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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HD텔레시네) - [할인행사]
이장호 감독, 이보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 전모 (氈帽) : 조선시대 여성들이 나들이 때 쓰던 쓰개의 하나.

감독: 이장호
주연: 이보희, 안성기, 김명곤, 박원숙, 신충식, 김기주, 문태선, 김성찬, 김하림, 윤순홍, 김형섭, 추석양
음악: 이종구
촬영: 박승배
18세 관람가 / Color / 110분 (극장 개봉판, VHS 출시판), 1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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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의 도입부는 조선시대 성종 집권기의 어느 칠흑같은 밤이다. 평민들이 일제히 탈을 쓰고 한 판 놀아보자는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개중에는 그 놀자판인 시간을 아껴 숲속에서 마치 짐승이 교미하듯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랑을 나눈 여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기생의 시녀였다. 시녀는 그렇게 자유분방한데, 이 기생은 나름의 품위를 지키겠다는 듯 가만히 있다가 별안간 납치를 당한다. 처음엔 보쌈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다. 납치한 자는 그녀를 범한 뒤에 죽이려 든다. 보통은 이런 죽이겠다는 위협을 들으면 벌벌 떨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별안간 호탕하게 웃어제끼더니 단박에 이 암살자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호통을 쳐서 그를 무릎꿇린다. 그러고는 얘기한다. 계집의 몸이 그깟 칼로 열려질 것 같으냐? 그래. 이제 내가 너를 가지고 놀아주지. 공깃돌 갖고 놀듯이 말이야. 도입부로 따지면 초장부터 세게 나가는 것이 아주 강렬하다. 표현수위로 보나 그 시퀀스 자체가 주는 격렬함은 관람 중인 관객에게도 어떤 본능적인 감정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잠깐 1980년대 초반의 이장호 감독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는 1976년부터 4년동안 대마초 사건 때문에 충무로 바깥에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바람불어 좋은 날>로 1980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대신 그것이 <별들의 고향> 이나 <어제 내린 비> 시절의 '흥행사' 로서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바람불어 좋은 날>을 통해 한국영화계에 다시 한 가지 화두를 들고 왔다. 그것은 바로 작가들이 다시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그 점에 관해 나름의 발언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문제다. 누구나 하고 싶어 했던 것, 그러나 호스테스 장르와 문예 장르가 맛보게 해줬던 과육에 취해서, 혹은 남산 밑으로 끌려가 구정물 들이킬까봐 하지 않았던 것. 표현의 자유가 마음대로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몰라 괴로워할 때 이장호 감독은 직구를 날리며 자신의 이름을 화려하게 휘날렸다.
그러나 그런 위용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바람불어 좋은 날>은 '서울의 봄', 그리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부터 본편 사전 검열까지 딱 한 부분만 삭제되고 거의 온전하게 보전되어 개봉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감독이 1년 뒤에 바로 차기작으로 내놓고, 3부작으로 만들 생각을 한 <어둠의 자식들>이 문공부에 의해 최종 편집본이 5분 가량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몇십초만 잘려도 바로 티가 나는 영화에서 5분부터는 이미 이야기 자체에 큰 구멍 내는 것을 각오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작품은 해외에 수출되는 것을 금지당했다. 비록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제작환경이 다시 힘들어 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또 문제가 된 것이 이미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정지를 당하기 전에 영화사와 맺어놨던 계약이 하나 있어서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를 동시 촬영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판이한 줄거리를 가진 두 작품을 동시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에서 감독은 자신의 권한을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에게 일임했고, 그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이 시기의 감독은 그랬다. 그나마 흥행과 영화제 수상 부분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둔 <낮은 대로 임하소서>는 별로 특출나지 않은 기독교 관련 작품이었고, <바보선언>이라는 무시무시한 걸작을 만들어 내지만 이 작품도 흥행몰이를 하기 전엔 제대로 개봉조차 하지 못한 채 1년간 영화사 창고에서 썩어야만 했다. 그 사이 만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와 <과부춤>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던 것이다. <어둠의 자식들>에 이어 <바보선언>이 한국영화계에 준 충격은 대단했지만, 80년대 초반기가 끝나갈 때 쯤의 이장호 감독은 더이상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흥행감독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 이장호 감독의 말에 따르면 한 가지 뭔가 계기가 되었을지 모를 만남이 이뤄진다. 바로 자신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 데뷔한 배창호 감독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한 시점에서 영화사무실까지 하나 차리게 된다. 그래서 일단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 새마을 운동에 관련된 작품인 <잘살아보세>를 만들기로 하고 자신의 촬영팀과 횡계에 있는 한 오징어 불고기 식당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는 마침 배창호 감독의 촬영팀도 자리잡고 있었다. <꼬방동네 사람들>로 혜성같이 등장한 배창호 감독은 당시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만들던 중이었다. 조감독이었던 사람은 지금 자신을 압도하는 신성이 되어있다... 그 때 이장호 감독 본인은 뭔가 다시 시작해서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 얼굴만으로 충분히 야하게 가는 <무릎과 무릎사이> (위의 사진) *

그런데 왜 하필 그 의지의 시작이 <무릎과 무릎사이> 였고, 이후에 <어우동>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것도 이장호 감독이? 아무리 방기환 작가의 신문연재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 했다고 할지언정, 이 시절의 관객들은 어쩌면 이장호 감독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을런지도 모르겠다. 당시 섹스를 활용한 작품들에 관해서는 전두환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우민화 정책인 3S 정책에 연관되어 있었단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흥영화사 창립작품으로 만들어진 <무릎과 무릎사이> 는 확실히 이장호 감독이 이전에 이뤄낸 여러 성과를 생각하면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상당히 얄팍하기 그지 없는 작품이었다. 그냥 성적 쾌락을 안겨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싶지 않아서 살짝 반미정서적 테마를 끼워넣은 작품이랄까. 비록 이장호 감독에게는 다시 한 번 흥행감독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해 준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우동>은 앞에 그 작품이 있다는 이유로 도매금 당하기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왜 그러냐 하니, 사실 이 작품은 <과부춤>과 <바보선언>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감독의 마음 속에서 나름의 프로젝트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자체도 좋은 얘기거리가 되겠지만, 원작소설 자체가 글과 삽입된 삽화로 많은 인기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영화화 경쟁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감독은 김원두 사장이 있는 현진영화사와 손을 잡고 작품을 만들어보려 했으나 <일송정 푸른 솔은>의 제작을 먼저 제안받는 바람에 작품은 미뤄져 버렸던 역사가 있었다. 이후에 감독 본인이 이 작품에 관해 어떤 감정을 가졌던 간에 <어우동> 자체는 나름대로 전부터 그에겐 염원이라고 할만한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태흥영화사에서 제작을 맡겠다고 하면서 결국 이뤄지게 된다.

* 물론 자신의 이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다소 얄팍한 접근법이 필요했던 것 같다. 영화월간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이장호 감독은 <어우동>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태원 사장이 또 하나의 에로물을 원했다' 고 답했다.
당시 태흥영화사는 첫 작품으로 당시 임권택 감독의 신작이자 배우 김지미의 복귀작으로 <비구니>를 만들고 있었는데, 불교계가 그 작품 만들지 말라고 거세게 반발하는 바람에 반 이상 찍어놓은 작품 제작을 중단해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 본인도 다시 재활용하고 싶을 정도로 잘 찍힌 전쟁 피난 시퀀스가 있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태흥영화사가 몇 번 이사하는 와중에 원본 필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작품, 제작비적인 면에서 큰 손해를 보고 실의에 빠져 있던 영화사를 다시 살린 또 다른 '첫 작품'이 <무릎과 무릎사이>인 셈이다. 프랑스 낭트 영화제까지 초청되어 톡톡히 재미를 본 이태원 사장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또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장호 감독에게 말했고, 그 때 그가 꺼낸 카드가 바로 <어우동> 이었다. *
<어우동>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스승으로 따지면 신상옥 감독이 만든 일련의 조선시대 여성사극들, 동시대의 작품들로 따지면 이전에 나온 이두용 감독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궤를 비슷하게 한다.. 바로 인권이라는 게 없었던 조선시대 여성수난극. 실제 어우동은 현재 가계도는 삭제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단은 승문원 지사 관직에 오른 바 있는 박윤창의 딸이라고 한다. 태어난 지명이 '음성 군 음죽 현' 이라 이미 태생부터 '음풍' 휘날리게 생긴 거 아니냐는 농을 걸어봄직 하겠지만 어우동, 혹은 어을우동 당사자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조신한 처자였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화려한 스캔들의 아이콘이 되던 계기는 전적으로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해 시집간 곳에서 무시를 당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던 것일게다.
보통 내가 다니는 대학도서관에는 찾는 책이 어지간하면 다 있고, 방기환 작가의 작품들도 여럿 구비가 되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동명원작은 없었다. 읽어보지 못해서 원작소설에 관해서는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장호 감독의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 어우동이 기녀가 되는 계기를 조금 극적으로 표현한 것을 제외하면, 적어도 그녀의 행적에서만큼은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충실한 편이다. '무늬만 조선시대'를 지향했던 당대의 수많은 토속물들을 생각하면 그 나름대로 들인 정성에서부터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확실한 구별점을 만들어 놓고 있는 셈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서 '칠거지악' 이라는 규율에 얽매인 여성은 얼마나 숨쉬기 힘들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어우동 역시 자신의 남편이자 변태인 태산군과 결혼하여 온갖 곤욕을 치루지만 그것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보희가 연기한 어우동은 결론적으로 강수연이 연기한 옥녀, 원미경이 연기한 길례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이미 역사 속에서 얼굴로 따지면 절세미인의 축에 들고 설정 상 몸 자체가 타고난 명기라고도 하는데 그걸 이용해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선사회에 좌절하지 않고 반항해 보는 것이다. 어우동의 그런 시도는 성공적이다. 그녀는 '꽃이 나비를 따라가나? 나비가 꽃을 따라와야지' 란 말을 가장 잘 실천하고 또 잘 이용하는 여자다. 탐욕스러운 어르신들은 공맹 운운하며 얻은 지식을 자랑할 데가 없어 낑낑대는데, 이 여자가 그걸 다 이해하고 받아주니 서초동 영포 빌딩 밑에 있는 보신탕 집 여주인마냥 매혹적 (이거 칭찬이다. 후에 국가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 바람 쐬러 나가자고 그랬다잖아.)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우동은 보신탕 집 여주인보다 독하다. 자신을 탐하러 온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포로로 만든 다음, 기운을 아주 죄다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취한 남자라고 문신까지 새기게 해서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웬만한 죽음의 위협이 앞에 다가와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어 넘기는 배포까지 있다. 이러니 어우동은 곧 조선시대 '남자양반들' 의 '토미에'로 승화된다. 누구나 절박하게 원하는 여성이지만 동시에 토막살해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어우동>은 역사적 충실함과 더불어 언제나 작품이 동일선상에 놓여지고 비교되던 당대의 '에로' 장르와 구별되는 상업적인 장점들이 있다. 일단 진지한 톤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라 작정하고 웃기려 드는 유머는 없지만 양반, 혹은 절대권력처럼 군림해오는 요소를 전복시키는 통쾌함이 있다. 그리고 여러 애마부인들과 당대의 외국 경쟁자들 정도는 가볍게 쌈 싸먹는 젊은 이보희가 마음껏 자신의 누드를 자랑하며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보희의 매력은 가히 폭발적인데, 그런 그녀를 보호하는 두 명의 남자들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도발적인 소재, 섹스, 복수의 롤러코스터가 함께 펼쳐지니 이 점이 상당히 재밌게 다가온다. 보통 한국에서 이런 류의 여성 수난기를 다룬 작품은 언제부터인가 한두가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파격이 시대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더이상 아무것도 없는 내용을 가져다 '예술' 이라고 빙자할 수가 없어 점점 존재가치가 도태되었다. (가령 유진선 감독의 <매춘>은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나영희가 보여주는 그 순간의 열연만이 살아남아 있다.)

<어우동>은 어떤가? 작품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두 명의 남자를 등장시킨다. 한 명은 김명곤이 연기한 천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안성기가 연기한 갈매라는 인물로 작품의 남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두 인물이 가진 특이점은 양반으로 인해 불구의 신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양반집 머슴이었던 갈매는 그 집 딸내미를 말 그대로 도와주고 업어줬다는 이유로 몽둥이질을 당하고 음부의 일부가 잘려나간다. 그리고 마침 그것을 지켜보게 된 천가는 이 행위가 누설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혀가 잘린다. 이후, 그들은 어우동에 관해 각자 다른 의뢰를 받으면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일반인을 초월한 육체적 능력을 갖고 있다. 작품은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이 점에 관해서 더 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후천적 불구자들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일반인들을 압도하는 초인적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인물을 보면 이 문제는 곧 어우동에게도 해당된다. 어우동의 아버지로부터 그녀를 즉사시키라는 의뢰를 받은 갈매는 곧 어우동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고, 그녀를 보호하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가 어떻게 이들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을까? 신체가 불구인 것도 아닌데.
그래서 작품은 어우동의 누드를 이용한 쾌락적인 시퀀스를 보여주는 것 사이사이로 그녀의 과거회상을 배치해 놓고, 어떤 지점에서는 잠시 본래 진행되는 이야기보다 아예 여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장 힘을 준 부분은 그녀가 기생의 삶을 살게 되는 순간에서다. 남편의 엽색 행각에 질리고, 시댁의 냉대에 질린 어우동은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온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딸은 출가외인' 이라는 이유를 들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녀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칠거지악이라는 수난을 공유하고 있는 어머니 뿐이다. 그 어머니마저도 시댁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좌절한 어우동은 자신의 시녀와 함께 끝끝내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먼 길을 방랑한다. 어딜 가도 여성의 삶이 이 따위라면, 차라리 이 세상을 떠버리고 마는 것이 외려 마음고생도 덜고 편하지 않을까. 무언가 결심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쓰던 전모를 벗어던진다.

이장호 감독의 작품에는 대체적으로 품 속의 이야기 전개에서 어떤 식으로든 여기는 자신이 힘 줘서 구상한 것이라고 웅변하듯 찍어놓은 시퀀스가 한 번씩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게 사실 초창기에는 완성도를 깎아내리는 단점이라고 보고 있는 편인데, 가령 데뷔작인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주인공 경아가 윤일봉이 연기한 준만의 집에 후처로 들어가 생활하는 시퀀스가 있다. 경아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고독하게 그 집에서 정신적으로 병들어가는 준만을 위로하지만, 곧 그녀가 중절을 했고 상상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준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변명 삼아 경아를 떠나버린다. 고독해지고 동시에 비정해져 가는 현대인을 묘사하기 위해 작품이 배치한 중요한 한 방이기에 신성일이 등장하는 시퀀스 만큼이나 비중있게 묘사되는데, 이상하게 이들이 등장하는 시퀀스의 장면 연출이 슬픈 로맨스를 다루는 작품을 난데없는 심리 호러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는 두번째 작품인 <어제 내린 비> 에서도 비슷한데, 동생의 애인을 사랑한 형의 트라우마를 호러 분위기로 둔갑시켰던 것이 그랬다. 이장호 감독은 새로운 곳으로 튀고 싶은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본인 나름대로는 뭔가 세련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사실 그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 점은 배창호 감독이 더 안정적이었다고 본다.
어쨌든 이 부분들이 다소 안정적으로 안착했다고 보여졌던 건 당연히 <바람불어 좋은 날> 부터였다. 이 작품은 이미 리뷰를 했으니 보면 알겠지만 세 젊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퀀스 대신 이향이 연기한 노인의 이야기가 마침내 서술되는 지점이 정말 강렬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과부춤>에서 만삭의 여인이 방을 박차고 뛰어나올 때의 슬로우 모션이라든가, 필히 봐야 할 걸작인 <바보선언> 에서 등장하는 이보희의 장례식 같은 시퀀스는 화려하게 복귀한 이장호 감독을 단순한 흥행사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핵심적인 '한 방'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어우동>은 위의 시퀀스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보희가 절망적인 심정의 뒷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앉아서 흰 천을 휘날리며 살풀이를 하는 부분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명장면은 어우동이 새처럼 날아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자살을 위해 강으로 뛰어들며 비통함을 최대치로 끌어낸 채로 끝이 난다. 이것도 그냥 그저 그런 신파일까. 어찌됐건 관객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게 목적이라는 점에서 부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강요가 아닌 영상언어를 통해 설득을 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이후, 강물에 빠진 어우동은 기생들의 맏언니 격인 향지에게 구출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고, 그녀는 후세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간다.

사실 이장호 감독의 영상감각은 정갈하지는 않더라도 대담한 맛이 분명히 있다. 가령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 작품의 무시무시한 결말을 다소 진부하게 만들었던 것이 함께 등장했던 자막이었다. 등장하는 방법도 그렇거니와, 거기서 서술되는 자막의 내용도 옥녀를 포함한 씨받이들의 비참한 삶과 그 악습을 특색없이 비판하는 수준 정도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 에도 배경이 되는 성종시대에 관해 서술되는 자막들이 몇 번씩 사용되곤 하는데, <씨받이> 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건 그 자막이 서술될 때 등장하는 다이나믹한 효과에서다. 그래도 엄연한 사극인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자막의 등장이 자칫 이 장르의 격을 떨어뜨리는 거 아닐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는 어울리고, 작품에 관해 따분할지도 모른다는 첫 인상을 말끔하게 지워버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위에서 이야기한 어우동의 자살 시도 시퀀스를 제외하면 그런 연출에서 이장호 감독의 고질적인 단점이 많이 드러나 있는 편이다. 초기 시절처럼 장르를 구분 못하는 건 아닌데, 작품이 담고 있는 함의를 어떻게든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이 많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상으로 멋지게 승화되면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칠거지악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악습이나, 참고만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심정을 웅변하듯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애쓰는 부분들이 많아서 과하게 친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많이 얘기해주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흥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법. 그래서 이보희가 카메라 렌즈 가까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관객을 쳐다보며 춤을 추는 매혹적인 시퀀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의심을 안겨준다. 왜 저렇게 애써 설명해 주려고 안달이지? '벗는 영화가 아니다' 라는 걸 그렇게 필사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안 그래도 노출이 포화 상태에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그래서 주제의식을 굳이 직접적으로 웅변하려 애쓴 것이 오히려 이 작품을 야한 작품으로만 기억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지간히 자격지심 있는가 보구나 싶은게다.

* 그 외 지나치게 과잉으로 밀어부치는 경우. 어우동이 자신의 정력을 자랑하듯 남정네들을 그로기로 몰고 가는 이 부분에서 작품은 이보희의 얼굴과 그녀가 펼치는 화려한 진기명기를 겹쳐놓는다. 여기서 이보희는 쉴새없이 웃고 있다. 지금 감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보희 누님 쉬지도 않고 웃으시니 턱 아프시겠다.' 정도다. *
그 점에 관해 한 마디 하자면, 작품은 어우동이란 인물을 단면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어우동의 이미지 때문에 올 초에도 흑요석이란 예명을 쓰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모바일 게임인 <밀리언 아서> 에 어우동 일러스트를 그려 넣었다가 네티즌들에 의해 '어우동이라 싫다', '기생년을 왜 쓰냐' 는 등의 괴이한 비난에 시달린 일명 '어우동 사태'가 일어난 바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의 그녀는 스캔들메이커이자 동시에 가무와 시문이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개밥그릇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양반이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학식의 깊이가 있는 법이라, 그들을 매혹시키는 기생이라면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교양을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어우동은 당대에 그 스캔들이 부각되어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순 없지만 시화집인 <송계만록>에 남겨져 있는 '부여회고' 같은 자작시를 보면 웬만한 양반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작품은 재미와의 절충점을 찾기 위해 어우동의 이런 교양을 선보일 수 있는 시퀀스를 남자들을 애타게 만드는 대화로 처리하는 재치를 보인다. 소설의 문장들을 빌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순순히 허락하지 않고 고상하게 남자들을 갖고 노는 작품 속 어우동의 대사는 그 절묘함에 무릎을 치게 만든다. 가령 작품이 시작된지 32분 정도가 지난 뒤에 등장하는 이런 대사들이 그렇다.
"내가 왔네. 나비가 왔네."
"그 나비, 꿀을 딸 줄이나 아실런지?"
"부리 없는 나비 봤나?"
"나비도 나비 나름!"
"허허. 찔려보면 알 일."
"매가 꿩을 쫓듯, 순서가 있는 법."
이후에 합환주를 먹여주는 척 하면서 이 남자를 협박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들 때, "안주가 필요한 건 나으리만이 아니었습니다요." 라고 존대를 쓰다 "큰 소리? 이봐!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그리 쉽게 벗어날 줄 알았나?" 라고 바로 반말로 전환하여 순간의 카리스마를 뿜어내 상대의 기를 눌러버리는 타이밍, 그리고 "어떤가? 자네가 내 말을 거역해 볼 용기가 있는가? 어서 이리 와 엎드려!" 라고 말하면서 그를 굴종시키며 마무리 하는 대화 시퀀스는 참으로 강렬하고 또 유려하다. 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차이가 하늘과 땅 같았던 시기였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그녀의 모습이 이후의 전개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반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후반부에서 평민으로 변장하고 자신을 만나러 온 성종을 무릎 꿇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전개는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초래하고 어우동, 갈매, 천가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다. 뭐,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어우동의 입장에서는 별 상관 없었겠지만 그녀도 힘들었을 것이다.

* 그 당시나 현재의 관객들이 볼 수 없는 시퀀스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어우동과 성종의 섹스 장면이다. (절대 '성종과 어우동'이 아니다!) 이게 얘기 들은 바로는 처음 개봉할 때는 있었다고 하는데 누군가가 이 장면과 관련해서 감사원에 투서를 넣었다고 한다. 성종이 어우동에게 놀아나는 부분은 당대의 권력자, 즉 전두환 군사정권을 조롱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장호 감독은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GV를 진행할 때 그 부분에 관해서는 본인은 별 의도가 없었는데 부풀려진 것이라 답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말을 했다.
"만약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그건 제 의도가 아니라 어우동의 의도겠지요."
근데 또 생각해보면 웃긴 것이 당시 군사정권은 자기들을 '왕'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딱히 그렇게 생각해주고 싶지도 않은데 지들 혼자 헛물 켰던 것 같아서 이게 또 우습다. 어쨌든 태흥영화사와 스펙트럼 측에서 후에 HD 텔레시네가 된 <어우동> DVD를 발매하기 위해서 삭제 장면이 있는지 찾아본 것 같은데, 끝끝내 그 삭제된 부분은 찾지 못했다. *
갈매는 이런 상황을 보고 그녀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임을 깨닫는다. 사랑 받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처럼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협을 받는 존재. 심지어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존재. 두 사람은 웬만한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래도 상대방 측에서 인해전술로 승부하면 아무래도 당해내기 버겁기 마련이다. 결국 이들은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애초에 이장호 감독 본인도 별로 의도한 것 같지도 않으니 뭔가 더 깊게 파고들 의욕도 없다만, <어우동>에서의 시대비판적 연출은 되려 자기는 이 정도 했다고 떠벌려서 인정받고 싶은 관심병 종자같은 면이 있어 그리 흥미롭지 않다. 작품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시대를 말하고자 하든, 장르적인 재미를 주고자 하든 간에 일단 '캐릭터'를 통해서 펼쳐질 때다. 사실 이 작품은 굳이 그렇게 입으로 불평등, 여성수난사 등을 부르짖을 필요가 없었다. 캐릭터들의 필터를 통과하는 순간, 이미 다 납득이 되는 연출력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역시 마무리를 섹스 장면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여기가 아주 가슴에 사무치게 슬프다. 아. 맞다. 깜빡했네. 위에서 어우동이 양반들에게 문신을 새겼다는 이야기를 썼었는데, 사실 이것이 이장호 감독의 작품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감독이 이 디테일을 역전시켜서 딱 한 번 활용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는 남자들의 몸에 직접 문신을 새기던 어우동은 이 작품에선 본인이 남자의 손에 의해 문신이 새겨지기를 자청한다. 그 문신을 새겨주는 사람은 바로 갈매다. 그는 뭘 새기고 있을까. 飛. 날 비. 갈매는 어우동과 함께 '날고 싶어한다'. 아마 신상옥 감독의 <내시>와 더불어 한국영화 사상 가장 슬픈 섹스 장면이 아닐까. 시대에 의해 인생이 뒤바뀐 여자와 성불구자가 된 남자는 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가며 되지도 않을 섹스에 몰입한다. 그런데 이게 몰입이 되냔 말이다. 안 될 것이 뻔한데! 그들은 불평등한 시대에 당하고, 또 이룰 수 없는 설움을 그렇게나마 분출한다. 조선 왕조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의 열망은 이뤄질 수가 없다. 그래서 날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가 멸망하는 길을 택한다.
<어우동>은 사실 캐릭터를 봐야 얘기거리와 가치가 많아지는 작품이다. 섹스도 몸을 통해 하는 것이고, 그 몸이란 결국 인물로서 귀결되는 법이다. 감독은 이 작품의 재평가를 요구할 때 꼭 의상 부분을 거론하곤 했다. 실제로도 <어우동>에서의 복식 고증은 이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던 요소이기도 하다. 박물관에 가서 조사도 하고, 실제 고증을 꼼꼼하게 거쳤으며 작품을 수놓는 화려한 원색의 향연은 사극 장르의 어떤 부분들에 한해선 새로 정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복식과 더불어 그것을 착용하는 인물이 있어야 배경이 되는 시대의 양면을 완전히 알 수 있는 법이다. 적어도 이 작품은 그렇다. 물론 <씨받이>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결말처리도 만만찮게 강렬하다. 그리고 어쩌면 담고 있는 함의나 감독 본인의 고민의 흔적이 더 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어우동>을 그 작품들보다 하대 한다는 건 조금 부당하다. 인물을 보면 어우동의 행각들은 마치 바뀔 수 없는 시대에 절망해서 자신을 함부로 대하며 망가져가는 여인의 이야기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엔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주려고 하는 남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장르적 재미에 안착하려는 욕망도 만만찮게 대단한 작품이지만, 나름대로 냉혹한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각을 크게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실상 흥행 외적인 면에서 다시 한 번 거론되어져야만 한다. 진지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져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올시다 라고 답하겠지만, (그런 거 없어! 내가 볼 때는!) 나름대로의 확연한 개성을 가진 여성 드라마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그 시대에 가장 잘 나갔던 섹스 영화' 라고 규정되기엔 다소 억울하다. 그런 왕좌는 <무릎과 무릎사이>가 차지해도 될 일이고, 아님 <애마부인> 시리즈가 가져가야 마땅할테니 말이다. 어찌됐던 이장호 감독은 1987년까지 나름의 걸작을 만들어내는 영화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이 작품 덕이다.

p.s.1 - DVD의 서플먼트로 수록된 극장 예고편이 나름 특별합니다. 당시 작품 촬영을 위해 감독과 출연진, 제작진들이 모두 모여 준비를 하는 모습을 찍어놨었거든요. 임권택 감독님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극장 예고편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 졌는데, <어우동>의 예고편은 그런 촬영 준비 모습과 더불어 본편에서 빠진 시퀀스가 등장하기도 하는 등 예고편 자체가 재밌게 만들어져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 작품들의 예고편이 이런 독특한 맛이 있는데 <바보선언>이야 본편 만큼 포스 있고, <무릎과 무릎사이> 예고편 에는 안성기 님과 이보희 님이 쉴새없이 끈적한 목소리로 '무릎과..무릎사이'를 후크송처럼 주구장창 읊었죠. 사이사이에 '만져보고 싶어요..', '무릎의 향기..욕망..', '갖고 싶어요..' 같은 표현들을 끼워 넣음으로서 당시 관객들에게 제대로 mind-fuck 을 먹여줬었습니다. 지금 들으면 많이 웃기죠. 기분 우울할 때마다 한 번씩 보고 빵빵 터지는 <코만도> 국내 예고편의 포스만큼은 못 미치지만 말예요.
<어우동>의 극장 예고편은 위의 저런 요소들 외에 연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감독님과 배우 분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오디오 인터뷰가 섞여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압권은 안성기 님의 당시 목소리였지요. "..으하하하. 이장호 감독.. 그 사람 참 요새,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에 만드는 게 그렇게 막 노출되고.."

p.s.2 - 이건 확인되지 않고 그냥 들은 이야기 입니다만 이 작품이 일본에 소개될 때는 'AV 물' 카테고리에 배치되어 있었다더군요. 확실히, 표현수위가 지금 봐도 나름 강렬하긴 합니다.
p.s.3 - <백년의 유산> 이라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요즘 아침 드라마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시어머니를 연기하는 배우 분이 이 작품에선 너무나 인자한 기생들의 맏언니를 맡고 있어 참 놀랍다 싶기도 합니다. 원래 이런 역할도 잘 하는 배우 분이긴 합니다만, 그 드라마 즐겨 보시는 분들은 <어우동> 에서 향지를 연기한 '박원숙' 님은 적응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p.s.4 - 개인적으로 이장호 감독님에 관한 인터뷰를 찾아보면서 참 싫었던 것은, <어우동>에 관한 이 분의 모호한 입장입니다. <월간조선> 2011년 1월호에서의 인터뷰를 보고 있으면 이 작품에 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정확히 내 영화를 집어낸 사람은 없어요. 예를 들면 <어우동>, <무릎과 무릎사이>에 대해서는 평 자체를 못 받았어요. 마치 에로물처럼 취급하더군요..', <키노>에서 이뤄진 97년경의 인터뷰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하던데, 2012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 개최로 인터뷰를 가졌을 때는 이 작품에 관해서 그냥 '<어우동>을 만들 때는 정말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돈 독이 올랐었지.' 라고 얘기하며 이 작품을 '그냥 에로영화'로 규정해 버립니다.
이게 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힘이 빠져요. 싫으면 싫다고 얘길 하든가, 이거도 아니고 저거도 아니고.. 자신의 작품을 집어낸 사람이 없다고 그래놓고 인터뷰만 보고 있으면 감독님 본인이 본인 작품을 집어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러길 포기한 것 같아서 말이죠. 재평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해 만든 그냥 에로영화' 라고 별 거 아닌 것처럼 얘기해 버리면 어떡하냐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언론플레이 잘 하는 것 같아서 '이장호 감독님 답다' 싶습니다만. 뭐, 굳이 감독 생각이 어쨌든 간에 제가 보고 좋으면 될 일이지만 그 작품 만든 사람까지 직접 나서서 별 거 아닌 것처럼 얘기해 버리면 그게 그렇게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드는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아요.
p.s.5 - 이장호 감독님은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두 기생 중 한 명인 어우동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감독님의 제자이자 그와 함께 8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가도를 이끌었던 배창호 감독님도 또 다른 기생 한 사람을 다루게 됩니다.
Pt.2 에서 뵙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