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 많아요.
 뭐가?
스포일러가.

근데 이 작품에다 스포일러란 표현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

 


감독: 오멸
주연: 양정원, 이경준, 성민철, 홍상표, 문석범, 박순동, 강희, 김동호, 김순덕, 조은, 어성욱, 백종환
음악: 전송이, 서지선
촬영: 양정훈
12세 관람가 / Black & White / 108분

 

....


제주도의 군부대도 4월 3일이 되면 4.3 박물관에 견학을 간다. 다른 군부대도 모두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군부대는 그랬다는 얘기다. 내가 본 비 오는 날 제주도의 날씨는 대부분이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공문이 날아오고, 대략적인 인원들을 꼽아서 가던 그 날도 안개가 자욱했다. 정확한 이름은 4.3 평화기념관.. 버스에서 내리면 그럭저럭 거리감이 느껴지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생각해보니 그 때 한 번 가보고는 못 가봤기 때문에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면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으니까. 참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난 포항도 가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끼는 경우가 있다. 고등학생 때, 통학버스비를 내지 않고 일부러 한 학기 정도는 학교에 걸어서 간 적이 있었는데, 내 발걸음의 속도로 그 곳까지는 대략 40분 가까이 걸렸다. 그 때는 맞은 편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난 안개를 좋아한다. 스스로 알 수 없이 내 한 몸 다 가려지는, 그것에 묻혀진다고 생각할 때의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안개는 달랐다. 마침 내가 제주도에 발령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기에 더 그렇지만, 그 곳은 낯선 공간이었다. 곳곳에서 까마귀 소리가 들리고 산 에 위치한 안개 속에 싸인 평화기념관을 향해 걸어가는 경험은 특별하다. 목적지는 저기 있는데, 거기까지 도달하는 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나는 길을 잃은 채 그저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게 희한하다. 육지도 아닌 섬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이. 육지도 끝이 있지만, 동시에 끝없이 이어져 있기도 하다. 길을 잃으면 이 두 발로 새로운 길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섬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벗어날 수 없다. 섬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그게 더 막막하다. 너무나 벗어나고 싶은데, '새로운 길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면 원래 도망쳐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섬의 한계이자 동시에 정의다. 4.3을 아는 것, 혹은 오멸 감독의 <지슬>을 보는 것은 결국 당사자들에게는 숙명으로, 상관 없는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의도치 않은 원죄처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그 박물관과 작품은 원죄처럼 보였다. 박물관은 고요했고 <지슬>의 도입부 역시 파도가 치는 시퀀스를 제외하면 고요하다. 무채색의 컨셉으로 내부가 디자인 되어졌던 박물관, 그리고 흑백으로 찍힌 작품... 컬러의 세상은 우리에게 몰입하라 강요하지만 흑백같은 단색조들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몰입하게 만든다. 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있고, 개성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던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검은색, 흰색, 회색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색깔이 비슷하다고 한 덩어리로 보여 별 것 아닌 듯 치부하다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 전에 관객은 필사적으로 몰입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슬>의 처음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적인 것들' 이다. 일종의 '전운' 같은 느낌이랄까? 회색빛 구름이 드리워진 공중 쇼트를 보여준 뒤에 작품은 제주도의 어느 한 민가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제사용 그릇들을 보여준다. 그 전에는 이미 '빨갱이 토벌대'로 온 군인들이 민가에다 불을 질러 그 주변을 폐허로 만든 뒤다. 군인들을 이끄는 수장인 김 상사가 어질러진 제사 그릇들을 발로 차며 문을 열자 그와 함께 온 군인인 고 중사가 칼을 다듬고 있다. 김 상사가 제사음식으로 쓰려는 것을 가져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를 꺼내더니, 그의 칼을 얻어 깎고는 서로 나눠 먹고 웃음 짓는다. 과일 한 쪽도 나눠먹는 선진병영 환경에서의 군인들의 우정이라며 국방부가 홍보 영상으로 쓸 법도 하지만 사실 이 쇼트는 굉장히 끔찍하다. 왜냐면 뒤에 웬 머리 긴 여자가 사다코 마냥 몸이 반쯤 가구 안에 걸쳐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이 쇼트를 마주했을 때, 그리 끔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감독이 구상했을 이 쇼트의 연출이 영화적으로 감정을 증폭시킨다기 보다 연극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반응이 조금 늦게 왔다. 아. 저게 여자의 시신이구나.. 지금 저 군인이 사람을 죽인 것이구나..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지슬>에서 앞으로 벌어질 '4.3 학살'의 첫 순간을 본 셈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사실 리얼하게 그 시대를 묘사하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첫 순간을 다큐멘터리적이지 않고, 의외로 양식적인 연출로 묘사한다. 막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배경처럼 자리 잡아 있는 여인의 시신, 그녀의 시신이 담겨진 가구, 그녀의 푹 숙여진 머리를 가운데 놓고 양 옆에 선 두 군인이 사람을 죽인 칼로 배를 깎아 나눠먹으며 웃는 모습까지.. 구도를 비롯한 전체적인 조형에 신경을 쓴 것이 상당히 미학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품은 도입부를 통해 <지슬>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를 관객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 4.3 은 4월 3일 새벽에 제주 남로당 무장대들이 제주대 내의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고 정의되어져 있고, 또 그것이 맞지만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처음 불안감이 조성됐던 것은 1947년에 일어난 3.1절 발포 사건 때문이었다. 제민일보 취재반이 지은 <4.3은 말한다> 1권에 따르면 당시 3.1 절 기념집회 도중 기마경관이 아이를 쳤다고 한다. 일부러라기 보다는 아마도 타고 있던 말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생겼던 일 같은데, 아이가 치었으니 성난 군중들이 그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서 경찰 측이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오인하고 제주도민들에게 발포를 하게 된다. 당시 집회에 시위대는 없었고 200여명 가량의 관람객들만 있었는데, 그 중 6명이 발포에 사망하고 만다. 경찰과 미군정은 민심수습을 하려 들지 않고 경찰서 습격을 근거로 내세우며 집회 관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남로당 제주위원회 측은 악화된 민심의 흐름을 반 경찰 / 군정 활동에 이용하여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필두로 민관총파업을 유도해서 돌입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내가 가졌던 궁금증 하나는, 제주도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는데 왜 그것을 애초부터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4.3은 말한다> 에서 제민일보 취재반과 인터뷰를 가졌던 남로당 연구 전문가 김남식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는 남로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구금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당시에 남로당은 군정청에 합법정당으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6.25가 일어나기 전이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됐지만, 친일파들이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공직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뭔가 불가능했던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남로당 제주도당은 4.3을 일으켰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에 의해 엄청나게 큰 인명피해가 날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고립된 지역인 제주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지은 <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에 따르면 이 남로당의 봉기는 중앙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남로당 제주도당 측은 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중앙당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4.3을 일으키겠다고 결정해 버렸다. *
 
이것은 4.3 이라는 것이 현재까지도 마땅하게 어떤 활동이었는지 통합적으로 규정되지 못했다는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누군가는 '사태' / '사건' 이라 이름 붙였고, 누군가는 '항쟁', 또 누군가는 '폭동'이라 말하며 아예 '혁명' 이라고 이야기 되어지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이 많은 호칭들에 문제가 있다면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우리네 말이듯이 어떤 명칭을 붙여주느냐에 따라 해당되는 사례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감독과 제작자는 GV나 인터뷰에서 작품을 흑백으로 촬영한 것은 제주의 풍경이 이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흑백의 색깔은 모든 것을 중화시키는 마력이 있다. 오멸 감독은 작품의 색채를 통해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바뀌는 명칭들을 전부 한 덩어리로 묶어버린다. 
 
그래서 <지슬>에서는 '사태, 사건, 항쟁, 폭동, 혁명' 이라는 표현이 모두 무의미해진다. 작품은 그 모든 명칭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속성을 본다. 위의 다섯개 단어가 정의를 규정받는 대가로 요구하는 것. 바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우리는 그것을 '학살'이라 부른다. 군인들이 배를 나눠먹으며 서로의 전우애인지 뭔지 모를 웃음과 마음을 공유하는 쇼트가 끔찍하게 보였던 건 그 뒤에 죽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흑백의 세상에서도 그것만큼은 똑똑히 보인다. 그리고 작품은 그 죽음을 응시하라고 말한다.

 

사실 안타깝게도 4.3은 이제 점점 논의되기 어려운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시간의 문제인 셈인데, 가깝게 보자면 용산 참사, 멀게 봐도 5.18의 경우에는 적어도 아직 관련자들이 살아있어 궁극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가지고 싸울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1948년에 발생한, 이 일의 도화선이라고 일컬어지는 3.1 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1947년까지 따지면 4.3은 무려 65년 이상의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유독 아카이브가 빈곤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일은 점점 논의될 수 있는 힘을 잃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로당, 이승만 정권, 미국,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각각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관련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자 악재가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슬>은 다큐멘터리 터치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덧붙여 그 일의 원인을 남과 북, 한 쪽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은 4월이 아니라 11월부터 시작한다. '해안선 5km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여기겠다'는 공포가 퍼져나간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 4.3에 관한 시선들 중 하나로, (자칭) 군사 전문가인 지만원은 4.3을 '폭도의 반란'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저서 제목인 <지워지지 않는 오욕의 붉은 역사: 제주 4.3 반란 사건>만 봐도 그의 견해를 대충 알 수 있는데, 이 책의 한 부분에서 북괴의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란 저서의 일부가 인용되고 있다. 지만원 박사는 이 책에서 4.3 발발의 첫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고 썼다.

 

'투쟁에 나선 남조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원수들의 피비린 탄압을 불굴의 투지로 싸워냈다. 2월 7일 이후 26일까지, 수많은 경찰지서가 녹아나고 악질경찰관, 악질관리, 반동분자 수십명이 처단되었다. 26자루의 총과 481발의 탄약을 빼앗고, 61대의 기관차, 27개의 통신기구, 수많은 다리와 도로를 파괴하고, 83개소의 전신전화선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또다른 비슷한 시선으로는 언론인 조덕송 기자가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쓴 현지보고서,
 '유혈의 제주도' 에서도 등장한다.
 
'...직접 난동의 희생이 되고 있는 제주도민은 뭐라고 사건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가. 금번 사건의 도화선은 순전히 도민의 감정악화에 있다. 무엇 때문에 제주도에 서북계열 사설청년단체가 필요하였던가. 경찰 당국은 치안의 공적도 알리기 전에 먼저 도민의 감정을 도발시키는 점이 불소하였다. 왜 고문치사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직접 원인의 한 가지로 당국자는 공산계열의 선동모략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근인의 한 가지로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30만 전 도민이 총칼 앞에 제 가슴을 내밀었다는 데에서 문제는 커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

 

군인들이 첫 등장했을 때의 섬뜩한 분위기를 제외하면, 제주사람들이 첫 등장하는 시퀀스는 유머러스하다. 오멸 감독의 전작 두 편인 <어이그, 저 귓것>과 <뽕똘>이 유머가 아주 풍부했기 때문에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애초에 작정하고 유머 코드를 넣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고 나면 더이상 웃기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다. 이들은 폭도로 간주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두려워 산으로 숨어든 참에, 군인들이 올까 구덩이에 숨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은 참 이상하게도 비좁은 구덩이 속으로 끊임없이 모여든다. 자리가 없으니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가라고 애원하는데도 말이다.
 
이 시퀀스는 어떻게 보면 꽤 상징적인 측면이 있다. 해안선 5km 바깥에 있다 폭도로 몰리기 싫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서로 모이는 것인데, 군인들과는 달리 이 마을 사람들은 육지를 오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공동체로서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모여 숨어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들 중에는 충분히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존재한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고 '삼촌'이라 불리는 자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협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의 아버지가 해코지를 당했다. 그래서 그는 간간히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경질적인 대응을 받는다. 그는 멋쩍게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만, 일단은 마을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한다. 이후에 군인들의 동굴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말린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우는 부분에 이르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이 삼촌을 용서하고 같이 화해한다. (근데 이 삼촌이 '동호 삼촌'인지 헷갈린다.)
 
마을 사람들은 4.3 이 어떤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죽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항변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러 온 토벌 군인들을 걱정하며, 서로 뭉치는 것이 도리어 고립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이들이 무식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그저 일상을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사회가 설명을 해 주지 않으니 위기의식을 느낄 새도 없고, 또 계속 그 의식에 사로잡힐 수만은 없으니 그냥 어딘가에 폭도들이 있는가보다 하면서 그렇게 산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는 토벌대들을 걱정하고, 친일했던 사람을 포용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피난올 때 집에 놔 두고 온 돼지에게 먹이 줄 걱정을 한다. 마지막으로 기어코 가지 않겠다는 어머니를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하는데, 얼만큼 심각한지 모르니까 일단은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하여 놔두고 간다. 이런 판단은 당연하다. 그들은 사람이니까.
 

 
 
작품 속에서 이런 방식은 일부의 군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사이 좋게 배 깎아먹는 이후, 다른 군인들의 모습이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는 추운 겨울날에 나체로 가혹행위를 받고 있는 병사인 박 일병의 모습에서다. 그러나 그의 나체가 등장하기 이전에 관객이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너무 추워서 꽉 쥔 주먹을 클로즈 업 한 쇼트다. 사병인 그 군인이 가혹행위를 받고 있는 이유는 '빨갱이 / 폭도들을 한 놈도 사냥하지 못해서' 다. 사람의 시체를 옆에 두고 눈밭에서 똥을 싸고 있던 김 상사가 가혹행위를 시킨 백 상병을 부르고, 밑의 애들에게 좀 잘 해주라는 말을 남긴채 사라져간다. 이 사병이 다음 순간에서 받는 대우는 몸에다 찬물이 끼얹어 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있으면 이 사병이 쥔 주먹은 여러 외부적 여건에서 발생된 고통이 증오로 승화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친구이지만 계급 상으로는 후임인 김 이병과 더불어 마을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들이 무고하다는 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꽉 쥔 그의 주먹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는 것과 같다.

 

의외로 증오의 순간은 예상 못한 지점에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서 상당히 섬뜩했던 부분 중 하나인데, 장지문이 클로즈 업 된 쇼트가 그것이다. 김 상사가 자신의 동생을 찾는 것이 장지문에 가려져 소리만 들려오는데 관객이 듣기에도 제대로 된 정신상태에서 소리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옆에서 누군가 지속적으로 칼을 갈고 있는 중이다. 작품은 가장 인도주의적이고 조용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장 지독하게 광기에 휩싸여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장지문이 열리고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돼지가 가마솥에 넣어질 때, 우리는 그들이 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지에 관해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김 상사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마약에 중독되어 있고, 옆에서 조용히 칼을 갈던 고 중사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폭도들을 죄다 잡아 죽이라고 지시한다. 관객은 후에 이 군인이 사람을 무차별로 학살하면서 자신의 가족이 빨갱이에게 희생당했다는 과거를 읊조리는 것을 듣게 되어 살인귀가 된 연유를 알게 된다.

 

<지슬>의 이런 디테일은 실제 이런 관련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들려왔던 증언들을 참고하여 넣은 것이다. 가령 우린 5.18 관련 TV 다큐멘터리에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진압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약물이 함유된 막걸리 등을 마시고 광주 시가지로 갔다고 증언한 것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비단 5.18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베트남전을 비롯한 전쟁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약물이 없으면 버텨내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더불어 빨갱이에 대한 무시무시한 증오를 드러낸 사람이 있지만, 정작 오해로 인해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인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 디테일은 '관습'이라 할 정도로 실생활이나 관련된 여러 작품들에서 봐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질리지 않고 여전히 생생히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는 약물과 누구나 오해로 인해 품을 수 있는 증오라는 익숙한 요소들이 우리의 인성을 단숨에 마비시켜 버린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군인들도 어찌보면 일상을 살고 있다. 그들 역시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명령에 살고 죽어야 하는 군인인지라 굳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빨갱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무고한 사람이라면 그는 공적을 세운 것이 아니라 살인범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두 사병만 빼 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습격한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에 관해 단 한 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사람이고 국방의 의무라고 여기며 자신의 일니까. 작품은 '사람이라서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뒤엉키게 만들어놓고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서로의 입장이 이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작품은 정말 사무치게 슬프다. 마치 우리가 왜 싸우고 죽어야 하느냐고 묻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오해의 증오는 그 절규를 바로 일축시켜 버린다.
 
이 시퀀스의 마무리는 섬뜩하다. 사병들은 민가에서 가져온 돼지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며, 고 중사의 명에 따라 '폭도들'을 죽이러 나서려 한다. 그리고 옆에선 김 상사가 약에 취한 채 기왕 폭도 잡으러 가는 김에 계집애도 하나 건지라고 말하며 땅바닥을 기고 있다. 죽은 돼지가 담겨진 가마솥의 동그란 형상은 곧 동굴의 구멍으로 바뀌며, 피난 온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잠시 그 구멍을 응시하다 다시 숨어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피난 온 마을 사람들은 도리어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 있다. 그들은 가마솥 안의 돼지다.


 

 
* <지슬>은 작품 속 인물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지슬>이 분노의 시선으로 부릅뜨고 '침묵하고 있다' 고, 그래서 진실을 밝히라고 외치는 곳은 작품 속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미국과 그에 관련된 사람들'이다.

 

미 군정은 3.1 발포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들의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한다. <4.3은 말한다> 에서 언급하는 그들의 자료에 따르면 미군 조사단은 제주 총파업의 원인을 3.1 절의 경찰발포로 인해 도민들의 감정이 고조됐고, 남로당이 이 점을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여 증폭시켰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후속조치를 '경찰의 행위' 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그들이 떠나자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대가 제주도에 상륙했으며, 경무부 수뇌진이 제주도민의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게 된다.

 

이후, 파업이 잠잠해지자 미군정 당국은 제주 수뇌부를 전면 교체하게 된다. 3.1 발포 사건 이후로 제주도 경찰관의 숫자를 줄이고, 사정 모르는 육지 사람들 / 서북청년단 일원들로 채워나간 것이다. 참고로 이 때 전면적으로 유입됐던 서북청년단은 40년대 후반에 결성된 반공단체로, 사무실은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으며 활동자금은 한반도 서북부 출신 실업가들과 미군정청 고위관리들, 그리고 이승만 정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의존하고 있었다. 흔히 4.3을 일으킨 원흉 중 하나로 꼭 거론되곤 한다. 그리고 이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일부가 빠져나가 대동청년단이라는 또다른 우익 단체를 만들게 된다. 둘 다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맞춰 활동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4.3 해결에 참여했다가 후에 해임되는 수난을 겪은 9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유고인 <4.3의 진실> 에서 그의 견해와 더불어 끔찍한 일화 하나를 볼 수 있다. 3.1 발포사건 이후, 제주도 내에서 약 2,500명의 청년들이 구금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김용철, 양은하, 박행구라는 이름의 청년들이 구금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다 죽는 일이 발생한다. 제주 경찰 측에서는 3월 15일에 시체를 몰래 강에 내던지려다 그 광경이 청년들의 가족들에게 발각되고, 그 사건이 제주민심에 큰 충격을 줘 도민들이 경찰들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미군정이 뒤에 있는 경찰들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는, 비록 이승만 정권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봉 당시 경무부 공보실장까지 이렇게 얘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물론 폭동 원인에 경찰도 과실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느 면에서 경관의 고문에 의한 치사 사건이 있었고, 또 경찰이 청년단체에게 경관행세까지 방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미군정 하에 있었기 때문에 '남로당의 폭동' 이라며 공산주의 세력 쪽에 원인이 있다고 봤지만, 동시에 당시 관공리 쪽의 문제도 심각했다고 지적한 이인 경찰총장도 있다. 그는 1948년 6월 17일 <서울신문> 에서 이렇게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제주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 것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는 것과 관공리가 부패하였다는 것 등을 볼 수 있겠다. 특히 그들은 제주도에 가는 게 무슨 정배나 가는 양으로 생각함으로써 인재될 만한 사람들은 제주도로 안 가고 보니, 명예나 돈이나 바라는 친구들이 어찌 옳은 시정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부패상은 작년인 1947년에 내가 제주에 방문했을 때 이미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

 

 

* 1. 김익렬 9연대장의 유고인 <4.3의 진실> 에서 그가 쓴 4.3 초기의 피난민 입산사태에 관한 주장과 견해.

 

'토벌이 시작되고 1주일이 못 되어 폭도의 세력은 강해지고, 경찰은 읍내를 수비하는 데도 급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육지에서 토벌명령을 받고 내려온 김정호 사령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수립된 작전계획이 '초토작전' 이다. 이 작전이야말로 제주도를 대폭동 사건으로 확대시킨 근본원인이 된다. ...최초의 작전은 극비밀리에 조천면과 애월면 일대의 산간마을에서 행해졌다. 그 초토작전은 철저하게 이뤄져 비밀의 누설을 방지하였으므로 당사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제주도 미군정 장관이나 9연대 정보부에서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인접마을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산간마을 주민들은 치안부재 상태에서 생명보전 때문에라도 할 수 없이 폭도들에게 조금이라도 협력 안 한 마을이 전무할 정도였다. 따라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지 않은 마을은 거의 없었다. 산간마을 주민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폭도에 가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읍이나 일주도로변의 치안이 확보된 해변마으로 피난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였다. 해안마을로 하산한 주민들에 대하여 또 경찰들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처음엔 강력히 초토작전을 반대하였으나 다음부터는 어찌된 셈인지 묵인하는 태도로 나오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장려하는 태도로 변하였다.'

 

미군정이 초토작전을 묵인하게 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한 마을, 한 마을을 초토화시켜 나갔다. 이렇게 되자 일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돌변하였다. 대부분의 산간마을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폭도들에게 가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폭도의 수는 기하급수로 증하가여 갑자기 수백, 수천이 되어 그 수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다.'

 

2. 당시 경찰의 진압작전을 직접 보고 그것을 경향신문 신춘 현상수기에 써서 당선되어 1964년 1월 5일자에 게재됐던 임두홍의 글, <내가 겪은 사건실기 - 4.3 폭동> 중 일부..
 

'..과연 그들 경찰이 하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그들의 총구는 닭과 개를 향하여 불을 뿜었고 아무 집에나 마구 들어가서 밥을 시켜먹었으며, 마을의 개들은 그들을 보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갔다.

 

그들은 젊은 여인들을 붙들어다가 욕을 보였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만 보면 폭도라거나 혹은 빨갱이라고 하여 행패를 부리고 잡아갔다... 젊은이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순경들은 마을사람들을 전부 학교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몽둥이로 사람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맞는 사람들은 '내가 맞을 죄를 졌으면 가르쳐 달라' 고 악을 썼지만 때리는 순경들의 입에서는 욕설과 몽둥이만이 내려졌을 뿐이었다.'
 

3. 4.3 당시 통위부 정보국장을 맡았던 백선엽 장군이 쓴 <실록 지리산> 118 페이지 일부..

 

'..한편으로 11연대 (9연대가 11연대로 재편성 되었음) 는 공비들의 정보망을 차단하고 좌익세력에 위협을 주기 위해 좌익 혐의자들을 마을별로 색출, 공개 처형 하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이 같은 처형 과정에는 집안끼리의 갈등, 개인적 원한 등이 얽혀들어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당시 토벌정책으로는 그런 옥석을 가려내지 못했다.' *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 쏴 버리지 그랬냐..?"
 
"그러게...
아냐. 그래도, 사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참고로 <지슬>은 네 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다. 그리고 두번째 챕터와 세번째 챕터는 장르적인 재미에서도 가장 긴박감 넘치고, 동시에 지독히 슬프며 작품 속 인물들의 오해와 갈등에 불을 붙인다. 그래서 솔직히 보는 내내 괴로웠다. 왜냐면 웬만한 호러 장르의 작품들보다도 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일원 중 한 명인 경준 ('뽕똘'이라 불려야 옳겠지만, 그는 이 작품에서만큼은 유일하게 '뽕똘'이라 불리지 않는다.) 의 안내에 따라 좁다란 굴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몇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잘 따라오다 학교에 놔둔 책을 가지러 가기 위해 사람들을 이탈한 순덕이란 처녀. 그녀는 굴에 들어가 있는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인 동호 삼촌 부부의 딸이다. 그리고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몸이 불편하니 자신은 못 간다며 마을에 남은 한 할머니. 그녀는 동굴에 숨어 있는 무동이란 남자의 어머니이다. 김 상병은 광대하게 펼쳐진 제주도의 오름에서 순덕을 발견하지만 차마 총으로 쏘지 못한다. 
 
문득 보면서 느꼈던 너무나 끔찍한 생각은 '차라리 저기서 박 이병이 순덕을 총으로 쐈다면 나았을까?' 하는 것이다. 순덕은 도망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른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고 중사와 김 상사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한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이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이나 끔찍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기어이 전자의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박 일병이 김 이병에게 배고플 때 먹으라고 얻은 감.. 아. 맞다. 이 작품 제목에 대한 의미를 안 적었네. '지슬'은 제주어로 '감자'를 의미한다. 그 '지슬'을 순덕에게 갖다 주려다 그녀가 입수한 총에 맞아 죽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섬 사람들과 육지 사람들 사이의 상처가 지독하게 곪아 버렸음을 극명히 드러내는 이 시퀀스가 참 싫다. 흑백 영상의 명암 처리는 아름답고,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민가의 장지문이 순서대로 닫혀가며 그것을 카메라가 빠르게 트래킹 하여 포착해내는 순간은 너무나 '영화적' 이라는 느낌을 준다. 알고 보면 사선에 내몰린 한 처녀가 사력을 다해 살아보고자 마지막 저항을 하는 처절한 순간이다. 그러나 작품은 군인들의 시선으로 이동해서는, 마치 오사마 빈 라덴 때려잡으러 가듯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근래에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제로 다크 서티>를 봐서..) 순덕의 죽음 직전 순간을 연출하고 있다. 여기에도 영화적인 리듬이란 표현을 쓴다면 그게 해당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 리듬이 너무 매끈해 보이는 것이다. 폭력의 순간을 보여주자고 관객에게까지 폭력을 쓸 수는 없다. 이것은 작품을 만든 오멸 감독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이 작품을 정식 개봉 전에 시사회 겸 기획전 형식으로 대구 동성아트홀에서 상영됐을 때 처음 관람했다. 그 다음주에 한 번 더 봤었는데, 처음 이 작품이 상영됐을 때 고혁진 프로듀서의 GV가 있었다. 오멸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작품의 공동감독인양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또 그에 걸맞게 작품 제작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게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의외로 오멸 감독이 찍은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작품은 대부분의 시퀀스가 그 날의 느낌을 따라 즉흥적으로 찍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테이크를 재촬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그런 방식으로 예전부터 찍어 왔던 홍상수 감독도 이 정도의 '화면 때깔'이 나오지 않는데, 감독의 능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제주도의 풍광이 그만큼 멋들어져서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실제로 제주도의 풍광은 어딜가나 멋지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퀀스 역시 즉흥적인 느낌에서 찍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시각적인 폭력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지극히 장르 영화적 재미의 향기를 풍기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일까? 오멸 감독의 작품은 잘 나가다가 꼭 한 번씩 나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었다. <어이그, 저 귓것> 은 초반 30분, <뽕똘>은 마지막의 '자파리',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순덕의 죽음과 더불어 벌어지는 한 밤 중의 총격전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감독이 듣는다면 그의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면 날 보고 어떡하라고, 이 자식아!?' 라고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일테니 뭐라 할 순 없지만...개인적으로는 그래서 '개별적인 쇼트'로 따질 때는 이 작품이 싫었다. 오히려 <어이그, 저 귓것>이나 <뽕똘>이 좋았던 것이다.
 
두 작품은 사실 기본적으로 워낙에 한정된 예산으로 만들어진 탓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적인 화면빨' 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이 솔직함이었다. 지금의 여건에서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다보면 갑자기 예상 못한 공격을 하듯이 불현듯 너무나 아름다운 쇼트들을 보여주곤 했다. 그건 그 여건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짜 내어 구현한 아름다움이었다. 반면 여전히 빡빡하더라도 앞의 두 작품보다는 여유로운 여건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모든 순간이 지나치게 매끄러워 갑자기 보석같은 순간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없다. 오히려 이 아픈 순간을 묘사하는 것에 있어 저런 연출이 타당한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아마 개인적인 체감의 차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지슬> 의 매력은 개별적인 쇼트보다 하나의 시퀀스에 있다. 잘 된 쇼트, 잘 되지 못한 쇼트들을 모두 합쳐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것이기에, 매끄럽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시퀀스는 매력적일 수가 없다. 작품 속에서는 이런 시퀀스가 여러 개 합쳐져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지점이 있다.. (Pt.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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