐르고' 도 그렇지만, 나는 그의 앨범에서 북소리가 등장하는 순간을 기다리곤 한다. 그의 음악 속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는 내게 있어 퀸의 'Bohemian Rhapsody'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징과 같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앞으로의 삶, 그리고 자신과 더이상 동시대를 살지 못하고 사라져간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할 때 곡의 화자는 문득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을 본다. 정확히는 곡에서 '바람부는 그 길에 / 갈가마귀 날아가는가' 라는 부분에서다. 

 

김두수의 음악에서 등장하는 북소리는 곡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고 곡 바깥에서 듣고 있는 감상자를 일깨운다. 이상한 것은 그의 목소리는 이전 곡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는데 이 곡부터 격앙된 듯 호소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떤 특정한 효과를 노린 것 같지 않다. 만약 의도라면 이전곡들은 모두 '건조한 곡'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김두수는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듣기에 건조해 보인다는 목소리로 수많은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단지 이게 <만추>의 탕웨이가 짓는 표정처럼 그런 시각적인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귀로 느껴야 하다 보니, 이 곡까지 와서야 내가 깨달은 셈이다. 정확히는 <자유혼>이 내 마음에 통한 순간이다. 이 순간을 접하게 되면 그의 음악이 아름다워진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10번 트랙 'Romantic Horizon'과 11번 트랙 '추상'은 앨범에서 가장 추상적이다. 동시에 전자는 6분 26초, 후자는 7분 14초로 앨범 내에서 대곡이기도 하다. 두 곡 모두 하나의 것이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개별적으로 급작스러운 음악전개의 전환을 보여주며 김두수의 목소리 역시 <자유혼> 내에서 가장 다채롭게 변화한다. 이 두 곡은 처음 접근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으며, 특히 '추상'의 초반 4분까지의 전개는 3집의 '청보리밭의 비밀'보다 더 불친절하고 난해한 구석이 있어 트레이에서 CD를 빼고 싶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찾지 않으면 사람은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들어서 익숙해 진다면 곧이어 이 두 곡이 얼마나 사람 마음을 울리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자유혼>에서의 이 두 곡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렸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는 건 그것이 어떤 감동이라서가 아니다. 정말 슬퍼서 울게 되는 것이다. 왜 그의 노래 속에서 그렇게 이야기 되어지는 방랑은 행복하지 않은 것인가. 왜 그는 누군가에게 버림받거나 스스로 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지금의 세상에서 뭔가를 채워가는 것은 비워가는 것에 비해 행복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인가? 난 내가 가진 것들을 절대 버리지 못하겠는데. 그러나 김두수는 노래 속에서 스스로 비워내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romantico 를 느끼는 것에 뭔가를 동반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낭만을 탐하는 것.. 세상의 모든 역사는 아름다움만을 지향하고, 그 아름다움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했을 때 타락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두수의 노래는 뭔가를 더 채워도 되지 않을까. 그는 힘들게 방랑하는 자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아름다움을 탐하기 위해서 치뤄야 하는 댓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노래한다. 

 

'Romantic Horizon'의 마지막 가사가 가슴 저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가오라 나의 천국 / 길을 잃고 또 길을 얻노라 / 맹인의 눈물, 농아의 노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구도 모를 맹인의 눈물과 농아의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았을 때 말이다. 그것이 아름답지만...적어도 그에겐 누구도 모를 아름다움보다는 모두가 아는 풍요로운 것으로 누리게 해 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버린 사람이 흔히 말하는 쓸데없는 오지랖일 것이다. 김두수, 그 만이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슬프다. 비워낼 수 있는 자신이 없어서다. 그래서 이 앨범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단호하게 절멸 (絶滅)의 길을 택하는 김두수의 모습이다. '추상'에서 (보너스 트랙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마지막 트랙인) 12번 트랙인 '저녁강' 에 이르면서 김두수는 해가 저물어가는 강가에 사라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이 앨범은 마지막에 이르러서 '자유혼'에 대한 장송곡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셈이다. '추상'은 분명 회귀의 노래다. 그러나 김두수는 길 위에 남아있을 뿐,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새들 뿐이며 그의 상념은 집을 짓는다. 그리고 그는 coffin. 즉, 관이나 다름없는 상념의 집 속으로 스스로 고립되길 자처한다. 마치 수도승처럼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음악적 진경을 경험한 것에 대한 숙제를 주듯이. 이제야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며 더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해서 네가 비워내야 할 것이 많다는 충고를 위해서일지 모른다.  <자유혼>이 끝나는 지점은 '이제 안녕을 고하라 / 시간이 강둑 저편 기슭에 머문다 / 노을, 꽃처럼 붉다 / 이제는 나의 땅으로 돌아갈 때' 이다. 이는 '저녁강'의 마지막 가사이다. 

 

김두수는 신념의 아티스트다. 이러한 고립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고, 결국은 스스로 박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도 이게 나에게 익숙하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하는 거라고 덤덤하게 대답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기하게도 <자유혼>에서 김두수의 목소리는 하나도 슬프지 않다. 나만 슬퍼할 뿐이다. 이게 참 신기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일까. 아니. 이것은 인생의 모든 것에 관한 깨달임일지도 모른다. 비워내고, 그 대가로 자신은 고립된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수없이 경험과 개인적인 배움과 견해들을 복기하며 고립의 삶을 벗어나자고 마음먹을 때, 문득 자신이 익숙하게 봐 왔던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달리 보일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평상시 있던 것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인데, 그래서 그것의 존재의의를 여태껏 몰랐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단순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김두수는 그런 방식으로 아름다운 곡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히 얘기하자면' 말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에서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를 만들어내는 건 아티스트 본인이 가진 통찰력의 문제다. 김두수는 이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느낄만한 통찰력을 갖고 있다. 1집부터 3집까지 그래왔지만, 4집부터 현재 최근작인 6집까지의 그의 음악 스타일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조롭다거나, 혹은 도태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혼>은 그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이것은 타락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비워진 세상으로 걸어들어가, 그 황무지에서 사람을 울리는 꽃을 피운 아티스트에 대한 최상의 찬사다. 여전히 생각날 때마다 자주 듣곤 하는 이 앨범은 그래서 참 좋다.

 

 

p.s.1 - 3집인 <보헤미안 / 강변마을 사람들>의 리뷰를 끄적일 때 언급하지 못했던 게 있었네요. 김두수 님의 앨범 중에서 '가장 먼저 들은 앨범'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인데, 저는 김두수 님의 앨범을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던 2006년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 때 신나라 레코드에서 인터넷 주문으로 3집과 4집을 같이 구매했지요. 그러고는 별 생각없이 4집인 <자유혼>을 먼저 비닐 뜯어서 들었어요. 3집은 LP 미니어처로 발매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늦게 뜯어보고 싶었거든요. 맛있는 것일수록 뒀다 먹고 싶은 마음이지요. 어쨌든 결론은 4집을 제일 먼저 들었다는 얘기죠.

 

하지만 앨범에 관한 소문을 처음 들은 것은 3집이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냐면 벅스뮤직에 들어가서 한대수 님의 앨범을 검색하다가 우연찮게 '김두수'라는 이름을 봤었거든요. 3집은 LP 미니어처본과 실제 LP 간의 커버 디자인이 살짝 다른데,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그 LP 음원이 벅스뮤직에서 서비스 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봤던 댓글이 '정말 대단한 음악인인데 한대수, 김민기 같은 사람에 비해서 너무 안 알려져 있다. 꼭 재평가 받아야 한다.' 였어요. 지금의 벅스뮤직이야 그저 그런 사이트지만 오래 전에는 정말 양질의 음악들을 서비스 했었죠. CD로는 절대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앨범들까지 거의 다 서비스 했었으니까요. 김두수 님을 알게 된 건 결국 벅스뮤직 덕택이었습니다. 

 

p.s.2 - 보너스 트랙 두 곡을 언급하지 못했는데, 음... 만만찮게 좋은 곡들이니 들어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자유혼> LP는 제가 앨범을 살 당시에 구매할 기회가 있긴 있었는데, 당시에 가격이 8만원 가까이 해서 제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대였습니다. 지금은 절판되어서 부르는 게 값이 되어버렸죠. 이후 감상자들의 요구가 빗발쳐서 7인치 싱글 세 장을 추가한 박스 세트로 새로 한정 발매 되는데요, 이 7인치 싱글곡들을 들을 기회가 없네요. 'H.H.에게 헌정함' 같은 곡은 오직 싱글에만 있으니까요. 그 곡 좀 들어보려고 하면 LP로 재테크 하려는 사람들은 프리미엄 얹어서 비싼 액수를 부르겠지만 말이죠.

 

어차피 세상이 자유경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이렇게 프리미엄을 얹는 행동들이 장기적으로 보자면 디스크 시장 (그것이 LP든, LD든, CD든, DVD든, BD든..) 을 더 좋지 않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막상 물건을 사면 그 희귀성을 알기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지만, 디스크를 산다는 것 자체가 이젠 더이상 '돈지랄'이라는 생각에서 바뀌지가 않는 것 같아요. 그 상태로 영겁의 시간이 계속 지속되는 것 같고요.

 

 

* Romantic Horizon *

 

다가오라 나의 천국 

그토록 오래도록 기다려온 

너는 그 어디에 

나를 버리고

 

길을 잃어 방황하여도 

나 항상 너를 그리워하였네 

잊혀진 꿈이여 너를 부른다

 

- 저 문이 열리고, 

비조(飛鳥)의 날개짓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운 Romantica여, 만개(滿開)한 빛들의 궁륭

 

La-

 

다가오라 나의 천국 

길을 잃고 또 길을 얻노라 

맹인의 눈물, 농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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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노래
백성민 지음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코믹스 / 전 1 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난 백성민의 작품 중 <토끼>를 볼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 꽤 오래 전 이야기구나. 문을 닫은 도서대여점인 열린X방에서 작품의 단행본을 봤기 때문이다. 위치가 대X N스쿨과 (구) 비디오 안방극X의 맞은편 들어가는 길이며 열린X방의 오른쪽엔 그 책방이 문 닫기 전에 영업을 막 시작했던 남성전용미용실이 위치해 있는 (포항시 북구 장성동에 살고 있거나 살았었던 주민들이여!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거들랑 기억하라!) 곳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성인만화의 세계가 궁금했다. 표현의 제한이 적었기에 오히려 예술에서 저질이 되고 마는 딜레마가 있다만, 사실 내가 궁금했던 건 그 화풍이었다. 96 ~ 97년, 혹은 90년대 초부터 라이센스화 되어 발매되기 시작한 일본만화들의 영향으로 어느샌가 수면 밑에서 행해지던 그림체 따라하기가 거의 한국만화계에 점유되던 상황이었다. 비록 대본소처럼 출판된 성인만화들 대부분이 커버와 본편의 그림체 차이가 꽤나 많이 난다는 것도 알게됐지만.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어떤 성인만화의 커버는 게리 마샬 감독의 <귀여운 여인>의 오리지날 포스터에서 얼굴만 바꾼 거였는데 그림 하나는 그럴듯하게 그려놨길래 대단하다 느꼈었다. 근데 정작 본편은 거의 김성모 공장장의 그림체와 맞먹고 섹스만 줄기차게 해대는 이야기를 가진 작품이었다. ...그래도 내 궁금증을 풀어줄 화풍들이 모두 거기 있었다. 박수동의, 한희작의, 고우영의, <머털도사>가 아닌 <바람소리>의 이두호의, 양영순의, <떠돌이 까치>가 아닌 <천국의 신화>의 이현세의, 허영만의, 그리고 백성민의...

 

  

*- 이런 그림체를 가지고 있는데 어찌 보지 않고 배기겠는가! -*

 

정확히 <토끼>가 왜 '19세 미만 구독불가' 판정을 바았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의문인데 어찌됐건 <광대의 노래>, 2007년에 책으로 묶인 이 작품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게 되는 그의 작품일 뿐더러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화풍으로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힘 있고 동시에 우아하며 세밀하기까지 한 그의 이전 그림체와 달리 이 작품은 정말 간단한 단선과 약간의 원색들로 이뤄져 있다. 이는 작품의 머리말에 이전의 화풍에 대해 '혼자서 해내기엔 정말 중노동' 이라 표현했고, 또 그로 인해 쉬어간다는 마음으로 그림체를 바꾼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그런데 그 외에도 사실상 많은게 다르다. 일단은 칸과 말풍선, 효과음이 존재하지 않아 코믹스의 영역에 있다고도 볼 수 없고 (근데 내 블로그는 만화의 경계에서 또 분류해야 할 정도로 세밀하지는 않아서 일단은 코믹스라고 적어놨다.) 그렇다고 한 컷에 모든 이야기가 설명되지 않기에 카툰이라 볼 수도 없다. 실질적으로 <광대의 노래>는 '우화'에 가깝다.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이 읽어도 좋겠지;만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을 그런 우화 말이다. 실을 이용한 제본 덕에 쫙 펴지는 이 화집으로, 우리는 오래된 고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책 마저도 종이가 아닌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글자 한 자 한 자를 읽으며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내용을 상상하며 공유하는지 아니면 글자를 흉내내어 똑같이 만들어내는 화면을, 읽는게 아니라 '그냥 보면서' ...그저 뭉뚱그려 이해하고 작품을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지 모를 시대에, (막상 이렇게 써놓고 보니 표현이 조금 에로틱한 감이 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러니까 꼭 지금이라기 보다는 시대 중 하나에 포함되는 2007년에 왜 이 작품이 출간되었는지. 놀랍다는 표현으로도 이 작품에 대한 감흥을 충분히 느끼게 할 순 없지만...어찌됐건!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생겼고 2008년 초에 초판을 구매한 난 이 작품에 대한 의문을 푸는 걸 주저해왔다. 왜 그래왔었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일단은, 개인적인 컴플렉스 였는지도 모르겠는데 내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경북 흥해에 부모님이 알고 지내시는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한 번은 그 스님의 방에서 아버지가 누군가의 지방 (紙榜) 을 흰 봉투에 적어주게 되었다. 그 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붓글씨를 높이 평가하고 써 달라고 부탁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스님도 아버지의 붓글씨를 높게 평가하신 분 중 한 분이었고. 근데 자식인 내 글씨도 궁금하셨나 보다. 나도 흰 봉투에 글씨를 적어 내보았다. 스님은 그리 길지 않게 말씀하셨다.

 

"잘 쓰네. 잘 써. 근데 돈으로 치면 지 아비의 절반 값 정도구만. 글씨를 '그리고 있어'. 고것만 고치고 나이 먹으면 되겠다."

 

글씨를 쓰는 것이지, 그리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 때나 지금이나 내 글씨는 결국 쓰는 걸 '흉내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절반의 값... 절반을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이 시작됐지만 그건 단순히 몇 년 간의 생각으로 정리되는 건 아닌 듯 싶었다.

 

마지막 장인 '희망조각'이 블로그 이웃인 '두리하나' 님의 글을 각색했다는 걸 알려주는 부분을 제외하면 화백은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장'이란 표현 대신에 '마당'이란 이름으로 풀어놓으며 참으로 간단하고 친절하게 독자들을 앉혀놓고 듣게 만든다. 어째 이전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의문 이전에 들었던 낯설음은 곧 풀렸다. 이전의 자신을 철저히 파괴함으로 인해 부정의 부정을 거친 결과였을테니까. 불가로 치면 그런 부정의 과정을 거치면 본성을 깨닫게 되면서 득도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게 이 작품이 되는 것일까?

 

 

첫번째와 두번째 마당인 '웃는 개'와 '1920년대식 사랑이야기'는 정말, 소위 말하는 '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 노리고 만든 치유계' 만화 장르에서나 써먹을 법한 흔한 소재다. 물론 그 흔한 듯 보이는 만화, 혹은 아침 라디오 방송 사연 feel의 '좋?생각' 류의 책자에서 읽거나 들을 법한 이야기가 식상하게 다가오지 않고 여전히 훈훈하게 다가오는 힘이 있으니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지켜내고 있다만, 어떻게 보면 이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함 이전에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독자들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배치한 전략이다. 이상은의 14집 앨범과 유사한 전략인 셈인데, 앞의 두 마당을 허허거리며 본 뒤 넘긴 세번째 마당, '니 몸에 싹 났다' 에서 불현듯 어떤 거대한 느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疏處可以走馬

密處不使透風

 

(성겨야 할 곳은 말이 질주할 정도로, 빽빽해야 한다면 바람 한 자락 통하지 못할 듯 하게)

 

 

 

 

 

청나라 시대의 인물인 등석여의 말이다. 세번째 마당과 여섯번째 마당인 '너와 나' 는 문득 저 등석여의 말을 떠오르게 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화제와 다시 마주치게 만든다. 대지 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자연의 일부인 듯 촉촉히 젖어 새 삶을 얻는 것과 동물들을 비교하듯 그려내는 것은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극사실주의 화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이 작품은 에드몽 보두앵의 <여행>보다도 더 담박하기 그지 없는 게 아닌가! 이 부분이 작품의 가장 놀라운 점이다. '1920년대식 사랑이야기' 가 다시 생각나 또 보다가 문득 노부부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던 주위의 공간에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가 머물고 있는 걸 보게 됐다. '웃는 개' 에서 붓 끝의 힘과 화선지가 만들어내는 '번짐'으로 그려진 개, '1920년대 사랑이야기' 에서의 나무 한 그루... 익숙한 이야기 속에 슬쩍슬쩍 그려놓은 놀라운 그림들을 낯설어하지 않게끔 끼워넣고 기다린 셈인데 보다보면 놀랍다. 일필휘지의 선이지만 자세하게 그리지 않아도 어떤 대상인지 전달되면서 이해도 가능하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이 단순한 형상만으로 모든 게 성립되기 때문이다. 대상을 극도로 단순화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일단 대상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자칫하며 무미건조해 질 수 있는, 또 어느 것이나 그렇다지만 특히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점에서,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계심을 놓치지 않아야 해서다. 맞다. 붓을 이용한 다듬기가 절정에 이르게 되면 되려 모든 군더더기가 제거되어 극도의 절제된 상태에 이르는 법이다. 개, 나무, 노부부, 아이들, 새싹, 장승, 달마 스님의 얼굴, 소와 사슴... 마지막으로 붓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여백의 공간까지, 붓이 이뤄낸 다양한 곡선과 직선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현란함이다. 모든 것들이 달라보여도 그 생동감만큼은 같은 법, 왜 코끼리를 이렇게 그려놨냐고 불평할 수 있지만 코끼리 그림을 구성하는 한 획 한 획을 살피면 우리가 그것을 흉내낸다 쳐도 절대 획의 힘까지 끌어올 수는 없음을 깨닫게 한다. <광대의 노래>는 백성민의 가장 화려한 작품이다. 거기다 철학적이기까지 하고.

 

 

 

*- '미켈란젤로' 편을 보다가 또 깜짝 놀랐던 것은 '천지창조'나 '피에타' 등의, 너무나도 세밀한 그림과 조각을 백성민 화백은 붓으로 윤곽만 그린 것 같은데도 작품의 핵심을 너무나도 잘 간파하여 표현해 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합성으로 '피에타'에다 <야인시대>의 세계를 끌고 들어오기도 할 정도가 됐지만..) 하지만 그는 그런 능력으로 자만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자연의 창조물을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일화를 이야기의 끝에 배치한 건 예술에 대한 백성민 화백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것과 같다. 예술이란 어쩌다 한 번 삐직 새어나온 방귀소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예술이다. 예술을 예술이라 받아들이지 못하면 바로 쓰레기가 될 수 있는 것도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

 

 

음,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중노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제의 끝은 자연이 만들어낸 대상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자체로 '자연'을 살아내는 것 말이다. 여기에 도달한 '인간 예술가'는 아직 없다. 사실 본인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여덟번째 마당인 '미켈란젤로' 에서 작가는 세기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피에타'를 만들고 자기 자신마저 도취되어 나르시즘과 자만심에 직접 이름을 새겨넣은 그는, 자랑할라고 작업실 문을 박차며 밖으로 나갔다가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을 보게 된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의 모습에 압도된 그는 곧 자신의 하찮음을 알고 다시는 자기 작품에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더라는 결론으로 이 마당은 마무리된다. 미켈란젤로의 일화는 어쩌면 백성민 화백과 <광대의 노래>란 작품이 가진 일정 부분의 세계일 듯 싶다. 세세하게 그리면 정말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보면 한없이 단순하고 별 것 아닐 법한 자연에서 예술, 혹은 인생의 진리를 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보고 신경쓰지 않을 것인지 말이다. 화백은 자연이란 대상을 만들어낸 신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더라도 그 경지에 이르는 비밀의 끝자락을 약간이라도 들춰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쌓여왔던 연륜이 있었기 때문일거다. 몸이라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노화의 과정을 시작하게 되지만 정신은 더욱 깊어지고, 깊음은 자신의 작품에서 겸손을 동반한 새로운 힘으로 승화된다. 화백은 그걸 알기에 마당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여 자신이 깨달아왔던 것들을 참 친근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거기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앞에서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21세기에 이 작품이 존재하게 됐고, 왜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였다. 이미 위에서 의문형으로 써 놨으니 이 끄적거림을 읽을 분들도 다 알고 계실 것이다. 이제는 미니홈피와 블로그가 존재하는 걸 넘어서 트위터와 페이스북까지 존재하고 있는 시대다. 인터넷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밝히는 풍경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왔지만, 사실 상대적으로 글을 길게 쓸 수 있는 미니홈피와 블로그에서 더이상 디테일한 글을 쓰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으며 페이스북, 그리고 140자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트위터는 우리가 만든 인터넷 세앙이 짧고 굵은 문장으로 치명적인 칼을 만들어 세상의 썩은 부분을 베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굳이 썩은 부분이 아니더라도 의식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예리한 칼이 되어야 한다.

 

작품의 도입부에 있는 추천사에 적혀져 있듯이 만화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매체다. 백성민은 타블렛도 아닌, 펜과 잉크도 아닌 붓과 먹으로 작품을 그렸고 블로그에다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찾았다. 복잡해질 필요 없이 이것 역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훌륭하고 행복한 결합의 예라고 볼 수 있겠는데 <광대의 노래>는 함축적이고 예리하기까지 하다. 네번째 마당, '네게도 날개가 있음을' 과 깨진 물독을 들고 다니는 할머니의 이야기, 전자는 작가가 이전에 그렸던 <싸울아비>나 <토끼>를 보는 듯한 역동적인 그림체를 붓으로 옮겨온 듯 하고 후자는 마치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보는 듯한 그림체로 구성됐다. 가장 극단적인 외형의 대비일 것이다.

 

이야기의 정서나 구성 역시 그렇다. '내게도 날개가 있음을' 은 강한 새끼만을 키우기 위해서 자식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는 매의 이야기이며 '미련 곰탱이 할매'는 이미 깨져버린 물독인데 시집올 때 들고 온 거라 물 새는 걸 알면서도 그냥 들고 다니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전자가 '니 몸에 싹 났다' 만큼 설명이 없이 그림만으로 대부분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후자는 참 친절한 설명들을 곁들이고 있는데, 전형적인 약육강식의 일례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을 반복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작가가 찾아내는 핵심은 독자들을 전율하게 만든다. 단순히 강함과 약함을 논해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를 벗어나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는 논리로 치환될 때 그 힘찬 붓선에서 작가가 찾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절박함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전율은 마침내 살아남은 매들이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넘어 태양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을 때의 그림과 더불어 그리 길지 않은 문장에서 나온다.

 

'너 잃어버린 날개를 찾았는가

저 매처럼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 본 자 만이

자신에게도 날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잊고 있던 날개를 다시 찾게 된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를 밀어내고 살아남는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날기 위해 자기 자신의 고민과 끊임없이 싸운 결과다. 작가는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채 57자로 설명한다. (140자도 아니네.) 동시에 그것은 살아남기, 혹은 경쟁에 대한 단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대가의 재밌지만 뼈가 있는 충고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스스로에 대해 고민한 적 있는가? 그렇게 고민한 자만이 스스로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어 흔들림 없이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좋은 방향으로의 작용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장담컨대, 이 이야기는 당신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미련 곰탱이 할매'는 할머니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붙인 별명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새 독이면 물이 새지 않아 우물에 한 번만 길러오면 되는데 깨진 걸 들고 다녀서 두 번 왔다갔다하니 미련하다고 붙여준 별명이다. 아니, 말이 별명이지 이건 완전히 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기분 나빠도 생각해보면 효율성을 따질 경우엔 새 물독으로 바꾸는 게 일리가 있고 사실상 대부분의 개인은 집단의 시선에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꿋꿋하고 또 여유롭다. 그녀의 가치는 효율성에 있는게 아니라 지금 자신의 행위를, 하루를, 인생을 구성하는 데 잇어서 더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려 깨지고 오래된 독을 선택한 것이며, 타인의 시선과 말들에 흔들리지 않았다. 표현의 방식과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다를지라도 핵심적인 건 같다. 할머니에겐 '날개'가 있다. 작가는 그녀를 격려할 수 있다. 거기엔 그닥 긴 말이 필요없다. 깨진 독에서 떨어진 물들이 흙에 스며드니 새싹이 돋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니 아름다운 꽃길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조금 모자란다고 부를 수 있겠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그런 사람들이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을까 말까인데 누군가는 훨씬 거대한 무언가를 바꿔가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는 재미있게 얘기한다. 말수는 적고 그림 역시 많지 않다. 근데 예리하고 화려하다. 딱인가? 작가의 서문에서 그림그리기는 참 재미있는 것이라며 어떤 놀이처럼 표현하지만, 작가의 즐거운 놀이마당은 고요한 강물 밑에서 격렬하게 몰아치는 물살처럼 독자를 느끼게 한다. 언제나 서민들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말과 행동들을 해 왔지만, 그 속에는 부패한 권력층을 향한 치명적 비수를 숨겼던 세상의 왕, 광대들처럼. <광대의 노래> 속에 숨겨진 비수는 지금도 유효하다.

 

추천 서평대로 백성민은 붓으로 만화의 영역을 초월해가고 있다. 그리고 난 길기만 할 뿐인 연필의 끄적거림으로 그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아마 난 그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베어내지 못할 것이다. 현재까지는. 뭐, 노력해 봐야겠지!

 

 

p.s.1 -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피에타'에 스며들어온 <야인시대>의 세계란.. DC 인사이드에서 만든 이것..

 

 

p.s.2 - 백성민 화백은 2005년부터 네이버 블로그에 자신의 그림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광대 가'란 닉네임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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