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체적으로 설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시고 극장 가셔도 괜찮을 거에요.
사실 소설이 있으니까 스포일러니 하기도 그렇긴 하지만. *
 
감독: 임순례
주연: 김윤석, 오연수, 백승환, 한예리, 박사랑, 김태훈, 송삼동, 주진모, 정문성, 이도경, 김성균
음악: 장영규, 달파란
촬영: 조용규
15세 관람가 / Color / 121분
 
(2013, 2, 14)


.....

 

 

고지서에 부과된 납부금을 징글징글하게 안 내고 버티는 찻집이 하나 있다. 정확히는 집과 찻집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이지만. 이미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아는 듯 하지만 어쨌든 납부금 받으러 온 공무원은 찻집 아들인 나라에게 아버지가 어디 가셨는지를 물어본다. 아들은 마치 외운 듯이 척척  "저희 아버지는 멀리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무슨 남쪽 섬이랍니다. 바닷가 언덕바지에 집을 짓고 밭을 일궈 수확의 계절이 될 때 쯤에 가족을 데리러 온다고 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작품은 최나라 역을 맡은 아역 배우인 백승환에게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에 나오는 문장을 거의 그대로 말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라의 표정이다. 마치 앵무새처럼 그대로 외우듯 말하면서 이젠 더 얘기하기도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은 시각적인 면에서 더 자세해질 수 있는 영화 매체의 장점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잠시 원작과 궤를 같이 하면서 유쾌하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유쾌함의 근원은 다름아닌 '범상하지 않은 것' 이다. 공무원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최나라의 아버지, 최해갑은 해경에 의해 바다 한가운데 어선 위에서 발견된다.

 

나는 일본문학과 어느 정도 맞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고전이나 근대문학은 아닌데 현대문학에 와서 그런 느낌이 잘 드는 편이다. 애초부터 어떤 문학을 취향이라 정하고 그것만 파고 드는 건 아니긴 하나 여튼 그렇다는 얘기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 표현하기가 애매하지만, 소설의 이야기보다는 가끔씩 작가 본인의 문화적 취향과 지식을 자랑하려고 드는 것 같은 게 문학을 읽는다는 생각을 방해하게 만드는 것 같다. 뭐,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품의 이야기보다는 그 작가의 실제 문화생활에서의 스타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야기나 주변인물에 대한 묘사보다는 그들이 뭘 마시거나 뭘 듣고 있는지를 신경 쓰는 듯 하는 것. 그 외에 문체의 표현도 있을 것이다. 근데 사실 이건 언제부터인가 현대에 출간되는 문학을 읽으면서 느꼈던 문제란 생각도 들고.. 하여간 이상하게 영화를 볼 때는 그런 거부감이 덜한데, 지금 가벼운 커버 디자인으로 출판되고 있는 일본문학들은 쉽사리 읽지를 못하겠다. 오히려 난 그 작가들이 소설보다 에세이를 발표한다면, 그걸 그나마 좋아하고 즐겨 읽는 편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내겐 오쿠다 히데오가 쓴 원작소설마저도 역시나 취향과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즐겁게 읽혀지지는 않았다. 아마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을 알게 되지 않았다면 평생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런 취향의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원작소설에는 분명 여러가지 면에서 독자를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임순례 감독의 영화화된 버전에서 아쉬움처럼 다가온다.
 
 


 
<남쪽으로 튀어>는 이런 이야기다. 최해갑과 안봉희라는 남녀가 있다.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둔 이 부부는 과거에 학생 +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에 섰던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중 특유의 행동력을 가지며 '봉 다르크'라는 별명으로 경찰과 검찰들에게 악명높았던 안봉희는 최해갑의 팬이라며 자청할 정도로 자신의 남편을 사랑한다. (이는 6~70년대에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시기에 몸을 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오는 원작소설을 한국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리고 남편인 최해갑은 운동권에서 물러난 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급진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공안들이 파견되어 감시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뻔히 다 들키는데도 불구하고 이 공안들은 자신들이 정말 잘 감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런 삶을 사는 가족의 집이니 세상 사는 게 편할리 없다. 그러던 중 해갑의 고향 후배인 만덕이 잠시 머물게 되고, 만덕을 통해 김하수라는 이름의 국회의원의 지원을 받는 건설사가 '들섬'을 재개발 하려 든다는 말을 듣게 된다. 옛부터 계속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고 만덕과 해갑의 고향이기도 한데 어느새 보니 그것이 '국유지'가 되어 있었고 건설사가 아무 제한 없이 개발권을 가지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만덕은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두르고 김하수의 집에 쳐들어 갔다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집에 차압딱지가 붙은 것을 본 해갑 가족은 만덕의 집이 있는 들섬으로 이사를 간다. 국민연금이라는 삥을 뜯길 필요도 없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공안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삶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찾아낸 것이다. (포스터에는 만덕을 연기한 김성균이 배낭을 메고 해갑 가족과 함께 해맑게 웃고 있지만, 그의 등장분량은 사실 적다. 잡혀가니까!) 그리고 들섬에서 생활할 때 김하수의 무리들이 찾아온다.
 
작품을 볼 때 새삼 감탄했던 것은 오쿠다 히데오의 원작소설이 정말 자국의 사회적 사건, 역사, 정서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차용하기 때문에 영화화가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걸 한국식으로 무겁지 않게 잘 각색했다. 원작에서는 프리랜서 작가였던 아버지는 영화화된 작품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첫째 딸인 민주의 이야기가 원작에 비하면 대폭 늘어난 편이다. 이 두 사람의 설정 변화, 그리고 이야기의 비중은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가 한국사회에 관해 뭔가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 줬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인 민주는 인문 대학을 포기하고 의상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교 담임 선생 한 명이 민주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이게 예나 지금이나 아청아청한 상황이기 때문에 자주 찾아는 가되, 보호자와 교육자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문제는 일과 사랑 모두에 충실하고 싶은 민주는 한국사회에서 낙오자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점이다. 담임선생이 아끼는 제자가 학교를 그만두니 걱정이 안 되는 교사가 어딨겠냐고 말하자, 민주는 기분 좋은 듯 하지만 동시에 그 오지랖이 지긋지긋 하다는 듯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민주는 과제에 몰두하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다. 아무 문제도 없고, 모든 것이 정상인 성인이다. 그러나 사회가 보기에 민주는 비정상이다. 대학을 거부하고 고등학생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꿈을 이룰 수 있는 문들은 모두 냉랭하게 문을 닫아버린다. 잠깐 등장하지만 민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해갑의 감독활동의 경우, 임순례 감독과 작품은 이마리오 감독이 2002년에 만든 다큐멘터리인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를 해갑의 감독작품이라고 칭한다. 나 같은 경우, 그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당시에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뛰쳐나올 방법을 강구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학교와 입시학원에 '당연한 듯 속해있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학교 바깥에서 이런 운동이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손지문을 개인정보화 하여 보관하는 주민등록증을 부러뜨려 버리라는 것인데, 실제로 2008년에 UN에서 한국 인권 상황 정기 검토가 이뤄졌을 때 주민등록증을 본 외국 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경악했었다는 명숙 상임활동가의 증언이 있다. 최해갑 감독은 이 작품으로 인해 팬클럽까지 형성됐으며, 팬들은 그를 '최 게바라' 라고 부르며 그의 인간됨과 작품활동을 칭송한다. 그리고 민주의 담임선생도 최해갑 감독의 작품 상영회에 참석했다가 그의 팬이 되어버린다. 작품은 두 인물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그 상황에 관계된 인물을 연계시키면서 점점 조그마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이후에 다시 섬에서 만나 나름의 생활방식을 찾아서 살아갈 때, 기묘한 감동마저 든다. 아.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면서.
 


 

사실 세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별 거 없다. 상영되고 있는 극장 좌석은 반의 반도 차지 않았으며, 진정 민주주의 사회라면 여러 의견들이 용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해갑 감독의 세상은 두 공안에 의해 국정원 쪽에 언제나 동태가 보고된다. 국장은 두 공안에게 이야기한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잘 하라고. 한국은 지독한 '자본주의' 다. 돈이 권력과 자유를 준다. 돈으로 학력을 사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비리를 통해 돈을 착복하고 사람을 지배할 권리를 획득한다. 감시 당하는 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살던 최해갑은 조그맣지만 통쾌한 복수를 한다. 최해갑을 따라붙던 두 공안이 그가 방향을 돌려 다시 오자 딴청 피우다가 의도치 않게 그에게 사인을 받는 시퀀스가 있다.

 

사인 해 주고 기분 좋아진 최해갑은 그들에게 "사인 받았으니 이제 주민등록증 찢어. 내 팬들은 다 찢었어." 라고 그들에게 종용한다. 그리고 공안들은 들키면 안 되니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정말 자신들의 주민등록증을 부러뜨려서 한강다리 밑으로 던져버린다. 선배들은 나름 머리 잘 굴리는데 현실의 후배 되는 애들은 어떻게 된 게 시민단체 간부 미행하다 들키기나 하고, 오피스텔 방문 잠그고 부모와 오빠를 불러달라 했을까? 당연히 <남쪽으로 튀어>가 촬영됐던 기간을 생각하면 염두해 뒀던 풍자는 아니겠지만, 작품이 한국사회의 정서를 그만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함의를 예언했다고 생각해도 별로 위화감이 없다. 난 <남쪽으로 튀어> 에서 최해갑의 작품 상영회와 주민등록증을 부러뜨려 버리는 것까지의 시퀀스를 작품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또 가장 웃기기도 하다.
 
그 외에도 작품은 이야기 자체를 무겁게 만들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도입부의 스코어 음악이 브라스 섹션이 강조되어 빠르고 흥겹게 흘러가지만 그 순간만 지나면 음악이고 카메라워크고 다들 잔잔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어떤 소재와 함의를 다루든 간에 이것을 잔잔한 유머가 있는 드라마로 봐 주길 원하는 작품의 의도 같은데, 들섬에서의 이야기는 마치 일본에서 TV 드라마, 토크쇼, 영화 등으로 이어졌던 '슬로우 라이프 연작' 을 연상케한다. 모두가 어떻게든 빠르게 작품을 이어가려 할 때, 임순례 감독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보는 것처럼 자신만의 영화적인 속도를 고수한다. 물론 원작이 두 권으로 이뤄진 장편소설 임을 생각하면 대량의 인물정리를 거치고 거의 원작의 뼈대만을 남겨놓는 수준의 각색을 한 셈이니 꽤나 컴팩트한 셈인데, 꼭 급박한 리듬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느긋한 정서를 가지고 진행시키는 것이 임순례 감독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있다.

 

이것은 예전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볼 때 너무 과잉된 감성을 보는 것 같아 생겼던 불만 때문에 더 좋게 느껴진다. 물론 관객들의 마음을 더 잡아 끌어보려면 그 리듬을 따랐어야 했는지에 관한 의문이 들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다는 이야기다. <남쪽으로 튀어>는 최해갑이 김하수에게 권총을 겨누는 순간에도, 강만덕이 김하수의 집에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쫓아 들어가는 와중에도 사실 무심하고 느긋하다. 물론 스코어 음악과 촬영 기법이 나름 긴박한 정서를 보여주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영화적 처리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담은 시퀀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2시간 1분짜리 작품인데 내겐 30분 정도 더 긴 작품처럼 느껴진다. 아. 이건 비판이 아니다. 감독들의 입장에선 사실 2시간 이내로 이야기를 끊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하지만 대부분은 그 정도 되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쳐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최소한 원래 의도했던 작품의 속도와 리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정서가 이 작품에 잘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극장에서 작품을 보는 내내 적어도 그 속도감에 관해서는 참 편안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단점은 다른 곳에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작을 먼저 읽는 바람에 생긴 것이다. 1권에서 일본현대사의 역사적인 투쟁들이 조금씩 인용될 때, 나는 원작에서 '역사'란 그저 대사를 좀 더 찰지게 만들기 위해 표면적으로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권을 읽을 때 조금 기이했다. 임순례 감독의 작품에서는 '들섬' (실제로 이 들섬이란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가상의 공간이겠지? 실제 촬영지는 대모도였다.) 이지만 원작에서는 주인공 가족이 오키나와로 이사를 간다. 참고로 오키나와는 예전부터 일본에 속해있던 땅이 아니라 '류쿠 왕국' 이라는 독립된 국가였다. 독립 국가였다가 16세기 경부터 슬슬 일본에게 식민지 화가 되었던 곳인데, 아이들이 도쿄와는 너무나 다른 오키나와의 환경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작품이 한 페이지 당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인물을 대사를 통해서 오키나와의 역사를 설명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장편이 된 이유는 이런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후로는 역사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지만, 그래도 오키나와에서의 생활상이 꽤나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원작소설은, 그러니까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태도를 잊지 않고 있다. 어떠한 왜곡이나 미화도 없이, 이 땅이 처음부터 일본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정확히 짚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역사는 동시에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식민 침략의 역사' 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건 간에 자기가 사는 국가의 침략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원작소설에서 압도당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있었던 일을 있었다고 말하는 태도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치사회적 관점의 차이를 가진 사람, 혹은 그것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한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 후자는 특히 위험하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할 족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 나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런 확고한 관점과 태도에 감동받자 곧 이 작품이 과할 정도로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이 역동적이려 드는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가령 원작 소설 2권 107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런 표현들.

 

'...모모코가 눈을 치켜뜨고 지로를 흘겨보며 "오빠가 빨리 엄마한테 말 좀 해!" 라고 비난하듯이 말했다. / 지로는 별 말 없이 모모코의 뺨을 꼬집었다. 모모코도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발차기를 먹였다. 집에 돌아올 때는 각자의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페인트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현대문학에서 이런 '발차기를 먹였다' 류의 표현이라든지, 뭔가 격앙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듯이 남발하는 느낌표 사용 같은 걸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원작소설에서 사용하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봤자 그게 고쳐질 것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런 표현들의 이용에 관해서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격앙은 '선동'이 아니라 할 말을 하지 않고 이득을 보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선언 같은 것이었다. 난 지금도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더 잘 살거다. 씨발놈들아! ...같은 그런 격앙된 선언과 흥 말이다. 우리가 이기려면 더 신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더 오래 살지.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확고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 여러모로 힘들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 이나 <오래된 정원>,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 조근현 감독의 <26년> 같은 작품들에 관한 평가를 생각해보라. 영화에 관한 논의보다도 더 많이 이뤄졌던 것이 이것이 과연 정치적 선동인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사실 논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좀 민망할 정도로 어느 누군가를 아이돌처럼 숭배하는 사생 팬들이 몰려와서 욕 해대는 그런 풍경이었지만 말이다. 개중에는 잘 만들어진 작품도 있고, 영화적으로 볼 때 부족한 면이 많은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이 적어도 용감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논란이 많은 소재 속에서 자신의 생각은 이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튀어>는 그 부분이 좀 약하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초반부에 최해갑의 가족을 공안들이 보고하는 과정에서 공안국장이 '빨갱이' 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인해서 나름의 승부수를 띄운다. 국민연금 거부만 해도 충분히 대단하다 싶은데 빨갱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이, 한국에서 이 단어는 과학마저도 마비 상태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빨갱이란 표현을 쓰는 공안국장을 앞, 뒤 꽉꽉 막힌 인간형으로 설정하고 일종의 유머 장치로서 활용한 것은 이 작품이 그 단어를 활용하는 자들을 언제든지 풍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버전은 소설처럼 조그맣지만 한 방에 뭔가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듯한 힘이 많이 부족하다. 한국식으로 잘 각색하고, 또 유쾌한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의 자격을 누구에게 줬는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봤다. 영화 버전에서는 아버지인 최해갑이 주인공이지만, 원작소설은 둘째이자 아들인 지로 (영화에서는 나라) 의 시선으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됐다. 1권은 도쿄에서의 이야기가 주된 것이며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겪는 성적 호기심, 그리고 학교폭력에 맞서는 지로의 이야기 속에 부모의 이야기가 조금씩 겹쳐졌다. 아버지야 하도 유명하니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도 투쟁과 관련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던 지로는 폭력과 맞서던 중 사실을 알게 되고 주변의 자료를 모아 어머니의 과거를 조사한다. 원작소설은 한 청소년에게 부모의 과거를 찾아가는 설정을 만듦으로서 일본 현대사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지로가 마주하는 어머니의 과거는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 그리고 어머니가 반대 투쟁을 하면서 사람을 찌른 적이 있었다는 '현실'이자 '역사' 다. 이후, 지로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투쟁에 참가한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곧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 하지만 2권 끄트머리에 가서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원작소설 속 부모의 과거는 곧 일본 현대 학생운동과 투쟁의 역사 한 토막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 역사를 아이들의 말을 통해 풀어가는 것은 완화된 느낌으로 볼 수 있고, 상당히 영리하기도 하다. 그것이 설교가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으로 해석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부감이 덜하다. 그리고 이 때 오쿠다 히데오는 독자에게 물어본다. 어떤 의의는 제쳐두고, 그 시대의 그들의 대항 방식이 마냥 옳다고만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그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눈으로 지나간 역사를 평가하기 때문에 원작 소설에서 2권 후반부, 그러니까 전체 책 페이지 중 본편이 310 페이지에서 끝이 나는데, 거기서 245~246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지점을 제공한다. 이 대사는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적을 때 자주 인용할 정도로 인기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허공을 바라보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지로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아버지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아버지가 자신을 비웃듯 입 끝을 치켜올렸다.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지로는 놀랐다. 누나도 의외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이야기 상으로 후반부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원작소설과 달리 임순례 감독의 작품에서는 이 대사가 중반부에 돌입할 때, 그러니까 들섬으로 떠나기 직전에 집에 있는 짐을 꾸리면서 나라를 향한 해갑의 대사로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한 발 앞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사가 영화에서는 힘을 잃는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김윤석이라는 배우가 이런 대사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불만족스러운 면이 있었다. 사실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작품 촬영 도중의 유명한 불화사건 때문은 아니다. 임순례 감독과 제작사, 김윤석은 나름의 합의를 본 듯 더이상은 그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고 있고, <씨네 21>의 김도훈 기자가 트위터에 이와 관련한 글을 남겼다고는 하는데 내가 그걸 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가 나올 당시에도 따로 확인을 하지 않았다. 얘기를 들었다든, 증언이 있다든 말은 많지만 적어도 내가 본 것은 '설'이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내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함부로 말 할 수 없으니까.
 
나는 소설처럼 이야기의 중심을 김윤석 대신 나라 역을 맡은 백승환에게 줬으면 작품이 더 나아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위의 이유 때문은 아니다. 작품은 예의의 차원인지 원작소설의 대사를 몇몇 시퀀스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와 삽입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본문학 식 대사가 김윤석이라는 배우에게 유독 잘 체화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본적인 정서를 최대한 걷어내고, 한국의 정서로 어색하지 않게 바꾼 흔적은 역력하지만 소설을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대사만 들어도 '일본스럽다' 라는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 것이 있다. 가령, 나라가 불량학생들에게 두들겨 맞고 돌아왔을 때 해갑은 아들에게 막걸리 한 잔 먹어보라고 무심하면서도 능청스레 말을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해갑은 곧바로 "싸울지 도망칠지, 네 뱃심을 딱 정해." 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사는 원작소설에도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은 아마 소설의 영화화를 이야기할 때 당연히 하게 되는 비교와 느끼게 되는 괴리감일 수 있다.
 
 


* 근데 위의 시퀀스가 있었나? 이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밑에 나라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건 기억이 나는데... *

 


그러나 내겐 김윤석이란 배우가 유독 이런 식의 대사를 소화하는 것이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해당 국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어투가 문화적으로 약간의 괴리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김윤석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얘기다. 가령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에서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때 옆에 있었던게 도둑이야.' 란 멋이 철철 넘치는 대사를 하지만, 난 그의 입술과 이빨과 혀가 위의 대사보다는 '구라치다 걸리면 피 보는 거 안 배웠냐?' 라든가, '구남아, 니 한국 가 사람 하나 죽이고 오라.' 같은 대사를 할 때 더 자유롭게 놀려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센 느낌의 역할이 더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대사의 체화력이 그렇게 유연하지가 않다.
 
그는 오쿠다 히데오와 임순례의 자장 안에 완벽하게 들어와 있다기 보다는, 여전히 오함마질을 하거나 4885 가진 번호판 찾다가 막 옷 갈아입고 간신히 이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다. 전의 대사는 어울리는데 후의 대사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활어처럼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그가 굉장히 경직된 느낌의 대사를 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특별출연한 박원상도 비슷하다. 건설회사의 변호사로 나와서 최해갑에게 최종통보장을 주다가 된통 당하고는 돌아가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어디서 저런 괴물같은 인간이 튀어나온거야?' 라는 대사를 하는데, 여기서 '괴물같은 인간' 이란 표현이 그 상황과 배우에게 잘 붙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역배우인 백승환은 훨씬 수월하게 대사를 연기한다. 도입부에 공무원에게 아버지가 어디 가셨는지를 얘기하는 것도 재밌었고 말이다. 어쨌든 이 시퀀스에서 그가 연기한 나라는 해갑의 대사를 듣고 원작소설에도 없는 말을 한다. "그 벌레, 나한테도 있는 것 같아. 아직 애벌레지만." 현실적이고 논쟁적일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것에 있어 이런 비유적인 대사들은 현실과 극작품의 경계를 가를 수 있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백승환은 그 대사들을 어색하지 않게 잘 소화해낸다. 그건 아마 10대라는 나이가 주는 이미지도 있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충분히 유연하게 그런 대사들을 넘나드는 능력이 보여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그리고 해갑의 이야기까진 아니더라도 작품에서는 나라의 이야기와 민주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은 이 세 이야기를 넘나들면서 종종 중심점을 잃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인해 상실되는 부분은 '이 작품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에 관한 것이다. 어른이 주인공이 되면서 해갑과 봉희가 몸 담았던 학생운동을 비롯한 투쟁과 시대역사는 그냥 인물의 성격을 재밌게 설명하기 위한 유희거리가 되어버린다. 어른들은 굳이 그 이야기를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해당되는 시대를 거쳐온 사람들이고, 옳든 그르든 간에 그런 역사적 사실들에 관해 나름의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소설과 다르게 나라는 자신의 어머니인 봉희에 관해 알아가는 순간을 놓치고 만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시각으로 부모를 바라보는 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영화 판본은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 시대에 관해 다양한 함의를 품을 수 있는 여지를 향해 가교 역할을 하던 어머니 캐릭터를 그냥 '봉다르크' 라는 장르적인 캐릭터로만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이것은 어쩌면 사회적인 분위기가 '선동'의 틀을 만들어 조성 되어버린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 점을 감안하면 이 작품도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의의를 만들어 줄 수도 있겠지만,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는 그냥 모순을 포함한 21세기 한국사회의 풍경들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놓은 지점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섬을 개발하러 온 악역들에 맞선 해갑 가족과 섬 주민들과의 왁자지껄한 소동이 벌어지고, 이게 상당히 재미있지만 다 보고 나면 마치 허공에 소리지르는 듯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자식들이 자신들의 시선으로 부모를 바라보고, 그들의 행동에 관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해갑이 주인공이 되어 해갑의 시선으로 자식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때문에 생겨난 문제다. 해갑 가족이 이뤄낸 자그마한 승리는 냉정히 생각하자면 또다른 위기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은 필름 속의 세상에서라도 이것을 통쾌한 승리로 포장하고 싶은 듯, 더이상의 말을 아낀다. 그 때문에 아버지 같은 어른은 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우라는 해갑의 말이 모호해진다. 물론 작품은 마지막까지 유쾌하고 충분히 해갑의 편에 서 있다. 하지만 관객은 판단하기 애매하다.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쩌라는 말인가. 싸우라는 건가, 아니면 말라는 걸까?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모든 관객들이 '내 가족 중에도 최해갑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끝이 나고 만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허공의 형상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꼴이다.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 자체가 공기처럼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작품이다. 그것이 외국소설의 정서를 한국화로 훌륭하게 변화시킨 각색을 간과하게 만들어 버려 다소 아쉽다.
 
아. 만약 주인공인 김윤석과 대사의 관계로 나처럼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유쾌하게 기분전환을 하며 현실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이 작품은 적절한 선택이다. 전 출연진의 연기는 적절하며 특히 악역인 김하수를 맡은 배우 이도경의 연기는 정말 인상적이다. 이건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 정치인을 가져다 놓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엽다. 그리고 들섬 순경 역의 송삼동, 공안을 연기한 주진모, 정문성, 담임 선생 역의 김태훈까지.. 대부분의 출연진들이 이렇게 골고루 귀엽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내겐 아쉬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금만 바꿨으면 더 깊은 함의를 던지면서도 유쾌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허나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지점에 의도적으로 멈춘 것이라 느껴져서 다소 아쉬운 작품이 되어버렸다.


p.s.1 - 무라카미 하루키 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입니다만, 저는 그 분 작품 중에서는 에세이를 주로 좋아하지, 소설은 좋아하는 게 거의 없네요. 하나 있긴 한데 <언더그라운드>를 유일하게 좋아합니다. 근데 이게 이 분 작품들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니까.. 아. 하나 영화화가 된다면 궁금한 건 있네요. <해변의 카프카>가 영화화 되면 어떻게 나올라나 하면서 궁금한 건 있습니다.

 

p.s.2 -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님의 판본도 같이 이야기해야 되는데, 제가 아직 그 작품을 못 봤네요.

 

p.s.3 - 김태훈 님의 담임 선생 연기는 이전 작품들에서 해왔던 연기를 생각하면 많이 순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형인 김태우 님이 했을 것 같은 역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형제가 각자 반대의 스타일을 연기하고 있네요. 김태훈 님은 이 작품에서 하고 있고, 김태우 님은 TV 드라마인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악역을 연기하는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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