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나루세 미키오
주연: 다카미네 히데코, 모리 마사유키, 단 레이코, 가토 다이스케, 나카다이 타츠야, 나카무라 간지로, 아와지 케이코, 오자와 에이타로, 센고쿠 노리코
음악: 마유즈미 도시로
촬영: 타마이 마사오
15세 관람가 / Black & White / 110분
원제: 女が階段を上る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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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하면 '고요함 속의 격렬함'이란 표현이 참 좋다 싶었다. 참으로 적절하고 양호하기 그지 없는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나도 어디서 주워 들었던 터라 저 말을 누가 했는지 참 궁금했다. 뒤에 알게 됐는데 저 말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한 말이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의 작품은 격렬한 조류가 조용한 수면 밑에 가려진 깊은 강과 같다.' 정확히는 이 말이라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나루세 미키오 밑에서 조감독으로 경력을 쌓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쇼치쿠 영화사의 중역인 기도 시로가 두 명의 오즈는 필요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 굴욕감을 안겨줬을 때 (아. 물론 '공식적으로' 굴욕감을 느꼈다는 발언은 못 봤기 때문에 내 추측이긴 하지만, 저 상황이면 화나지 않을 감독이 없을 것 같다.) 오직 구로사와만이 영화현장의 스승이 가진 작품관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나루세와 같은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과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살아있을 당시, 어느 정도까지 비교를 당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도 시로의 말만 들어도 당시 그의 작품이 평가를 높게 받든, 낮게 받든 간에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은 일본영화계에서 은연중에 끊임없이 오즈와의 관련성이 지적됐던 것 같다.
1920년에 쇼치쿠 영화사에 입사했던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50년대 초반에 도호 영화사로 자리를 옮긴다. 자신이 짜놓은 영상 구도의 엄격함을 지키기 위해 컬러 작품을 만들면서도 끝까지 1.33:1의 스탠다드 화면을 지켰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는 달리 아주 유연하게 스탠다드에서 와이드스크린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로 넘어갔다. 이미 충분히 여러가지 면에서 그의 작품은 오즈와 다르다. 그건 5분만 봐도 알 것이다. 하지만 와이드스크린 작품을 만든 것이 아마도 좀 더 많은 구별점을 지니게 만든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단, 컬러 작품의 개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비슷하다. 단지 <피안화> 이후로 유작까지 계속 컬러로만 작품을 만든 오즈와는 다르게 나루세는 컬러 촬영이 대세이던 시기에도 필요에 따라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띄엄띄엄 한편씩 찍어 총 다섯편을 찍었다.) 그리고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감독의 와이드스크린 작품 중 한 편이다.
'회사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퇴근하는 시간.. 우리 일은 바로 그 때 시작된다.
계단.. 난 이 계단을 오를 때가 가장 싫다. 하지만 올라갈 때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해야만 한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전후 시대에 도쿄 긴자에 위치한 '라일락' 이라는 이름의 바에서 마담으로 일하며 '마마'라 불리는 게이코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는 작품이 시작된지 10분쯤 지난 뒤에 등장한다. 그리고 첫 10분은 케이코의 말을 따르는 젊은 호스테스들의 잡담으로 채워진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녀들 중 한 명이 결혼을 해서 바 생활을 청산하는 모양이다. 이 순간을 기념하고자 그들은 케이코를 기다리지만, 곧이어 전화를 통해 들려온 그녀의 말은 제 때 못 갈 것 같다는 이야기다. 호스테스들은 곧 삼삼오오 둘러앉아 마마로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얘기한다.

그녀들이 겪어보지도 않은 고생에 관해 재잘거리는 사이, 정말 '마마', 케이코는 사장에게 바의 매상이 저조한 것에 관해 한 소리 듣고 애써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곧 함께 온 바의 매니저인 켄이치와 건물을 나서며 터덜터덜 긴자 거리를 향해 걸어간다. 곧 켄이치와 헤어지고 혼자서 바로 가던 그녀는 앞에 도착해서 자신처럼 일하는 다른 호스테스가 막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블루 버드' 에서 일하던 호스테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소설인 <파랑새>에서 행복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파랑새'는 사람이 잡기도 힘들거니와, 혹여 잡히면 오래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 호스테스를 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없겠지만, 작품의 인물들 모두 그 생활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환락에 허우적대며 쉽게 발을 뺄 수 없었을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에 언급되는 호스테스의 자살과 그녀가 있었던 바의 이름은 뭔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이후에 이 상황은 변주되어 한 번 더 반복된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 이영애가 연기하는 금자가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쇼트가 있다. 그 작품 자체가 '나루세 빵집' 이라고,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 헌정하는 요소가 하나 있기 때문에 이 계단 쇼트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박찬욱 감독보다는 평론가들의 말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작품의 감상 이전에 이 말을 먼저 들었는데, 실제로 그 작품에서 로케이션을 통해 찾아낸 계단은 조형적으로도 상당히 멋있었다. 그래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에도 그런 것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계단은 상당히 소박하다. 4~5층을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게이코가 일하는 바가 2층에 있어서, 1층에서 한 층 더 위로 올라가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계단의 수는 많지 않고 높이는 너무나 완만하다. 게다가 계단은 수직적인 요소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쉽고, 또 그 상징이 강하기 때문에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는 많이 불리하다. 그래서 보통은 스탠다드 화면비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1.50:1, 1.66:1 비율의 유로피안 비스타비전 화면비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같은 해에 한국에서 만들어진, 그리고 계단하면 떠오르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1.55:1의 화면비를 가지고 있다.) 1.85:1의 화면비로 넘어가는 순간, 수직 구도는 극단의 연출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사실상 반쯤 포기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애초부터 거의 수평구도를 위해서 생겨난 화면비나 다름없는 2.35:1 비율의 시네마스코프를 다루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넓은 화면길이를 감당해내기 위해, 그리고 그러면서도 계단의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해 양 옆에 배치된 벽을 활용한다. 계단 앞에 선 케이코, 그리고 그녀의 시선으로 계단을 바라봄으로 인해 그것의 높이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짧은 계단을 올라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개의 쇼트를 교차시키는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에서만 가능한 '길이'의 부각이 여기서 등장한다. 작품은 시간상으로 볼 때 분명 잠깐임에도 불구하고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 특유의 종종걸음으로 바삐 계단을 올라가는 게이코의 발을 보여준다. 보통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가는 것에 익숙해지면 어지간해서는 한 칸씩 꼼꼼히 밟아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작품 속의 게이코는 계단을 한 칸씩 꼼꼼히 밟으며 올라간다. 아마도 계단을 두 칸 이상씩 밟으며 오를 때 보여지는 특유의 쩍 벌어지는 자세가 여성으로서의 품위에는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는 기모노라는 일본 옷의 디자인 상, 그렇게 오르는게 사실 조금 번거로운 게 있겠지만.. 어쨌든 쩍벌은 모냥 빠진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계단을 오르는 잠깐의 시간동안 관객으로서 주목하게 되는 건 올라가는 바로 그 계단의 갯수다. 1층에 선 그녀의 시선으로 올려다 본 계단은 몇 걸음만 올라가면 단박에 정상에 설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잠깐동안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계단을 보고 있으면 저것이 저렇게 길었는가에 관해 나 역시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 생각. 나의 생각은 곧 작품 속 주인공의 생각에까지 와닿고 그녀의 머리 속을 읽을 수 있다는 관심법스러운 '지경'까지 가게 된다. 저 계단을 오르면서 저 여자는 무엇을 생각할까. 짧은 계단이 저렇게 길게 느껴지는데, 자신이 밥 벌어먹고 사는 저 세상이 과연 만족스러워서 저런 걸까. 당연히 나레이션에는 계단을 오르기가 정말 싫다는 말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바 마담과 호스테스들의 세상은 싫어도 좋은 척 해야하는 세상이다. 사람의 감정은 가면 속으로 가려져 버린다. 그리고 초반부터 싫다고 얼굴에 티 내면 관객이 재미없다. 케이코를 연기한 다카미네 히데코, 그리고 그녀와 '프로 의식'에 관해 얘기하는 매니저인 켄이치를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의 표정은 진심인지 가면을 쓴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과정들이 몇 번 반복되면서 작품은 관객에게 굳이 별다른 감정연기 없이도 등장인물들, 그 중에서 특히 케이코가 이 일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관객이 알아서 알아차리게 만들어준다. 그녀에게는 전쟁 중에 죽은 남편이 있었다. 자신의 집에 온 젊은 호스테스가 탁상 액자 속 남자의 모습에 관해 궁금해하자, 그녀가 알려줌으로 인해 관객이 알 수 있는 정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 작품 속에서 케이코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가 관객의 눈에 점점 좁혀지기도 한다. 작품은 그렇게 각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들, 그리고 평소에도 치근덕대는 남자들이 모두 그녀가 과부라는 것을 아는지에 관해서 딱히 말을 해 주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케이코의 처지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여기서 케이코의 행동 속에 담겨진 진심을 엿볼 수 있다. 그녀가 웃으며 손님을 맞는 태도와 그냥 비지니스 때문에 마지못해 이 짓 한다는 태도 사이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반부엔 남자들의 치근덕거림에 절대 넘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 마음에 둔 남자가 바의 고객들 중에 있으며, 실로 가공할만한 절제력으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이런 심정은 사실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거나 괴로움에 몸에 찬물을 끼얹는 등, 애정에 대한 욕구를 참아내는 부분들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묘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독과 작품은 절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절제가 어떤 영화적인 양식미가 덧붙여진 것은 아니다. 허허실실, 평소 우리가 사는 삶에서 마음껏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사그러드는 정서를 완벽히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도 다소 힘을 뺀 상태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무기력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기운 없지만 그래도 살아야 할 내일이 있기 때문에,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없는 힘을 쥐어 짜서 내야만 하는 그 지점을 연기로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내가 본 그녀의 출연작은 이 작품을 제외하면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뿐이다. 거기서 자극적인 의상만 골라 입으며 껌을 질겅질겅 씹고 춤과 노래까지 소화하는 그녀가 이 작품에서는 정 반대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많이 놀라웠지만, 그녀는 1979년에 은퇴하기 전까지 기노시타 감독과 작업한 것과 더불어 주로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많이 작업을 했던 배우였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에서의 연기는 어쩌면 그녀의 '주된 연기'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감독들이 지향하는 연기가 같을 순 없고,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게는 그만의 연기를 지도하는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흩어진 구름>의 츠카사 요코가 그랬고,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작품과는 완전히 딴판의 연기를 보여주는 <산의 소리> 에서의 하라 세츠코가 그렇다.

* 그리고 조연인 켄이치를 연기한 나카다이 타츠야도 그렇다. 첫 출연작이 단역으로 나왔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54년작, <7인의 사무라이> 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꽤 빨리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57년작인 <말괄량이> 에서 첫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여러명의 감독들과 다양하게 작업했고, 또 그 중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과의 작업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카다이 타츠야 본인은 언제나 자기가 경험한 가장 특이한 영화촬영현장으로 꼭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현장을 꼽았다. 왜냐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를 찍을 당시의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촬영현장을 오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한 번씩 그에게 "내 영화에선 절대로 구로사와나 고바야시 작품에서의 스타일로 연기하지 말아주게." 라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주로 나지막하게 말하거나 귓속말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첫번째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모습, 두번째는 이 작품의 스틸, 세번째는 <말괄량이>의 스틸, 네번째는 현재의 나카다이 타츠야)
현재야 일본에 마지막 남은 대배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그 이지만, 5~60년대 초의 그의 연기를 보면 연극배우로 시작한 연기특성이 남아있어 굉장히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기도 하고 (이치가와 곤 감독의 <염상>이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 같은 작품 보면...) 동작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과장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작품 속의 역할이 그런 걸 요구 했겠지만. 나카다이 타츠야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자신의 '연기 선생님' 이라고 칭했는데, 그의 연기가 좀 더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에 참여했던 것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 때는 그가 어려서 감독에게 자신은 이런 연기를 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감독에게 '조련'을 당해본 셈이다. DVD에 서플먼트로 수록된 인터뷰에서 나카다이 타츠야는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지도를 받은 한 일화를 들려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차 마시는 장면이 있다고 칩시다. 차를 마시면, 찻잔을 내려야 하죠. 그리고 내리면 커트를 합니다. 다음은 제 얼굴을 클로즈 업 합니다. 그러면 제 손은 보이지 않아요. 근데 저는 불안해 하는 거죠. '아.. 찻잔 잘못 놨나? 이거 위치를 어떻게 해야하지?' 하면서 당황해하는데, 그 때 다카미네 씨가 조언을 해 줍니다. '화면에 나오지 않아. 전혀 안 나오니까 아무데나 치워.' 라고요.혹은 '마이크가 바로 밑에 있으니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돼.' 라면서요. ...무서웠습니다. (웃음) 나이도 8살이나 차이 나고. 무서웠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말은 쌀쌀맞게 했지만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
다카미네 히데코가 연기하는 케이코가 스스로에게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는 순간이 왔을 때, 작품은 그녀를 통곡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화를 내게 한다. 처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라일락의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말하지만, 곧 덮어버리고 손님들을 맞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되면서 라일락의 매상이 줄기 시작한다. 케이코는 다시 계단 앞에 서서 이 막막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 나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곧 그녀는 켄이치와 함께 '카튼' 바에 가서 새롭게 일을 하기 시작한다. 라일락 바를 운영해 나가면서 생긴 손해와 빚은 자신의 고객 중 한 명이 대신 대 주겠다고 하고. 이게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인생은 평생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가 빚을 일정 부분 해결해 주겠다고 하니 어째 자신의 흠을 들킨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결국 케이코는 자신이 직접 바를 열어야 겠다고 마음먹는다. 자신의 파트너인 그녀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는 켄이치가 도와주겠다고 하고, 그녀는 창업자금을 모으러 다닌다. 그러던 중 자신보다 먼저 바를 열어 운영하고 있는 동료를 간만에 만난 케이코는 자신의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 때 작품은 케이코의 말을 듣고 있는 동료가 불길한 농담을 던지게 만든다. 나도 마음고생이 심해서 언제나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가방 속에 수면제를 넣고 다닌다고 말이다. 사실 보통 대다수는 그저 무기력한 농담 차원에서 끝나곤 하지만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중간이 없다. 죽음 뿐이다. 그리고 만남을 가진 어느 날, 바에 나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케이코는 자신의 동료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케이코를 비롯한 여인들이 착취의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고, 가혹하지만 동시에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케이코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바람에 자신의 고향집에서 요양을 하는 시퀀스가 있다. 그녀는 거기서도 편히 쉬지 못한다. 식구들이 전부 그녀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빠가 한 사람 있긴 하지만 실업자 상태고, 조카는 몸에 마비가 와 있어 병원에 입원해있다. 카튼 바의 사장이 터틀 수프를 사 갖고 와서 기력을 회복하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것은 빨리 나와서 가게를 돌보라는 압박이나 다름없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케이코에게 살고 있는 아파트가 너무 비싸지 않냐고 타박이다. 자식 걱정에 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작품은 조금 더 삐딱하게 상상하게끔 만든다. 어머니가 딸에게 아파트를 팔고 더 싼 곳으로 이사간 다음, 남는 돈으로 자신과 아들에게 보태라는 것 같은. 결국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심한 다툼을 한다. 사실 케이코의 가족은 냉정히 볼 때 현재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방해만 될 뿐이다. 요양 시퀀스가 끝나고 그녀가 긴자로 돌아왔을 때 오빠가 찾아오는 부분이 있다. 바 창업 때문에 돈을 빌리던 그녀가 역으로 그에게 돈을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이유는 단 하나. 조카의 병원비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녀가 더 괴로워 하는 건, 피까지 토하고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은 너무 오래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막상 진짜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는 어떻게 하지못해 우왕좌왕 할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결정적인 순간에 '중도'가 없다. 분노하거나, 죽음을 맞이 하거나. 웬만한 무협 저리가라할 정도로 비정한 세계인 셈이다. 그래서 케이코는 스스로가 무너져 내릴 때 절대 통곡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와 다름없는 감정 표출을 한다. 그리고 이런 시퀀스가 작품 속에서 몇 번 되지 않기 때문에 한 번씩 등장할 때의 임팩트가 상당하다. 그런데 사실 요즘이나 그 당시나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일련의 장면들은 사실 '자극'이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의아하다. 이런 것이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스타일이 아니냐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사실 <흐트러지다>의 마지막 시퀀스나 <흩어진 구름>의 이야기 설정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이 감독도 충분히 센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러한 자극이 과연 이 작품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너무 센 자극성은 작품과 섞여들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극이 너무 세면 그것에 무감각해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들과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에서 보여주는 자극성은 사람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다.
케이코가 동료 호스테스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을 때,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의 부하직원이 찾아와서 돈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시퀀스가 있다. 딸을 잃은 어머니는 빚까지 갚는 거야 그렇다쳐도, 그것 때문에 사람이 자살했는데 와서 돈을 갚으라고 하는 잔혹함은 뭐냐며 흐느낀다. 여기서 케이코가 느낀 심정이 켄이치에게 끼치는 영향이 주목할만하다. 왜냐면 그 사채업자는 케이코가 마담을 할 때마다 찾아오는 중요한 고객이라서다. 여태까지는 여유와 거짓웃음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람을 상대해 왔었지만 도저히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다. 그건 사실 그녀의 장에서는 돈이 중요할지언정 끝내 거기에 매몰될 수는 없다는 한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저항이나 다름없다. 그 때 켄이치를 향한 케이코의 행동은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깟 돈이 뭐라고... 오늘만은 싫어! 지금도 장례식 장의 향 냄새가 내 몸에서 느껴진단 말야! 저 인간하고 같이 있는 건 죽은 내 지인에 대한 모욕이야. 아무리 일이라도 그렇지, 한계라구!"
그에 대항하는 켄이치의 말은 '굶는 것' 이다. 말하자면 이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엔 결국 굶게 될 거라는 말이다. 케이코는 마시던 물을 켄이치에게 뿌려버린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굶음에 관해 말하고 있는 켄이치의 배에 물이 끼얹어진다. 설마 물 뿌리는 타이밍까지 계산했을까. 그냥 이건 내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배를 채울 수 있는 수단을 벌어야 한다는 남자의 배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건, 일단 그것이 과연 사람됨이라 할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단지 물을 뿌리는 것인데, 적어도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세계에서는 막 다듬은 차가운 칼에 몸을 관통당한 것 같은 아픔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작품에는 이렇게 전반적인 정서 속에 '저건 좀 센데?' 라고 생각할만한 행동이나 대사들을 인물들 간의 감정이 폭발하는 지점에 꼭 하나씩 깔아두고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르다는 것이 큰 특징인데, 전반부는 케이코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이 생활에 관한 불안, 그리고 그녀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망쳐가는 모습들을 그녀의 삶과 교차시킨다. 그리고 후반부는 케이코가 바의 단골고객이기도 한 남자들 때문에 여러가지 의미로 곤경에 처하는 상황들을 보여준다. 이 후반부가 유독 서글픈 것은 지인들의 몰락을 지켜본 그녀가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던 켄이치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채 주위의 다른 남자들에게 점점 의지를 하기 때문이다. 그 기대라는 것이 참 무섭다. 좌절될 때의 후폭풍이 굉장히 세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녀가 남자들을 차례차례 거쳐가며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만든다. 한 남자가 케이코가 애용하는 향수를 선물로 주고, 돈과 일의 고단함 때문에 걱정을 하는 그녀를 위로할 때 작품은 그가 사실은 유부남인데다 허언이 심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가토 다이스케가 연기하는 이 남자는 나카무라 간지로와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귀여운 인물이니까. 처음엔 사실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런 헌신적이고 섬세한 태도 때문에 잠시나마 이 남자에게 자신을 맡길지에 관해 고민하던 여인의 입장에서는, 그러나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이 세트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비중이 적은 야외 촬영분에 해당하는 이 시퀀스는 사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꽤 드물게 프레임 안이 비어 있는 편이다. 드물다는 것은, 그의 작품은 대개 스탠다드 화면비이건,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이건간에 프레임 안이 언제나 꽉꽉 채워져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느낀 감흥이기도 하다. 정말 그렇다. 이 감독의 세계는 밖으로 나가도 자연물이든, 인공적인 건물이든 간에 마치 벽처럼 등장인물들을 에워싸고 있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더불어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의 차이가 느껴지는 대표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해가 되는 결정이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현재 처해진 상황에 관해 뭔가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나서야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비로소 탁 트인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산의 소리>에서 시아버지와 여주인공이 걷는 황량한 공원, <흩어진 구름>의 여주인공이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혼자 걸어가는 강가.

* <흐트러지다>의 결말. 작품은 여기서 보여주는 클로즈 업을 더 지속할 생각을 하지 않고 보여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딱 끊어버린다(고 한다). 뭘 봤는지는 스포일러니까... 아. 그리고 내가 아직 못 봤지. *

청소년이었다면 그것이 막막함이겠지만 나루세의 세계에서는 어차피 세상사 좀 징허게 겪어본 어른들이니 살기야 어떻게든 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슬픈 것일지도 모른다. 바보같은 선택이겠지만, 무모해지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이 작품은 의외로 그런 흔치 않은 배경이 빨리 등장하는 편이다. 충격적인 증언을 듣고 있는 케이코의 뒤엔 연기를 내뿜고 있는 공장굴뚝 정도만이 보일 뿐이다. 반면, 케이코에게 말을 해 주는 여자의 뒤에는 여러채의 집들이 보인다. 이는 어떻게 보면 <산의 소리>, <흩어진 구름> 등에서 선보였던 '자연물'이, 이 작품에서 '집'으로 대체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흐트러지다>의 결말과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고. <산의 소리>와 <흩어진 구름>에서는 분명 주인공들은 앞을 바라보고 있다. 단지 카메라가 그들의 뒤에서 바라볼 뿐이다. <흐트러지다>와 (<- 참고로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다카미네 히데코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주인공들 역시 앞을 바라본다. 단지 카메라가 주인공들의 뒤가 아니라 뭔가를 쳐다보는 그들의 정면을 바라볼 뿐이다. 바라보는 대상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 앞에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들이 뭘 보고 뭘 느꼈는지 그게 어떻든 간에, 그 앞에는 그녀들의 시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세상이 있다. 이 작품에서의 케이코는 직업이 마담이니 인간의 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사랑 앞에서도 그나마 Cool 할 수 있겠지만, 작품이 주는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섹스. 한 때 설레는 행위일지 몰라도 나이가 들다보면 의무방어전처럼 되어버려서 더이상은 설레지 않는 것. 그런데 케이코는 그런 섹스를 나눌 '위기'에 처한다. 그것도 남편 이후로 처음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던 남자에게 말이다. 그녀는 화류계 생활을 하고 있지만 드물게 성적으로 덜 문란한 여자였다. 그게 가능했던 건 일과 사랑, 사랑과 일에 관한 그녀 나름의 삶의 자세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전과는 달리 케이코가 이 남자는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굳이 말하지 않은 채 연기자인 모리 마사유키의 얼굴만 봐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전반부에서도 미묘한 긴장감을 유발시켰는데, 결국엔 내쳐질 걸 알면서도 그녀는 무기력하게 남자의 손길에 이끌린다. 하루가 지나고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 또다른 남자인 켄이치에게 뺨을 맞는다. 이것 역시 작품의 가장 자극적인 순간들 중 하나다.

당연히 예상했겠지만 이 작품의 섹스 장면은 직접적이지 않고, 눕는 순간 페이드 아웃이 되어버린다. 뺨을 때리는 장면은 사실 굉장히 예외적이다. 작품 속에서의 유일한 신체적 폭력이 가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찌마와 리가 화려한 택견 실력으로 리쌍 멤버 둘을 골로 보내던 걸 생각하면 사실 뺨 때리는 건 많이 우습다. 하지만 유독 나루세의 세상이 지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서방세계와 자국에서 감독을 설명할 때 간간히 인용되던 '시선의 내러티브'란 표현처럼, 그 '시선'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다소 충동적인 성향의 섹스를 끝내고 난 뒤, 케이코는 방 천장을 바라보며 한 방울 눈물을 흘린다. 거기엔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남자가 분명 어떤 충동에 의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그에게 마음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가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는 천장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가질 수 없는 것을 내심 가지길 바랐던 사람의 심리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예상된 일이겠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픔을 겪는다. 그리고 곧 켄이치에게 뺨을 맞는다. 켄이치가 당신만은 믿었는데 이젠 창녀가 되어버렸다고 한탄할 때 케이코는 자폭 발언을 하고야 만다. 네가 말하는 '프로페셔널'이 이런 거 아니냐고 말이다. 이 때 슬픈 것은 케이코의 시선이다. 그녀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내몰렸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뺨을 맞았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는 실연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켄이치는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한다. 타이밍이 좀 뜬금없긴 하지만 (게다가 방금 섹스했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한테 입부터 들이대려고 한다. 접근방법은 완전히 꽝이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노리개로만 아는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에게 남몰래 마음을 갖고 있었던 남자에게 가는 것이 더 나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케이코는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이 호스테스 일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관성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녀는 그것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 그리고 여기서 또 느꼈던 20대 시절 나카다이 타츠야의 괴로움. 나카다이 타츠야는 다카미네 히데코를 연기 상으로 딱 두 번 때렸던 적이 있다. 이 작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작품에서. 기노시타 감독과 다르게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에서는 진짜로 때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카다이 타츠야는 많이 당황해서 그냥 시늉만 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었다는데, 감독은 단호히 정말 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때리는 쇼트를 촬영한 이후, 나카다이는 하도 미안해서 다카미네 히데코에게 사과를 하러 갔다. 그러나 미안한 그와 달리 다카미네 히데코는 "어차피 연기인데 뭘 그걸 가지고 사과를 하고 그러냐" 며 웃어 넘겨버렸다고 한다. 호탕한 누님 입장에서는 8살 연하의 이 남자배우가 어지간히 귀엽게 보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드는 일화다. *
"케이코 씨. 우리 결혼합시다. 내가 빌게요. 우리가 운영하는 바를 새로 개업해서 살아요."
"나가.. 당장 나가지 않으면 소리 지를거야.."
"..그렇게 내가 싫은가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아.
그런 상태에서 하는 결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우린 안 돼. 우린 서로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잖아. 부탁이야. 제발 나가 줘."
켄이치의 고백이 끝내 그녀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이것이다. 이 가슴 아픈 마지막 대화 시퀀스에서 작품은 켄이치라는 남자가 한 여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랑고백의 결론이 '새로운 바' 라는 것을 말해준다. 갑자기 임권택 감독의 97년작인 <노는 계집 창>이 떠오른다. 박상면이 연기한 포주가 집창촌에서 창녀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우리가 대한민국의 성범죄 예방에 공헌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하면서 쩝쩝대는 부분. 그 작품의 주인공이나 이 작품의 주인공이나 본질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인데 그 여자들을 사로잡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만 생각한다. 물론 박상면과 달리 나카다이 타츠야가 연기한 켄이치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말한 것일게다. 그러나 아마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끊임없이 돈을 갚고, 또 빌리고 거짓 웃음으로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다.
작품의 대사처리는 인상적이고 또 무섭기까지 하다. 보통은 서로를 잘 아는 사람끼리 더 잘 살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할 수 있을텐데 감독은 그 점을 부정한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그만큼 더 현실에 안주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그러한 삶을 살 것이라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다. 그들은 몇 배로 아플지라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다. 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헤어지고 각자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다. 그래봐야 또 바에서 일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감동적이다 싶은 건 바에 한정되더라도 이 두 사람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쓰는 삶의 방법 덕분이다. 켄이치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자신이 처음 이 생활을 시작하게 됐던 바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사람이 시작점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에는 큰 용기가 요구된다. 케이코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가족과 함께 타고 떠나려는 열차를 찾아간다. 남자가 섹스 후,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 건네준 물건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다. 거기다 그녀는 나름의 성의를 담은 선물까지 건네며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를 미련없이 잊고 뒤돌아선다. 작품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떠나가는 열차를 보는 방식으로 끝맺지 않는다. 열차 안의 사람들이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게 만든다. 간결하고 명확하며 또 인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으로 인해 작품이 꼭 비극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마지막 시퀀스는 케이코가 다시 카튼 바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다. 그녀가 계속 자신만의 새 바를 열기로 마음먹는 것은 더이상 거론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그녀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나레이션이 없다. 그 나레이션은 이미 그녀가 바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이미 나온 뒤다. 이 추운 겨울에도 봄새싹이 미리 준비하듯 피워 놓듯이 나 역시 살아야 한다고. 그녀는 잠깐 계단 위를 바라본 뒤, 성큼성큼 걸어올라간다. 이게 좀 기이하다. <산의 소리>와 <흩어진 구름>에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것은 다름아닌 삶을 산다는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에 대한 감흥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반대다. 힘들지만 어쨌든 삶을 산다. 삶이라는 것이 앞, 혹은 뒤에 있는 것에 따라 의미의 변화와 체감이 유독 깊게 와닿는다. 케이코는 힘들지만, 어쨌든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점이 감동적이다. 그녀는 좋지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그런 불행에 굴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마치 삶의 지리멸렬함에서 초월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녀의 실생활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리고 생업인 바에 출근하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지옥같은 경험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던 그녀가 지금 그 지옥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서 환한 웃음을 피운다. 탁 트인 자연을 보여줬던 몇 작품과 달리 이 작품도 <흐트러지다> 처럼 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바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폐쇄공간 안으로 '하강'하는 상태에서 끝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언제나 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한다. 살려면.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살아가면 모르겠지만, 난 주변에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이 작품의 결말도 사실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감동적인 것은 이 여자는 적어도 무기력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녀는 기꺼이 지옥으로 걸어들어가 거기서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아. 나루세 감독의 작품 속 여인들은 이렇게 절망을 극복하는구나. 다카미네 히데코는 특히 그렇다. <부운>이나 <흐트러지다> 같은 작품에서의 그녀는 본의 아니게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이 작품도 그렇지만, 여기선 그녀가 닥쳐온 비극을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는 직종만 다를 뿐,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삶과 대처하는 방식은 우리가 한 번 쯤은 했던 것이기에 저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이 내가 본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가장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작품일거라고 얘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케이코라는 여자가 지옥 속에서 다시 기어 올라갈 것인지는 알 수 없고, 또 살다가 다시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알고 보면 나약하다는 것은 관객들이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처입은 스스로를 다시 추스리고 다시 살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큰 위로가 된다. 우리 모두 그녀처럼 나약하지만, 동시에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p.s.1 - 지난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바다의 왕자님이 지인인 가수, 조원민 님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면서 그에게 "형.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해." 라는 위로를 했었다지요. 이 작품 보니 그 말이 생각이 나더군요.
p.s.2 -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은 1969년에, 다카미네 히데코 님은 2010년에 고인이 됐습니다.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님을 제외하면 흔히 거론되는 일본의 다른 '영화 천황' 들은 모두 5~60대에 생을 마감했지요. 다카미네 히데코 님은 1979년 이후 영화계에서 은퇴했는데, 글에도 재능이 있었는지 여러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남은 생애를 은둔하며 보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에 관련된 일화 중 가장 유명하기도 하고,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흰 커튼만 있고 세트 없이, 흑백으로 사람의 움직임만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다가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것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를 누가 들었는지 많이 궁금했었습니다. 근데 이제 보니 다카미네 히데코 님이 1969년 초에 병문안을 가서 들은 얘기라고 하네요. 이 개인적 일화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배우는 1984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회고전이 열렸을 때 평론가인 오디 복 님에게 처음으로 알려줬다고 합니다. 감독님은 '만약 내가 몸이 다 나아서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되면, 다카미네 씨가 연기해 줄 수 있겠어?' 라고 했다는군요.
p.s.3 - 참고로 다카미네 히데코 님은 이 작품에서 주연과 더불어 의상도 직접 담당했습니다.
p.s.4 - 정확히 4년 뒤, 한국에서는 이 작품의 표절작이 만들어집니다. <명동에 밤이 오면> 이라는 작품이에요. 신필름 작품이고..표절의 수준이 거의 김기덕 감독님의 <맨발의 청춘> 수준이라는군요. 쇼트 바이 쇼트로 통째로 베끼다 시피 한 거.. <백사부인>도 그렇고, 신필름이 이런 몹쓸 짓을 간간히 하곤 했는데 이형표 감독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경악했네요. 나 <서울의 지붕 밑> 좋아한단 말이야!!! 크흑.. 김기덕 감독님은 지금도 <맨발의 청춘>에 관해서 잡아떼고 있는 판이고 이형표 감독님도 고인이 되기 전까지 <명동에 밤이 오면>의 표절 건에 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리메이크라고 시인했다면 구스 반 산트 감독님 버전의 <사이코>처럼 대담한 오마주라면서 해석 될지도 몰랐을텐데.. 이 작품은 필름이 남아있습니다. EBS에서 HD로 방영된 적 있지요.
정지영 감독님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이지만 한국영화는 미국영화 다음으로 일본영화와 중화권 영화의 영향도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영화요. 왜냐면 이건 전체적으로 개방되기 전까지 제한된 경로와 사람들만이 접할 수 있는 문화였고, 그로 인해서 어떤 죄책감도 들지 않았을테니까요. 아마 당시에는 자기 살아 생전에는 절대 개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연출력이 참 괜찮다 싶은 작품이 아류작이라는 것이 확인될 때 그 순간의 허탈감은 참....... 그렇고 그런 느낌이에요. 아. 물론 EBS와 영상자료원 측이 HD로 복원한 것에 관해선 불만 없습니다. 한국영화계의 어두운 역사도 복원되어서 같이 의논이 되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걸 두려워해서도 안 되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