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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기타노 다케시 감독, 기타노 다케시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 아. 맞다. 알고 계시죠? 이 작품 좀 센 거. 모르신다구요? 그럼...유의하면서 보세요. *

감독: 기타노 다케시
주연: 기타노 다케시, 쿠니무라 준, 코이나타 후미요, 미우라 토모카즈, 가세 료, 시이나 에이히, 시이나 갓페이, 츠카모토 타카시, 이시바시 렌지, 와타나베 타오코, 이타야 유카, 기타무라 소이치로
음악: 스즈케 케이이치
촬영: 야나기시마 카츠미
18세 관람가 / Color / 109분
원제: アウトレイジ
(2012, 9, 7 - 02:09 a.m.)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언젠가 작품을 위해 야쿠자 사무소에 갔었던 일화를 생전에 얘기한 적이 있다. (야쿠자 관련 작품이니 당연히 <의리없는 전쟁> 5부작을 위해서겠지만 이 이야기를 어디서 봤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배틀 로얄>을 DVD로 보다 거기 서플먼트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사무소에 가니 그 곳 야쿠자의 보스가 굉장히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자신들을 자랑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있던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찬찬히 그의 뒤에 놓여진 것들을 훑어봤는데 뭔가 여러 것들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방부처리를 한 사람들의 잘려진 새끼손가락이 담겨진 거대한 투명단지들이었다. 외부인들하고 얘기하는데 눈에 띄는 위치에 저걸 갖다 놨다는 것은 자기가 모은 손가락에 관해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은 그 일화를 능청스럽게 회고하고 있었다. 야쿠자는 결국 그런 족속들이라면서.

* 그런 족속들. 상위 서열 앞에서 웃음 지으며 가식을 떨던 한 야쿠자는 곧 굳어진 표정으로 바뀐 채 자신의 부하들과 동료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 지를 논의한다. 야쿠자들의 차가 일제히 지나간 뒤, 저 멀리서 하나의 차가 뒤따라 오는데 거기서는 그런 논의를 하는 이케모토와 오토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차량의 색깔은 같고 그들 모두 하나의 대상에 충성하는 듯 하지만, 속내는 이리도 다르다. <아웃레이지>의 도입부다. *
언젠가 몇 년 전에 야쿠자란 단어의 어원을 화투패에서 찾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실제로도 이 표현에서 따 온 언어겠다 싶어서 복사를 해 뒀었는데, '야쿠자'란 숫자의 조합으로 일본어로 8(야),9(쿠),3(자) 를 합쳤을 때 총 합계가 20, 끝자리가 0이 되어버리는 최악의 패를 뜻한다. 도박에 관한 것이니 원래 야쿠자는 허구한날 도박만 하는 놈팽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세계에 일본을 알릴 때 크게 공헌한.. 그러니까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 크게 공헌한 범죄집단을 일컫는 말로 변화되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에도, 안보투쟁이 일어났던 60년대와 정치, 사회적 안정을 바라는 단계였던 70년대에 이르면서 야쿠자는 일본사회의 어두움을 상징하는 한 축으로서 실제로도 많은 일들을 저질러 왔다. 전공투 세력이 아사마 산장에서 자폭하듯 서로를 죽고 죽였을 때 일본의 어두움은 그 광경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을지 모른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특이했던 것은 그런 야쿠자라는 소재에서 고유의 독특한 감수성을 찾아내서다. 잔인하기만한 줄 알았던 이들에게 아이같은 순수성이 있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주저하다 끝끝내 자폭하고 마는 순간들, 그냥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에게서 다양한 주제를 이끌어내는 순간들은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일본 쪽에서는 그를 영화감독보다는 거의 유명 코미디언으로서의 '비트 다케시'의 자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생전에 '일본영화계의 미래이며 잘 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 것이나 서방세계에서 환호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실질적으로 그의 필모그래피 중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될 <아웃레이지 비욘드> 까지 포함해 17편의 작품 중 야쿠자의 세계를 중점적인 주제로 다룬 작품은 <3X4-10월>, <소나티네>, <브라더>, <아웃레이지>, <아웃레이지: 비욘드>, 딱 5편 뿐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야쿠자는 나오지만 그냥 부수적인 등장인물이나 설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기타노 다케시와 야쿠자라는 단어를 동일시한다. 그 이야기를 다룬 것 중에서 걸작이라 불릴만한 작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매혹된 것이 바로 '야쿠자'라는 테마를 다룬 작품이라서 였을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지금도 과대평가의 단초가 되었다는 논쟁이 존재한다.
<아웃레이지>는 '오피스 기타노'의 로고보다 워너 브라더스 사의 로고가 먼저 뜨는 신기한 광경이 이어진 뒤 시작된다. <브라더> 이후 10년만에 야쿠자 장르의 작품으로 돌아온 기타노 다케시 감독에 관해 많은 기시감과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데, 어째 <소나티네> 등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작품은 도입부에서 관동지방의 최대의 폭력조직인 산노우회의 모임을 보여주면서 두목인 이케모토가 본부에게 무라세 조직과 너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지 말라며 타박을 듣는 장면을 보여준다. 오프닝 타이틀 등장 전 초반 10여분의 시간을 굳이 이 야쿠자 세계의 디테일을 너무나 세세히 제시하는 것에 집중하는 점이 이전 작품들과 뭔가 다르다. 감독의 이전작들은 사실상 음모 (conspiracy) 가 발현하는 지점을 잡아내는데는 무관심했다. 야쿠자 세계에서의 음모는 일상다반사처럼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덤덤하게 대처하는데, 이 작품은 굳이 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부분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본부에게 한 소리 들은 이케모토는 산노우회에서 나와 자신의 구미(組) 로 돌아가면서 부하인 오토모와 이야기를 나눈다. 오토모는 이리 묻는다. "..무라세 놈들 사무소에 가서 총알 몇 발 좀 박아주고 올까요?" 이케모토가 지시한다. "아냐. 일단은 무라세 구미 쪽에다가 사무소를 하나 열어 놔." 그제야 작품이 시작된다. 여태까지 내가 본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 중에서 앞으로의 전개가 가장 궁금해지는 시작이다. 일을 좀 만들어서 사실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보고하자는 의도임에 분명한데, 자칫하면 상황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궁금증이 흥미로웠던 것일까. 2010년의 칸 영화제에서 벌어진 <아웃레이지>에 관한 외국 쪽의 반응과 극장 개봉 이후 일본 쪽의 반응은 참 재밌게 느껴진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귀국해서는 '내가 칸에 가서 관객들 전부 다 넉다운 시키고 왔다'는 멋진 말을 한 바 있지만 사실 그건 멋진 자학개그에 가깝다. 실제 이 작품은 무시무시한 야유와 더불어 그 해 칸 영화제 최악의 평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이 점수 면에서 이 작품과 비교되기는 하지만, <돈의 맛>의 1.4점과 이 작품의 0.9점은 사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느 외국 기자는 화장실에서 만난 한국 기자에게 도대체 이 작품이 어디가 우수한건지 말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서방세계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 열광한 것은 '필름 코멘트' 지의 표현대로 일본영화의 두 가지 전통이 지닌 균형을 지녀서였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보여줬던 정갈함과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보여준 격렬하고 날것에 가까운 에너지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미학적 성취에 있어서는 이 두 감독에 비해 많이 떨어지며 정치나 사회적 의식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의 경우에는 감독이 그의 작품인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비중있는 역을 맡은 적도 있으니 약간의 영향도 있을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가 코미디언인 비트 다케시로 활동할 때는 빠른 어조로 독설을 날리는 것이 트레이드마크 였다. 그런데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그에게 코미디언의 특성을 버리고 무표정한 동시에 과묵한 연기를 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는 이 어울리지 않는 극단의 전통을 합쳐서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감성을 만들어냈다. 이건 독특한 그의 작품 특유의 리듬이며 새로운 개념이다.

조금 적나라하고 단순하고 무식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웃레이지>가 마음에 든 건 감독이 작품을 만들 때 정했던 컨셉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의 진행과 장면구성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공포영화 장르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가진 악취미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니 그런 혐의도 없잖아 있다.) 더 놀란 것은 그의 작품이 여태까지 보여줬던 폭력성과 서정성 중, 뒤의 것을 내던져 버리고 만들었다는 시도에 있었다. <자토이치> 이후, '자기반영' 3부작을 만들고 그가 내린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작품의 한국 버전 포스터에 적힌 태그라인에 되어있는대로 '폭력 엔터테인먼트' 라면 그것이 이전 작품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는지는 봐야할테니 말이다.
애초에 정한 컨셉대로 이 작품에 관해서 얘기를 하자면 안타깝게도 솔직히 할 말이 별로 없다. 이후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이만 조금 좋지 않게 하자고 시작한 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살아남기 위해 죽고 죽이는 이야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은 드물게 이야기 전개에 많은 공을 들인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 5부작의 아우라를 재현하기 위한 발악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서는 이야기가 특출나게 눈에 띈 적도 없었고 그것이 흥미롭게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나름 이야기의 전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는 걸 드러내는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컨셉은 완전히 '악인들의 배틀로얄' 인데 그는 폭력의 스타일, 물고 물리며 그 사이에 배신이 존재하는 야쿠자들의 생태를 나름 복잡하게 그려내려고 애쓴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모두 하고 있습니까?> 이후 처음으로 주변인으로서의 기타노 다케시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초반부에 그가 연기한 오토모가 이케모토와 얘길 나누는 것을 보면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겠다고 짐작하겠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그의 비중이 조금 커질 뿐, 그 역시 일종의 조연이다. 어둠의 세계 특유의 성질 더러운 다툼이 곧 살인으로 이어진다. 오토모가 마치 이케모토의 수족이 되듯 앞장서서 무라세 구미의 일원들과 무라세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최종적으로 그들이 일하던 세력권들을 물려받는다.

"형님. 정말 그 대사 놈한테 얼마나 주는 겁니까?"
"니가 상관할 거 아니야. 등신같은 새끼야."
"형님. 형님이 다루시는 비자금에 대해선 별말 안할 테니까, 그 돈 저한테도 좀 나눠 주시죠?"
"너 이 자식.. 나보다 더 한 놈이잖아."
"야쿠자가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위의 대사는 오토모의 부하인 이시하라가 자신의 부하 야쿠자와 나누는 대화다. 일본 공개 포스터에 쓰였던 태그라인인 '전원악인'에 걸맞는 대사다. <아웃레이지>에서 작품과 감독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개인과 풍경이 아니라 조직의 구조다. 여기서 돋보이는 건 실제 야쿠자들이 이리 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세심한 묘사인데, 오토모 일당들은 미국 대사관의 대사를 협박해서 그 장소를 불법 카지노로 개조한다. 오토모를 마냥 자신의 부하라고 생각하는 이케모토는 칩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서 불법 카지노의 운영을 원활하지 못하게 만들고, 분노한 오토모는 그를 잔혹하게 죽인다. 전부터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오토모에게 산노우회의 두목은 몰래 불러다 친근한 관계를 맺는 '사카스키' 의식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방법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는 피로 맺어진 형제라고도 하여 좀 오버하면 자신들의 피를 서로 먹게 하는 극단적 방법도 서슴치 않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저 언급만 될 뿐이지만 실제로 야쿠자들의 세상이 이런 식이다. 그 세상에선 오직 두목과 부하 뿐이며, 그 외에는 동료라 불리는 교다이붕 (兄第分) 만 존재하고 있다.

두목과 부하라는 수직적인 관계와 동료가 가지고 있는 수평적인 관계, 여성은 그저 성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한 노리개에 불과하며 부하와 동료를 대하는 태도는 전국시대적인 사고방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득이나 입막음을 위해, 혹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하를 죽이는 건 우스운 일이며 사카스키 의식을 맺은 동료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감독은 인물 대신 멀찍이서 이 구조를 다루는데 힘을 쏟고, 이런 의식이 현재로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런 배신의 관계 속에서 인물들은 오토모를 포함하여 대부분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
그 비참함. 그의 작품들이 원래 어느 정도의 폭력성을 동반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거의 고어의 경지를 넘보는 듯한 무지막지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건 일종의 양념이다. 문제는 만약 후카사쿠 킨지나 고샤 히데오 감독이 지금까지 살아서 만들었다면 남성적인 터치가 더해져 더 잘 살아났을 이야기들이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손을 거치면서 허무의 기운이 너무 과하게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흥미로워야 할 장면들이 흥미롭지가 않다. 대표적으로 무라세 구미의 일원인 기무라가 복수를 하려 이케모토 구미의 일원들이 탄 차를 뒤쫓는 장면이 있다. 한밤중에 좁은 길에서 벌어지는 두 차 사이의 미행, 혹은 자동차 추격전인데다 화끈한 충돌 장면, 그리고 총격 장면들까지 있는데 감독과 촬영감독인 야나기시마 카츠미는 되게 재미없게 이 장면을 연출한다. 카메라는 움직이지도 않고 고정된 채, 몇 장면을 빠르지만 단순한 편집으로 보여주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폭력 장면들은 듣도 보도 못한 식이다. 치과 기구로 마구 쑤시는 장면이나 바깥에 세워진 봉과 차에 탄 사람에 줄을 묶고, 자동차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 사람이 거기서 목이 거의 잘려나가는 수준으로 튕겨나오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기발한 살인방법들이 출동하기 때문에 사실 존재 자체만으로 자극적이다. 하지만 자동차 추격전 같은 경우엔 남의 의사를 묻지 않고 미행하는 금기의 자극만으로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는 관객이 직접 추격을 하는 듯한 체감을 동반하는 연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감독과 작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무시한다. 이상한 일이다.

* 캡쳐로만 보니 그럴 듯해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전체적인 연출이 상당히 긴박감 '없다'. *
문득 몇 가지 생각들이 겹쳐졌다. 사실 쇼치쿠 영화사의 제안을 받고, 그 곳의 제안을 적절히 수용하며 만들었다는 <자토이치>를 보고 짐작했던 것이지만, 그는 자신이 창조하고 칭송받아온 그 세계에 침식당할 뻔 한 것 같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없었다면 심히 밋밋한 감흥만을 전해줄 뻔 했던 <브라더>를 봤을 때 그런 우려가 들기는 했지만. 원래 자기반영 3부작의 마지막편인 <아킬레스와 거북이> 이후 차기작은 이 작품이 아니라 시대극이 될 뻔 했었다. 감독은 주연으로 이미 <자토이치>에 출연한 적 있는 배우인 사오토메 다이치를 점찍어 놨었는데, 주변의 반대로 계획이 엎어졌다. 역사극 소재에다 그 배우가 이름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그리 유명하지 않으니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결국 그는 <아웃레이지>를 만들게 됐다. 작품을 만들면서 그는 또 새로운 요구조건에 부딪쳤는데, 그건 바로 작품의 투자사인 반다이 비주얼 측에서 더이상 '기타노 군단'은 출연시키지 말자는 의견을 내놨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은 이전에 같이 작업했던 익숙한 배우들을 대부분 출연시키지 않고 고히나타 후미요, 미우라 도모카즈, 가세 료, 시이나 깃페이처럼 지명도 높은 새 배우들로 출연진을 교체해야만 했다. 연기 면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들이지만 감독에게 익숙한 이들이 아니며, 또 다들 인상이 야쿠자 장르의 작품에 어울리지 않게 선하고 유약한 면이 돋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악역을 연기할 때 관객은 몇 배의 잔혹함과 교활함, 그리고 비열함을 체감하게 되는데 이는 여지껏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것이기도 하고. 예전 기타노 사단의 배우들이 보여줬던 몸과 대사의 리듬은 찾을 수 없고, 이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사태를 파악하며 머리를 굴리기에 바쁘다. 인간의 감수성이 느껴졌던 표정과 순간, 대사들은 모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인위적인 감정들로 채워지며 결과적으로 이 작품에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 외엔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배제된 채 건조함만이 남는다. 아. 물론 건조함은 사실 2002년에 만들어진 <돌스> 이후부터 더이상 히사이시 조와 음악작업을 하지 않는 것도 이유에 포함될 듯 하다. (이후로 감독은 나기, 이케베 신이치로 같은 다양한 음악가들과 작업했는데 그나마 그 중에서 록 그룹 '문 라이더스'의 멤버이자 배우이기도 한 스즈키 케이치와의 작업이 이 작품을 포함해서 두 편으로 가장 많다.)
감독이 전부터 보여줬던 건조함은 묘하게 샘 페킨파 감독의 걸작이자 기타노 다케시 감독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를 떠올리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루시엔 발라드 촬영감독의 황토빛 영상이 유독 탁하고 건조하게 보이고 주인공부터 시작해서 작품의 모든 순간들이 굉장히 무기력했던 그 기괴한 작품의 정서가 이 작품과 공유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샘 페킨파 감독의 그 작품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예전 작품들의 감수성과 더 잘 맞는다. 요컨대 <소나티네> 같은 작품.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에서 워렌 오츠가 연기한 주인공 베니는 의뢰를 받고 알프레도 가르시아란 남자를 죽이러 애인과 함께 간다. 그 일만 하면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걱정없이 살 수 있는 돈을 받기 때문에, 이미 반 쯤 성공했다 치고 애인에게 반지까지 주면서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작품은 곧 애인을 죽이고 베니를 도망자로 만든다. 많은 걸 잃은 베니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이미 잘려진 채 파리만 드글거리고 있는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통 뿐이다. 작품이 기괴해 지는 건 베니가 가르시아의 머리에 얘기를 건네는 순간부터다. 실수로 머리를 든 자루를 놓쳐서 떨어지니 그걸 주워 "미안하네, 알." 이라 말하고, 드라이아이스에 담궈주면서 시원하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관객이 봐도 뻔히 죽을 법한 마지막 장면 이전에는 모두 감독 특유의 액션 장면들과 한 남자가 잘린 머리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순간들은 꼭 야쿠자들의 내분으로 인해 오키나와로 쫓겨갔던 <소나티네>의 무라카와 일당들을 연상케 한다. 베니와 잘린 머리, 야쿠자들이 오키나와에서 평화롭게 노는 한 때는 기묘한 유머로 작품에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 번 망가지자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마지막 순간을 자폭하듯 끝내버린다. 이렇게 보면 참 닮았다.

하지만 같은 감독에게서 만들어진 <아웃레이지>는 그런 작품들과 어지간하면 거리를 떨어뜨려 놓으려 든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와의 연관성을 최소로나마 유지하고 있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이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 이제 더이상 90년대에 보여줬던 이미지들이 보여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전자의 경우, <다케시즈> 같은 작품은 이전에 만든 그의 작품을 총결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토이치> 같은 경우엔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한 사무라이가 병약한 아내의 치료를 위해 원치않는 요짐보 일을 하고, 원래는 관직에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비>의 니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니시도 원래 경찰관이었으나 아내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갚아야 할 상황이 오자 은행강도가 되어 돈을 훔쳤으니 말이다. 그런데 후자의 얘기를 하자면 그냥 그 정도의 연상에서 끝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건 이미 만들어 버린 과거의 필모그래피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인장으로서 남겨놓는 것과 같다. 이 작품도 이전 작품들과 영 동떨어진 것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는 듯 특별한 한 장면이 존재한다. 한 차례의 잔혹한 살인장면 이후, 야쿠자의 차가 죽음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체 옆을 느리게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그 다음 작품은 원경에서 파도가 세차게 치고 있는 바다의 풍경 옆으로 차가 달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청명하게 빛나는 푸른 색감, 잠깐이긴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거론하던 '기타노 블루' 의 세상이 다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다른 세계의 색깔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성취한 색깔을 비교적 최소한도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교적 최소한' 이란 표현이다. 감독과 작품은 거기서 어떤 접점을 찾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1997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자신을 일본영화계의 암이자 에이즈라고 비유한 바 있다. 베테랑 코미디언 다운 발언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말이 은근히 슬프게 들린다. 감독은 야쿠자 장르 외에도 청춘, 로맨스, 코미디, 시대극, 드라마 등 비교적 다양하게 스펙트럼을 확장 시켜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영화평론가인 요노타 이누히코의 말에 따르면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국에서는 난해하다고 평가받고 외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 그의 작품이었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후기 커리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들의 완성도에 관해선 호불호가 갈리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가 다양한 장르를 통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미 오른 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 감독의 입장에서는 불안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영역을 정복하고자 한다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노력 덕분이었을까. <아웃레이지>는 일본 내에서 남성관객들의 호응 속에서 예전 작품들보다 다섯 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거두기에 이른다.

감독은 결국 자신의 작품이 자국 내에서 트렌드가 될 수 있었는지를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예술적 성취로 따진다면 이 작품은 결국 몇 발짝 더 앞서나갈 수 있었으면서 적당히 안주하고 맞춰갔던 작품이란 혐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린 예전작들이 자국의 관객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가 대중적 성향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다는 의도가 불만족스럽다면, 오로지 그의 '잘못'이라고 얘기하기 보다 동시에 현재의 관객들이 원하는 트렌드가 그런 것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퀄이 아닌 이상 절대 속편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버린 <아웃레이지>의 결말은 현 일본, 혹은 현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객은 결과물이 설사 아쉽더라도, 그걸로 바로 단정 짓지 않고 앞으로도 작품을 만들어갈 예술가를 계속 주시 할 필요성이 있다. 예술작품은 당대의 사회를 일정부분 반영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사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사람들이기도 한 관객들은 그런 덕목 하나 쯤 가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안주하기만 한 뻔한 작품이었나? 아니. 그는 관객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며, 그것을 '시도' 했다는 것에 있어 이 작품 역시 또 하나의 경지다. 그리고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내가 마냥 농담 조로 우습게 생각했던 말들이 실제로는 굉장히 기분 나쁠 수 있고, 위협적인 상황을 조장할 때 사용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체감케 해줬기 때문이다.
일본에 갔을 때, 지인과 함께 전철 안에서 <아웃레이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 작품 속의 야쿠자들은 다들 입에 'お前(오마에: 너 이 놈)', 'このやろう(고노야로: 이 새끼)' 혹은 'うるせ, 馬鹿やろう(우루세, 바까야로: 닥쳐라, 바보자식아)' 같은 말들을 달고 살더라고 웃으며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말을 하자마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쉿!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하지 말아요." 라고 조심스럽게 경고의 답을 해줬다. 사실 위의 두 단어가 한국에서는 몇몇 드라마를 통해서나, 혹은 인터넷에서 유머를 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기에 저 말을 들으면 웃음부터 먼저 나온다. 단도직입적으로 '바가' 라는 말만 들어도 스브스 방송국 드라마인 <야인시대>에서 분노에 가득찬 표정으로 책상을 두들기던 미와 경부가 떠오르는데 웃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니지. 웃어야지.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위협적인 욕이며, <아웃레이지>에서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아는 야쿠자들이 저 말을 쓴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는 저 말들을 한 이후 대부분이 끔찍한 살인이나 생사를 넘나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야쿠자들은 지독하게 현실적이고 악랄한 인간군상들이다. 멋있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이 작품은 저 말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고 위협적이며, 그리고 저 말을 애용하는 인간들은 몇 배는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엔터테인먼트의 필터를 거쳐서 일깨워준다. 그래서 재밌게 보다가도, 결국 마지막엔 장난 아니라는 말을 연발하고 마는 것이다.

p.s.1 - 베니스 영화제가 한창 개최 중인데, <아웃레이지: 비욘드>도 상영 됐을라나요. 전작이 꽤나 악명 높았으니 <하나-비> 때처럼 황금사자상 한 번 타 줬으면 싶지만 가능성이 별로 없겠지요.. 오히려 김기덕 감독님이 베니스에서 하나 수상하실 거 같은데.
p.s.2 - 그냥 큰 상관없는 일화 하나. 일본에는 <담뽀뽀>, <민보의 여인> 같은 걸작들을 만든 이타미 주조라는 감독님이 있습니다. 이 중 <민보의 여인>은 야쿠자가 작품의 중요요소로 등장하고 있는데요, 개봉 이후 야쿠자 쪽에서 자신들을 왜곡했다면서 이 감독님께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는군요. 하지만 굴하지 않고 작품을 계속 만드신 감독님이 어느 날 97년에 44세의 나이로 자살을 했습니다. 한 황색 타블로이드로부터 스캔들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는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려면 죽음밖에 없다는 유서를 써놓고 8층 건물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님에게도 약간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요, 1986년에 고단샤가 발행하는 주간지인 '프라이데이'의 기자가 감독님의 애인에게 (그런데 여기서 진짜 애인이었는지, 아니면 애인이라는 소문이 도는 여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밀착취재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성이 취재를 거부하니 기자가 집까지 따라와서 소리를 지르며 위협하고, 손을 잡아 완력으로 취재에 응하게끔 시도를 했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들은 감독님은 ...소화기를 들고 프라이데이 사무실에 난입해서 뿌린 다음 편집장과 편집부 사람들을 폭행하고 기물을 때려부수는 방식으로 되갚았다고 합니다. 아예 '개박살'을 내버렸다고 하더군요.
문득 이런 걸 적은 게, 야쿠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보면서 '이 감독님이 야쿠자랑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거든요. 이 작품을 볼 땐 더욱 그랬구요. 만약 그랬다면 타블로이드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80년대 일본 타블로이드의 행태는 정말 경악스러운 수준이었으니까요.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10대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 님이 1986년에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을 때, 사진 찍으려고 숨어있던 기자가 뇌수가 터져나온 자살 현장을 발견하곤 그걸 그대로 찍어 신문에 내보낼 정도였죠. 심지어는 엎어진 자세의 시신을 건드려 얼굴이 다 드러나는 정면 사진을 찍었다고도 하니까 (그 정면 사진은 소속사가 입수해서 금고에 극비문서로 보관 중이라더군요. 신문사가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참.. 야쿠자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족속들이 황색 타블로이드였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