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박스 셋트 - 거울, 이반의 어린 시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 알아두셔야 할 게, 이 끄적임을 읽으시다 보면 거의 끝부분에서 실제 사람의 시신이 담긴 기록 필름 쇼트가 있습니다. 예. 맞아요. 제가 그걸 또 캡쳐를 해 놨어요. 나쁜 놈이죠. 심하게 잔인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실제 사람이 죽은 거니까 혹시 거부감 있으신 분들은 독일 시퀀스 운운하는 장면이 나오면 스크롤 바를 빨리 내리시라고 적어놓습니다. ...그냥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하드코어한 면이 있다면서 누명 한 번 씌어보고 싶었어요. *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반은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버드나무가 자라 있었던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그 누구도 왜 이 나무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것이 이반의 버드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에서 죽어서 우의를 관뚜껑마냥 덮어쓴 채,
이반이 버드나무 아래 그늘로 돌아왔다
이반의 버드나무
이반의 버드나무
하얀 배를 닮은 그것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주연: 니콜라이 부를라이예프, 발렌틴 주브코프, 니콜라이 그린코, 예브게니 자리코프, 스테판 크릴로프, 발렌티나 말야비나,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블라디미르 마렌코프
음악: 바야체슬라프 오프치닌코프
촬영: 바딤 유소브
18세 관람가 / Black & White / 95분
원제: Ивано детство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 버리는 경험을 꽤 민망하게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사람이다. 이전에 <솔라리스>와 <스토커>를 본 상태였고, 그 다음이 <희생> 이었다. 이 작품을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초등학생 때 처음 그 작품의 VHS 커버를 보고는 관심이 가서 대여해보려 했지만 당시에 그 작품의 관람 등급이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였다. 우일 비디오에서 발매된 그 VHS는 내가 처음 비디오 대여점에서 발견했을 때도 포장이 뜯기지 않은 상태였는데, 당시에는 보지 못했고 그 곳 주인이 15세에 근접한 나이가 되면 대여를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줬다. 그리고 14세가 되던 해인 2002년에 마침내 그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작품이 한국에 개봉했을 때가 95년이었는데 7년 동안 대여 해 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희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문으로 들어왔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본다는 생각에 흥분했던 당시의 홍준호는 작품이 진행된지 50여분이 넘어 스르르륵 잠들고 말았다. 지루해서 그 고통으로 몸을 배배 꼬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르르륵.. 그렇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작품을 볼 때 매혹적인 영상에 눈길이 가는 내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선사하는 영상미학은 단숨에 매혹 될 수 있을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선보이는 모습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가령 <희생>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긴 롱테이크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수다 장면들에 매혹된 듯한 그런 상황인데,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은 날 한 번도 잠들게 만든 적이 없는데 왜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날 꿈꾸게 하고', 꼭 영화가 다 끝나고 난 뒤에 꿈에서 깨게 만들었던가? 사실 지금이야 왕빙, 라브 디아즈 감독 같은 영화인들이 있으니 '아. 타르코프스키는 그 감독들에 비하면 마이클 베이구나.' 하면서 느끼지만 어쨌든 그 때는 그랬다.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내겐 너무 거대한 생각이었고, 그냥 한 편의 작품이라도 잠들지 않을 정도의 깊은 공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데뷔작으로 가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반의 어린 시절>의 도입부는 <희생> 등의 작품보다 시각적으로 더 강렬하게 감상자를 사로 잡는다. 사실 강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이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장르의 작품이고 주인공이 어린아이라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독의 작품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어떤 자극의 정서가 존재한다. 그것이 은유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어머니. 뻐꾸기가 있어요."
작품의 첫 시작에서 ,이반은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바닷가 지대에서 어머니가 떠다주는 물을 마신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던 이반은 어떤 소리와 어머니의 시선 하나로 산산조각 나버린다. 악몽이 침범하는 것처럼 카메라가 갑작스럽고 급격하게 줌 아웃하며 이반을 깨운다. 과거를 회상하는 꿈이었던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에 관해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것이 섬뜩하든 아름답든 간에 기본적으로 '차분함' 이 연상되는 것인데, 도입부 시퀀스는 그 기본적인 선입견을 날려버릴 정도로 상당히 자극적인 감흥을 던져준다.
정말 가히 ' 아, 씨발 꿈' 이라 할만하다.*
이건 사실 카메라 움직임과 배경의 전환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까 전만 해도 러시아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엘프같았던 꼬마가 갑자기 황폐해진 눈동자와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을 한 채 돌아다니니 당시 자국의 관객들은 어떤 감흥을 느꼈을까. 확실한 것은 당시 정부는 <이반의 어린 시절>을 제작하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방식을 굉장히 싫어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창 작품이 촬영되고 있을 때 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서 줄거리가 끊기지 말고 진행되어야 하며, 줄거리를 비롯해서 작품의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어져야 한다고 항의했다. 말이 항의인 것이지, 영화 만들겠다는 데 정부가 간섭하고 통제 하겠다는 것도 웃기지만 단 한 순간의 은유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단 한 순간의 '다른 생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런 항의전화는 작품 촬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됐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빌어먹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도입부를 포함하여 작품의 전반부에서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달리 굉장히 날이 서 있는 듯한 이반과 젊은 중위인 갈제프의 만남이다. 이반은 혼자서 독일군의 총격을 피해 드네프르 강가를 헤엄쳐 왔다. 그래서 처음엔 어떻게 죽지 않고 헤엄쳐 왔는지를 궁금해하던 갈제프는 이반을 심문하려고 한다. 그러나 곧 소년이 러시아 부대의 척후병으로 활동해 왔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놀란다. 왜 이런 아이까지 전쟁에 개입해야만 하는 것인가.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느껴진 그는 그라즈노프 대령이 있는 군대에게 전달해 줄 비밀 암호를 적어 내려나가는 이반을 병사가 아닌 '소년'으로 대접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반 역시 잠시 진심을 느꼈는지 경계심을 거두고 순순히 그의 배려에 응하고, 곧 잠이 든다. 그리고 다시 꿈을 꾼다.
들리는 말로 러시아 정부는 이런 식의 전개와 영화화된 작품의 최종 결과물을 보고 많이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명확하지 않은' 전개방식도 그렇거니와, 그들은 전쟁 승리와 혁명 (시도 때도 없이 혁명이다.) 을 위해 겁없이 전장으로 뛰어드는 소년 전쟁 영웅의 캐릭터가 등장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화된 작품의 초안 시나리오가 실제로 그런 식의 전개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그런 입장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 작품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겁없이 뛰어드는 소년 병사가 등장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뭔가 그들의 입맛에 맞게 확실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감독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최고의 영화인 중 한 명이자 인재였지만,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와 체질적으로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무리 스탈린이 죽고 난 뒤에 조금이나마 사회 분위기를 완화한 상태일지라도 말이다.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단편소설인 <이반>을 원작으로 한 <이반의 어린 시절>은 원래 제작사인 모스필름 측에서 의뢰한 감독이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에두아르도 아발로프 감독. 그러나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신통치 않았나보다. 제작은 중단되었고, 모스필름 측은 그가 찍어뒀던 필름들을 폐기하고 1년간 영화화를 중단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그렇게 누군가가 만들다 만 결과물을 대신 이어받는 식으로 시작됐던 것이었다. 데뷔작부터 온전하게 자신의 의사와 창작적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은 상태로부터 시작한 것이, 그로 하여금 더 기를 쓰고 자신의 스타일을 처음부터 확립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감독은 의외로 블라디미르 보고몰로프의 소설이 가지는 몇몇 요소들에 매혹되어 있었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과 어떤 극적전개 없이 마치 냉철하게 보고서를 작성하듯 사건을 서술 하는 점, 그리고 이 아이가 죽음을 맞이할 때도 위치가 추적되어 보고 된다는 설정이 그랬다. 하지만 매혹만 되어 있을 뿐, 소설의 전개방식과 중점요소들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감독에게 있어 영화는 '정서적인 연결과 시적 서정성'의 집결체였기 때문이다. 감독은 작품을 촬영할 때 제작진들이 소설을 철저하게 고증해서 만들어 놓은 사실적인 프로덕션 디자인들을 보고는 아무런 영화적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은 모스필름 측에서 준 시나리오를 자신의 방식으로 수정하기 시작한다. 과연 '전쟁'과 '꿈'은 어울리는가? 감독은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의 정서적 연결과 시적인 서정성의 합일을 위해서 과감하게 두 가지 요소를 결합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현실의 잔혹함과는 또 다른 방식의 잔혹함을 목도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웃기지 마! 지금 애, 어른이 어디있어!? 전쟁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아!
나 되게 쓸모 있는 사람이야! 뭐든지 잘 할 수 있다고!"
작품을 처음 본 지도 꽤 됐고 (그 때는 러시코에서 출시된 DVD를 통해서 봤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DVD로 다시 본 것도 꽤 오래 되어서 이 대사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나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흐름 상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훌륭하게 척후병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이반은 포상을 기대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군사학교로 가는 게 좋겠다는 '어른들'의 대답이다. 이쯤 되면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겠지만 이반은 전쟁고아다. 그리고 이 소년을 척후병으로 보낸 군인들은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군사학교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반은 끝까지 자신은 쓸모가 있으니까 계속 이용하라고 어필한다. '이용' 이라는 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용이라는 단어만큼 편하면서도 무서운 말은 없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순수한 분노의 의지로 이용하라고 외치는 말처럼 이용하기 좋은 수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써 놓은 이반의 말은 어른이 듣기에도 꽤나 매섭다.
실은 위의 대사와 장면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반이 또 꿈을 꾸는 장면이 있다. 총 네 번 등장하는 작품의 꿈에서 두 번째 꿈을 꾼 것인데, 이번에는 이반과 어머니가 우물에 물 뜨러 와서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반에게 우물이 깊으면 낮에도 별이 보인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정말로 우물물에 무언가가 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반사인 것 같기에는 우물에 비친 대상이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호기심이 생긴 이반은 우물 밑으로 내려가서 반짝이는 뭔가를 잡으려 한다. 바로 그 때 위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이반의 시야에서 어머니가 사라져 버린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작품이 물의 이미지를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에서 물의 이미지는 자주 출현했다. 그 중에서도 <거울>이나 <스토커>에서 보여준 물의 이미지는 그의 작품들에서 가장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솔라리스>나 <희생>에서의 물은 생물을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내는 지루하게 감상한 사람이라도 그 장면들은 아예 포스터로 만들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지. 금승훈 감독의 글 중 하나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 에 적힌 일화를 조금 인용하자면, 감독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할 때 동시에 해저 탐사반에 자원해서 심해 탐사를 했던 경력이 있다고 한다. 아마 그의 작품세계에서 물이 자주 연관이 되는 건 감독 본인의 이런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심해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해저의 물결을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 물의 이미지가 가장 직접적으로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이반의 어린 시절> 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작품에서 이용되는 물의 이미지는 죽음을 삶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반이 가장 생기발랄했던 시절에 어김없이 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삶의 기억들은 현재의 자신이 산 송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원인이 된다. 작품은 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속성들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가령 음식물 쓰레기가 물과 어울렸을 때 더 심하게 풍기는 냄새, 물에 잠긴 사람의 시체가 보여주는 흉측한 몰골과 썩은 냄새. 그 냄새... 물에 불어버린 뭔가를 만질 때 느껴지는 물컹함과 파편화되는 요소들 같은 것들 말이다. 이반이 꾸는 두 번째 꿈에서 총에 맞은 어머니는 우물 옆에 쓰러져 있고, 그런 그녀의 몸에 물이 세차게 끼얹어진다. 죽은 사람에 몸에 물을 끼얹는 것은 더 불어터지고 썩은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과거의 회상이기는 하지만, 꿈으로 표현된 이 시퀀스를 통해서 과연 정말로 이반의 어머니가 이런 방식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이 사람의 피부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어머니의 죽음은 이반에게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물은 몸의 기억이다. 축축히 젖어드는 물방울이 예전의 일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후로 작품은 꿈에서 깨어난 이반의 단독 쇼트가 등장할 때마다 끊임없이 조그맣게 낙숫물 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 속 대부분의 장면에서 굉장히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반의 모습을 납득 시키는데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이렇듯 내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자연적 요소들을 마치 영화 속 미술처럼 이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들에 있다. 그리고 동시에 놀라운 로케이션 촬영 능력도 있는데, 이는 자연적 순간들을 잘 이용하는 데이비드 린이나 홍상수 감독같은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치 헐리우드에 있는 ILM 같은 특수효과 회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구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상력을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서다. <스토커>에서 천장 뚫린 방에서 비가 쏟아지는 장면 같은 것. 아니면 <노스탤지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도 될 것 같다. 주인공이 집 앞에 주저 앉아 있는데 그 뒤로 교회인지 사원인지 모를 옛날 건축물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들 말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제 막 컴퓨터 그래픽이 그 질감을 조금씩 극복하고 초보적으로나마 이용되고 있을 때였고, 광학 특수효과가 애니매트로닉스와 조합하여 구식 특수효과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지금의 눈으로 냉정하게 따진다면 그 당시의 특수효과 합성 쇼트는 뭘 해도 티가 날 때였다. 단지 티가 나도 당시 시대에 이뤄낼 수 있는 성취에 감탄한 것도 있고, 또 예의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봤을 뿐이지.
그런데 이 감독은 <이반의 어린 시절>만 한정지어도 그 당시의 헐리우드가 '평면적으로' 구현해왔던 영화적 세계 (헐리우드의 매트 아티스트들이 감쪽같이 그림을 그려놨지만 어쩔 수 없이 실제 세트와 따로 노는 모습을 종종 보지 않았던가.) 를 능가해 버리고, 스크린을 캔버스 삼아 실재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려낸다. 어떤 '공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미학적으로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과 더불어 감독과 여러편을 함께 작업한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의 공로가 크기도 하고. 이런 아름다움은 주로 이반의 이야기가 주가 되는 장면들에서 빛을 발하는데, 도입부의 첫번째 꿈에서 나무를 만지작거리던 이반의 얼굴을 클로즈 업 한 상태에서 카메라가 이동하는 장면이 있다. 당연히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있기 때문에 딱히 뭔가 놀라운 것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제 보니 그 장면은 이반이 하늘을 날고 있음을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뭔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감독은 꿈이라는 것을 표현해주기 위해 별 설명도 없이 능청스럽게 이 소년을 날게 만든다. 그러나 '난다'는 행위에 중심을 두지 않고,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시각 기술 요소가 관객에게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정서적 공허함의 여지를 애초에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는 도대체 저런 배경을 어디서 찾아냈을까 하는 로케이션의 대단함도 있다. 가령 작품 속에서는 갈제프 중위와 그라즈노프 대령과 더불어 이반을 보살펴 주는 크롤린 대위라는 인물이 나온다. 작품은 주로 이반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도 간간히 이반을 둘러싼 주위의 어른들의 시점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드물게 이반이라는 아이의 존재와 정서가 범접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루는 독립적인 시퀀스를 하나 보여준다. 바로 크롤린 대위의 사랑 시퀀스인데, 이야기 진행상으로 보자면 이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잠시 다른 데로 튀는 셈이니 그닥 좋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작품과 별개로 시퀀스 자체는 굉장히 강렬하다. 그것이 잠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것은 문제겠지만,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자작나무 숲의 전경은 감탄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흑백으로 촬영됐기 때문인지 하얗고 빼빼 마른 자작나무숲이 유독 창백하게 느껴져 죽음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것이다. 갈제프 중위는 마샤라는 이름의 간호장교와 숲에서 밀고 당기기를 한다. 아. 참고로 여기서 밀고 당긴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삶과 죽음이 쉽게 오고 가는 전쟁터에서 이 남녀는 감독의 작품치고는 드물게 커플이라면 한 번 쯤 따라 해 보고 싶은 장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바로 참호 위에서 키스 하기. 크롤린 대위의 감정은 이미 마샤에게 향해있고, 그녀는 남자의 명령인지 구애인지 모를 이 행위를 받아 들여야 하는지에 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녀는 결국 체념한듯 그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작품의 카메라가 크롤린과 마샤의 키스 장면을 담아내는 방식이 아주 독특하다. 본디 참호라는 것은 총알을 피해 사람이 걸어다녀야 하므로 깊게 파서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참호의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가 집중하는 것은 바닥을 볼 수 없기에 더욱 막연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참호의 깊이다. 그리고 얼만큼 깊은지 모를 참호 위에서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다. 작품은 결론적으로 참호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해 파는 무덤처럼 촬영해내고 있다. 만약 키스를 하고 있는 와중에 이들이 총을 맞는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참호는 곧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작품은 여기서 전쟁에 관한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이 오히려 외면적으로는 얌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데,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다루는 전쟁이라는 것은 어떤 요소로도 중화되거나 혹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동원될지라도 말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아무리 고차원적인 사상을 보여준들 무엇이든 당대의 상황에 맞게 끼워맞춰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의 저서인 <봉인된 시간>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의 장면 몇몇을 연출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확히 어떤 장면들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작품의 이 시퀀스는 어떠한 타의적 해석을 거부시킨다. 사랑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작품들이 연상시키는 고요하고, 어떻게 보면 얌전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감독 본인은 꽤 담대했는지도 모른다.

* 인상적인 순간 하나 더. 이반은 군사학교로 보내려는 그라즈노프 대령의 결정에 반발해서, 홀로 부대를 떠나 적진을 정찰하러 떠난다. 가는 길에 이반은 폐허가 된 집에서 사는 정신나간 노인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실제 폐허를 찾은 것인지, 아니면 프로덕션 디자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의 전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아궁이와 굴뚝, 문만 남은 모습이 굉장히 기괴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리고 이런 프로덕션 디자인은 극도의 사실성을 추구했다는 보고몰로프의 소설과는 반대의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 어쨌든 작품 속에서 노인은 그 곳에서 마치 집이 정상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반은 그 노인에게 말을 걸다 그가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반은 군인들에 의해 다시 돌아가게 됐을 때 그를 위해 음식들을 놔 두고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반을 데리러 온 군인들은 노인을 노망 났다고 취급하거나,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인의 모습에서 비극성을 느끼고 그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은 이반 뿐이다. 차가 떠난 뒤, 노인이 한 마디 한다. 오히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미쳐버린 노인이야말로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신이시여.. 이 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입니까..." *
그리고 그런 담대함은 완성본을 본 당대의 정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소년을 용맹하게 적진에 뛰어들게 하는 영웅으로 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은 후반부에 이르러 아예 이반을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있는 소년으로 만들어 버린다. 억압하는 사회에서 예술가는 극단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동조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얽매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첫 시작부터 명확했다. 그는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하나의 회화를 보여준다. 이반이 다시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자 갈제프 중위는 그림책을 하나 보여준다. 그리고 이 중 이반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독일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묵시록의 네 기사들' 이다. 그림 속에서 두 번째 기사가 전쟁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작품 속에서 '적국'이 되어야 할 독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경계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반은 베를린에 잠입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독일놈들은 잔혹하고 무식해서 이런 판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서 광장에서 책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을 봤다고 말한다. 그러자 갈제프 중위는 이반에게 뒤러는 독일인이긴 하지만 500년전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물론 나치즘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이다. 아무리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지른 죄과가 있을지언정, 그로 인해서 나치즘이 '유태인들에 대한 히틀러의 신의 한 수' 운운되며 납득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공산주의 시기의 러시아가 독일을 비판하고 자신들이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을 증오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당대의 러시아가 완벽한 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용맹한 소년 전쟁 영웅은 중위가 호신용으로 준 칼을 이용하여 혼자 있을 때 전쟁 놀이를 한다. 나름의 위악을 부리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관객이 알 수 있게 되는 부분은 이 소년이 얼마나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로 가득 차 있는가다. 마치 무성영화 시기를 보는 듯, 작품은 극한의 어둠 속에서 조명만으로 이반의 가족들이 그 날 몰살당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과거이자 환상의 일부를 보여준다. 이반은 그 날 이후로 우물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 우물의 어두움 속에서 악몽을 마주하며, 그것에 매몰되어 살고 있다. 감독은 진심으로 그들을 동정한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입장보다도 예술가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무래도 데뷔작이라서 그런 것일까? 감독이 작품을 영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다소 직접적이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갈제프 중위가 독일의 나치당 본부에 진입했을 때, 작품은 실제 패전 직후의 독일의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을 삽입한다. 기록 필름의 삽입은 <거울> 에서도 이용됐던 적이 있는데, (러시아군이 겨울에 강을 건너는 장면이었다.) 그 작품에서의 영상은 감독과 제작진 측에서 처음 발굴하여 보여준다는 의의로라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의 기록 필름은 상당히 공포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패전하여 자살하고 사살당한 인간들의 시신이 가감없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앞서 나오는 후반부의 시퀀스는 앞서 나왔던 상징적 이미지들이 선물세트처럼 총동원된다. 밤에 적진에 침투하기로 계획한 등장인물들은 조심스럽게 강을 건넌다. 감독과 제작진들은 당시 러시아에서 물에 잠겨버린 숲을 찾아내 그 곳에서 촬영했다. 마치 전쟁으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상징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곳은 생명이 깃든 늪지도 아니고,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의 흑백영상 덕에 어둠만 가득한 죽어가는 숲이 되어버렸다. (초반부, 평화로운 시절의 이반이 지냈던 바닷가 주변의 숲과 닮았다.) 군인들은 이반의 잠입을 위해 길을 터 주고, 쉴새없이 날아드는 적진의 조명탄과 총탄들은 강물로 떨어져 가라앉는다. 물은 끈적하게 바닥 밑으로 가라앉은 조명탄 파편과 총탄의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이 밤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갈제프 중위의 얼굴에도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이 새겨진다.
그리고 독일로 온 그는 빨치산으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이반의 마지막 사진을 보고 충격에 빠지게 된다. 앞으로 이어질 작품연보를 생각하면 독일 시퀀스는 사실 과장된 느낌이다. 이런 점을 보면 데뷔작답다 싶다. 직접적으로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던 이반의 사형 장면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알고 보면 자비가 없다!) 굳이 연출해가며 잘린 목이 굴러가는 묘사까지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 정부를 향해 자긴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 한다면,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자 했다면 성공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대지를 탐구하는 지질학을 전공하고, 심해의 물결을 영상화하기 위해 고민했던 것. 그것을 영화적 목표로 삼았다면 독일 시퀀스는 어찌보면 사족이고 실패다. 폐허가 된 수용소의 빈 공간을 유려한 움직임으로 훑고 지나가는 바딤 유소프의 카메라는 끔찍하리만큼 아름답지만,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독의 작품에 관해 칭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내게는 이반의 사형 장면이 두 번째 작품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타타르족이 사람 죽이는 장면보다도 더 끔찍했다.

* 되도않은 소리지만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는 많은 "우리가 국민들한테 뽑으라고 강요한 적 없어. 국민들이 우리한테 위임한거지. 그리고 지금 그들은 댓가를 치루고 있는거야." 란 말을 했다던 요제프 괴벨스의 불 탄 시신이 찬조출연 *
오히려 후에 만들어질 작품들의 연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결말이다. 아무 일도 없던 과거의 시절, 놀이를 하던 이반은 아리따운 소녀를 보며 호감을 가지며, 곧 둘은 활기차게 뛰기 시작한다. 밀물과 썰물을 볼 수 있는 바닷가에서 촬영을 했는지, 그 덕분에 작품 속에서 이반은 마치 물 위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반이 가지고 있는 몸의 기억 중 물이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물의 기억은 죽은 고목나무 안으로 들어가며 암전되어 버린다. 끔찍하고 끈적한 물의 기억이 송장같은 고목 속으로 들어가니 오히려 더 썩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수생도 가능한 나무 종이 있으니 저것이 일반화가 될 수는 없지만, 나무뿌리에게 생명으로 작용할 수 있는 물과의 관계를 동시에 죽음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은 시적인 심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동시에 우리가 그에게 가장 감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서를 표현해내는 능력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변형의 가능성을 보고 각각 견디거나 흐르게 만든 시간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이 행복한 기억이든 끔찍한 기억이든간에. <이반의 어린 시절>은 어쩌면 데뷔작이기 때문에 가끔 덜컹거리기도 하지만, 어느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초장부터 완벽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든 명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석권한다. 그러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이 작품 이후로 4년간 침묵한다.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해 4년의 시간이 걸렸다면 꽤나 길다. 당시 정부가 그를 고깝게 봐서 압력을 행사한 것도 있겠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그 스스로가 자책하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여 시간을 그만큼 보냈다고도 하더라. 그래도 사람인데, 어떻게 누군가에게 영향받지 않고 이렇게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나! 궁금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DVD의 북클릿에는 그런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재밌는 작품이 하나 있다. <봉인된 시간>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시인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 한 편을 머리 속에서 영화화 했다고 써 놨다. 그리고 <거울>이나 <스토커> 같은 작품은 아예 직접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시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 정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반의 어린 시절>을 만들 때 그 시가 영향을 줬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 끄적임을 읽을 때 가장 위에서 본 것이 바로 그 시다. 이제는 안드레이의 말을 들을 수 없지만, '..a possible source of influence' 란 표현답게 연관의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는 있겠다. 기억..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기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 하다못해 자신이 살지 못한 시대의 '묵시록의 네 기사'에 대한 기억, 혹은 차기작에서 등장하는 '삼위일체' 같은 성당벽화에도 기억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특정 작품에 영향을 받든, 받지 않았든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런 기억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반은
누가 심었는지도 모를 버드나무가 자라 있었던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그 누구도 왜 이 나무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것이 이반의 버드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전쟁에서 죽어서 우의를 관뚜껑마냥 덮어쓴 채,
이반이 버드나무 아래 그늘로 돌아왔다
이반의 버드나무
이반의 버드나무
하얀 배를 닮은 그것이
강 하류로 흘러 내려간다
이반의 버드나무 (Ivan's Willow)(1958)
(지은이: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
p.s.1 - "야, 이 자식아! 러시아는 91년까지 소련 연방이었다고! 너 신문도 안 보고 사냐!?" 는 말이 있을 수 있는데요, 예. 91년 당시 세 살이었으니 신문은 보지 않았습니다. 남들한테 개그 칠 때는 '소련'이란 표현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데 이상하게 여기서 끄적이려니 잘 안 되네요. 그래서 그냥 러시아로 표기했습니다. 근데 지금 하려는 이야기에서는 소련이란 표현을 쓰긴 써야겠네요. '러시아 카메라' 라고 하면 뭔가 어감이 잘 달라붙지가 않아서..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항공 촬영을 시도하다 당시 제작진 중 한 명이 추락사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장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도입부의 꿈 장면에서 보였던 버드 아이 뷰 쇼트를 찍다가 일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정부에서 영화를 찍을 때 감독들에게 필히 80kg 가까이 하는 '소련제 카메라'로만 찍으라고 권고 했었대요. 그걸 사용해서 항공 촬영을 하다가 일이 난 것이지요. 뭔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후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할 때도 정부가 '소련제 카메라'를 들고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베니스 영화제 풍경을 찍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하기 위해서 들고 가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네요. 어찌됐건 참 끔찍한 일입니다.
p.s.2 - 작품이 굳이 공포스러운 연출을 하지는 않지만 이반에게는 마리오 바바 감독님의 <블랙 사바스>에서 가장 살 떨리는 에피소드인 '물방울' 만큼 낙숫물 소리가 무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p.s.3 - 의외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님과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님은 촬영을 할 때마다 많이 다퉜다고 합니다. <이반의 어린 시절> 같은 경우에는 위에서 설명한 추락 사고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후 이 작품으로 바딤 유소프 촬영감독님도 정부에 의해 징계를 받았다는 일화를 보면 그래도 뭔가 인정을 하니까 그렇게 협업을 지속했겠거니 싶습니다. 실제로도 이렇게 말을 했다더군요. "처음 찍어보는 사물을 이렇게 긴장감있고 황홀하게 찍은 사람은 타르코프스키 이외엔 없었다." 라고요.
p.s.4 - 이반이 혼자 전쟁 놀이를 하다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시퀀스의 결말은 마치 구해달라는 듯, 혼자서 종을 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님의 작품에서 등장한 종! 뭔가 낯설지가 않죠? 개인적으로는 그 시퀀스에서 <안드레이 루블료프>에 대한 영감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이반을 연기한 배우인 니콜라이 부를라이예프 님이 이후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종 만드는 소년인 보리스카를 연기하게 되니 분명 연관성이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