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18.월
영국 특파원 장조림


자 이제 가자
우리 저기 먼 곳으로
더 이상 여기서
땀을
눈물을
흘리지 말자

땀박아지 노동으로 흘린만큼
받고자고 더 이상
돈없고 빽없고 힘없어도 살 수 있는
그곳을 만들자고 더 이상
날밤까며 얘기하며
그날이 올 것이라 더 이상

해가 떠도 우리 곁엔 널부러진 빈소주병
쓰린 속 그것처럼
너도
나도
여기도, 아무것도
변한건 없다 변하지 않는다

자 이제 가자
우리 저기 먼 곳으로
더 이상 여기서
땀을
눈물을
흘리지 말자

비행기를 타기 얼마 전 저는 이 글을 쓰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약 3년 전, 기명사미 대통령은 결국 명동 성당에 까지 공권력을 투입했고, 노동자 시위는 무산되었으며 한총련은 와해되었고, 그들의 쇠파이프를 손에 쥔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했죠.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살인도구다. '

정권이 바뀐 지금도 악습은 계속 됩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부도를 냈으며 그날부터 김 사장님 아버지는 김 씨로 전락하며 노가다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워낙 성실하셨던 아버지께서는 노가다를 하시면서도 밤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건설 공부를 하셨습니다. 사업을 하시던 기질을 발휘해서 몇 년 뒤 부터는 조그마한 건설업체를 다시 설립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설날이나 추석에도 일터에 나가셨고 일년 중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아마도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던 얼마간의 기간이 몇 년 동안 유일하게 가진 휴식의 기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온 건설 붐으로 저희는 약 12년 만에 그 동안 진 빚을 모두 갚을 수가 있었고 빚쟁이들에 시달리던 악몽의 세월을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우리 부자는 함께 소주를 마셨는데 노가다를 다니실 때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처음으로 자식들에게 보이셨죠. 이제 고통은 끝났다면서 버는 일만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큰 공사를 따낼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성실성을 높이 산 한 분이 무명의 중소 건설 업체에게 엄청난 금액의 빌딩 공사를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두계약이 끝나고 공사 준비를 하던 중 한 건설 대기업이 그 사이로 들어와 건설비만 받고 이윤을 남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건물주의 마음을 돌려 버렸습니다.

전화상으로 계약 취소를 알리는 전화를 받으시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시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셨죠. 결국 그 회사가 건물을 완공하고 얼마 후에 부도로 문을 닫더군요. 그런데 워낙 부실공사를 해서 건물 입주 단 한달 만에 여기저기 물이 새고 난리 였죠. 그 건물주는 다시 아버지를 찾았고 아버지는 화가 나긴 하셨지만 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수공사를 하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씀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신 아버지께서는 얼마 후 다른 공사를 시작을 하셨는데 또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조그만 관급 공사였는데 감독하던 감독관 몇 명이 돈봉투를 요구했던 겁니다. 아버지는 당시 50대 중반이셨고 그 감독관들은 이제 삼십도 안 된 사람들이었죠.

공사장에는 관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간의 돈봉투가 오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 거나하게 저녁을 접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아버지는 술을 사셨죠. 오십이 넘은 분이 이제 이십대 후반의 그들에게 감독님, 감독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요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봉투 주는 게 어렵다면 함께 현장에 가서 고스톱이나 치자는 것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계속 잃기만 해라. 그러면 결국 봉투를 준 게 아니라 놀이에서 돈을 잃은 것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결국 격분한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던 다른 50대 아저씨는 참지를 못하고 20대, 30대의 감독관 서너 명과 말 다툼 끝에 편싸움을 벌이셨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저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가보니 가건물인 현장 사무소는 난장판이 되어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유리는 깨어지고 집기는 부숴져 있고... 그날 아버지와 소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아버지는 갑자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한 만큼 얻을 수 없는 이 나라가 이젠 싫다. 너는 이런 곳에서 살지 마라.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일한 만큼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떠나라....이곳은 젊은이들이 살만한 그런 곳이 아니다. 그리곤 다시는 돌아 올 생각을 하지 말거라.. "

대충 이런 말씀을 하시곤 아버지는 다시 우셨습니다. 내 나이 오십에 당신 자식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과 싸움박질이나 하는 자신이 정말 부끄럽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를 중퇴하고 영국으로 왔습니다. 거의 3년 전 입니다.

저는 이 곳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불법으로 일하다가 경찰이 가게로 들어와 뒷문으로 도망친 적도 있고, LA특파원처럼 손님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주인 몰래 봉투에 넣어서 집에 와 행여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 볼까 봐 방문을 잠그고 깨끗한 부분을 골라내 먹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너무 배가 고파 식당에서 버리는 음식을 먹다가 그걸 본 주인이 나중에는 저를 위해 따로 음식을 해주곤 했습니다. 제가 국가 망신을 시켰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어떻게든 일해서 자리잡고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일부 유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대부분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지만 소수의 유학생들은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에 고급 승용차를 몰면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우연히 그들 중 꽤 유명한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한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구조조정에 관한 문제였는데 학자들이 하는 말의 복사판 이었습니다. 일단 회사를 살려야 나중에 다시 고용인원을 재창출 할 수 있으니 짤린 사람들은 억울하겠지만 나중을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쉽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 분은 귀국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사회 지도층 인사'란 말을 들을 수가 있을 겁니다. 한국에서 명문대 석사 출신에 다시 영국의 명문대에서 학위를 공부하고, 게다가 재력있는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이천 오백 파운드 (그 사람과 만났을 당시는 우리 돈으로 사백만원이었고 지금은 약 칠백만원입니다)가 생활비인 그를 생각하고, 대학 중퇴인 저를 생각했습니다.

미래에 사회지도층 인사가 될 그를 생각하고 그 아래서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을 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그런 사람 밑에서 당하고 살 수만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무리인 줄 알지만 작년부터 대학에 들어와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정말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사람들... 결국엔 좋은 성적을 받고도 학비가 없어 다음 학기를 등록하지 못해 귀국한 형님도 계셨고 끝까지 버텨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들,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 글을 올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서 저의 개인사를 올린 것은 결코 내세울 것도 없는 제가 잘났다거나 아버지의 삶을 과장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힘없는 우리 모두 아버지들의 모습이며 제가 살아오고 선택한 길 또한 여러분 모두의 삶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다면 아마도 '그렇다. 내 아버지의 모습, 나의 모습이다.' 라고 공감을 하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떠들고 한탄을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이번 IMF 시대에 약자의 설움 속에서 많은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기력함 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술에서 깨어나고 낙심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다가올 돈 없고, 빽 없고, 힘 없는 사람들도 다 함께 잘 사는 그 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자 이처럼 긴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들과 또한 우리가 흘리는 그 눈물을 후손들에게는 그대로 안겨주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들 스스로가 그 눈물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국 특파원 장조림 ( k2001@hanimail.com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LAYLA 2004-08-0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엔 장조림이란 이름에 장난글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군요..;;
가슴이 저리네요.

sayonara 2004-08-0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우리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공무원의 실수(또는 음모)로 10억빌딩을 날린 노부부, 겨우 3번밖에 만난적 없는 의붓아들이 이라크에서 죽었다고 수십억을 요구하는 부모, 학생을 개패듯이 패고서도 멀쩡히 교사생활 하고있는 선생...
답답한 일들이 많지요.
 

▲이민 가려다 달러 폭등으로 재산 2배=1997년 김태공씨는 미국으로 이민가기로 작정했다. 당시 37세.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미국으로 이민 가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미국에 있는 친지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소액투자이민을 소개해줬다. 당시에도 3억원이 넘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둘 재산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장만했던 아파트도 팔았고,별 재미를 못 봤던 주식도 처분했다. 장롱도 팔고,가재도구도 거의 다 팔다 못해 친지들에게 마구 나눠줬다. 마지막으로 차까지 중고차시장에 내다 팔고 나니 통장에 들어온 돈은 3억5,000만원이 조금 넘었다. 모두 달러로 바꿨다. ‘가서 슈퍼마켓이나 세탁소에서라도 일하자’는 생각으로 비자수속을 밟고 있을 때였다.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국가가 외환대출을 받는다는 뉴스가 귀에 들어왔다. 97년 11월의 일이었다. 나라가 무슨 전쟁 나는 기분처럼 불안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도 외환위기는 계속됐고,급기야 대 달러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민을 가려던 입장이었던 김씨로서는 환율에 민감했다. 달러 급등세는 멈추지 않았고,1달러당 830원에 매입했던 달러는 이듬해 1,400∼1,500원을 넘어서더니 마침내 1,800원대마저 올라섰다.

이쯤 되자 김씨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 이거 봐라. 내 재산이 두 배로 늘었네. 내가 왜 이민을 가. 여기서 잘 살 수 있겠네”라며 다시 눌러앉기로 하고 모든 달러를 내다 팔았다. 좀더 오르지 않겠냐는 가족의 얘기에도 “됐다. 이 정도면 복받았다”라며 모든 달러를 정확히 1,900원에 팔았다. 거의 8억원에 가까운 현금이 손에 들어왔다.

▲직장에서 가까운 아파트 샀더니 또 2배=편안하게 한국에 눌러 살기로 마음 고쳐먹고 나니 살 집과 직장을 골라야 했다. 살 집은 돈이 있으니 고르면 되는데 직장이 문제였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하루 아침에 부도나서 문을 닫는 형국이었다. 운이 좋은 걸까. 아는 선배가 하는 병원에 취직됐다. “평소 인간성이 좋구 봐야 돼”라며 자만에도 빠졌다. 어쨌든 생각보다 쉽게 직장을 구했으니 그동안 얹혀 살던 동생 집에서 나와야 했다.

집은 당연히 직장과 가까운 아파트를 선택했다. 오래 된 아파트이긴 했지만 경제위기가 겹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앞다퉈 집을 내다 팔았고,그 때문에 집값도 반토막난 게 수두룩했다. 급매물로 나온 서울 강남구 소재 34평 아파트를 2억원이 조금 안 되는 값에 샀다. 그때는 나오는 물건마다 대부분 ‘급매물’이었다. 그런데 그럭저럭 3년여가 지나자 아파트값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경제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재건축 얘기가 나오며 급등했다. 김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노래가 절로 나왔다. 10억원 자산에 도달한 김씨의 그때 나이는 41세. 지금 그 아파트의 가격은 7억5,000만원이 넘는다.

▲안정적인 금 투자로 꾸준한 수익=김씨는 그 이후 하루 일이 끝나면 낚시터를 즐겨 찾는다.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낚시에 푹 빠져 산다. 다만 라디오를 통해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 듣는다. 그는 ‘불경기’라든가 ‘시국 불안정’이란 뉴스에 귀가 쫑긋한다. 뭔가 불안정하면 금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김씨는 역시 친구의 권유로 금을 사고 판다. 정확히 말하면 ‘골드바’(Gold Bullion Bar)다. 그렇다고 골드바,즉 금괴를 갖고 왔다갔다 하는 것은 아니다. 은행의 사설금고에 골드바 몇 개를 넣어두고 시중에서 증서만으로 거래한다. 김씨가 거래하는 골드바는 보통 500돈짜리. 1돈에 3.75g이니까 약 1.875㎏ 정도가 된다. 1돈에 요즘 5만5,000원(소매가 6만8,000원) 정도 하니까 보통 골드바 하나면 약 3,000만원이 된다.

물론 ‘급’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세계 최고급 골드바인 스위스은행의 금괴는 1개에 11만5,000∼13만달러니까 한화로 환산하면 1개당 1억3,800만∼1억8,000만원에 이른다. 이른바 벽돌 모양의 골드바다. 김씨의 투자기준은 대략 1돈에 도매가 기준으로 5만원에 사서 6만원선에 파는 거다.

금은 안정적인 투자수단의 대명사. 가격이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때가 되면 알아서 올라준다. 금 주화,금메달 유사품 등 금 관련 제품들의 수요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금 투자의 가장 큰 장점은 양도소득세 등이 없다는 점이다. 또 매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금 투자의 장점이다. 김씨는 올 초 이라크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평소보다 많이 벌었다. 최대 20% 가까운 수익률을 올렸다. 금은 한 방에 크게 버는 일은 없지만 꾸준한 수익을 올려주는 투자상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야기 1. 피터 드러커의 한 마디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이 일을 시작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조건 예스가 아니라면, 당장 그 일을 중단하던가 아니면 비중을 대폭 줄여라.

언젠가 나는 Why라는 질문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왜 그 일을 하는가?’, ‘왜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그 일을 처리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새로운 창의적인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조직의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꼬마 아이에게 <휴지를 버리지마!>와 같이 다그치는 것보다는 왜 휴지를 버리면 안 되는지를 차분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엄마, 아빠의 역할이다. <공부해!>와 같이 다그치기보다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자녀와 공감하는 것이 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왜?’라는 질문은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당신에게도 질문 해보라.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런데, 어떤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받았다. 그 분의 말을 요약하면, why라는 질문은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앞의 피터 드러커의 말을 나에게 전해줬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분이 나에게 준 피드백을 소개한다.

--------
사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동기유발이 약합니다. 현재 직종에서 "왜 이 일을 하지?"라는 질문에 "돈 벌어야 되니까" ,"그냥",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혹은 "전공이어서"라는 식의 대답들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형편의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적은 수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모든 경영자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라고 권합니다. 박종하님의 "왜"와 일맥상통하나 더 단순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이면서도 보다 강한 동기유발을 가진 질문으로, 사실 우리 모두 던져도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사업)을 만약 하지 않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그 일(사업)을 시작하겠는가?"

잭 웰치는 이 질문을 책에서 읽고, GE의 사업부분을 대거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만일 잭 웰치가 "자신이 하는 일에 항상 `왜`라고 묻고 답하세요"라는 문구를 읽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의문입니다.
---------

피터 드러커의 질문은 분명 <왜>라는 단순한 질문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도구임에 틀림이 없다. <왜>라는 질문은 우리를 냉정하게 이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으로는 그 일을 좀더 잘 되게 하겠다는 의지만이 있을 뿐, 그 일에 대한 근본적인 냉정한 평가는 어려운 것 같다. 피터 드러커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일을 되돌아보게 한다.
피터 드러커의 효과적인 질문을 당신의 삶 속에서도 적용해보라. 당신에게 질문 해보라.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이 일을 시작할까?>

당신도 피터 드러커의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잭 웰치처럼 말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의 순간, 주저하는 이유는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서다. 구차스런 미련 때문에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서 일을 더 망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언제나 새로운 것을 얻지 못한다.

피터 드러커의 질문을 당신 삶의 여러 곳에 적용해보라. 약간씩 변형하여 적용하는 것도 때로는 효과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적당하지 않은 변형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령, 이 질문을 결혼한 사람에게
<현재 내가 결혼한 여자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결혼하겠나?>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질문의 대답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은 꼭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내가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와 아직 사귀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사귈 것인가?>
만약, 이 질문에 무조건 예스(yes)가 아니라면, 당신은 그녀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피터 드러커의 결론을 따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 상담에 대해 기억 나는 인상적인 대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떤 여자가 자신이 새로 사귀는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카운셀러에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고민거리들을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한 시간 가까이 혼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그녀에게 카운셀러는 단 한마디를 했다.
<아직도 고민이 남았다면, 결혼하지 마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위 워 솔저스
랜달 월레스 감독, 멜 깁슨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동료들간의 전우애와 임무에 대한 책임감... 이런 케케묵은 주제들이 잘 녹아있는 걸작 전쟁영화다.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거창하게 포장하지도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감동을 쥐어짜내지도 않았다.

“가장 먼저 전쟁터에 도착하고 가장 나중에 전쟁터를 떠나는 사람이 되겠다”는 무어 중령의 말도 필요이상으로 비장하지도 않다.

딱 필요한 만큼의 감동과 적당한 수준의 액션,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가 뛰어나다. 기존의 전쟁영화들과는 달리 적군 또한 ‘인간’으로 본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실제의 전쟁도 이와 같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자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밥을 먹던 전우들 중 몇몇은 죽고, 몇몇은 불구가 된다. 적군병사 또한 고향에서 기다리는 가족과 연인이 있을 것이며, 그가 죽는다면 누군가가 슬퍼할 것이다.

전투에서의 전우애만큼이나 인상적인 부분은 고향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들이다. 전사통지서를 전달하는 배달원이 단지 주소를 묻기 위해 문을 두드리자,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고함을 지르던 무어 중령의 부인이 잊혀지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cking Spoken English - 영화와 드라마로 떠나는 구어체 탐험
최완규 지음 / 넥서스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확실히 구어체의 진수를 배울 수 있는 책이다. F*ck이라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데, 내용 또한 상당히 적나라할 정도다. 기존의 교재나 학원강의같은 데서는 배울 수 없는 내용이다.

배울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내용인데, 우리가 흔히 보는 외화나 시트콤 등에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이책 전체를 통해서 가장 큰 교훈은 ‘미국방송이면 무조건 올바른 영어’라는 생각이 오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TV의 쇼프로에 나오는 자막들도 틀린 문장이 많으며, 심지어는 토크쇼의 사회자들도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들을 내뱉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표현들은 그저 익히고 외워두는 정도가 좋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표현들을 써먹는다면 매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될 것이고, 또한 너무 어색해서 놀림을 받을 것이다. 웬만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말 발음도 어색한 외국인이 “당근이지”, “짭새다”같은 표현들을 내뱉는다면 한국말이 유창하다는 생각보다 ‘놀구있네’하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