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ire: 라틴어. 산책하다, 섹스하다
 
감독: 이송희일
주연: 김영재, 한주완, 윤종훈
음악: 조브라웅
촬영: 윤지운
18세 관람가 / Color / 38분
 



 
 
이송희일 감독의 <지난 여름, 갑자기>의 시작은 학교 학생인 상우의 모습을 보여준 다음, 학교 선생인 경훈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인물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특이점은 조급함과 여유로움이다. 상우는 겉보기엔 무더운 여름날을 견디기 위해 미니 선풍기를 돌리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 버스가 보이자, 곧 그것을 응시하더니 어쩔줄 몰라한다. 이제 보니 고민이 되는 것이다. 저 버스를 타고 누군가에게 가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가. 상우는 버스를 타고, 다다를 곳은 가정방문을 준비하며 아침에 말끔히 샤워를 한 뒤 준비하는 경훈에게로다. 그래. 원래 뭘 하든 간에 학생이 선생을 만나러 가는 건 긴장되는 일이지. 사제 간의 교류라는 것이 왜곡된지 오래니까.

 

그런데 수줍고 엄숙해야 할 이 관계는 이제 보니 그 모든 게 빠져있다. 상우는 게이 고등학생이다. 어느 날 게이 바에 갔다가 우연찮게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경훈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저장해둔다. 이 순간은 훗날, 이 작품의 이야기를 위해서 쓰여지게 된다. 바로 상우가 경훈에게 핸드폰 사진을 통해 협박하는 것으로 말이다. 상우는 저돌적이지만 두렵다. 그는 수업시간에 경훈이 계속 자기를 쳐다본 것이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신만의 생각에서만 그러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는데, 게이 바에 온 경훈을 보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 믿음 하나로 욕도 해보고, 협박도 하며 달려든다. 중학생 시절이 지나간 이후에 남아있는 그 나이 약간의 허세 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고백하는 순간은 두렵다. 이 작품이 갑자기 흥미로워졌던 이유는 협박을 하고 당하는 관계를 역전시킨 것과 더불어 이 순간 때문이었다. 상우가 경훈에게 협박을 할 때는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다가, 하루만 자신과 같이 있어달라고, 그리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하자고 부탁을 할 때 시선을 회피하고 얘기하는 것.
 
이 때 카메라는 잠시 누군가의 눈이 된다. 경훈이 서 있는 방향과는 다른 지점에서 상우의 몸을 훑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경훈의 시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눈이 허용할 수 있는 시야 안에 있는 각도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의 시선일 수도 있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상우의 팔뚝은 성인 남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굵고 빳빳한 힘줄이 서 있다. 어깨 역시 그 만큼이나 넓다. 그러나 시선을 더 올려서 마침내 얼굴에 다다르게 되면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성인 남자'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말하는데도 너무나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소년 남자' 다. 그 소년은 갑자기 겁이 났는지 시선을 피한채 말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시선은 정말 경훈의 시선이었으리라. 그 모습이 보여진 뒤, 경훈은 상우를 쫓아내려는 생각을 잠시 거두고 차에 같이 태워서 상우의 말대로 한강 유람선을 타러 가기 때문이다. 그 유람선은 경훈이 수업시간에 타 보고 싶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가 보길 열망하는 그런 장소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구경 가 보는 것이 더 옳을텐데, 자기 반 학생과 간다. 나는 잠시 경훈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됐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나쁘지는 않을 거 같은데? 내가 학교선생이 아니라서 이렇게 막말을 할 수 있는건가?

 

'고등학생', 즉 열일곱부터 열아홉 사이의 존재는 스스로가 그 시절이었을 때, 아니면 지금의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할 때 일종의 지옥같은 미혹처럼 다가왔었다. 마음은 성숙하지 않지만, 몸은 이미 성숙해져버린 시기였다. 그래서 지금 현재 그 치명적인 아청법으로 규정 지으려 해도 다소 애매한 측면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오래 전 시대였으면 이미 충분히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였으니 육체적인 문제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경훈은 계속 상우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거기에는 옛날이 아닌 바로 지금, 성인으로서의 자신이 처한 상황과 (경훈은 작품의 초반부에 지인과 통화하면서 다른 학교에 자신이 갈 자리가 없는지를 물어본다.) 고등학교 선생이 고등학생을 사랑할 수 없다는 인륜, 그리고 자신은 게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 게이 고등학생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나름의 '자기판단'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판단인지 아니면 애써서 하려 드는 자기합리화인지에 관해서는 이미 관객이 볼 땐 다 티가 나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인디플러그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봤다.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다. 상영되던 기간을 놓쳤기 때문이다. 내가 극장에서 본 작품은 마지막에 소개할 <백야> 뿐이다. GV 진행이 원활하게 되도록 도우러 간 김에 그 작품을 본 것인데, 이송희일 감독과 그의 이 3부작에 출연한 배우들과 함께 한 GV에서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언급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감독이 <지난 여름, 갑자기> 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구 동성아트홀에 GV를 하러 온 배우들이 마침 <백야>와 <남쪽으로 간다>의 배우들이어서 그 작품들 위주로 질문이 이뤄진 감이 있지만 진짜 이유는 이 작품에 대한 감독 본인의 불만족 때문이었다. 다른 두 작품을 이미 다 촬영하고 난 시점에서 갑작스런 사정으로 한 편을 더 찍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그런 여건 속에서 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급하게 만들어진 작품' 이 바로 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에 대한 질문은 감독의 언급을 제외하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확실히 이 작품은 이송희일 감독이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다기 보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다른 작품들로부터 브리콜라주를 하려 들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일단 제목이 조셉 L. 맨키비츠 감독이 1959년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캐서린 헵번을 주연으로 하여 찍은 작품과 같다. 게다가 그 작품도 동성애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음악이다. <백야>가 과연 그들의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앨범에 동명제목의 음악이 있으며, <남쪽으로 간다>는 확실히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여름, 갑자기>의 경우에는 감독 본인이 준비하다가 엎어져서 현재 준비 중인 장편인 <야간 비행>의 프롤로그 같았다고 언급을 한 적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예고편, 그리고 본편에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음악 (본편은 멤버 중 한 사람이기도 한 조브라웅의 자작곡들로 채워졌다.) 이 쓰였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여러 장소를 이동하긴 하지만 차 안에서 인물들이 벌이는 대화나 이야기 전개의 비중도 만만찮음을 생각하면 <남쪽으로 간다>의 변주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결말부를 제외하면 이 작품은 스코어 음악을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키지 않는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라디오라든가, 아니면 헤드폰을 통해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음악이라는 존재를 주변부로 내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으로 음악이 사용된 작품들을 몇 편 본 기억이 있다. 예를 들자면 프란츠 왁스먼이 사운드트랙을 담당했지만 막상 보면 스코어 음악이 사용됐는지 잘 모를 법도 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4년작인 <이창> 이라든가, 차 안에선 잘 들리는 음악이 인물이 바깥으로 나오면 거의 들리지 않는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1973년작, <붉은 결혼식> (국내 VHS 출시제목: <애정관계>!!) 같은 경우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이송희일 감독이 가장 불만족스럽다고 한 이 작품이 도리어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참고로 감독은 이 세 작품들을 묶어 'Coire' 라고 이름붙였고, 외국에서 상영할 때는 이 세 작품을 한 방에 몰아서 모두 상영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굳이 하나의 흐름을 가진 작품들의 모음으로 봐야 할 테니 무엇이 더 나은가를 논하는 걸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을 어떤 순서대로 봐야 하는지도 무의미할 것이고. 그래서 '굳이 꼽자면' 이다. 굳이 꼽자면. <후회하지 않아>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이송희일 감독은 '밤을 참 사랑하는 것 같다'는 감흥이었다. 게이가 등장하는 작품들을 만드는 또다른 감독인 김조광수의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최대한 낮을 배경으로 해서 발랄하게 진행되던 것과는 정 반대의 시간대 설정이다. 이 감독은 낮에 뭘 하면 되게 어색해 보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낮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건, 나쁜 일이 생기건 상관없이 살벌할 정도로 밝은 한 여름의 낮이다. 이것은 게이 로맨스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것에 있어 흔히 가지고 있는 인식을 깨게 만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게이 로맨스에 관해 우리가 정서적으로 상상하게 되는 시간대는 밤, 혹은 어둠이 드리워질 때다. 이것은 실제로 이태원이나 낙원동 쪽에서 게이들이 자주 가는 바 라든가, 아니면 이들이 주로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대가 주로 밤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생겨난 인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게이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소수자'라고 불리는 인생을 산다는 건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알 수 없는 무력에 의해 강제로 어둠 속으로 내몰리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이 작품을 본다면 <지난 여름, 갑자기> 의 '차 안' 은 두 주인공이 이 소수적인 문제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된 공간이다. '한국에서'.

 

그러나 낮을 배경으로 했다고 이송희일 감독과 김조광수 감독이 공통되는 것은 아니다. (아. 이름 글자 수가 똑같구나.) 김조광수 감독은 무력이 그어놓은 경계 속으로 자신들도 당당히 두 발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며 싸운다. 반면 이송희일 감독은 이 3부작에 와서 더욱 확실해진 감이 있다. 그는 이 경계를 두 발로 걸어 들어가서 호소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지우려 든다. 지우려 드는 것은 아예 그 원치 않는 구분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결의에도 해당된다. 그 순간, 이 작품은 단순히 이 주인공들의 관계가 선생과 제자라는 것 외에도 또다른 미묘한 긴장감이 생겨나게 된다.

 

유람선에 올라탄 경훈과 상우는 안에서 벌어지는 공연들을 보며 지낸다. 하지만 서로의 취향에 맞지 않는 듯, 작품은 그들이 공연을 보고 유람선 안을 돌아다니는 시퀀스를 마치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처리해놨다. 말하자면 괜히 탄 것이다. 바다를 보니 그나마 상우가 신이 나지만 경훈은 지루하다. 상우는 그것을 보고는 자신이 듣던 음악을 경훈에게 들려준다. 참고로 이 음악은 작품의 초반부에서 경훈이 상우를 태워가다 라디오를 트는데, 상우가 지루하고 어둡다고 말하며 꺼버렸던 라디오 속의 음악과 같다. 말하자면 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에 관해 마구 말할 수 있는 '차 안에서의 음악'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음악을 듣기 전의 경훈은 한강을 보며 상우에게 "물 더럽다." 고 말한다. 그런데 음악을 듣자, 카메라는 햇빛에 반짝이는 고요한 한강의 물살과 맞은편 전경을 보여준다.

 

원래 작품의 예고편에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2집인 <우정 모텔>의 수록곡 중 하나였던 '장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본편에서는 멤버인 조브라웅이 작곡한 '한강'이 흘러나온다. 라디오 속의 음악을 여기서 다시 등장시킨 부분은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자신이 숨겨온 모든 것들을 지킬 수 있는 차 안에서만 들었던 음악을 밖에서 다시 들었을 때에 느끼는 긴장감이 있기 때문이다. 날씨는 세상 모든 곳의 어두움을 드러낼 수 있을 듯한 치명적인 밝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숨기고 있는 것들이 모두 드러날 듯한... 이 때 이송희일 감독의 낮은 어둠의 속성까지 모두 갖춘 진중함을 가지고 관객에게 다가온다. 따뜻한 빛이 한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태워 죽여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주는 것이다. 그 때 상우와 시선이 마주친다. 상우는 경훈을 향해 웃어보인다. '차 안에서의 감정' 이 세상 밖에서 발현되는 순간이다. 이 긴장은 짜릿하다. 왜냐면 작품이 중시하는 것은 동성애적 감정이 지금의 세상에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논하는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플라토닉한 애정이든, 아니면 지금 당장 저 몸을 탐하고 싶은 욕정이든. 그래서 <지난 여름, 갑자기>는 Coire 3부작 중에서 가장 위험해 보인다. 그리고 이 유람선에서의 시퀀스가 지나가고, 다시 차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작품에서 상우가 듣기에 가장 가혹하다고 느낄 법한 말들이 튀어나온다.

 

 * "..그러면 왜 예전에, 나한테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어요?"

 

"기억 안 나."

 

"그 때 1학기 성적상담할 때 나한테 그랬잖아요? 방학 때 나한테 선물해준 책은? 그것도 기억 안 나요? 선생님도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나! 네 담임이야. 네 선생이야!"

 

"수업시간에.. 나 자꾸 훔쳐 봤잖아.."

 

"..미친 놈! 바지만 입으면 누구나 졸졸 쫓아다니는 너 같은 피래미들, 눈만 감으면 환상이잖아!"

 

"..환상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넌 네 식성 아니야. 어려! 젖비린내 나! 내가 왜 널 피했다고 생각해? 무서워서? 아니.. 귀찮아서. 거머리처럼 달라 붙을까봐. 너 같이 어린 애들은 도저히 흥분이 안 되거든!"
 

사실 이송희일 감독이 대사를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이 대사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는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오히려 꾸밈이 없는 것이 더 정서적으로 와닿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


요약하자면 강한 긍정의 감정에 이르기 전에 강한 부정이 나오는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시퀀스가 끝나는 시점이 시작한지 30분째 되는 순간이다. 이 작품의 상영시간이 38분인데, 남은 8분 안에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려고 저러나? 작품은 이 순간에 두 등장인물이 헝클어 놓고 꼬아버린 실타래를 한 번에 풀 수 있을 결말을 선보인다.
 
<남쪽으로 간다>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결말부가 강렬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는데 감독은 GV에서 역시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먼저 얘기했었다. 힘들게 빌린 아파트였고, 매직 아워의 순간은 짧고, 무엇보다 소재 때문에 빌려놓은 곳이 취소될까 두렵다는 것. 그리고 장비의 열약함 때문에 감독 본인이 생각했던 '더 나은 비전'이 구현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나는 감독의 머리 속에 뭐가 구상되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멋진 걸 생각해놓고 있었는가 보다. 그러나 더 나은 비전이라는 표현에서 '더 나은' 이라는 말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더 깔끔하고, 더 유려하고, 한 마디로 더 멋진' 것이라면 글쎄.. 이 작품에서 그게 어울렸을까? 지나간 일에 '만약' 이란 없지만 말이다.

 

차 밖으로 뛰쳐나간 상우가 먼저 경훈의 집 앞 계단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 경훈의 차에서 뛰쳐나갈 때 깜빡하고 헤드폰을 놓고 간 까닭이다. 과연 고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겠지만. 헤드폰을 건네주고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드러간 경훈은 밖에서 상우가 두드리는 문소리를 차마 거부하지 못한다. 문을 열고, 상우가 들어온다. 잠시 일몰을 바라보던 상우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경훈을 바라본다. 이 때 카메라는 잠시 누군가의 눈이 된다. 상우의 눈일 것이다. 상우가 서 있는 방향에서 경훈을 훑어본다. 그러나 이 때의 카메라는 허리부터 얼굴을 올려다 보지 않는다. 카메라는 숄더 쇼트로 경훈을 바라본다. 어깨. 그리고 시선을 피하는 얼굴. 끝까지 자신이 선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투. 상우는 그 어깨에 자신의 턱을 괴고 안긴다. 흔히 사랑의 관계에서 어깨에 기대는 것, 그리고 안기는 것이 누군가에게 있어 근심걱정을 덜고 의지하는 느낌이라면 지금이 바로 그럴 것이다. 상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경훈의 바지에다 손을 넣어 그의 성기를 애무한다. <지난 여름, 갑자기> 에서 가장 자극적인 순간은 학생이 선생의 성기를 애무하는 쇼트에서다. 음.. 유일하게.. 3부작 중에서 섹스가 없는 작품이기도 하고. 나름 자랑이라면 자랑이다. 그리고...
 

 

어쨌든 소년은 잘못이 없다. 소년은 저 선생이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끝까지 밀어부쳤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는 미소는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품을 보면 저 소년이 참 나쁜 놈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몸이 이미 이 소년에게 가 있지만 머리 속으로는 끝까지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최면을 거는 이 선생이 소년의 얼굴을 주먹으로 칠 때, 그의 뒤로 공산당원의 그림이 그려진 접시가 보인다. 동성애는 공산당만큼 나쁜 것일까? 작품은 소년에게 그런 악인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미소는 마침내 자신에게 넘어왔고 굴복시켰다는 개인적 만족감에서 지어진 것이 아닐까? 과하게 이분법적으로 남겨놓자면, 그런 '악인처럼 보이는 생각' 이 이성애자들의 인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은 딱히 그런 함의에 관해서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는 동성애자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학생과 선생의 '사랑이야기'를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이 소년에 관해 복합적인 느낌을 남겨놓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몰이 진행되는 중이다. 적당히 아름다워서 좋다. 경훈이 상우의 멱살을 잡을 때, 상우가 또 맞을까봐 두려워서 눈을 내리깔고 오므린 손을 올리는 부분이 좋다. 진실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위험한 건 지금부터다. 이 아청아청한 세상에서 남자 사제지간의 사랑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그들은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의 결말은 어둠이 드리워지는 시점에서 끊긴다. 하지만 금기는 세상의 구성원들이 본인들의 시각에서 만든 것일 뿐, 세상이 만든 것은 아니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 점에서 <지난 여름, 갑자기>는 이 아청아청한 세상에서 '게이 로맨스' 가 아닌 '그냥 로맨스'가 된다. 퇴화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냥 앞의 표현을 지워버렸을 뿐이니까. 어둠이 다가오고, 경계는 사라진다. 위험하지만, 자유롭다. 인상적이다.

 

 

p.s.1 - '아청아청'은 '아청법' 입니다. 교복 취향은 아닙니다만 법 자체는 굉장히 재수없다고 생각하는데, '아청아청'이란 요상한 표현은 어감 자체가 그나마 덜 재수없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p.s.2 - 근데 뭐 딱히 이 작품은 문제가 될 것도 없는 게, 상우를 연기한 한주완 님 나이가 30세거든요. 오히려 서른 살이 뭐 이리 동안이냐고 따져야 할 정도로 교복이 잘 어울립니다.


Pt.2 에서 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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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HD텔레시네) - [할인행사]
이장호 감독, 이보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 전모 (氈帽) : 조선시대 여성들이 나들이 때 쓰던 쓰개의 하나.
  
  


감독: 이장호
주연: 이보희, 안성기, 김명곤, 박원숙, 신충식, 김기주, 문태선, 김성찬, 김하림, 윤순홍, 김형섭, 추석양
음악: 이종구
촬영: 박승배
18세 관람가 / Color / 110분 (극장 개봉판, VHS 출시판), 115분
 
 
....


<어우동>의 도입부는 조선시대 성종 집권기의 어느 칠흑같은 밤이다. 평민들이 일제히 탈을 쓰고 한 판 놀아보자는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개중에는 그 놀자판인 시간을 아껴 숲속에서 마치 짐승이 교미하듯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랑을 나눈 여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기생의 시녀였다. 시녀는 그렇게 자유분방한데, 이 기생은 나름의 품위를 지키겠다는 듯 가만히 있다가 별안간 납치를 당한다. 처음엔 보쌈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다. 납치한 자는 그녀를 범한 뒤에 죽이려 든다. 보통은 이런 죽이겠다는 위협을 들으면 벌벌 떨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별안간 호탕하게 웃어제끼더니 단박에 이 암살자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호통을 쳐서 그를 무릎꿇린다. 그러고는 얘기한다. 계집의 몸이 그깟 칼로 열려질 것 같으냐? 그래. 이제 내가 너를 가지고 놀아주지. 공깃돌 갖고 놀듯이 말이야. 도입부로 따지면 초장부터 세게 나가는 것이 아주 강렬하다. 표현수위로 보나 그 시퀀스 자체가 주는 격렬함은 관람 중인 관객에게도 어떤 본능적인 감정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잠깐 1980년대 초반의 이장호 감독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는 1976년부터 4년동안 대마초 사건 때문에 충무로 바깥에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바람불어 좋은 날>로 1980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대신 그것이 <별들의 고향> 이나 <어제 내린 비> 시절의 '흥행사' 로서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람불어 좋은 날>을 통해 한국영화계에 다시 한 가지 화두를 들고 왔다. 그것은 바로 작가들이 다시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그 점에 관해 나름의 발언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문제다. 누구나 하고 싶어 했던 것, 그러나 호스테스 장르와 문예 장르가 맛보게 해줬던 과육에 취해서, 혹은 남산 밑으로 끌려가 구정물 들이킬까봐 하지 않았던 것. 표현의 자유가 마음대로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몰라 괴로워할 때 이장호 감독은 직구를 날리며 자신의 이름을 화려하게 휘날렸다.

 

그러나 그런 위용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바람불어 좋은 날>은 '서울의 봄', 그리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부터 본편 사전 검열까지 딱 한 부분만 삭제되고 거의 온전하게 보전되어 개봉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감독이 1년 뒤에 바로 차기작으로 내놓고, 3부작으로 만들 생각을 한 <어둠의 자식들>이 문공부에 의해 최종 편집본이 5분 가량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몇십초만 잘려도 바로 티가 나는 영화에서 5분부터는 이미 이야기 자체에 큰 구멍 내는 것을 각오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작품은 해외에 수출되는 것을 금지당했다. 비록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제작환경이 다시 힘들어 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또 문제가 된 것이 이미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정지를 당하기 전에 영화사와 맺어놨던 계약이 하나 있어서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를 동시 촬영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판이한 줄거리를 가진 두 작품을 동시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에서 감독은 자신의 권한을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에게 일임했고, 그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이 시기의 감독은 그랬다. 그나마 흥행과 영화제 수상 부분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둔 <낮은 대로 임하소서>는 별로 특출나지 않은 기독교 관련 작품이었고, <바보선언>이라는 무시무시한 걸작을 만들어 내지만 이 작품도 흥행몰이를 하기 전엔 제대로 개봉조차 하지 못한 채 1년간 영화사 창고에서 썩어야만 했다. 그 사이 만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와 <과부춤>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던 것이다. <어둠의 자식들>에 이어 <바보선언>이 한국영화계에 준 충격은 대단했지만, 80년대 초반기가 끝나갈 때 쯤의 이장호 감독은 더이상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흥행감독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 이장호 감독의 말에 따르면 한 가지 뭔가 계기가 되었을지 모를 만남이 이뤄진다. 바로 자신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 데뷔한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한 시점에서 영화사무실까지 하나 차리게 된다. 그래서 일단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새마을 운동에 관련된 작품인 <잘살아보세>를 만들기로 하고 자신의 촬영팀과 횡계에 있는 한 오징어 불고기 식당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는 마침 배창호 감독의 촬영팀도 자리잡고 있었다. <꼬방동네 사람들>로 혜성같이 등장한 배창호 감독은 당시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만들던 중이었다. 조감독이었던 사람은 지금 자신을 압도하는 신성이 되어있다... 그 때 이장호 감독 본인은 뭔가 다시 시작해서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 얼굴만으로 충분히 야하게 가는 <무릎과 무릎사이> (위의 사진) *


 


그런데 왜 하필 그 의지의 시작이 <무릎과 무릎사이> 였고, 이후에 <어우동>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것도 이장호 감독이? 아무리 방기환 작가의 신문연재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 했다고 할지언정, 이 시절의 관객들은 어쩌면 이장호 감독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을런지도 모르겠다. 당시 섹스를 활용한 작품들에 관해서는 전두환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우민화 정책인 3S 정책에 연관되어 있었단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흥영화사 창립작품으로 만들어진 <무릎과 무릎사이> 는 확실히 이장호 감독이 이전에 이뤄낸 여러 성과를 생각하면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상당히 얄팍하기 그지 없는 작품이었다. 그냥 성적 쾌락을 안겨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싶지 않아서 살짝 반미정서적 테마를 끼워넣은 작품이랄까. 비록 이장호 감독에게는 다시 한 번 흥행감독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해 준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우동>은 앞에 그 작품이 있다는 이유로 도매금 당하기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왜 그러냐 하니, 사실 이 작품은 <과부춤>과 <바보선언>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감독의 마음 속에서 나름의 프로젝트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자체도 좋은 얘기거리가 되겠지만, 원작소설 자체가 글과 삽입된 삽화로 많은 인기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영화화 경쟁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감독은 김원두 사장이 있는 현진영화사와 손을 잡고 작품을 만들어보려 했으나 <일송정 푸른 솔은>의 제작을 먼저 제안받는 바람에 작품은 미뤄져 버렸던 역사가 있었다. 이후에 감독 본인이 이 작품에 관해 어떤 감정을 가졌던 간에 <어우동> 자체는 나름대로 전부터 그에겐 염원이라고 할만한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태흥영화사에서 제작을 맡겠다고 하면서 결국 이뤄지게 된다.

 

 

* 물론 자신의 이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다소 얄팍한 접근법이 필요했던 것 같다. 영화월간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이장호 감독은 <어우동>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태원 사장이 또 하나의 에로물을 원했다' 고 답했다.

 

당시 태흥영화사는 첫 작품으로 당시 임권택 감독의 신작이자 배우 김지미의 복귀작으로 <비구니>를 만들고 있었는데, 불교계가 그 작품 만들지 말라고 거세게 반발하는 바람에 반 이상 찍어놓은 작품 제작을 중단해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 본인도 다시 재활용하고 싶을 정도로 잘 찍힌 전쟁 피난 시퀀스가 있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태흥영화사가 몇 번 이사하는 와중에 원본 필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작품, 제작비적인 면에서 큰 손해를 보고 실의에 빠져 있던 영화사를 다시 살린 또 다른 '첫 작품'이 <무릎과 무릎사이>인 셈이다. 프랑스 낭트 영화제까지 초청되어 톡톡히 재미를 본 이태원 사장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또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장호 감독에게 말했고, 그 때 그가 꺼낸 카드가 바로 <어우동> 이었다. *

 

<어우동>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스승으로 따지면 신상옥 감독이 만든 일련의 조선시대 여성사극들, 동시대의 작품들로 따지면 이전에 나온 이두용 감독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궤를 비슷하게 한다.. 바로 인권이라는 게 없었던 조선시대 여성수난극. 실제 어우동은 현재 가계도는 삭제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단은 승문원 지사 관직에 오른 바 있는 박윤창의 딸이라고 한다. 태어난 지명이 '음성 군 음죽 현' 이라 이미 태생부터 '음풍' 휘날리게 생긴 거 아니냐는 농을 걸어봄직 하겠지만 어우동, 혹은 어을우동 당사자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조신한 처자였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화려한 스캔들의 아이콘이 되던 계기는 전적으로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해 시집간 곳에서 무시를 당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던 것일게다.

 

보통 내가 다니는 대학도서관에는 찾는 책이 어지간하면 다 있고, 방기환 작가의 작품들도 여럿 구비가 되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동명원작은 없었다. 읽어보지 못해서 원작소설에 관해서는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장호 감독의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 어우동이 기녀가 되는 계기를 조금 극적으로 표현한 것을 제외하면, 적어도 그녀의 행적에서만큼은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충실한 편이다. '무늬만 조선시대'를 지향했던 당대의 수많은 토속물들을 생각하면 그 나름대로 들인 정성에서부터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확실한 구별점을 만들어 놓고 있는 셈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서 '칠거지악' 이라는 규율에 얽매인 여성은 얼마나 숨쉬기 힘들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어우동 역시 자신의 남편이자 변태인 태산군과 결혼하여 온갖 곤욕을 치루지만 그것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보희가 연기한 어우동은 결론적으로 강수연이 연기한 옥녀, 원미경이 연기한 길례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이미 역사 속에서 얼굴로 따지면 절세미인의 축에 들고 설정 상 몸 자체가 타고난 명기라고도 하는데 그걸 이용해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선사회에 좌절하지 않고 반항해 보는 것이다. 어우동의 그런 시도는 성공적이다. 그녀는 '꽃이 나비를 따라가나? 나비가 꽃을 따라와야지' 란 말을 가장 잘 실천하고 또 잘 이용하는 여자다. 탐욕스러운 어르신들은 공맹 운운하며 얻은 지식을 자랑할 데가 없어 낑낑대는데, 이 여자가 그걸 다 이해하고 받아주니 서초동 영포 빌딩 밑에 있는 보신탕 집 여주인마냥 매혹적 (이거 칭찬이다. 후에 국가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 바람 쐬러 나가자고 그랬다잖아.)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우동은 보신탕 집 여주인보다 독하다. 자신을 탐하러 온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포로로 만든 다음, 기운을 아주 죄다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취한 남자라고 문신까지 새기게 해서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웬만한 죽음의 위협이 앞에 다가와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어 넘기는 배포까지 있다. 이러니 어우동은 곧 조선시대 '남자양반들' 의 '토미에'로 승화된다. 누구나 절박하게 원하는 여성이지만 동시에 토막살해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어우동>은 역사적 충실함과 더불어 언제나 작품이 동일선상에 놓여지고 비교되던 당대의 '에로' 장르와 구별되는 상업적인 장점들이 있다. 일단 진지한 톤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라 작정하고 웃기려 드는 유머는 없지만 양반, 혹은 절대권력처럼 군림해오는 요소를 전복시키는 통쾌함이 있다. 그리고 여러 애마부인들과 당대의 외국 경쟁자들 정도는 가볍게 쌈 싸먹는 젊은 이보희가 마음껏 자신의 누드를 자랑하며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보희의 매력은 가히 폭발적인데, 그런 그녀를 보호하는 두 명의 남자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도발적인 소재, 섹스, 복수의 롤러코스터가 함께 펼쳐지니 이 점이 상당히 재밌게 다가온다. 보통 한국에서 이런 류의 여성 수난기를 다룬 작품은 언제부터인가 한두가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파격이 시대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더이상 아무것도 없는 내용을 가져다 '예술' 이라고 빙자할 수가 없어 점점 존재가치가 도태되었다. (가령 유진선 감독의 <매춘>은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나영희가 보여주는 그 순간의 열연만이 살아남아 있다.)
 
 


 
<어우동>은 어떤가? 작품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두 명의 남자를 등장시킨다. 한 명은 김명곤이 연기한 천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안성기가 연기한 갈매라는 인물로 작품의 남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두 인물이 가진 특이점은 양반으로 인해 불구의 신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반집 머슴이었던 갈매는 그 집 딸내미를 말 그대로 도와주고 업어줬다는 이유로 몽둥이질을 당하고 음부의 일부가 잘려나간다. 그리고 마침 그것을 지켜보게 된 천가는 이 행위가 누설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혀가 잘린다. 이후, 그들은 어우동에 관해 각자 다른 의뢰를 받으면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일반인을 초월한 육체적 능력을 갖고 있다. 작품은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이 점에 관해서 더 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후천적 불구자들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일반인들을 압도하는 초인적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인물을 보면 이 문제는 곧 어우동에게도 해당된다. 어우동의 아버지로부터 그녀를 즉사시키라는 의뢰를 받은 갈매는 곧 어우동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고, 그녀를 보호하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어떻게 이들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을까? 신체가 불구인 것도 아닌데.

 

그래서 작품은 어우동의 누드를 이용한 쾌락적인 시퀀스를 보여주는 것 사이사이로 그녀의 과거회상을 배치해 놓고, 어떤 지점에서는 잠시 본래 진행되는 이야기보다 아예 여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장 힘을 준 부분은 그녀가 기생의 삶을 살게 되는 순간에서다. 남편의 엽색 행각에 질리고, 시댁의 냉대에 질린 어우동은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온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은 출가외인' 이라는 이유를 들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녀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칠거지악이라는 수난을 공유하고 있는 어머니 뿐이다. 그 어머니마저도 시댁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좌절한 어우동은 자신의 시녀와 함께 끝끝내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먼 길을 방랑한다. 어딜 가도 여성의 삶이 이 따위라면, 차라리 이 세상을 떠버리고 마는 것이 외려 마음고생도 덜고 편하지 않을까. 무언가 결심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쓰던 전모를 벗어던진다.

 

 

이장호 감독의 작품에는 대체적으로 품 속의 이야기 전개에서 어떤 식으로든 여기는 자신이 힘 줘서 구상한 것이라고 웅변하듯 찍어놓은 시퀀스가 한 번씩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게 사실 초창기에는 완성도를 깎아내리는 단점이라고 보고 있는 편인데, 가령 데뷔작인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주인공 경아가 윤일봉이 연기한 준만의 집에 후처로 들어가 생활하는 시퀀스가 있다. 경아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고독하게 그 집에서 정신적으로 병들어가는 준만을 위로하지만, 곧 그녀가 중절을 했고 상상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준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변명 삼아 경아를 떠나버린다. 고독해지고 동시에 비정해져 가는 현대인을 묘사하기 위해 작품이 배치한 중요한 한 방이기에 신성일이 등장하는 시퀀스 만큼이나 비중있게 묘사되는데, 이상하게 이들이 등장하는 시퀀스의 장면 연출이 슬픈 로맨스를 다루는 작품을 난데없는 심리 호러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는 두번째 작품인 <어제 내린 비> 에서도 비슷한데, 동생의 애인을 사랑한 형의 트라우마를 호러 분위기로 둔갑시켰던 것이 그랬다. 이장호 감독은 새로운 곳으로 튀고 싶은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본인 나름대로는 뭔가 세련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사실 그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 점은 배창호 감독이 더 안정적이었다고 본다.

 

 

 

어쨌든 이 부분들이 다소 안정적으로 안착했다고 보여졌던 건 당연히 <바람불어 좋은 날> 부터였다. 이 작품은 이미 리뷰를 했으니 보면 알겠지만 세 젊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퀀스 대신 이향이 연기한 노인의 이야기가 마침내 서술되는 지점이 정말 강렬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과부춤>에서 만삭의 여인이 방을 박차고 뛰어나올 때의 슬로우 모션이라든가, 필히 봐야 할 걸작인 <바보선언> 에서 등장하는 이보희의 장례식 같은 시퀀스는 화려하게 복귀한 이장호 감독을 단순한 흥행사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핵심적인 '한 방'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어우동>은 위의 시퀀스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보희가 절망적인 심정의 뒷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앉아서 흰 천을 휘날리며 살풀이를 하는 부분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장면은 어우동이 새처럼 날아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자살을 위해 강으로 뛰어들며 비통함을 최대치로 끌어낸 채로 끝이 난다. 이것도 그냥 그저 그런 신파일까. 어찌됐건 관객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게 목적이라는 점에서 부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강요가 아닌 영상언어를 통해 설득을 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이후, 강물에 빠진 어우동은 기생들의 맏언니 격인 향지에게 구출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그녀는 후세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간다.

 

 

사실 이장호 감독의 영상감각은 정갈하지는 않더라도 대담한 맛이 분명히 있다. 가령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 작품의 무시무시한 결말을 다소 진부하게 만들었던 것이 함께 등장했던 자막이었다. 등장하는 방법도 그렇거니와, 거기서 서술되는 자막의 내용도 옥녀를 포함한 씨받이들의 비참한 삶과 그 악습을 특색없이 비판하는 수준 정도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 에도 배경이 되는 성종시대에 관해 서술되는 자막들이 몇 번씩 사용되곤 하는데, <씨받이> 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건 그 자막이 서술될 때 등장하는 다이나믹한 효과에서다. 그래도 엄연한 사극인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자막의 등장이 자칫 이 장르의 격을 떨어뜨리는 거 아닐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는 어울리고, 작품에 관해 따분할지도 모른다는 첫 인상을 말끔하게 지워버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위에서 이야기한 어우동의 자살 시도 시퀀스를 제외하면 그런 연출에서 이장호 감독의 고질적인 단점이 많이 드러나 있는 편이다. 초기 시절처럼 장르를 구분 못하는 건 아닌데, 작품이 담고 있는 함의를 어떻게든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이 많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상으로 멋지게 승화되면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칠거지악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악습이나, 참고만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심정을 웅변하듯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애쓰는 부분들이 많아서 과하게 친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많이 얘기해주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흥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법. 그래서 이보희가 카메라 렌즈 가까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관객을 쳐다보며 춤을 추는 매혹적인 시퀀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의심을 안겨준다. 왜 저렇게 애써 설명해 주려고 안달이지? '벗는 영화가 아니다' 라는 걸 그렇게 필사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안 그래도 노출이 포화 상태에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그래서 주제의식을 굳이 직접적으로 웅변하려 애쓴 것이 오히려 이 작품을 야한 작품으로만 기억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지간히 자격지심 있는가 보구나 싶은게다.
 
 


 
* 그 외 지나치게 과잉으로 밀어부치는 경우. 어우동이 자신의 정력을 자랑하듯 남정네들을 그로기로 몰고 가는 이 부분에서 작품은 이보희의 얼굴과 그녀가 펼치는 화려한 진기명기를 겹쳐놓는다. 여기서 이보희는 쉴새없이 웃고 있다. 지금 감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보희 누님 쉬지도 않고 웃으시니 턱 아프시겠다.' 정도다. *

 

그 점에 관해 한 마디 하자면, 작품은 어우동이란 인물을 단면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어우동의 이미지 때문에 올 초에도 흑요석이란 예명을 쓰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모바일 게임인 <밀리언 아서> 에 어우동 일러스트를 그려 넣었다가 네티즌들에 의해 '어우동이라 싫다', '기생년을 왜 쓰냐' 는 등의 괴이한 비난에 시달린 일명 '어우동 사태'가 일어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의 그녀는 스캔들메이커이자 동시에 가무와 시문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개밥그릇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양반이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학식의 깊이가 있는 법이라, 그들을 매혹시키는 기생이라면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교양을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어우동은 당대에 그 스캔들이 부각되어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순 없지만 시화집인 <송계만록>에 남겨져 있는 '부여회고' 같은 자작시를 보면 웬만한 양반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작품은 재미와의 절충점을 찾기 위해 어우동의 이런 교양을 선보일 수 있는 시퀀스를 남자들을 애타게 만드는 대화로 처리하는 재치를 보인다. 소설의 문장들을 빌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순순히 허락하지 않고 고상하게 남자들을 갖고 노는 작품 속 어우동의 대사는 그 절묘함에 무릎을 치게 만든다. 가령 작품이 시작된지 32분 정도가 지난 뒤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들이 그렇다.
 
"내가 왔네. 나비가 왔네."
"그 나비, 꿀을 딸 줄이나 아실런지?"
"부리 없는 나비 봤나?"
"나비도 나비 나름!"
"허허. 찔려보면 알 일."
"매가 꿩을 쫓듯, 순서가 있는 법."

 

이후에 합환주를 먹여주는 척 하면서 이 남자를 협박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들 때, "안주가 필요한 건 나으리만이 아니었습니다요." 라고 존대를 쓰다 "큰 소리? 이봐!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그리 쉽게 벗어날 줄 알았나?" 라고 바로 반말로 전환하여 순간의 카리스마를 뿜어내 상대의 기를 눌러버리는 타이밍, 그리고 "어떤가? 자네가 내 말을 거역해 볼 용기가 있는가? 어서 이리 와 엎드려!" 라고 말하면서 그를 굴종시키며 마무리 하는 대화 시퀀스는 참으로 강렬하고 또 유려하다. 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았던 시기였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그녀의 모습이 이후의 전개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반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후반부에서 평민으로 변장하고 자신을 만나러 온 성종을 무릎 꿇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전개는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초래하고 어우동, 갈매, 천가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다. 뭐,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어우동의 입장에서는 별 상관 없었겠지만 그녀도 힘들었을 것이다.

 

 

* 그 당시나 현재의 관객들이 볼 수 없는 시퀀스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어우동과 성종의 섹스 장면이다. (절대 '성종과 어우동'이 아니다!) 이게 얘기 들은 바로는 처음 개봉할 때는 있었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이 장면과 관련해서 감사원에 투서를 넣었다고 한다. 성종이 어우동에게 놀아나는 부분은 당대의 권력자, 즉 전두환 군사정권을 조롱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GV를 진행할 때 그 부분에 관해서는 본인은 별 의도가 없었는데 부풀려진 것이라 답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말을 했다.

 

"만약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그건 제 의도가 아니라 어우동의 의도겠지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웃긴 것이 당시 군사정권은 자기들을 '왕'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딱히 그렇게 생각해주고 싶지도 않은데 지들 혼자 헛물 켰던 것 같아서 이게 또 우습다.  어쨌든 태흥영화사와 스펙트럼 측에서 후에 HD 텔레시네가 된 <어우동> DVD를 발매하기 위해서 삭제 장면이 있는지 찾아본 것 같은데, 끝끝내 그 삭제된 부분은 찾지 못했다. *


갈매는 이런 상황을 보고 그녀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임을 깨닫는다. 사랑 받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처럼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협을 받는 존재. 심지어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존재. 두 사람은 웬만한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래도 상대방 측에서 인해전술로 승부하면 아무래도 당해내기 버겁기 마련이다. 결국 이들은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애초에 이장호 감독 본인도 별로 의도한 것 같지도 않으니 뭔가 더 깊게 파고들 의욕도 없다만, <어우동>에서의 시대비판적 연출은 되려 자기는 이 정도 했다고 떠벌려서 인정받고 싶은 관심병 종자같은 면이 있어 그리 흥미롭지 않다. 작품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시대를 말하고자 하든, 장르적인 재미를 주고자 하든 간에 일단 '캐릭터'를 통해서 펼쳐질 때다. 사실 이 작품은 굳이 그렇게 입으로 불평등, 여성수난사 등을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다. 캐릭터들의 필터를 통과하는 순간, 이미 다 납득이 되는 연출력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역시 마무리를 섹스 장면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여기가 아주 가슴에 사무치게 슬프다. 아. 맞다. 깜빡했네. 위에서 어우동이 양반들에게 문신을 새겼다는 이야기를 썼었는데, 사실 이것이 이장호 감독의 작품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감독이 이 디테일을 역전시켜서 딱 한 번 활용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는 남자들의 몸에 직접 문신을 새기던 어우동은 이 작품에선 본인이 남자의 손에 의해 문신이 새겨지기를 자청한다. 그 문신을 새겨주는 사람은 바로 갈매다. 그는 뭘 새기고 있을까. 飛. 날 비. 갈매는 어우동과 함께 '날고 싶어한다'. 아마 신상옥 감독의 <내시>와 더불어 한국영화 사상 가장 슬픈 섹스 장면이 아닐까. 시대에 의해 인생이 뒤바뀐 여자와 성불구자가 된 남자는 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가며 되지도 않을 섹스에 몰입한다. 그런데 이게 몰입이 되냔 말이다. 안 될 것이 뻔한데! 그들은 불평등한 시대에 당하고, 또 이룰 수 없는 설움을 그렇게나마 분출한다. 조선 왕조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의 열망은 이뤄질 수가 없다. 그래서 날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가 멸망하는 길을 택한다.
 
<어우동>은 사실 캐릭터를 봐야 얘기거리와 가치가 많아지는 작품이다. 섹스도 몸을 통해 하는 것이고, 그 몸이란 결국 인물로서 귀결되는 법이다. 감독은 이 작품의 재평가를 요구할 때 꼭 의상 부분을 거론하곤 했다. 실제로도 <어우동>에서의 복식 고증은 이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던 요소이기도 하다. 박물관에 가서 조사도 하고, 실제 고증을 꼼꼼하게 거쳤으며 작품을 수놓는 화려한 원색의 향연은 사극 장르의 어떤 부분들에 한해선 새로 정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복식과 더불어 그것을 착용하는 인물이 있어야 배경이 되는 시대의 양면을 완전히 알 수 있는 법이다. 적어도 이 작품은 그렇다. 물론 <씨받이>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결말처리도 만만찮게 강렬하다. 그리고 어쩌면 담고 있는 함의나 감독 본인의 고민의 흔적이 더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어우동>을 그 작품들보다 하대 한다는 건 조금 부당하다. 인물을 보면 어우동의 행각들은 마치 바뀔 수 없는 시대에 절망해서 자신을 함부로 대하며 망가져가는 여인의 이야기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엔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주려고 하는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장르적 재미에 안착하려는 욕망도 만만찮게 대단한 작품이지만, 나름대로 냉혹한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각을 크게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실상 흥행 외적인 면에서 다시 한 번 거론되어져야만 한다. 진지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져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올시다 라고 답하겠지만, (그런 거 없어! 내가 볼 때는!) 나름대로의 확연한 개성을 가진 여성 드라마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그 시대에 가장 잘 나갔던 섹스 영화' 라고 규정되기엔 다소 억울하다. 그런 왕좌는 <무릎과 무릎사이>가 차지해도 될 일이고, 아님 <애마부인> 시리즈가 가져가야 마땅할테니 말이다. 어찌됐던 이장호 감독은 1987년까지 나름의 걸작을 만들어내는 영화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이 작품 덕이다.
 

 
p.s.1 - DVD의 서플먼트로 수록된 극장 예고편이 나름 특별합니다. 당시 작품 촬영을 위해 감독과 출연진, 제작진들이 모두 모여 준비를 하는 모습을 찍어놨었거든요. 임권택 감독님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극장 예고편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 졌는데, <어우동>의 예고편은 그런 촬영 준비 모습과 더불어 본편에서 빠진 시퀀스가 등장하기도 하는 등 예고편 자체가 재밌게 만들어져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 작품들의 예고편이 이런 독특한 맛이 있는데 <바보선언>이야 본편 만큼 포스 있고, <무릎과 무릎사이> 예고편 에는 안성기 님과 이보희 님이 쉴새없이 끈적한 목소리로 '무릎과..무릎사이'를 후크송처럼 주구장창 읊었죠. 사이사이에 '만져보고 싶어요..', '무릎의 향기..욕망..', '갖고 싶어요..' 같은 표현들을 끼워 넣음으로서 당시 관객들에게 제대로 mind-fuck 을 먹여줬었습니다. 지금 들으면 많이 웃기죠. 기분 우울할 때마다 한 번씩 보고 빵빵 터지는 <코만도> 국내 예고편의 포스만큼은 못 미치지만 말예요.
 
<어우동>의 극장 예고편은 위의 저런 요소들 외에 연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감독님과 배우 분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오디오 인터뷰가 섞여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압권은 안성기 님의 당시 목소리였지요. "..으하하하. 이장호 감독.. 그 사람 참 요새,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에 만드는 게 그렇게 막 노출되고.."

 

 

p.s.2 - 이건 확인되지 않고 그냥 들은 이야기 입니다만 이 작품이 일본에 소개될 때는 'AV 물' 카테고리에 배치되어 있었다더군요. 확실히, 표현수위가 지금 봐도 나름 강렬하긴 합니다.

 

p.s.3 - <백년의 유산> 이라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요즘 아침 드라마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시어머니를 연기하는 배우 분이 이 작품에선 너무나 인자한 기생들의 맏언니를 맡고 있어 참 놀랍다 싶기도 합니다. 원래 이런 역할도 잘 하는 배우 분이긴 합니다만, 그 드라마 즐겨 보시는 분들은 <어우동> 에서 향지를 연기한 '박원숙' 님은 적응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p.s.4 - 개인적으로 이장호 감독님에 관한 인터뷰를 찾아보면서 참 싫었던 것은, <어우동>에 관한 이 분의 모호한 입장입니다. <월간조선> 2011년 1월호에서의 인터뷰를 보고 있으면 이 작품에 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정확히 내 영화를 집어낸 사람은 없어요. 예를 들면 <어우동>, <무릎과 무릎사이>에 대해서는 평 자체를 못 받았어요. 마치 에로물처럼 취급하더군요..', <키노>에서 이뤄진 97년경의 인터뷰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하던데, 2012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 개최로 인터뷰를 가졌을 때는 이 작품에 관해서 그냥 '<어우동>을 만들 때는 정말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돈 독이 올랐었지.' 라고 얘기하며 이 작품을 '그냥 에로영화'로 규정해 버립니다.
 
이게 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힘이 빠져요. 싫으면 싫다고 얘길 하든가, 이거도 아니고 저거도 아니고.. 자신의 작품을 집어낸 사람이 없다고 그래놓고 인터뷰만 보고 있으면 감독님 본인이 본인 작품을 집어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러길 포기한 것 같아서 말이죠. 재평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 만든 그냥 에로영화' 라고 별 거 아닌 것처럼 얘기해 버리면 어떡하냐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언론플레이 잘 하는 것 같아서 '이장호 감독님 답다' 싶습니다만. 뭐, 굳이 감독 생각이 어쨌든 간에 제가 보고 좋으면 될 일이지만 그 작품 만든 사람까지 직접 나서서 별 거 아닌 것처럼 얘기해 버리면 그게 그렇게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드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아요.
 
p.s.5 - 이장호 감독님은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두 기생 중 한 명인 어우동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감독님의 제자이자 그와 함께 8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가도를 이끌었던 배창호 감독님도 또 다른 기생 한 사람을 다루게 됩니다.
 
 

Pt.2 에서 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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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체적으로 설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시고 극장 가셔도 괜찮을 거에요.
사실 소설이 있으니까 스포일러니 하기도 그렇긴 하지만. *
 
감독: 임순례
주연: 김윤석, 오연수, 백승환, 한예리, 박사랑, 김태훈, 송삼동, 주진모, 정문성, 이도경, 김성균
음악: 장영규, 달파란
촬영: 조용규
15세 관람가 / Color / 121분
 
(2013, 2, 14)


.....

 

 

고지서에 부과된 납부금을 징글징글하게 안 내고 버티는 찻집이 하나 있다. 정확히는 집과 찻집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이지만. 이미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아는 듯 하지만 어쨌든 납부금 받으러 온 공무원은 찻집 아들인 나라에게 아버지가 어디 가셨는지를 물어본다. 아들은 마치 외운 듯이 척척  "저희 아버지는 멀리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무슨 남쪽 섬이랍니다. 바닷가 언덕바지에 집을 짓고 밭을 일궈 수확의 계절이 될 때 쯤에 가족을 데리러 온다고 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작품은 최나라 역을 맡은 아역 배우인 백승환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에 나오는 문장을 거의 그대로 말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라의 표정이다. 마치 앵무새처럼 그대로 외우듯 말하면서 이젠 더 얘기하기도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은 시각적인 면에서 더 자세해질 수 있는 영화 매체의 장점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잠시 원작과 궤를 같이 하면서 유쾌하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유쾌함의 근원은 다름아닌 '범상하지 않은 것' 이다. 공무원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최나라의 아버지, 최해갑은 해경에 의해 바다 한가운데 어선 위에서 발견된다.

 

나는 일본문학과 어느 정도 맞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고전이나 근대문학은 아닌데 현대문학에 와서 그런 느낌이 잘 드는 편이다. 애초부터 어떤 문학을 취향이라 정하고 그것만 파고 드는 건 아니긴 하나 여튼 그렇다는 얘기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 표현하기가 애매하지만, 소설의 이야기보다는 가끔씩 작가 본인의 문화적 취향과 지식을 자랑하려고 드는 것 같은 게 문학을 읽는다는 생각을 방해하게 만드는 것 같다. 뭐,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품의 이야기보다는 그 작가의 실제 문화생활에서의 스타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야기나 주변인물에 대한 묘사보다는 그들이 뭘 마시거나 뭘 듣고 있는지를 신경 쓰는 듯 하는 것. 그 외에 문체의 표현도 있을 것이다. 근데 사실 이건 언제부터인가 현대에 출간되는 문학을 읽으면서 느꼈던 문제란 생각도 들고.. 하여간 이상하게 영화를 볼 때는 그런 거부감이 덜한데, 지금 가벼운 커버 디자인으로 출판되고 있는 일본문학들은 쉽사리 읽지를 못하겠다. 오히려 난 그 작가들이 소설보다 에세이를 발표한다면, 그걸 그나마 좋아하고 즐겨 읽는 편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내겐 오쿠다 히데오가 쓴 원작소설마저도 역시나 취향과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즐겁게 읽혀지지는 않았다. 아마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을 알게 되지 않았다면 평생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런 취향의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원작소설에는 분명 여러가지 면에서 독자를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임순례 감독의 영화화된 버전에서 아쉬움처럼 다가온다.
 
 


 
<남쪽으로 튀어>는 이런 이야기다. 최해갑과 안봉희라는 남녀가 있다.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둔 이 부부는 과거에 학생 +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에 섰던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중 특유의 행동력을 가지며 '봉 다르크'라는 별명으로 경찰과 검찰들에게 악명높았던 안봉희는 최해갑의 팬이라며 자청할 정도로 자신의 남편을 사랑한다. (이는 6~70년대에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시기에 몸을 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오는 원작소설을 한국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리고 남편인 최해갑은 운동권에서 물러난 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급진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공안들이 파견되어 감시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뻔히 다 들키는데도 불구하고 이 공안들은 자신들이 정말 잘 감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런 삶을 사는 가족의 집이니 세상 사는 게 편할리 없다. 그러던 중 해갑의 고향 후배인 만덕이 잠시 머물게 되고, 만덕을 통해 김하수라는 이름의 국회의원의 지원을 받는 건설사가 '들섬'을 재개발 하려 든다는 말을 듣게 된다. 옛부터 계속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고 만덕과 해갑의 고향이기도 한데 어느새 보니 그것이 '국유지'가 되어 있었고 건설사가 아무 제한 없이 개발권을 가지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만덕은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두르고 김하수의 집에 쳐들어 갔다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집에 차압딱지가 붙은 것을 본 해갑 가족은 만덕의 집이 있는 들섬으로 이사를 간다. 국민연금이라는 삥을 뜯길 필요도 없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공안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삶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찾아낸 것이다. (포스터에는 만덕을 연기한 김성균이 배낭을 메고 해갑 가족과 함께 해맑게 웃고 있지만, 그의 등장분량은 사실 적다. 잡혀가니까!) 그리고 들섬에서 생활할 때 김하수의 무리들이 찾아온다.
 
작품을 볼 때 새삼 감탄했던 것은 오쿠다 히데오의 원작소설이 정말 자국의 사회적 사건, 역사, 정서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차용하기 때문에 영화화가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걸 한국식으로 무겁지 않게 잘 각색했다. 원작에서는 프리랜서 작가였던 아버지는 영화화된 작품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첫째 딸인 민주의 이야기가 원작에 비하면 대폭 늘어난 편이다. 이 두 사람의 설정 변화, 그리고 이야기의 비중은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가 한국사회에 관해 뭔가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 줬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인 민주는 인문 대학을 포기하고 의상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교 담임 선생 한 명이 민주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이게 예나 지금이나 아청아청한 상황이기 때문에 자주 찾아는 가되, 보호자와 교육자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문제는 일과 사랑 모두에 충실하고 싶은 민주는 한국사회에서 낙오자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점이다. 담임선생이 아끼는 제자가 학교를 그만두니 걱정이 안 되는 교사가 어딨겠냐고 말하자, 민주는 기분 좋은 듯 하지만 동시에 그 오지랖이 지긋지긋 하다는 듯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민주는 과제에 몰두하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다. 아무 문제도 없고, 모든 것이 정상인 성인이다. 그러나 사회가 보기에 민주는 비정상이다. 대학을 거부하고 고등학생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꿈을 이룰 수 있는 문들은 모두 냉랭하게 문을 닫아버린다. 잠깐 등장하지만 민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해갑의 감독활동의 경우, 임순례 감독과 작품은 이마리오 감독이 2002년에 만든 다큐멘터리인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를 해갑의 감독작품이라고 칭한다. 나 같은 경우, 그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당시에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뛰쳐나올 방법을 강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학교와 입시학원에 '당연한 듯 속해있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학교 바깥에서 이런 운동이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손지문을 개인정보화 하여 보관하는 주민등록증을 부러뜨려 버리라는 것인데, 실제로 2008년에 UN에서 한국 인권 상황 정기 검토가 이뤄졌을 때 주민등록증을 본 외국 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경악했었다는 명숙 상임활동가의 증언이 있다. 최해갑 감독은 이 작품으로 인해 팬클럽까지 형성됐으며, 팬들은 그를 '최 게바라' 라고 부르며 그의 인간됨과 작품활동을 칭송한다. 그리고 민주의 담임선생도 최해갑 감독의 작품 상영회에 참석했다가 그의 팬이 되어버린다. 작품은 두 인물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그 상황에 관계된 인물을 연계시키면서 점점 조그마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이후에 다시 섬에서 만나 나름의 생활방식을 찾아서 살아갈 때, 기묘한 감동마저 든다. 아.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면서.
 


 

사실 세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별 거 없다. 상영되고 있는 극장 좌석은 반의 반도 차지 않았으며, 진정 민주주의 사회라면 여러 의견들이 용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해갑 감독의 세상은 두 공안에 의해 국정원 쪽에 언제나 동태가 보고된다. 국장은 두 공안에게 이야기한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잘 하라고. 한국은 지독한 '자본주의' 다. 돈이 권력과 자유를 준다. 돈으로 학력을 사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비리를 통해 돈을 착복하고 사람을 지배할 권리를 획득한다. 감시 당하는 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살던 최해갑은 조그맣지만 통쾌한 복수를 한다. 최해갑을 따라붙던 두 공안이 그가 방향을 돌려 다시 오자 딴청 피우다가 의도치 않게 그에게 사인을 받는 시퀀스가 있다.

 

사인 해 주고 기분 좋아진 최해갑은 그들에게 "사인 받았으니 이제 주민등록증 찢어. 내 팬들은 다 찢었어." 라고 그들에게 종용한다. 그리고 공안들은 들키면 안 되니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정말 자신들의 주민등록증을 부러뜨려서 한강다리 밑으로 던져버린다. 선배들은 나름 머리 잘 굴리는데 현실의 후배 되는 애들은 어떻게 된 게 시민단체 간부 미행하다 들키기나 하고, 오피스텔 방문 잠그고 부모와 오빠를 불러달라 했을까? 당연히 <남쪽으로 튀어>가 촬영됐던 기간을 생각하면 염두해 뒀던 풍자는 아니겠지만, 작품이 한국사회의 정서를 그만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함의를 예언했다고 생각해도 별로 위화감이 없다. 난 <남쪽으로 튀어> 에서 최해갑의 작품 상영회와 주민등록증을 부러뜨려 버리는 것까지의 시퀀스를 작품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또 가장 웃기기도 하다.
 
그 외에도 작품은 이야기 자체를 무겁게 만들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도입부의 스코어 음악이 브라스 섹션이 강조되어 빠르고 흥겹게 흘러가지만 그 순간만 지나면 음악이고 카메라워크고 다들 잔잔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어떤 소재와 함의를 다루든 간에 이것을 잔잔한 유머가 있는 드라마로 봐 주길 원하는 작품의 의도 같은데, 들섬에서의 이야기는 마치 일본에서 TV 드라마, 토크쇼, 영화 등으로 이어졌던 '슬로우 라이프 연작' 을 연상케한다. 모두가 어떻게든 빠르게 작품을 이어가려 할 때, 임순례 감독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보는 것처럼 자신만의 영화적인 속도를 고수한다. 물론 원작이 두 권으로 이뤄진 장편소설 임을 생각하면 대량의 인물정리를 거치고 거의 원작의 뼈대만을 남겨놓는 수준의 각색을 한 셈이니 꽤나 컴팩트한 셈인데, 꼭 급박한 리듬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느긋한 정서를 가지고 진행시키는 것이 임순례 감독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예전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볼 때 너무 과잉된 감성을 보는 것 같아 생겼던 불만 때문에 더 좋게 느껴진다. 물론 관객들의 마음을 더 잡아 끌어보려면 그 리듬을 따랐어야 했는지에 관한 의문이 들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다는 이야기다. <남쪽으로 튀어>는 최해갑이 김하수에게 권총을 겨누는 순간에도, 강만덕이 김하수의 집에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쫓아 들어가는 와중에도 사실 무심하고 느긋하다. 물론 스코어 음악과 촬영 기법이 나름 긴박한 정서를 보여주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영화적 처리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담은 시퀀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2시간 1분짜리 작품인데 내겐 30분 정도 더 긴 작품처럼 느껴진다. 아. 이건 비판이 아니다. 감독들의 입장에선 사실 2시간 이내로 이야기를 끊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하지만 대부분은 그 정도 되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쳐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최소한 원래 의도했던 작품의 속도와 리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정서가 이 작품에 잘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극장에서 작품을 보는 내내 적어도 그 속도감에 관해서는 참 편안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단점은 다른 곳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작을 먼저 읽는 바람에 생긴 것이다. 1권에서 일본현대사의 역사적인 투쟁들이 조금씩 인용될 때, 나는 원작에서 '역사'란 그저 대사를 좀 더 찰지게 만들기 위해 표면적으로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권을 읽을 때 조금 기이했다. 임순례 감독의 작품에서는 '들섬' (실제로 이 들섬이란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가상의 공간이겠지? 실제 촬영지는 대모도였다.) 이지만 원작에서는 주인공 가족이 오키나와로 이사를 간다. 참고로 오키나와는 예전부터 일본에 속해있던 땅이 아니라 '류쿠 왕국' 이라는 독립된 국가였다. 독립 국가였다가 16세기 경부터 슬슬 일본에게 식민지 화가 되었던 곳인데, 아이들이 도쿄와는 너무나 다른 오키나와의 환경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작품이 한 페이지 당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인물을 대사를 통해서 오키나와의 역사를 설명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장편이 된 이유는 이런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후로는 역사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지만, 그래도 오키나와에서의 생활상이 꽤나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원작소설은, 그러니까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태도를 잊지 않고 있다. 어떠한 왜곡이나 미화도 없이, 이 땅이 처음부터 일본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정확히 짚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역사는 동시에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식민 침략의 역사' 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건 간에 자기가 사는 국가의 침략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원작소설에서 압도당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있었던 일을 있었다고 말하는 태도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치사회적 관점의 차이를 가진 사람, 혹은 그것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한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 후자는 특히 위험하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할 족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 나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런 확고한 관점과 태도에 감동받자 곧 이 작품이 과할 정도로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이 역동적이려 드는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가령 원작 소설 2권 107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런 표현들.

 

'...모모코가 눈을 치켜뜨고 지로를 흘겨보며 "오빠가 빨리 엄마한테 말 좀 해!" 라고 비난하듯이 말했다. / 지로는 별 말 없이 모모코의 뺨을 꼬집었다. 모모코도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발차기를 먹였다. 집에 돌아올 때는 각자의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페인트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현대문학에서 이런 '발차기를 먹였다' 류의 표현이라든지, 뭔가 격앙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듯이 남발하는 느낌표 사용 같은 걸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원작소설에서 사용하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봤자 그게 고쳐질 것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표현들의 이용에 관해서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격앙은 '선동'이 아니라 할 말을 하지 않고 이득을 보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난 지금도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더 잘 살거다. 씨발놈들아! ...같은 그런 격앙된 선언과 흥 말이다. 우리가 이기려면 더 신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더 오래 살지.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확고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 여러모로 힘들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 이나 <오래된 정원>,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 조근현 감독의 <26년> 같은 작품들에 관한 평가를 생각해보라. 영화에 관한 논의보다도 더 많이 이뤄졌던 것이 이것이 과연 정치적 선동인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사실 논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좀 민망할 정도로 어느 누군가를 아이돌처럼 숭배하는 사생 팬들이 몰려와서 욕 해대는 그런 풍경이었지만 말이다. 개중에는 잘 만들어진 작품도 있고, 영화적으로 볼 때 부족한 면이 많은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이 적어도 용감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논란이 많은 소재 속에서 자신의 생각은 이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그 부분이 좀 약하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초반부에 최해갑의 가족을 공안들이 보고하는 과정에서 공안국장이 '빨갱이' 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인해서 나름의 승부수를 띄운다. 국민연금 거부만 해도 충분히 대단하다 싶은데 빨갱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 한국에서 이 단어는 과학마저도 마비 상태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빨갱이란 표현을 쓰는 공안국장을 앞, 뒤 꽉꽉 막힌 인간형으로 설정하고 일종의 유머 장치로서 활용한 것은 이 작품이 그 단어를 활용하는 자들을 언제든지 풍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버전은 소설처럼 조그맣지만 한 방에 뭔가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듯한 힘이 많이 부족하다. 한국식으로 잘 각색하고, 또 유쾌한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의 자격을 누구에게 줬는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봤다. 영화 버전에서는 아버지인 최해갑이 주인공이지만, 원작소설은 둘째이자 아들인 지로 (영화에서는 나라) 의 시선으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됐다. 1권은 도쿄에서의 이야기가 주된 것이며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겪는 성적 호기심, 그리고 학교폭력에 맞서는 지로의 이야기 속에 부모의 이야기가 조금씩 겹쳐졌다. 아버지야 하도 유명하니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도 투쟁과 관련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던 지로는 폭력과 맞서던 중 사실을 알게 되고 주변의 자료를 모아 어머니의 과거를 조사한다. 원작소설은 한 청소년에게 부모의 과거를 찾아가는 설정을 만듦으로서 일본 현대사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지로가 마주하는 어머니의 과거는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 그리고 어머니가 반대 투쟁을 하면서 사람을 찌른 적이 있었다는 '현실'이자 '역사' 다. 이후, 지로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투쟁에 참가한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곧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 하지만 2권 끄트머리에 가서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원작소설 속 부모의 과거는 곧 일본 현대 학생운동과 투쟁의 역사 한 토막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 역사를 아이들의 말을 통해 풀어가는 것은 완화된 느낌으로 볼 수 있고, 상당히 영리하기도 하다. 그것이 설교가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으로 해석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부감이 덜하다. 그리고 이 때 오쿠다 히데오는 독자에게 물어본다. 어떤 의의는 제쳐두고, 그 시대의 그들의 대항 방식이 마냥 옳다고만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그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눈으로 지나간 역사를 평가하기 때문에 원작 소설에서 2권 후반부, 그러니까 전체 책 페이지 중 본편이 310 페이지에서 끝이 나는데, 거기서 245~246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을 제공한다. 이 대사는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적을 때 자주 인용할 정도로 인기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허공을 바라보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지로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아버지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아버지가 자신을 비웃듯 입 끝을 치켜올렸다.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지로는 놀랐다. 누나도 의외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이야기 상으로 후반부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원작소설과 달리 임순례 감독의 작품에서는 이 대사가 중반부에 돌입할 때, 그러니까 들섬으로 떠나기 직전에 집에 있는 짐을 꾸리면서 나라를 향한 해갑의 대사로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한 발 앞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사가 영화에서는 힘을 잃는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김윤석이라는 배우가 이런 대사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불만족스러운 면이 있었다. 사실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작품 촬영 도중의 유명한 불화사건 때문은 아니다. 임순례 감독과 제작사, 김윤석은 나름의 합의를 본 듯 더이상은 그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고 있고, <씨네 21>의 김도훈 기자가 트위터에 이와 관련한 글을 남겼다고는 하는데 내가 그걸 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가 나올 당시에도 따로 확인을 하지 않았다. 얘기를 들었다든, 증언이 있다든 말은 많지만 적어도 내가 본 것은 '설'이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내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함부로 말 할 수 없으니까.
 
나는 소설처럼 이야기의 중심을 김윤석 대신 나라 역을 맡은 백승환에게 줬으면 작품이 더 나아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위의 이유 때문은 아니다. 작품은 예의의 차원인지 원작소설의 대사를 몇몇 시퀀스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와 삽입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본문학 식 대사가 김윤석이라는 배우에게 유독 잘 체화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본적인 정서를 최대한 걷어내고, 한국의 정서로 어색하지 않게 바꾼 흔적은 역력하지만 소설을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대사만 들어도 '일본스럽다' 라는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 것이 있다. 가령, 나라가 불량학생들에게 두들겨 맞고 돌아왔을 때 해갑은 아들에게 막걸리 한 잔 먹어보라고 무심하면서도 능청스레 말을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해갑은 곧바로 "싸울지 도망칠지, 네 뱃심을 딱 정해." 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사는 원작소설에도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은 아마 소설의 영화화를 이야기할 때 당연히 하게 되는 비교와 느끼게 되는 괴리감일 수 있다.
 
 


* 근데 위의 시퀀스가 있었나? 이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밑에 나라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건 기억이 나는데... *

 


그러나 내겐 김윤석이란 배우가 유독 이런 식의 대사를 소화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해당 국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어투가 문화적으로 약간의 괴리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김윤석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얘기다. 가령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에서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때 옆에 있었던게 도둑이야.' 란 멋이 철철 넘치는 대사를 하지만, 난 그의 입술과 이빨과 혀가 위의 대사보다는 '구라치다 걸리면 피 보는 거 안 배웠냐?' 라든가, '구남아, 니 한국 가 사람 하나 죽이고 오라.' 같은 대사를 할 때 더 자유롭게 놀려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센 느낌의 역할이 더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대사의 체화력이 그렇게 유연하지가 않다.
 
그는 오쿠다 히데오와 임순례의 자장 안에 완벽하게 들어와 있다기 보다는, 여전히 오함마질을 하거나 4885 가진 번호판 찾다가 막 옷 갈아입고 간신히 이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다. 전의 대사는 어울리는데 후의 대사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활어처럼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그가 굉장히 경직된 느낌의 대사를 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특별출연한 박원상도 비슷하다. 건설회사의 변호사로 나와서 최해갑에게 최종통보장을 주다가 된통 당하고는 돌아가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어디서 저런 괴물같은 인간이 튀어나온거야?' 라는 대사를 하는데, 여기서 '괴물같은 인간' 이란 표현이 그 상황과 배우에게 잘 붙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역배우인 백승환은 훨씬 수월하게 대사를 연기한다. 도입부에 공무원에게 아버지가 어디 가셨는지를 얘기하는 것도 재밌었고 말이다. 어쨌든 이 시퀀스에서 그가 연기한 나라는 해갑의 대사를 듣고 원작소설에도 없는 말을 한다. "그 벌레, 나한테도 있는 것 같아. 아직 애벌레지만." 현실적이고 논쟁적일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것에 있어 이런 비유적인 대사들은 현실과 극작품의 경계를 가를 수 있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백승환은 그 대사들을 어색하지 않게 잘 소화해낸다. 그건 아마 10대라는 나이가 주는 이미지도 있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유연하게 그런 대사들을 넘나드는 능력이 보여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그리고 해갑의 이야기까진 아니더라도 작품에서는 나라의 이야기와 민주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은 이 세 이야기를 넘나들면서 종종 중심점을 잃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인해 상실되는 부분은 '이 작품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에 관한 것이다. 어른이 주인공이 되면서 해갑과 봉희가 몸 담았던 학생운동을 비롯한 투쟁과 시대역사는 그냥 인물의 성격을 재밌게 설명하기 위한 유희거리가 되어버린다. 어른들은 굳이 그 이야기를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해당되는 시대를 거쳐온 사람들이고, 옳든 그르든 간에 그런 역사적 사실들에 관해 나름의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소설과 다르게 나라는 자신의 어머니인 봉희에 관해 알아가는 순간을 놓치고 만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시각으로 부모를 바라보는 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영화 판본은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 시대에 관해 다양한 함의를 품을 수 있는 여지를 향해 가교 역할을 하던 어머니 캐릭터를 그냥 '봉다르크' 라는 장르적인 캐릭터로만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이것은 어쩌면 사회적인 분위기가 '선동'의 틀을 만들어 조성 되어버린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도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의의를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만,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는 그냥 모순을 포함한 21세기 한국사회의 풍경들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은 지점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섬을 개발하러 온 악역들에 맞선 해갑 가족과 섬 주민들과의 왁자지껄한 소동이 벌어지고, 이게 상당히 재미있지만 다 보고 나면 마치 허공에 소리지르는 듯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자식들이 자신들의 시선으로 부모를 바라보고, 그들의 행동에 관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해갑이 주인공이 되어 해갑의 시선으로 자식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때문에 생겨난 문제다. 해갑 가족이 이뤄낸 자그마한 승리는 냉정히 생각하자면 또다른 위기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필름 속의 세상에서라도 이것을 통쾌한 승리로 포장하고 싶은 듯, 더이상의 말을 아낀다. 그 때문에 아버지 같은 어른은 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우라는 해갑의 말이 모호해진다. 물론 작품은 마지막까지 유쾌하고 충분히 해갑의 편에 서 있다. 하지만 관객은 판단하기 애매하다.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쩌라는 말인가. 싸우라는 건가, 아니면 말라는 걸까?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모든 관객들이 '내 가족 중에도 최해갑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끝이 나고 만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허공의 형상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꼴이다.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 자체가 공기처럼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작품이다. 그것이 외국소설의 정서를 한국화로 훌륭하게 변화시킨 각색을 간과하게 만들어 버려 다소 아쉽다.
 
아. 만약 주인공인 김윤석과 대사의 관계로 나처럼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유쾌하게 기분전환을 하며 현실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이 작품은 적절한 선택이다. 전 출연진의 연기는 적절하며 특히 악역인 김하수를 맡은 배우 이도경의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다. 이건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 정치인을 가져다 놓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엽다. 그리고 들섬 순경 역의 송삼동, 공안을 연기한 주진모, 정문성, 담임 선생 역의 김태훈까지.. 대부분의 출연진들이 이렇게 골고루 귀엽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내겐 아쉬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금만 바꿨으면 더 깊은 함의를 던지면서도 유쾌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허나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지점에 의도적으로 멈춘 것이라 느껴져서 다소 아쉬운 작품이 되어버렸다.


p.s.1 - 무라카미 하루키 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입니다만, 저는 그 분 작품 중에서는 에세이를 주로 좋아하지, 소설은 좋아하는 게 거의 없네요. 하나 있긴 한데 <언더그라운드>를 유일하게 좋아합니다. 근데 이게 이 분 작품들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니까.. 아. 하나 영화화가 된다면 궁금한 건 있네요. <해변의 카프카>가 영화화 되면 어떻게 나올라나 하면서 궁금한 건 있습니다.

 

p.s.2 -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님의 판본도 같이 이야기해야 되는데, 제가 아직 그 작품을 못 봤네요.

 

p.s.3 - 김태훈 님의 담임 선생 연기는 이전 작품들에서 해왔던 연기를 생각하면 많이 순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형인 김태우 님이 했을 것 같은 역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형제가 각자 반대의 스타일을 연기하고 있네요. 김태훈 님은 이 작품에서 하고 있고, 김태우 님은 TV 드라마인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악역을 연기하는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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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나루세 미키오
주연: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단 레이코, 가토 다이스케, 나카다이 타츠야, 나카무라 간지로, 아와지 케이코, 오자와 에이타로, 센고쿠 노리코
음악: 마유즈미 도시로
촬영: 타마이 마사오
15세 관람가 / Black & White / 110분
원제: 女が階段を上る時

.....

 

나루세 미키오 하면 '고요함 속의 격렬함'이란 표현이 참 좋다 싶었다. 참으로 적절하고 양호하기 그지 없는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나도 어디서 주워 들었던 터라 저 말을 누가 했는지 참 궁금했다. 뒤에 알게 됐는데 저 말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한 말이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의 작품은 격렬한 조류가 조용한 수면 밑에 가려진 깊은 강과 같다.' 정확히는 이 말이라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나루세 미키오 밑에서 조감독으로 경력을 쌓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쇼치쿠 영화사의 중역인 기도 시로가 두 명의 오즈는 필요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 굴욕감을 안겨줬을 때 (아. 물론 '공식적으로' 굴욕감을 느꼈다는 발언은 못 봤기 때문에 내 추측이긴 하지만, 저 상황이면 화나지 않을 감독이 없을 것 같다.) 오직 구로사와만이 영화현장의 스승이 가진 작품관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나루세와 같은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과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살아있을 당시, 어느 정도까지 비교를 당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도 시로의 말만 들어도 당시 그의 작품이 평가를 높게 받든, 낮게 받든 간에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은 일본영화계에서 은연중에 끊임없이 오즈와의 관련성이 지적됐던 것 같다.
 
1920년에 쇼치쿠 영화사에 입사했던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50년대 초반에 도호 영화사로 자리를 옮긴다. 자신이 짜놓은 영상 구도의 엄격함을 지키기 위해 컬러 작품을 만들면서도 끝까지 1.33:1의 스탠다드 화면을 지켰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는 달리 아주 유연하게 스탠다드에서 와이드스크린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로 넘어갔다. 이미 충분히 여러가지 면에서 그의 작품은 오즈와 다르다. 그건 5분만 봐도 알 것이다. 하지만 와이드스크린 작품을 만든 것이 아마도 좀 더 많은 구별점을 지니게 만든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단, 컬러 작품의 개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비슷하다. 단지 <피안화> 이후로 유작까지 계속 컬러로만 작품을 만든 오즈와는 다르게 나루세는 컬러 촬영이 대세이던 시기에도 필요에 따라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띄엄띄엄 한편씩 찍어 총 다섯편을 찍었다.) 그리고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감독의 와이드스크린 작품 중 한 편이다.

 

'회사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퇴근하는 시간.. 우리 일은 바로 그 때 시작된다.
계단.. 난 이 계단을 오를 때가 가장 싫다. 하지만 올라갈 때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해야만 한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전후 시대에 도쿄 긴자에 위치한 '라일락' 이라는 이름의 바에서 마담으로 일하며 '마마'라 불리는 게이코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는 작품이 시작된지 10분쯤 지난 뒤에 등장한다. 그리고 첫 10분은 케이코의 말을 따르는 젊은 호스테스들의 잡담으로 채워진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녀들 중 한 명이 결혼을 해서 바 생활을 청산하는 모양이다. 이 순간을 기념하고자 그들은 케이코를 기다리지만, 곧이어 전화를 통해 들려온 그녀의 말은 제 때 못 갈 것 같다는 이야기다. 호스테스들은 곧 삼삼오오 둘러앉아 마마로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얘기한다.

 

 

 

그녀들이 겪어보지도 않은 고생에 관해 재잘거리는 사이, 정말 '마마', 케이코는 사장에게 바의 매상이 저조한 것에 관해 한 소리 듣고 애써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곧 함께 온 바의 매니저인 켄이치와 건물을 나서며 터덜터덜 긴자 거리를 향해 걸어간다. 곧 켄이치와 헤어지고 혼자서 바로 가던 그녀는 앞에 도착해서 자신처럼 일하는 다른 호스테스가 막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블루 버드' 에서 일하던 호스테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소설인 <파랑새>에서 행복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파랑새'는 사람이 잡기도 힘들거니와, 혹여 잡히면 오래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 호스테스를 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없겠지만, 작품의 인물들 모두 그 생활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환락에 허우적대며 쉽게 발을 뺄 수 없었을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에 언급되는 호스테스의 자살과 그녀가 있었던 바의 이름은 뭔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이후에 이 상황은 변주되어 한 번 더 반복된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 이영애가 연기하는 금자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쇼트가 있다. 그 작품 자체가 '나루세 빵집' 이라고,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 헌정하는 요소가 하나 있기 때문에 이 계단 쇼트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박찬욱 감독보다는 평론가들의 말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작품의 감상 이전에 이 말을 먼저 들었는데, 실제로 그 작품에서 로케이션을 통해 찾아낸 계단은 조형적으로도 상당히 멋있었다. 그래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에도 그런 것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계단은 상당히 소박하다. 4~5층을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게이코가 일하는 바가 2층에 있어서, 1층에서 한 층 더 위로 올라가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계단의 수는 많지 않고 높이는 너무나 완만하다. 게다가 계단은 수직적인 요소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쉽고, 또 그 상징이 강하기 때문에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는 많이 불리하다. 그래서 보통은 스탠다드 화면비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1.50:1, 1.66:1 비율의 유로피안 비스타비전 화면비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같은 해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그리고 계단하면 떠오르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1.55:1의 화면비를 가지고 있다.) 1.85:1의 화면비로 넘어가는 순간, 수직 구도는 극단의 연출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사실상 반쯤 포기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애초부터 거의 수평구도를 위해서 생겨난 화면비나 다름없는 2.35:1 비율의 시네마스코프를 다루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넓은 화면길이를 감당해내기 위해, 그리고 그러면서도 계단의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해 양 옆에 배치된 벽을 활용한다. 계단 앞에 선 케이코, 그리고 그녀의 시선으로 계단을 바라봄으로 인해 그것의 높이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짧은 계단을 올라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개의 쇼트를 교차시키는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에서만 가능한 '길이'의 부각이 여기서 등장한다. 작품은 시간상으로 볼 때 분명 잠깐임에도 불구하고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 특유의 종종걸음으로 바삐 계단을 올라가는 게이코의 발을 보여준다. 보통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가는 것에 익숙해지면 어지간해서는 한 칸씩 꼼꼼히 밟아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작품 속의 게이코는 계단을 한 칸씩 꼼꼼히 밟으며 올라간다. 아마도 계단을 두 칸 이상씩 밟으며 오를 때 보여지는 특유의 쩍 벌어지는 자세가 여성으로서의 품위에는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는 기모노라는 일본 옷의 디자인 상, 그렇게 오르는게 사실 조금 번거로운 게 있겠지만.. 어쨌든 쩍벌은 모냥 빠진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계단을 오르는 잠깐의 시간동안 관객으로서 주목하게 되는 건 올라가는 바로 그 계단의 갯수다. 1층에 선 그녀의 시선으로 올려다 본 계단은 몇 걸음만 올라가면 단박에 정상에 설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잠깐동안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계단을 보고 있으면 저것이 저렇게 길었는가에 관해 나 역시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 생각. 나의 생각은 곧 작품 속 주인공의 생각에까지 와닿고 그녀의 머리 속을 읽을 수 있다는 관심법스러운 '지경'까지 가게 된다. 저 계단을 오르면서 저 여자는 무엇을 생각할까. 짧은 계단이 저렇게 길게 느껴지는데, 자신이 밥 벌어먹고 사는 저 세상이 과연 만족스러워서 저런 걸까. 당연히 나레이션에는 계단을 오르기가 정말 싫다는 말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바 마담과 호스테스들의 세상은 싫어도 좋은 척 해야하는 세상이다. 사람의 감정은 가면 속으로 가려져 버린다. 그리고 초반부터 싫다고 얼굴에 티 내면 관객이 재미없다. 케이코를 연기한 다카미네 히데코, 그리고 그녀와 '프로 의식'에 관해 얘기하는 매니저인 켄이치를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의 표정은 진심인지 가면을 쓴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과정들이 몇 번 반복되면서 작품은 관객에게 굳이 별다른 감정연기 없이도 등장인물들, 그 중에서 특히 케이코가 이 일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관객이 알아서 알아차리게 만들어준다. 그녀에게는 전쟁 중에 죽은 남편이 있었다. 자신의 집에 온 젊은 호스테스가 탁상 액자 속 남자의 모습에 관해 궁금해하자, 그녀가 알려줌으로 인해 관객이 알 수 있는 정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 작품 속에서 케이코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가 관객의 눈에 점점 좁혀지기도 한다. 작품은 그렇게 각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들, 그리고 평소에도 치근덕대는 남자들이 모두 그녀가 과부라는 것을 아는지에 관해서 딱히 말을 해 주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케이코의 처지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여기서 케이코의 행동 속에 담겨진 진심을 엿볼 수 있다. 그녀가 웃으며 손님을 맞는 태도와 그냥 비지니스 때문에 마지못해 이 짓 한다는 태도 사이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반부엔 남자들의 치근덕거림에 절대 넘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 마음에 둔 남자가 바의 고객들 중에 있으며, 실로 가공할만한 절제력으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이런 심정은 사실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거나 괴로움에 몸에 찬물을 끼얹는 등, 애정에 대한 욕구를 참아내는 부분들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묘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독과 작품은 절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절제가 어떤 영화적인 양식미가 덧붙여진 것은 아니다. 허허실실, 평소 우리가 사는 삶에서 마음껏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사그러드는 정서를 완벽히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도 다소 힘을 뺀 상태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무기력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기운 없지만 그래도 살아야 할 내일이 있기 때문에,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없는 힘을 쥐어 짜서 내야만 하는 그 지점을 연기로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내가 본 그녀의 출연작은 이 작품을 제외하면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뿐이다. 거기서 자극적인 의상만 골라 입으며 껌을 질겅질겅 씹고 춤과 노래까지 소화하는 그녀가 이 작품에서는 정 반대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많이 놀라웠지만, 그녀는 1979년에 은퇴하기 전까지 기노시타 감독과 작업한 것과 더불어 주로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많이 작업을 했던 배우였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에서의 연기는 어쩌면 그녀의 '주된 연기'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감독들이 지향하는 연기가 같을 순 없고,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는 그만의 연기를 지도하는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흩어진 구름>의 츠카사 요코가 그랬고,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과는 완전히 딴판의 연기를 보여주는 <산의 소리> 에서의 하라 세츠코가 그렇다.
 
 


* 그리고 조연인 켄이치를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도 그렇다. 첫 출연작이 단역으로 나왔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54년작, <7인의 사무라이> 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꽤 빨리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57년작인 <말괄량이> 에서 첫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여러명의 감독들과 다양하게 작업했고, 또 그 중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과의 작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카다이 타츠야 본인은 언제나 자기가 경험한 가장 특이한 영화촬영현장으로 꼭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현장을 꼽았다. 왜냐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를 찍을 당시의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촬영현장을 오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한 번씩 그에게 "내 영화에선 절대로 구로사와나 고바야시 작품에서의 스타일로 연기하지 말아주게." 라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주로 나지막하게 말하거나 귓속말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첫번째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모습, 두번째는 이 작품의 스틸, 세번째는 <말괄량이>의 스틸, 네번째는 현재의 나카다이 타츠야)
 
현재야 일본에 마지막 남은 대배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그 이지만, 5~60년대 초의 그의 연기를 보면 연극배우로 시작한 연기특성이 남아있어 굉장히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기도 하고 (이치가와 곤 감독의 <염상>이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 같은 작품 보면...) 동작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과장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작품 속의 역할이 그런 걸 요구 했겠지만. 나카다이 타츠야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자신의 '연기 선생님' 이라고 칭했는데, 그의 연기가 좀 더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에 참여했던 것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 때는 그가 어려서 감독에게 자신은 이런 연기를 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감독에게 '조련'을 당해본 셈이다. DVD에 서플먼트로 수록된 인터뷰에서 나카다이 타츠야는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지도를 받은 한 일화를 들려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차 마시는 장면이 있다고 칩시다. 차를 마시면, 찻잔을 내려야 하죠. 그리고 내리면 커트를 합니다. 다음은 제 얼굴을 클로즈 업 합니다. 그러면 제 손은 보이지 않아요. 근데 저는 불안해 하는 거죠. '아.. 찻잔 잘못 놨나? 이거 위치를 어떻게 해야하지?' 하면서 당황해하는데, 그 때 다카미네 씨가 조언을 해 줍니다. '화면에 나오지 않아. 전혀 안 나오니까 아무데나 치워.' 라고요.혹은 '마이크가 바로 밑에 있으니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돼.' 라면서요. ...무서웠습니다. (웃음) 나이도 8살이나 차이 나고. 무서웠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말은 쌀쌀맞게 했지만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

다카미네 히데코가 연기하는 케이코가 스스로에게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는 순간이 왔을 때, 작품은 그녀를 통곡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화를 내게 한다. 처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라일락의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말하지만, 곧 덮어버리고 손님들을 맞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되면서 라일락의 매상이 줄기 시작한다. 케이코는 다시 계단 앞에 서서 이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 나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곧 그녀는 켄이치와 함께 '카튼' 바에 가서 새롭게 일을 하기 시작한다. 라일락 바를 운영해 나가면서 생긴 손해와 빚은 자신의 고객 중 한 명이 대신 대 주겠다고 하고. 이게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인생은 평생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가 빚을 일정 부분 해결해 주겠다고 하니 어째 자신의 흠을 들킨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결국 케이코는 자신이 직접 바를 열어야 겠다고 마음먹는다. 자신의 파트너인 그녀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는 켄이치가 도와주겠다고 하고, 그녀는 창업자금을 모으러 다닌다. 그러던 중 자신보다 먼저 바를 열어 운영하고 있는 동료를 간만에 만난 케이코는 자신의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 때 작품은 케이코의 말을 듣고 있는 동료가 불길한 농담을 던지게 만든다. 나도 마음고생이 심해서 언제나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가방 속에 수면제를 넣고 다닌다고 말이다. 사실 보통 대다수는 그저 무기력한 농담 차원에서 끝나곤 하지만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중간이 없다. 죽음 뿐이다. 그리고 만남을 가진 어느 날, 바에 나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케이코는 자신의 동료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케이코를 비롯한 여인들이 착취의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가혹하지만 동시에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케이코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바람에 자신의 고향집에서 요양을 하는 시퀀스가 있다. 그녀는 거기서도 편히 쉬지 못한다. 식구들이 전부 그녀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빠가 한 사람 있긴 하지만 실업자 상태고, 조카는 몸에 마비가 와 있어 병원에 입원해있다. 카튼 바의 사장이 터틀 수프를 사 갖고 와서 기력을 회복하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것은 빨리 나와서 가게를 돌보라는 압박이나 다름없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케이코에게 살고 있는 아파트가 너무 비싸지 않냐고 타박이다. 자식 걱정에 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작품은 조금 더 삐딱하게 상상하게끔 만든다. 어머니가 딸에게 아파트를 팔고 더 싼 곳으로 이사간 다음, 남는 돈으로 자신과 아들에게 보태라는 것 같은. 결국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심한 다툼을 한다. 사실 케이코의 가족은 냉정히 볼 때 현재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방해만 될 뿐이다. 요양 시퀀스가 끝나고 그녀가 긴자로 돌아왔을 때 오빠가 찾아오는 부분이 있다. 바 창업 때문에 돈을 빌리던 그녀가 역으로 그에게 돈을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이유는 단 하나. 조카의 병원비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녀가 더 괴로워 하는 건, 피까지 토하고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은 너무 오래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막상 진짜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는 어떻게 하지못해 우왕좌왕 할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결정적인 순간에 '중도'가 없다. 분노하거나, 죽음을 맞이 하거나. 웬만한 무협 저리가라할 정도로 비정한 세계인 셈이다. 그래서 케이코는 스스로가 무너져 내릴 때 절대 통곡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와 다름없는 감정 표출을 한다. 그리고 이런 시퀀스가 작품 속에서 몇 번 되지 않기 때문에 한 번씩 등장할 때의 임팩트가 상당하다. 그런데 사실 요즘이나 그 당시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일련의 장면들은 사실 '자극'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의아하다. 이런 것이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스타일이 아니냐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사실 <흐트러지다>의 마지막 시퀀스나 <흩어진 구름>의 이야기 설정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이 감독도 충분히 센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러한 자극이 과연 이 작품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너무 센 자극성은 작품과 섞여들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극이 너무 세면 그것에 무감각해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들과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에서 보여주는 자극성은 사람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케이코가 동료 호스테스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을 때,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의 부하직원이 찾아와서 돈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시퀀스가 있다. 딸을 잃은 어머니는 빚까지 갚는 거야 그렇다쳐도, 그것 때문에 사람이 자살했는데 와서 돈을 갚으라고 하는 잔혹함은 뭐냐며 흐느낀다. 여기서 케이코가 느낀 심정이 켄이치에게 끼치는 영향이 주목할만하다. 왜냐면 그 사채업자는 케이코가 마담을 할 때마다 찾아오는 중요한 고객이라서다. 여태까지는 여유와 거짓웃음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람을 상대해 왔었지만 도저히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다. 그건 사실 그녀의 장에서는 돈이 중요할지언정 끝내 거기에 매몰될 수는 없다는 한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저항이나 다름없다. 그 때 켄이치를 향한 케이코의 행동은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깟 돈이 뭐라고... 오늘만은 싫어! 지금도 장례식 장의 향 냄새가 내 몸에서 느껴진단 말야! 저 인간하고 같이 있는 건 죽은 내 지인에 대한 모욕이야. 아무리 일이라도 그렇지, 한계라구!" 


 


그에 대항하는 켄이치의 말은 '굶는 것' 이다. 말하자면 이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엔 결국 굶게 될 거라는 말이다. 케이코는 마시던 물을 켄이치에게 뿌려버린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굶음에 관해 말하고 있는 켄이치의 배에 물이 끼얹어진다. 설마 물 뿌리는 타이밍까지 계산했을까. 그냥 이건 내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배를 채울 수 있는 수단을 벌어야 한다는 남자의 배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건, 일단 그것이 과연 사람됨이라 할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단지 물을 뿌리는 것인데, 적어도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세계에서는 막 다듬은 차가운 칼에 몸을 관통당한 것 같은 아픔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작품에는 이렇게 전반적인 정서 속에 '저건 좀 센데?' 라고 생각할만한 행동이나 대사들을 인물들 간의 감정이 폭발하는 지점에 꼭 하나씩 깔아두고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르다는 것이 큰 특징인데, 전반부는 케이코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이 생활에 관한 불안, 그리고 그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망쳐가는 모습들을 그녀의 삶과 교차시킨다. 그리고 후반부는 케이코가 바의 단골고객이기도 한 남자들 때문에 여러가지 의미로 곤경에 처하는 상황들을 보여준다. 이 후반부가 유독 서글픈 것은 지인들의 몰락을 지켜본 그녀가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던 켄이치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채 주위의 다른 남자들에게 점점 의지를 하기 때문이다. 그 기대라는 것이 참 무섭다. 좌절될 때의 후폭풍이 굉장히 세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녀가 남자들을 차례차례 거쳐가며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만든다. 한 남자가 케이코가 애용하는 향수를 선물로 주고, 돈과 일의 고단함 때문에 걱정을 하는 그녀를 위로할 때 작품은 그가 사실은 유부남인데다 허언이 심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가토 다이스케가 연기하는 이 남자는 나카무라 간지로와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귀여운 인물이니까. 처음엔 사실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런 헌신적이고 섬세한 태도 때문에 잠시나마 이 남자에게 자신을 맡길지에 관해 고민하던 여인의 입장에서는, 그러나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이 세트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비중이 적은 야외 촬영분에 해당하는 이 시퀀스는 사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꽤 드물게 프레임 안이 비어 있는 편이다. 드물다는 것은, 그의 작품은 대개 스탠다드 화면비이건,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이건간에 프레임 안이 언제나 꽉꽉 채워져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느낀 감흥이기도 하다. 정말 그렇다. 이 감독의 세계는 밖으로 나가도 자연물이든, 인공적인 건물이든 간에 마치 벽처럼 등장인물들을 에워싸고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더불어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의 차이가 느껴지는 대표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해가 되는 결정이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현재 처해진 상황에 관해 뭔가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나서야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비로소 탁 트인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산의 소리>에서 시아버지와 여주인공이 걷는 황량한 공원, <흩어진 구름>의 여주인공이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혼자 걸어가는 강가.  

 

 

* <흐트러지다>의 결말. 작품은 여기서 보여주는 클로즈 업을 더 지속할 생각을 하지 않고 보여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딱 끊어버린다(고 한다). 뭘 봤는지는 스포일러니까... 아. 그리고 내가 아직 못 봤지. *

 

 

청소년이었다면 그것이 막막함이겠지만 나루세의 세계에서는 어차피 세상사 좀 징허게 겪어본 어른들이니 살기야 어떻게든 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슬픈 것일지도 모른다. 바보같은 선택이겠지만, 무모해지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이 작품은 의외로 그런 흔치 않은 배경이 빨리 등장하는 편이다. 충격적인 증언을 듣고 있는 케이코의 뒤엔 연기를 내뿜고 있는 공장굴뚝 정도만이 보일 뿐이다. 반면, 케이코에게 말을 해 주는 여자의 뒤에는 여러채의 집들이 보인다. 이는 어떻게 보면 <산의 소리>, <흩어진 구름> 등에서 선보였던 '자연물'이, 이 작품에서 '집'으로 대체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흐트러지다>의 결말과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고. <산의 소리>와 <흩어진 구름>에서는 분명 주인공들은 앞을 바라보고 있다. 단지 카메라가 그들의 뒤에서 바라볼 뿐이다. <흐트러지다>와 (<- 참고로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다카미네 히데코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주인공들 역시 앞을 바라본다. 단지 카메라가 주인공들의 뒤가 아니라 뭔가를 쳐다보는 그들의 정면을 바라볼 뿐이다. 바라보는 대상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 앞에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들이 뭘 보고 뭘 느꼈는지 그게 어떻든 간에, 그 앞에는 그녀들의 시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세상이 있다. 이 작품에서의 케이코는 직업이 마담이니 인간의 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사랑 앞에서도 그나마 Cool 할 수 있겠지만, 작품이 주는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섹스. 한 때 설레는 행위일지 몰라도 나이가 들다보면 의무방어전처럼 되어버려서 더이상은 설레지 않는 것. 그런데 케이코는 그런 섹스를 나눌 '위기'에 처한다. 그것도 남편 이후로 처음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던 남자에게 말이다. 그녀는 화류계 생활을 하고 있지만 드물게 성적으로 덜 문란한 여자였다. 그게 가능했던 건 일과 사랑, 사랑과 일에 관한 그녀 나름의 삶의 자세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전과는 달리 케이코가 이 남자는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굳이 말하지 않은 채 연기자인 모리 마사유키의 얼굴만 봐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전반부에서도 미묘한 긴장감을 유발시켰는데, 결국엔 내쳐질 걸 알면서도 그녀는 무기력하게 남자의 손길에 이끌린다. 하루가 지나고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 또다른 남자인 켄이치에게 뺨을 맞는다. 이것 역시 작품의 가장 자극적인 순간들 중 하나다.

 


 
당연히 예상했겠지만 이 작품의 섹스 장면은 직접적이지 않고, 눕는 순간 페이드 아웃이 되어버린다. 뺨을 때리는 장면은 사실 굉장히 예외적이다. 작품 속에서의 유일한 신체적 폭력이 가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찌마와 리가 화려한 택견 실력으로 리쌍 멤버 둘을 골로 보내던 걸 생각하면 사실 뺨 때리는 건 많이 우습다. 하지만 유독 나루세의 세상이 지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서방세계와 자국에서 감독을 설명할 때 간간히 인용되던 '시선의 내러티브'란 표현처럼, 그 '시선'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다소 충동적인 성향의 섹스를 끝내고 난 뒤, 케이코는 방 천장을 바라보며 한 방울 눈물을 흘린다. 거기엔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남자가 분명 어떤 충동에 의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그에게 마음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가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는 천장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가질 수 없는 것을 내심 가지길 바랐던 사람의 심리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예상된 일이겠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픔을 겪는다. 그리고 곧 켄이치에게 뺨을 맞는다. 켄이치가 당신만은 믿었는데 이젠 창녀가 되어버렸다고 한탄할 때 케이코는 자폭 발언을 하고야 만다. 네가 말하는 '프로페셔널'이 이런 거 아니냐고 말이다. 이 때 슬픈 것은 케이코의 시선이다. 그녀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내몰렸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뺨을 맞았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는 실연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켄이치는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한다. 타이밍이 좀 뜬금없긴 하지만 (게다가 방금 섹스했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한테 입부터 들이대려고 한다. 접근방법은 완전히 꽝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노리개로만 아는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에게 남몰래 마음을 갖고 있었던 남자에게 가는 것이 더 나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케이코는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이 호스테스 일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관성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녀는 그것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 그리고 여기서 또 느꼈던 20대 시절 나카다이 타츠야의 괴로움. 나카다이 타츠야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연기 상으로 딱 두 번 때렸던 적이 있다. 이 작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작품에서. 기노시타 감독과 다르게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에서는 진짜로 때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카다이 타츠야는 많이 당황해서 그냥 시늉만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었다는데, 감독은 단호히 정말 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때리는 쇼트를 촬영한 이후, 나카다이는 하도 미안해서 다카미네 히데코에게 사과를 하러 갔다. 그러나 미안한 그와 달리 다카미네 히데코는 "어차피 연기인데 뭘 그걸 가지고 사과를 하고 그러냐" 며 웃어 넘겨버렸다고 한다. 호탕한 누님 입장에서는 8살 연하의 이 남자배우가 어지간히 귀엽게 보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드는 일화다. *
 

"케이코 씨. 우리 결혼합시다. 내가 빌게요. 우리가 운영하는 바를 새로 개업해서 살아요."

 

"나가.. 당장 나가지 않으면 소리 지를거야.."

 

"..그렇게 내가 싫은가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아.
그런 상태에서 하는 결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우린 안 돼. 우린 서로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잖아. 부탁이야. 제발 나가 줘."

 

켄이치의 고백이 끝내 그녀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이것이다. 이 가슴 아픈 마지막 대화 시퀀스에서 작품은 켄이치라는 남자가 한 여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랑고백의 결론이 '새로운 바' 라는 것을 말해준다. 갑자기 임권택 감독의 97년작인 <노는 계집 창>이 떠오른다. 박상면이 연기한 포주가 집창촌에서 창녀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우리가 대한민국의 성범죄 예방에 공헌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하면서 쩝쩝대는 부분. 그 작품의 주인공이나 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본질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인데 그 여자들을 사로잡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만 생각한다.  물론 박상면과 달리 나카다이 타츠야가 연기한 켄이치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말한 것일게다. 그러나 아마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끊임없이 돈을 갚고, 또 빌리고 거짓 웃음으로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다.
 
작품의 대사처리는 인상적이고 또 무섭기까지 하다. 보통은 서로를 잘 아는 사람끼리 더 잘 살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할 수 있을텐데 감독은 그 점을 부정한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그만큼 더 현실에 안주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그러한 삶을 살 것이라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다. 그들은 몇 배로 아플지라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다. 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헤어지고 각자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다. 그래봐야 또 바에서 일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감동적이다 싶은 건 바에 한정되더라도 이 두 사람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쓰는 삶의 방법 덕분이다. 켄이치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자신이 처음 이 생활을 시작하게 됐던 바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사람이 시작점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에는 큰 용기가 요구된다. 케이코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가족과 함께 타고 떠나려는 열차를 찾아간다. 남자가 섹스 후,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 건네준 물건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다. 거기다 그녀는 나름의 성의를 담은 선물까지 건네며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를 미련없이 잊고 뒤돌아선다. 작품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떠나가는 열차를 보는 방식으로 끝맺지 않는다. 열차 안의 사람들이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게 만든다. 간결하고 명확하며 또 인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으로 인해 작품이 꼭 비극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마지막 시퀀스는 케이코가 다시 카튼 바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그녀가 계속 자신만의 새 바를 열기로 마음먹는 것은 더이상 거론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그녀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나레이션이 없다. 그 나레이션은 이미 그녀가 바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이미 나온 뒤다. 이 추운 겨울에도 봄새싹이 미리 준비하듯 피워 놓듯이 나 역시 살아야 한다고. 그녀는 잠깐 계단 위를 바라본 뒤, 성큼성큼 걸어올라간다. 이게 좀 기이하다. <산의 소리>와 <흩어진 구름>에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것은 다름아닌 삶을 산다는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에 대한 감흥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반대다. 힘들지만 어쨌든 삶을 산다. 삶이라는 것이 앞, 혹은 뒤에 있는 것에 따라 의미의 변화와 체감이 유독 깊게 와닿는다. 케이코는 힘들지만, 어쨌든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점이 감동적이다. 그녀는 좋지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그런 불행에 굴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마치  삶의 지리멸렬함에서 초월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녀의 실생활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리고 생업인 바에 출근하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지옥같은 경험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던 그녀가 지금 그 지옥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서 환한 웃음을 피운다. 탁 트인 자연을 보여줬던 몇 작품과 달리 이 작품도 <흐트러지다> 처럼 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바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폐쇄공간 안으로 '하강'하는 상태에서 끝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언제나 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한다. 살려면.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살아가면 모르겠지만, 난 주변에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이 작품의 결말도 사실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감동적인 것은 이 여자는 적어도 무기력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녀는 기꺼이 지옥으로 걸어들어가 거기서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아. 나루세 감독의 작품 속 여인들은 이렇게 절망을 극복하는구나. 다카미네 히데코는 특히 그렇다. <부운>이나 <흐트러지다> 같은 작품에서의 그녀는 본의 아니게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이 작품도 그렇지만, 여기선 그녀가 닥쳐온 비극을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는 직종만 다를 뿐,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삶과 대처하는 방식은 우리가 한 번 쯤은 했던 것이기에 저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이 내가 본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가장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작품일거라고 얘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케이코라는 여자가 지옥 속에서 다시 기어 올라갈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또 살다가 다시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알고 보면 나약하다는 것은 관객들이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처입은 스스로를 다시 추스리고 다시 살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큰 위로가 된다. 우리 모두 그녀처럼 나약하지만, 동시에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p.s.1 - 지난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바다의 왕자님이 지인인 가수, 조원민 님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면서 그에게 "형.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해." 라는 위로를 했었다지요. 이 작품 보니 그 말이 생각이 나더군요.

 

p.s.2 -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은 1969년에, 다카미네 히데코 님은 2010년에 고인이 됐습니다.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님을 제외하면 흔히 거론되는 일본의 다른 '영화 천황' 들은 모두 5~60대에 생을 마감했지요. 다카미네 히데코 님은 1979년 이후 영화계에서 은퇴했는데, 글에도 재능이 있었는지 여러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남은 생애를 은둔하며 보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에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하기도 하고,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흰 커튼만 있고 세트 없이, 흑백으로 사람의 움직임만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다가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것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누가 들었는지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근데 이제 보니 다카미네 히데코 님이 1969년 초에 병문안을 가서 들은 얘기라고 하네요. 이 개인적 일화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배우는 1984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회고전이 열렸을 때 평론가인 오디 복 님에게 처음으로 알려줬다고 합니다. 감독님은 '만약 내가 몸이 다 나아서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되면, 다카미네 씨가 연기해 줄 수 있겠어?' 라고 했다는군요.
 
p.s.3 - 참고로 다카미네 히데코 님은 이 작품에서 주연과 더불어 의상도 직접 담당했습니다.
 
p.s.4 - 정확히 4년 뒤, 한국에서는 이 작품의 표절작이 만들어집니다. <명동에 밤이 오면> 이라는 작품이에요. 신필름 작품이고..표절의 수준이 거의 김기덕 감독님의 <맨발의 청춘> 수준이라는군요. 쇼트 바이 쇼트로 통째로 베끼다 시피 한 거.. <백사부인>도 그렇고, 신필름이 이런 몹쓸 짓을 간간히 하곤 했는데 이형표 감독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경악했네요. 나 <서울의 지붕 밑> 좋아한단 말이야!!! 크흑.. 김기덕 감독님은 지금도 <맨발의 청춘>에 관해서 잡아떼고 있는 판이고 이형표 감독님도 고인이 되기 전까지 <명동에 밤이 오면>의 표절 건에 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리메이크라고 시인했다면 구스 반 산트 감독님 버전의 <사이코>처럼 대담한 오마주라면서 해석 될지도 몰랐을텐데.. 이 작품은 필름이 남아있습니다. EBS에서 HD로 방영된 적 있지요.
 
정지영 감독님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이지만 한국영화는 미국영화 다음으로 일본영화와 중화권 영화의 영향도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영화요. 왜냐면 이건 전체적으로 개방되기 전까지 제한된 경로와 사람들만이 접할 수 있는 문화였고, 그로 인해서 어떤 죄책감도 들지 않았을테니까요. 아마 당시에는 자기 살아 생전에는 절대 개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연출력이 참 괜찮다 싶은 작품이 아류작이라는 것이 확인될 때 그 순간의 허탈감은 참....... 그렇고 그런 느낌이에요. 아. 물론 EBS와 영상자료원 측이 HD로 복원한 것에 관해선 불만 없습니다. 한국영화계의 어두운 역사도 복원되어서 같이 의논이 되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걸 두려워해서도 안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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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마세요. 일정부분 이야기를 말하긴 하지만 스포일러 없으니까요.

이거 보시고 극장 가셔도 괜찮아요. *

 

 

 

감독: 류승완

주연: 먹방의 신, 지아나 전, 넘버 3, 북경 살쾡이, 장의사, 태주 (식인종. 한복집 뱀파이어 말고.), 신애리, 배씨 성을 가진 남자 모델, 조 검사, 외국 배우들

특별출연: 명계남, 윤종빈, 이경미

음악: 조영욱

촬영: 최영환

15세 관람가 / Color / 120분

 

.....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베를린>의 우수한 장면 중 하나는 다름아닌 도입부다. 도입부 시퀀스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작사, 투자자 등이 나오는 그 도입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이 조금 진득하고 느릿하게 어느 곳에서의 지원을 받았는지, 투자자와 제작사가 어디인지 보여주는 편인데 이 작품은 그것보다 좀 더 짧게 빨리빨리 지나간다. 그래서 그 투자자의 이름들을 채 다 읽지도 못한다. 근데 생각해보면 투자자들은 감독의 작품에 지원만 해주면 될 일이지 굳이 관객들까지 알 필요성은 없다. 류승완 감독은 '그래. 어쨌든 내 작품에 돈 대준 이들이니까 의무감에 띄어 놓은 거야.' 라고 말하듯 후딱 지나가 버린다. 생각해보면 관객까지 그들의 이름을 오래 봐야할 이유는 없다. 작품은 빨리 달리고 싶어서 안달났다는 듯이 이런 삽입 타이틀까지도 빨리 넘겨버린다.


사실 본편을 보기 직전까지는 많이 심란했다. 지난 밤 6시에 잠들어서 새벽 2시 10분에 일어나서 동 틀 때까지 깨어 있었다. 동 텄다고 자면 아까울 것 같아서 나중에 보기로 한 이 작품을 조조로 보고 오자고 마음먹고 시내를 나갔는데, 문득 CJ가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 지원 중단한 것 때문인지 근래에는 유독 이 회사가 뭘 응원한다고 하면 되게 미워보이는 것이 그 이유다. 그리고 본편 보기 직전에 등장한 국방부 광고 (신기하게도 이 광고 본 지 꽤 된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직도 사용되고 있더라.) 와 자칭 '친서민적' 은행광고는 여러모로 사람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작품이 기업홍보가 아닌 이상, 관심있는 감독의 작품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나 같이 어질어질해 있는 사람도 단박에 몰입시키겠다는 듯, <베를린>의 본편은 도입부에서 아예 거친 필름질감 속에서 어떤 사건의 진행을 빠르게 보여준 뒤, 다시 세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류승완 감독의 작품 중에서 인터넷 단편까지 포함하여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나보다. <부당거래>를 만들 당시 류승완 감독은 <다찌마와 리> 이후 영화제작과 관련된 사람들이 다 자길 피해다니더라고 얘기한 바 있다. 꼭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래 차기작으로 거론됐던 <야차>는 엎어졌으며 감독은 오히려 모토롤라와 연관된 <타임리스>를 찍은 다음 <부당거래>로 넘어갔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넘어왔는데, 다 보고 나니 이런 지점들에 관해서 얇든 깊든 뭔가 생각을 하게 되는 면이 있다. <베를린>은 재밌는 작품이지만, 사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부분도 많다. 비교하면 안 되는 거지만 정말 일체의 불만도 없이 한 감독이 당당하게 자신이 도약했음을 선포했고, 또 그걸 보는 재미가 충만했던 <부당거래>나 너무 일찍 나왔던 <주먹이 운다>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 작품에서 하정우가 연기하는 주인공 표종성은 등장부터 매번 위기에 처하고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 그 상황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작품이 어느 정도 흘러간 시점에서 드러나지만, 조작이 됐든 예상치 못했든 언제나 이 남자는 불안에 떤다. 도입부 액션 시퀀스는 그것을 관객에게 상징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연출을 보여준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작품이 초반에 관객을 기선제압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온갖 시각적인 연출들을 총동원 한다는 점이다. 상당히 기발했던 부분은 자막 그래픽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작품은 한국어, 영어, 독일어가 뒤섞여있기 때문에 분명 자막이 필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은 자막을 화면 중앙 하단, 혹은 오른쪽 상단에 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이것을 영화적인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게 만든다. 



 

아직 딱히 이 작품과 관해서 류승완 감독이 이야기 면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예전에 <시사인>에서 주진우 기자 (참고로 <부당거래> 때도 도움을 주기도 했던 그는 이 작품을 위해 탈북자와 류승완 감독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와 함께 작품 이야기를 하다 말미에 존 르 카레의 소설인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와 톰 롭 스미스의 소설인 <차일드 44>를 읽으며 자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작품은 두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다. 스파이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의 정도가 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보면 국제정세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복잡한 설정과 디테일들이 요구된다. 문제는 어느 소설이나 다 그렇겠지만, 영화판으로 옮겨질 때 제한된 시간 내에 모든 걸 담아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나 북한과 관련된 문제는 실제 현실에서도 여전히 조심스럽게 다뤄지고 있는 중이다. 

 

류승완 감독은 기본 설정 자체를 많이 꼬아놓고 있는 이 작품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관련 인터뷰에서도 언급되는 것을 봤지만, 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보고 나서 복잡한 내러티브로 재밌는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관해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를린>은 여태까지의 류승완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복잡하게 상황들을 제시해놓고 풀어나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류승완 작품 중에서' 다. 그는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마치 기본적으로 친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놔야 한다는 듯 곳곳에서 배려하려고 하는 연출을 삽입한다. 작품의 한 축이 스파이 액션물이라면 다른 한 축은 로맨스라는 것도 그렇고 위의 자막도 그렇다. 자막은 관객들이 국정원 위장차량을 더 빨리 파악할 수 있도록 굳이 진짜 그 차량이 있는 지점에 삽입된다. 단순히 위치를 조금 조정한 것 뿐이지만, 대체적으로 작품 속에서 자막이란 게 화면의 중앙과 가장자리에만 배치되던 걸 생각하면 식상하지 않은 연출이라 재미가 있다. 이 작품에서는 표종성이 접선장소를 암호처럼 적어놓은 쪽지를 클로즈 업 하면서 자막 그래픽이 변화하기도 하며, 심지어 인물들의 외국어 대화 장면에서조차도 관객의 시선을 돌려놓지 않겠다는 듯 쉴새없이 자막의 위치를 변경시킨다. 이는 탁월한 선택이다. 다소 산만하게 보이더라도 관객의 집중도를 뺏기지는 않을테니까. 왜냐면 하정우, 전지현이 연기한 표종성, 련정희 부부의 도주시도가 이어지는 중반부에 이르기 전까지의 이야기 흐름은 분명 조금이라도 놓치면 이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다소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다소 어지럽다고 느낀 지점이 있었다. 작품은 복잡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초, 중반부의 화면구성도 만만찮게 복잡한 스타일로 만들어놨다. 대표적으로 표종성이 아랍 조직과의 거래장소로 들어갈 때 모사드 조직의 잠입, 그리고 도청을 시도하는 남한 국정원과 북한 정보부의 모습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 때 작품이 교차편집보다 더 많이 애용하는 스타일은 바로 화면분할이다. 문제는 그 분할되는 장면들이 한 쇼트당 유지되는 시간이 굉장히 짧다는 것이다. 하나의 화면에서 그것을 여러개로 갈라 보여주면 거기서 관객들이 볼 수 있는 영상정보는 굉장히 많다. 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이런 화면 분할을 잘 활용하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나 최동훈 감독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류승완 감독이 다른 점이 있다면,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어지간해서는 화면 분할을 두 개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화면분할이 등장하면 관객에게 두 개의 분할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최소한 인식시킬 정도의 시간은 주거나, 혹은 꽤 긴 시간동안 화면 분할 시퀀스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충무로에 화면 분할의 유행을 몰고 온 최동훈 감독의 경우에는, 화면 분할을 이야기의 흐름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쓰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화면분할을 할 때 배우들에게 더 집중을 하는 경향이 있다. <범죄의 재구성>의 초반부에서 인물들이 모여 은행강도 모의를 하는 시퀀스에서 화면분할이 이용되지만 과정만큼이나 이 영상 기법이 힘을 쏟는 건 계획을 듣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다. 마치 한 계획을 듣고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이들의 얼굴을 보라는 듯이.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이야기 진행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최동훈 감독은 순전히 자신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멋스러움을 뽐내기 위해서 화면분할을 이용한다. 어떤 연유에서든 이 기법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나름의 확실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 최동훈 감독의 2005년작, <범죄의 재구성> 중에서 *


그러나 <베를린>의 화면 분할 시퀀스는 너무 많은 정보가 포화상태 마냥 꽉꽉 들어차 있다고 느껴진다. 실제로는 오늘 아침에 한 번 보고 쓰는 것이니 실제로는 별 거 아닌 동작들을 내가 착각한 것일수도 있다. 대부분의 장면들이 기계를 조작하고, 무언가를 듣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밀한 디테일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일 수 있지만 중요한 장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가령 표종성이 거래 도중에 화장실로 가는 척하고 상대쪽의 계획을 알기 위해 도청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유리탁자에 도청도구를 놓고 가고, 카메라는 그것을 밑에서 위로 비춤으로 인해 표종성이 나름의 도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중요한 장면인데 문제는 이것이 화면분할 시퀀스에서 왼쪽 하단 가장자리에 보여지고 얼마 안 가 쇼트가 바뀌면서 사라진다는 점이다. 요즘 관객들이 눈이 서너개가 달렸는지 알 수 없다만 적어도 나는 한 쇼트에 여러가지 진행되는 상황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하마터면 이것을 놓칠 뻔했다. 그나마 그런 부분들도 예상했는지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소품들이 반복이용되는  지점들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녹음기, 도청장치, 과거회상) 그럭저럭 볼만했다.


도입부를 넘어가면 우린 작품에서 액션의 비중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어떤 논란과 마주하게 된다. 현재 빠른 흥행호조에 반대되게 작품이 시달리고 있는 논란인데, 그 중 하나가 더그 라이먼,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본 3부작>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보고 나서 느낀 점은 딱히 <본 3부작>이 연상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액션 구성을 따진다면 3부작의 스턴트 감독이었던 '댄 브래들리가 만든 액션 시퀀스가 연상된다' 라고 표현하는 점이 옳을 것이다. 내 기준에서 볼 때 댄 브래들리의 액션 시퀀스가 너무 유사하다는 생각이 잠시 든 것은 악한과 표정성이 함께 유리천장 위로 떨어지는 부분에서다. 그리고 그 시퀀스는 댄 브래들리가 참여한 작품 중에서 <본 3부작>이 아니라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동시에 그게 작품 전체에서 그나마 참신하다고 여길 수 있는 액션 시퀀스였으며, 현재 액션 장르에서 트렌드처럼 되어가고 있는 댄 브래들리 본인조차도 자신이 개발한 시퀀스들을 클리셰처럼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 류승완 감독은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것을 자기 식으로 잘 체화해서 다뤄내는 감독이었다. <부당거래> 같은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액션 시퀀스를 줄이고 인물들과의 대화를 박진감 넘치는 편집과 카메라 이동으로 구성함으로서 본인의 이전 작품 수준의 박력을 구현해내는 새로운 경지를 이룩했지만, 그는 그렇게 작품세계를 형성해 온 감독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내가 류승완 감독을 좋아하는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니까 <부당거래>를 제외한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 말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아주 적극적으로 표현한 감독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주인공들과 악역이 거의 20분 넘게 마지막 결투를 펼치는 장면도 그렇고, <주먹이 운다>에서도 두 주인공이 권투 경기를 펼치는 장면을 라운드 끝까지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예전 중화권 작품들이 이런 경향을 많이 보여줬었다. 지금은 잘 볼 수 없는 그 방식은 류승완 감독이 애용해 왔던 것이었고, 좋든 나쁘든 간에 그의 작품을 연상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세계였다. 나는 그런 욕망을 포기하지 않아서 그 감독의 작품이 좋았다. 끝까지 포기 못하겠다면 내가 맞춰줄 수도 있는거지, 뭐. 하지만 문제는 끝까지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게 앞으로의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가는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그 때는 바꾸는 것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떻게 보면 작품의 액션이 외형적으로 유사할 수 있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이 적어도 이 시퀀스에서 지향하고 있는 액션은 다르다. 007의 경우에는 떨어진 두 사람이 줄에 묶여있는 상황이라 어떤 공격을 가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추락 후에 벌어지는 액션의 최종목적은 서로 손과 팔을 휘저어가며 권총을 잡아 상대를 먼저 저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자신이 이걸 어떻게 한 번 더 식상하지 않게 재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같은 도구나 상황이더라도 자신은 이렇게 이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보여주는 <베를린>의 액션 지향점은 보수를 하지 않고 여태까지 버텨온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독일의 건물들이 총에 맞아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마구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 인물들은 도시와 건물의 날카로운 부분들에 쉴새없이 충돌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이 작품의 추락 시퀀스의 마무리도 상당히 격렬한데, 007과 달리 죽을 고비를 넘긴 하정우가 자신을 받아낸 와이어가 뜯겨져나가 벽 여기저기에 부딪히면서 기어이 땅에 떨어진 다음에야 끝이 난다. 작품의 액션은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계속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 짓 계속하자니 도저히 몸도 아프고 위험해서 제명에 못해 먹겠다는 그런 것. 이 작품은 그런 고통을 부각시키는 디테일이 있다. 벽 충돌에 이어 큰 돌에 허리가 찍히는 것들 말이다. 작품은 그런 액션의 고통을 통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창출해내는 비범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충분히 창의적이고 이 작품의 최대성과가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류승완 감독에게 작가보다는 일부러 억제하여 장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게 만드는 작품이다. 나름대로 숙련된 장인 말이다. 전작의 흥행과 비평성공에 힘입어 다시 주목을 받은 그가 많은 예산을 들인 작품들을 재밌게 만들 자신이 있고, 또 효과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안정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작품 같다는거다. <베를린>은 현재 류승완이라는 영화감독이 자신의 가치를 세속적으로 증명해 보이려 CJ에게 제출한 포트폴리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게 해서 여지껏 자신의 개별작품에서 모았던 관객동원보다 더 많이 끌어오게 된다면 그것 역시 류승완이라는 감독의 '진화'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충무로 내에서 많은 예산을 들였다고 해도 헐리우드에 비하면 여전히 가격대 성능비의 표현을 논할 수 밖에 없지만, 이 작품은 그것을 고려할 때 헐리우드 작품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형적인 부분들, 말하자면 '때깔'을 크게 위화감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점들 때문에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이 다소 아쉬워 졌다' 고 느끼는 쪽이다. 위에서 본 시리즈를 얘기하다 보니 몇몇 시퀀스가 비슷하다고 볼 수는 있겠구나 싶은데, 사실 내겐 오히려 그 유사 시퀀스를 놓고 두 작품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한다고 치면 이 작품이 '표절했다' 보다는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주 간신히 턱걸이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발로 뛰는 추격전 시퀀스 중 이경영이 연기한 리학수를 남한과 북한 측에서 뒤쫓는 부분이 있다. 그 때 카메라는 리학수를 중심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지시를 받거나 행동으로 옮기는 여러가지 모습들을 쉴새없이 트래킹과 줌을 번갈아 활용하며 보여준다. 본 시리즈가 대단했던 점은 핸드헬드 같은 어지럽고 요란한 움직임을 가진 촬영기법을 선보이면서도 카메라의 피사체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카메라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한 번도 이탈하지 않았다. 혹시 그게 더 빠른 차량 간의 추격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베를린>은 핸드헬드를 쓰지 않으면서도 때때로 카메라의 주된 피사체를 놓치는 경향이 있다. 빠르게 트래킹하거나 패닝하는 순간에는 더 그렇다. 심지어 차량 추격전도 없는데! 어차피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고 아마도 그런 헐리우드 식의 분위기가 난다는 것만으로도 환호할 수 있겠지만, 작품을 생각하면 이경영을 추적하는 시퀀스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해서 오히려 감독이 가진 액션철학의 면모를 덜 부각시키게 만드는 독처럼 되어 버렸다는 느낌이 있어 안타깝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스파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신이나 마르크스 어록이나 달달 외우는 도덕군자처럼 보이시나? 스파이는 나처럼 지저분하고 추잡하고 별볼일 없고, 주정뱅이나 변태, 공처가 같은 추잡한 놈들 뿐이야. 아니면 비루한 일상 속에서 카우보이 짓거리나 하는 공무원들이라 할 수 있겠지."


- 존 르 카레 원작, 마틴 리트 감독의 65년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고 느끼는 지점은 전지현이 연기한 련정희가 계략에 의해 얽히게 되면서 표종성, 련정희 부부가 탈주를 시도하는 부분이 나오면서부터다. 그리고 한석규가 연기한 국정원 요원인 정진수가 이들의 처지에 연민을 표하면서부터다. 나는 꼭 샘 페킨파 감독의 <겟어웨이>에 등장하는 스티브 맥퀸, 알리 맥그로우 커플을 보는 것 같았지만 이런 탈주의 이야기는 류승완 감독이 본 책을 생각해 볼 때 주인공이 연인과 함께 철의 장막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뛰어가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류승완 감독에게 남녀 간의 미묘한 애정을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사랑 얘기 다루는 걸 못봤다는 거다. 하지만 만일 장인이 되고자 한다면 감독에게 사랑이라는 소재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는 소재가 사랑이지만, 그만큼 자칫 잘못하면 뻔하게 다룰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카메라가 쉴새없이 움직이는 부분과는 반대로 이들 부부의 대화 장면에서 만큼은 가능하면 움직임을 자제한다. 마치 폭풍처럼 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미 전작에서 대화 장면만으로도 작품에 파도를 일으키는 능력을 보여준 감독은 말이든 몸이든 대화가 가장 잘 어울리는 로맨스라는 장르를 탐구한다. 정확히는 국가가 만들어준 분위기에 너무 심취해서 옆에 있는 자기 아내의 소중함을 모른 한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잘 만들 수 있는 자신이 있다면 굳이 이국적인 풍경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베를린>은 사실 그래서 조금 의아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알겠는데, 작품이 베를린 현지촬영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도시를 조망하면서 부각시키는 면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보며 '류승완 버전의 <아이리스> / <아테나>' 라고 평가하는 반응을 봤는데, 두 작품은 이야기를 하려 들다가도 어느샌가 뮤직 비디오나 인물화보 촬영에 몰두하는 꼴이 되어버린 바 있다. 그에 비하면 이 작품은 이야기를 진행할 때 인물과 배경이 있다면 무언가를 포기해서라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 대표적인 시퀀스. 이경영이 연기하는 리학수와 류승범이 연기하는 동명수가 오펜바움 다리 밑에서 접선하는 장면. 여기서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발코니 비스무리한 장소로 가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지만, 베를린의 전경은 다리 기둥이 사이에 가려져 틀 속에 갇힌 것처럼 일부만 보이고, 대부분이 특징 없는 건물에 가려진다. 오히려 이 시퀀스는 굳이 베를린으로 가지 않고 컴퓨터 그래픽과 세트 설계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작품의 카메라는 익스트림 클로즈 업 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배우의 모습과 대화를 포착해 내는데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어쩌면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 때문에 베를린을 간 것은 그냥 그 곳의 공기를 포착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등장인물 모두에게 베를린은 안식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타 지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하여간 뭔가 이 작품이 도시를 잡아내는 방식을 볼 때마다 가수 김현식이 5집 앨범 커버를 위해서 사진을 찍을 때 뒷면에 쓸 것을 위해 사는 곳에서 굉장히 먼 바닷가까지 갔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그런데 막상 앨범 커버를 보면 백사장 모래와 김현식의 발만 클로즈 업 되어서 찍혀있기 때문에 어느 바닷가인지도 모른다. 누구 회고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 사람이 김현식의 촬영현장을 따라갔다가 굳이 저기까지 갈 필요가 있나 싶어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 당사자는 가야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

 

가령 배우 캐스팅에도 그런 부분이 있을텐데, 작품은 김서형이나 곽도원 같은 배우들을 그리 분량이 많지 않은 조연으로 출연시킨다. 아마 김서형은 <짝패> 때 출연한 인연으로 <베를린>에 합류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실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이 두 배우들을 작품에 좀 더 활용해야 했다는 아쉬움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은 결국 장소만 베를린일 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의 모티브가 나오는 작품이다. 참고로 김서형은 하정우 쪽과, 곽도원은 한석규 쪽과 연관이 있는데 이 주인공들이 서로의 진영에 질릴 정도로 징글징글한 임팩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이 두 배우들은 모두 제 몫을 잘 하고 있다. 

 

이경영과 하정우를 의심하는 김서형은 민소희 / 구은재의 정체를 밝히려 만날 뒤를 밟았던 <아내의 유혹> 시절의 명탐정 경력을 재활용하여 이들에게 위기를 닥치게 한다. (물론 이 부분이 중반부이고 여기서 반전에 가까운 이야기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고 곽도원은 등장할 때마다 한석규에게 계급이 깡패라는 가혹한 현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런 사람들의 등장은 표용성, 련정희, 정진수라는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고향'이라는 표현에 기묘한 환상을 품게 만든다.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의 고향에 관해 완벽히 다 알 수 없는 어떤 혐오감을 품고 있다. 표용성의 경우에는 그런 혐오감을 가장 늦게 깨닫게 되는데, 특이하게도 온갖 복잡한 설정들을 맞춰가던 작품이 특정 지점에서는 추상적인 사랑의 테마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놨다. 어떤 복잡한 원인으로 이러한 결과가 초래됐다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한 죄, 그 죄로 인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적들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품은 그런 사람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겟어웨이> 같은 작품도 강도였던 부부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고 자유를 향해 달려가는데, 그걸 생각하면 <베를린>은 참으로 슬픈 로맨스다. 그리고 그 로맨스로 특히 여성 관객의 눈물샘을 잡아내는데 있어 효과가 확실하다. 이 세 인물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세차게 휘몰아치는 액션의 대비는 이 작품이 여전히 흥미로운 지점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하고 나서 작품은 다시 후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또 뛰어나지도 않은 결말을 보여준다. 물론 해당 인물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만족감과 기대감을 주는 연출이다. 그러나 결말에 도달하기 이전에 등장했던 대사가 그 결말보다 몇 배는 더 높고 크다는 느낌을 줬다. "고향으로.. 고향으로 가자..", "우리 아직 못한 말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사람은 배신해." 같은 대사들 말이다.


하지만 작품은 거기서 멈춘다. 이 작품의 목적은 안전하게 착륙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류승완 감독의 신작이지만, 동시에 'CJ의 손길이 미친 블록버스터' 다. 우리는 요 몇 년간 CJ와 블록버스터라는 단어가 조합을 이루며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왔었는지를 알거나 들은 바 있다. 그걸 생각하면 이 작품은 내가 봤던 'CJ의 손길이 미친 블록버스터' 중에서 가장 정상적이다. 하지만 작품은 철저하게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 눈에는 류승완 감독이 뭔가를 더 하고 싶어하는 꿈틀대는 욕구를 애써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철저히 그 수준에서 만족할 수 있는 감독들이 있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세계를 특정지을만한 에센스가 있다. 로맨스 부분을 연출하는 능력도 마냥 고만고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겐 이 부분이 액션을 압도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었다. 좀 더 숨통을 틔어주면 더 날아갈 수 있을텐데 <베를린>은 그 모든 것을 조금은 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그게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더 모아야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개봉 3일 만에 1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순항 중이다. 류승완 감독의 욕망이 작가적인 것에 있는지, 아니면 장인적인 것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한다. 작가든, 장인이든 그는 앞에 '더 나은'이란 표현을 붙일 수 있는 감독으로 보인다. 나는 <부당거래>와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만든 그가 다음에 저런 작품들을 만들어 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가능하면 전자보다는 후자로. 위험하겠지만... <베를린>은 안전하고 재밌으나 내게는 어느 시점에서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예상보다 나쁜 시퀀스도 있다. 

 

그러나 예상 외의 지점에서 놀라움도 주기 때문에 'CJ의 손길이 미친 이전 블록버스터들' 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p.s.1 - 이 끄적임을 지금 한 새벽 5시 대에 마무리를 했는데, 보기는 어제 아침에 조조로 봤고, 보고 와서 갑자기 바로 쓸 수 있을 법한 끄적거림의 덩어리들이 뇌를 타고 올라오길래 조금 자고 밤 7시에 일어나서 끄적였습니다. 근데 보다 보니 작품의 표절에 관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하나는 본 시리즈고, 그건 제가 본 작품이라 위에 포함을 했습니다만 다른 한 작품은 바로 <차일드 44> 였습니다. 너무 비슷하다는 거죠. 일단 이 작품은 읽어보지 못한 관계로 뺐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도 원작소설은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마틴 리트 감독님의 영화 버전을 봤기 때문에...) 대신 DVD 프라임에 스테판 님이 작성한 소설과의 유사 장면 설명 게시물이 있길래 읽어봤지요. 읽어보고 느낀 것은 전 동의할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게 논란이 될 정도로 비슷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이미 두 책을 읽었다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요.

 

그러나 저도 궁금한 게 한 가지 생기긴 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표종성이 책을 손에 들고 있고, 그 책이 클로즈 업 되는 쇼트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적힌 건 저자의 이름입니다. 존 르 카레. 정확히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자의 이름은 확실하다. 작품에 대한 류승완 감독님의 일종의 경의겠죠. 근데 <차일드 44>를 지은 톰 롭 스미스 님의 이름은 없어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만약 <베를린>에서 톰 롭 스미스 님의 이름이 적힌 책을 보여주는 쇼트가 하나 나왔으면 지금만큼의 논란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도 경의로 해석될 수 있을텐데. 왜 존 르 카레 님의 이름은 보여줌녀서 톰 롭 스미스 님의 이름은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텐데. 왜지? 나왔는데 내가 놓쳤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독 CJ 쪽 작품들과 관련해서 예전부터 표절에 진배없는 차용이 연달아 나온 탓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일수도 있겠지요. 저는 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이 점에서 류승완 감독님의 대답이 궁금해지기는 합니다. 아마 감독님 본인도 <차일드 44>에 관해서는 한 번 언급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어떤 말일지라도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명확하게 뭔가를 말하는게 분명 침묵보다 훨씬 도움이 될테니까요. 화제작이라 인터뷰도 많이 했을테니 한 번 찾아봐야 겠습니다.


p.s.2 - 갈대밭 장면은, 사실 순전히 갈대가 나와서 그런 것도 있는데 <겟어웨이>의 커플이 장철 감독님의 <철수무정>과 마이클 리치 감독님의 <프라임 컷>의 갈대밭에 떨어진 것 같다고 미약하게나마 연상됐었습니다.


p.s.3 - 전지현 님은 신기하게도 표준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더 잘 어울리는 배우 같아요. (후시 녹음 탓이기도 하지만 저는 <도둑들>에서의 연기도 다소 어색하게 보였거든요.) <블러드> 같은 경우에도 작품 자체는 솔직히 많이 그렇습니다만 전지현 님의 영어 연기는 기억에 남거든요.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개인적으로 북한쪽 사투리를 가장 어울리게 구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경영, 하정우, 류승범 님 같은 배우들이 있는데 말이죠!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나서 조금 쇳소리가 나는 듯한 톤인 이경영 님의 연기를 보면서 북한 사투리를 못 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몇몇 표현이나 발음이 쇳소리와 섞여서 새는 것 같더군요. 그런 부분들은 못 알아 들었습니다. 어쨌든 결론은 전지현 님은 <베를린>에서의 연기가 <엽기적인 그녀> 이후로 최고인 거 같네요.

 

p.s.4 - 이 작품은 등장배우들이 영어발음을 할 때 굳이 원어민처럼 발음하려고 들지 않아서 그게 참 좋았습니다. 저는 외국어를 발음할 때 그 국가의 문화권에 따라서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굳이 어울리지도 않고, 되기도 힘든 원어민식 발음에 집착하면 그게 그렇게 어색하게 보일 수가 없어요. 근데 이 작품은 그게 없어 좋더군요. 그리고 가장 감탄했던 것은 한석규 님의 외국어 연기였습니다. 세탁소에서 동료랑 얘기할 때 USB 하나 꺼내들고 구슬리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p.s.5 - 먹방의 신이 뭘 먹는 장면이 거의 없더군요. 그나마 있는 것이 아침밥 먹는 장면인데, 그래도 놀라운 것이 먹방의 신이 깨작깨작 먹음에도 불구하고 밥알 씹히는 소리가 들려요. 아니.. 밥에서 씹히는 소리가 날 수 있나..? 어떻게 저런 밥알 씹는 소리가 날 수 있지? 아무리 맛없게 먹는다고 할지라도 먹방의 신이 어디 가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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