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오멸
주연: 양정원, 오영순, 문석범, 이경준, 김대영, 장정인
음악: 황태승, 양정원
촬영: 김경섭
12세 관람가 / Color / 9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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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똘>을 책에다 적어놓을 때, 그 작품의 연작이라 볼 수 있는 오멸 감독의 <어이그, 저 귓것>은 블로그에 적어놔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적어놓는다.) 오멸 감독의 <어이그, 저 귓것>의 시작은 슬프다. 기타 잘 치고 노래 잘 부르는 용필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온 몸이 성치 않은 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노래로 성공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육지로 상경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용필은 어머니는 잘 계시냐고 묻는데, 관객은 그 말 때문에 잠시 기대를 한다. 그래도 어머니가 따뜻하게 그를 맞아주겠지. 하지만 용필은 '어머니의 산소'를 얘기한 것이었다. 작품은 곧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절규하는 용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찌보면 절규 같고, 어찌보면 고향에 돌아와서 다시 시작해 보겠노라는 의지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곧 그 생각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할아방'이 등장해 용필을 다그치기 때문이다. 너희 어머니 묘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있지 않냐?
....풋! 용필은 순간 멍해진다. 이 순간이 웃긴 이유는 용필 본인이 남의 묘인 줄도 모르고 온갖 감정을 다 담아서 절규하고 있는 중이며, 또 음악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마치 이 시퀀스는 정말 감동적이고 슬프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 알려주려고 홍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감정을 담은 시퀀스가 결국 남의 묘라는 이유로 착각으로 끝나고 말 때 작품의 제목이 뜬다. '귓것'. '귀신'의 제주어 표현이지만 동시에 '바보'라는 놀림과 경멸의 표현이기도 하다. 작품을 한 번에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기발한 도입부이자 저예산으로 찍힌 것이 티가 나지만, 동시에 특정 부분에서의 카메라워크가 참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이 작품을 거꾸로 봤다. 오멸 감독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이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인 2011년, 휴가가 끝나고 귀대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복무 중인 부대가 있는 제주도로 왔을 때였다. 복귀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 주로 제주도에 도착을 했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는 꼭 영화 한 편을 보고 귀대하곤 했었다. 그 때 <뽕똘>이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에서 한 관을 차지하고 상영 중이길래 관람했었는데, 그 작품이 내가 처음 본 오멸 감독의 작품이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뽕똘>과 이 작품은 모두 2009년에 제작됐는데 개봉을 2년 뒤에 한 것이었다. 거꾸로 보고 느낀 것은, 영화란 것이 개인의 취향과 선호도에 차이가 있다지만 오멸 감독의 작품은 만듦새로 따진다면 첫 작품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음 작품을 만들어 갈수록 더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이후에 그가 이뤄낸 성취를 생각하면 첫 작품이 가장 나쁘다는 이야기도 된다.
단적으로 <어이그, 저 귓것>의 초반 20여분은 최호 감독의 <고고 70>을 처음 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말했던 감정을 떠올리게 된다. '주인공들만 신난다'..라는 것 말이다. 이 작품의 주된 이야기는 제주도에 용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뽕똘과 전설적인 춤꾼이 되기를 꿈꾸는 댄서 김, 실명은 '대영' 이 자기 실생활을 내팽겨 쳐버리고 그로부터 음악을 한 수 배워보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뽕똘>과 더불어 이 작품이 초반부에 관객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나라 방언인데도 불구하고 듣고 있으면 꼭 외국어 듣는듯한 100% '제주어' 대사들이다. 실제로 제주도 말은 방언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들어보면 의미를 아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유네스코에게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인정을 받았다. 그 언어가 제주도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강점이 된다. 특히 이 제주어의 매력이란 말에 딱히 강세를 붙이기 보다는 끝을 조금 늘리거나 주로 의문문으로 말하고자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발음의 높이를 구사하는데서 나오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같이가젠~?', '뭐 하멘~?' 같은.) 이 언어의 느낌은 가히 '귀엽다'! 이런 느낌은 <뽕똘>에서 자주 사용됐고, 또 관객의 미소를 짓게 만들기 위한 유머로서 적중률이 꽤나 높았다. 노래를 배우는 이 작품과 달리 <뽕똘>은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인데 육지에서 온 무명배우인 성필이 현장을 무시하자, 뽕똘이 제주어를 쓰면서 성질을 부리는데 전혀 화가 나 보이지 않고 귀엽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그, 저 귓것>에서는 제주어가 힘을 발휘하려는 순간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작하고 30여분이 지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 초반 30분은 짜임새 있게 만들어 졌는가? 사실 여기서 많은 불만이 있었다. 그것은 캐릭터에 관해 별다른 명확한 영화적 설명이 존재하지 않아서다. 가령 관객이 도입부부터 보게 되는 인물 중 한 명인 할아방, 혹은 '삼촌'이라 불리는 노인은 남의 묘에서 울고 있는 용필을 다그칠 때는 정신 똑바로 박힌 동네 어르신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는 정신이 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용필을 다그치고 난 뒤에 바로 등장하는 시퀀스는 다름아닌 이 할아방이 동네 할망이 운영하는 점빵 앞에서 노숙자처럼 드러누워 잠을 자는 것이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별다른 대사도 없이 점빵 외벽에다가 노상방뇨를 한다.
여기서 뽕똘이 첫 등장하는데, 그는 할망에게 외상을 하려 들면서 할아방의 행동을 고자질한다. 할망은 화가 나서 모른 척 하고 서 있는 할아방의 등을 찰지게 후려치기 시작한다. 젊었을 적엔 이 오줌이나 싸대는 물건으로 이곳저곳 쑤시고 다녔다면서 말이다. 관객들이 할아방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입부 이후로 바로 이런 시퀀스가 등장하는 것이 이 인물에 대해 심한 괴리감을 만든다고 느껴졌다. 이후는 더 심하다. 할아방은 개밥그릇에 있는 물을 들어서 먹다가 할망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며, 또 한 번은 점빵에 들어가 소주를 훔치려다 적발되어 쫓겨난다.
그리고 이후, 첫 감상 때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시퀀스가 하나 툭 튀어나온다. 여전히 주변을 서성이던 할아방은 농사를 짓고 있다 새참 먹고 있는 여인들의 초대를 받는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그녀들은 마치 짠 듯이 할아방에게 소리 한 곡조를 요청하고, 그가 한 소리 부르기 시작하는데 정말 잘 한다. 마침 용필에게 지적받고 양동이 뒤집어쓴 채 노래 연습하던 뽕똘과 대영은 할아방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지금 저쪽에서 놀고 있다면서 그쪽을 향해 달려간다. 마을 사람들이 한데모여 소리에 맞춰 풍악을 울리는 중이며, 멀리서 대영이 '댄서 김'이 되어 괴이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 시퀀스의 핵심은 그들만 신났다는 점이다. 아까 전만 해도 가게 앞에서 오줌 싸다 얻어맞고, 개밥그릇의 물을 먹고, 소주 훔치려던 남자가 노래를 굉장히 잘 부른다. 이 점에 관해서 관객에게 어느 정도 납득을 시켜줘야 했었다. 그런데 작품은 이 순간이 등장하기 이전 30분동안 할아방을 코미디의 대상으로만 삼을 뿐, 음악적인 이야기에 관해서는 어떠한 말도 해 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음악적인 부분에서 고수의 면모를 보여준 이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30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작품은 이 인물에게 큰 비중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나마 등장해도 화장실 코미디에서나 발생할 법한 상황들을 만들어 내어 어떻게든 웃기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소리가 한 곡조 뽑혀나오자 어안이 벙벙한 것이다. 이전과 지금의 갭이 너무나 커서. 그래서 <어이그, 저 귓것>의 첫번째 음악판은 관객의 입장에선 난장판으로 보인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할아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할 때 거리낌 없이 뛰어가서 신나게 논다. 하지만 관객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쌍방향 소통을 하는 영화는 드물다. 그런 영화는 필름이 영사되는 매체적 한계 이상의 것들을 끌고 들어와서 극복했을 때 뿐이다. (남기남 감독의 <영구와 땡칠이> 라든가.. 짐 셔먼 감독의 <록키 호러 픽쳐 쇼> 라든가..) 일방적으로 작품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들이 너무나 이상할 뿐이다.

여기서 느낀 것은, 현재까지의 오멸 감독은 '작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에는 참 미숙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두번째 작품인 <뽕똘> 부터 담고 있는 이야기의 함의를 키워가는 모습을 보였다. 소규모 인원으로 영화를 찍는 이야기는 중반부로 가면서 제주도의 신화적 요소들을 끌고 들어왔으며 세번째 작품인 <이어도> (<- 오멸 감독이 극장 개봉을 할 생각은 없다고 했던..) 와 최근작인 <지슬>은 기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제주 4.3 이라는 '역사' 였다. <어이그, 저 귓것>도 빛이 나는 순간은 순수하게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창출되는 소동극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세상의 이야기'를 끌고 들어와 작품 속 인물들에게 맞출 때다.
그 순간은 다행히도 내가 이 작품을 좋지 않게 봤던 순간에 거의 이어서 등장한다. 시작은 뽕똘의 아내가 아기에게 쓸 기저귀를 사러 할망의 점빵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마침 점빵에 기저귀가 다 떨어져서 도착하는데 몇 일 걸릴 거라고 얘기해준다. 뽕똘의 아내는 그럼 아껴써야 겠다고 말하며 조금 근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나선다. 남편은 밭일을 하지 않고 노래를 배우겠다고 나돌아 다니는 중인데 집에는 아기 기저귀조차 없다. 이런 와중에 할망이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늙었는데 대형마트 때문에 사람이 잘 오지도 않는 이 점빵을 누구에게 줘야 할 지... 이 작품이 '음악영화' 로서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은 바로 할망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다. 제주민요 중 하나인 '망건노래', 혹은 '양태 젖는 소리' 가 점빵할망 역을 맡은 오영순의 육성으로 불려진다. 그녀의 육성과 함께 겹쳐지는 것은 뽕똘의 아내가 터덜터덜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다. 예술을 노래하며 한 곡조 뽑고 신나게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동시에 세상에는 하루를 어떻게 먹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작품은 이런 고민을 제주도의 여성들에게 투영한다. 이것은 인상적인데, 단순히 남성들이 철이 없다기 보다는 '제주도에는 여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런 이야기의 근거로 자주 전해지는 것은 바닷가나 섬 지방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숙명이다. 남자들은 바다에 고기잡이를 하러 떠나고, 여자들은 남는다. 남자들은 풍랑을 만나면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바다에서 '이어도를 봤다' 는 이야기도 여기서 유래하는데, 실제로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 평평한 바위라고 한다. 그런데 납작해서 수평적인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봐야만 보이는 것이 이어도인데, 이 바위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위치까지 가 있다면, 풍랑을 만나 파도를 이용해 배나 사람이 그 위치까지 떠 있다는 얘기가 되므로 살아남기가 힘들다. '망건노래' 에는 '이여 이여 이여도 허라. 이여라는 말에 눈물이 난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할망의 입에서 불려질 때 노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비애의 정서를 가진다. 작품이 납득이 가고, 인상 깊어지는 순간이다.

* 망건노래 *

* 인생길 *
그리고 뒤이어 용필을 연기한 양정원이 자신의 자작곡인 '인생길' 을 부를 때 (양정원은 실제로도 제주도에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곡은 이전에 할망이 부른 '망건노래' 의 훌륭한 반대지점이 된다. 제주도의 여자들은 비애가 느껴지는 슬픈 소리를 하고 있을 때, 제주도의 남자들은 '인생은 멀고 먼 하늘 끝'을 부르며 계곡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이 곡은 작품의 개봉이 끝난 후에 찾는 사람이 많아질 정도로 인기곡이 되었지만 듣고 있으면 참 서글프게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는 생각이다. 이 두 곡이 지나간 뒤에 작품은 한동안 캐릭터 코미디에 집중하는데, 초반부와는 다르게 그 상황들이 어색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할아방이 뽕똘에게 할망에게 자기 오줌 눈 것을 일러바쳐서 앙심을 품고 그를 혼내려다 졸지에 레슬링이 되어버리는 시퀀스도 그렇고.
압권은 술을 못 마시게 되어 시원섭섭해진 이 남자들 중에서, 대영이 아이디어를 내어 자기 친척집이 오늘 가문잔치를 하는데 거기 가서 술을 좀 얻어마시자는 아이디어를 낼 때다. 용필이 심드렁하게 거기 가면 축의금도 내야 하지 않냐고 다그치자 뽕똘이 간단하게 방법을 얘기한다. "거 봉투에 5천원 담아서 주면 되죠. 제가 가져 올게요." (<- 참고로 이 작품이나 <뽕똘>이나 밑에 '한국어 자막'이 있다.) 그리고 고수들이 승부를 내려고 이동할 때 나올법한 스코어 음악이 흘러 나오며 한껏 차려 입은 4인방이 위풍당당하게 대영의 친척집을 향해 슬로우 모션으로 걸어갈 때다. 이 시퀀스의 끝은 가자고 한 대영이 어머니에게 들켜서 얻어맞고 끌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 시퀀스를 보고 웃겨서 뒤집어 지고야 말았다. 두번째 감상 때부터는 박장대소까지는 갈 수 없겠지만, 계속 사람의 입가에 미소를 끊이지 않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어이그, 저 귓것>이 어느 지점부터 갑자기 긍정적인 면에서 인상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노래를 통해 예술가의 삶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민요를 맛깔나게 부르는 할아방, 음악가로 성공하려 했던 용필, 댄서가 되고자 하는 대영 / 댄서 김, 음악을 배우려는 뽕똘은 지금 현재의 세상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면 어느새인가 세상은 예술을 향유하고 즐기지 않고, 한 끼 먹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감수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나는 서민이기 때문에 어딘가 콕 찝을 곳은 있겠지만, 어쨌든 세상이 그렇게 변해버렸다. 대기업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동네 점빵을 몰아내고 대형 마트를 건설하며 음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 처자식만 고생시키고, 물건값조차 제대로 지불하지 못한 채 외상만 해대는, 그리고 남의 집 잔치에 축의금으로 5천원만 넣는 귓것들'이 되어버렸다.
문득 든 생각은 '예술가에게 예술적 영감 이외에 인성까지 바라는 것은 과한 것일까?' 하는 점이다. 예술의 시대에 태어났으면 존경받았을 할아방은 지금의 세상에선 젊었을 적 오입질 많이 하여 할망에게 지탄 받는 노인일 뿐이다. 아니, 뭐.. 건스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도 생각해보면 '노래 쥑이게 부르는 나쁜 놈'의 이미지니까. 하지만 인성이 어찌됐건 공통되는 것은 이들의 노래만큼은 예술적으로 존경 받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할아방을 쫓아내던 할망은 막상 본인이 나이가 들고, 점빵 또한 폐점의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알자 갑자기 술상을 들고 할아방의 집을 찾아간다. 그를 위한 술상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때 할아방은 잔칫집에 놀러 가 있다. 예술가들은 이기적인 족속들이다. 결국 나이가 든 할망은 어느샌가 갑자기, 홀연히 가버린다. 이기적인 예술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은 사람이 들어줄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녀를 위해 한 소리를 읊어주는 것이다. 할아방은 이후, 한 번도 소리를 부르지 않는다. 그나마 예술가가 살만했던 땅인 제주도 이젠 점점 그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오멸 감독은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무대가 되는 장소의 역사나 신화와 연결시킬 때 굉장히 아름다워지고 깊어진다.

* 이 시퀀스는 도입부만큼 아름답게 찍혔을 뿐만 아니라 마치 '백아절현 (伯牙絶絃)' 같은 사자성어를 생각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 때 살았던 거문고의 달인, 백아의 솜씨를 잘 알아줬던 사람은 친구인 종자기 뿐이었다. 그 종자기가 어느 날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자신의 소리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 죽었다면서. 할아방은 나이가 들었다. 할망들도 사라지고, 언젠가 그도 사라질 것이다. *
대개의 예술가들은 각개 행동은 좋아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서로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들도 결국은 사람이니 말이다. 용필은 뽕똘에게 왜 할아방이 저러고 사는지 사연을 듣고 나서 그를 위한 헌정곡을 쓴다. 노래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뽕똘을 언제나 매몰차게 쫓아냈던 용필은 그 날따라 희한하게 그를 직접 자신의 무대에 포함시킨다. 이 시퀀스는 꼭 <뽕똘>에서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둘러보는 한가운데서 등장인물들이 영화를 찍는 것을 연상케 만든다. 그만큼 다큐멘터리적으로 찍혔다는 이야기다. 양정원은 실제로 그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카메라의 배치도, 느낌도, 모여있는 사람들도 '영화적'이라 볼 수 없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적 수법이 결합되는 순간, 작품은 뭔가 결의를 다지는 것 같다. <뽕똘>에서도 그 순간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희극적으로 보이던 인물들이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찍힌 시퀀스에서는 한 없이 진지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희극의 대상으로 삼아왔지만, 결론적으로 감독이 이들을 애정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작품은 모든 상황이 끝난 뒤 다시 예전처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나누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 중에는 끝내 성공하겠다고 육지로 올라간 사람도 있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고 자연의 순리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주인공들의 존재가 처음엔 우스웠지만 지금은 그들이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들은 이제 귓것같은 짓거리를 하며 살지 않는다. 뽕똘은 자신의 아내가 앓아 눕자 미안함에 알아서 집안일을 하고, 그녀를 다시 챙기며 용필은 멋지게 공연을 한다. 적어도 관객의 눈에는 과거의 그들같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들은 예술가이며, ..비록 같이 산다면 좀 골 아플지라도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움을 받기도 하지만 (참고로 이 말은 미움을 받으려고 작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태어나 노래 할 수 있다면 / 같은 길을 가겠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신은 이기적이라 자신이 탐내는 사람들을 꼭 일찍 데려가곤 한다. 그래서 쓸모없는 인간들만 남겨놓는 것 아니냐고 우리 입장에서 항의할 법도 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활력을 얻게 해주기 위해서, 아니면 보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게 하고 싶어서 다 데려가지 않을 때도 있다. 바로 이들. 이들이 만들고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그런 기분이 든다. 처음 시작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됐던 <어이그, 저 귓것>은 결국 멋있는 '음악영화'로 승화되었다. 이 작품은 오멸 감독의 현재 발표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뽕똘>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감독이 뒤로도 이런 형식을 다시 시도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동시에 유일하고 소중하다.

* 다시 태어나 *
작사, 작곡: 양정원
내가 다시 태어나 숨을 쉴 수 있음에
나는 다시 나는 다시
내가 다시 태어나 걸어갈 수 있음에
나는 이제 나는 이제
얼마나 기다렸는지 세상 밝은 빛을
얼마나 기도했는지 가슴 졸이며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노래 할 수 있도록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같은 길을 가겠노라고
내가 다시 태어나
노래 할 수 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