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 스웨덴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만나다
최연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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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회과학 일반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최연혁, 샘앤파커스, 2012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스웨덴을 통해 한국의 현대와 미래를 고민해보고 한국의 현실을 재조명해 보는 데 있다. 우리의 현주소는 과연 어디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고민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스웨덴이 우리의 직접적인 대안은 아니다.” 맺는 글 중에서

 

복지 문제가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르면서, 무상교육과 견고한 실업프로그램 등 2012년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꿈처럼 보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스웨덴이지만, 저자의 말처럼 스웨덴식 복지가 우리 사회의 직접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단지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변혁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23년 동안 한 국가의 총리로 지냈던 노정객 부부가 (돌아갈) 집한 채 없는 청렴한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은 경악했다.”

 

‘국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은 에를란데르 스웨덴 총리의 이야기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집권 사민당은 노정객부부를 위해서 스톡홀름 외곽 사민당 청년 연수원 부근에 별장 한 채를 지어주었고, 자진해서 은퇴한 68세의 노정객은 그 별장에서 스웨덴 정치를 이끌어갈 청년들과 함께 지내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자기 집 한 채 마련하지도 않고 평생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선거에서 패배해서 은퇴한 것이 아니라 선거에 승리하고도 스스로 은퇴한 대정치인을 옆에서 지켜보며 성장한 청년정치인들이 지금의 스웨덴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 정치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의 상당 부분을 이런 정치인들과 정치 현실에 할애했다. 사업가가 실패하면 하나의 기업이 망하지만, 정치인의 실패에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다. 우리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者가 국민의 인기만을 등에 없고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하고 공부하는 이들이 정치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국회의원의 30% 이상이 매번 정치를 그만둔다고 한다. 국회의원의 특혜란 존재하지도 않고, 대기업보다 적은 봉급과 더 강한 노동강도가 정치를 그만두게 한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대학 3학년은 대개 한 학기에 3,000페이지 정도의 전문서적을 읽어야 학점을 이수할 수 있다. 그렇게 강도 높은 대학 공부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공부해야 의원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대학생들도 이 정도는 읽는다. 단지 어떻게 읽느냐가 문제다. 3,000페이지의 전문서적을 정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리포트를 제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00페이지 정도의 참고자료를 봐야한다. 리포트를 꼼꼼하게 읽고 그것을 점수로 매기는 교수가 있다면, 대학생들은 웃고 즐기며, 젊음 향연을 누릴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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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치인들은 어떠한가? 가끔 뉴스에 비치는 국정감사 장면을 생각해보자. 국회의원 마이크 옆에 말끔히 쌓인 복사용지를 생각해 보자. 우리 정치인들은 국정감사를 위해서 감사자료를 읽었을까? 읽었다면 중간중간 접어두었거나, 스티커를 붙여놓았거나, 그것을 뒤적거리며 질문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정치인들이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모든 정치적 사안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는 것이 아니다. 각종 보고서와 수많은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현실 상황과 비교하면 일을 하는 스웨덴 국회의원이 우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준에 못 미치는 것이다.

 

이 책은 전문서적이라기보다는 일반인들을 겨냥한 안내서에 가깝다. 스웨덴의 모든 것은 보여준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깊이 있게 들어가지는 못한 것 같다. 스웨덴 정치학 일반과 사회복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도 있지만, 그 책도 이 책도 내가 원하는 것은 제시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가 스웨덴의 복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세금을 50% 이상 내고 있다거나,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 한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넘어서서, 스웨덴인들이 어떠한 고난 속에서 지금의 복지국가를 이룩했는지, 스웨덴의 역사적 고찰도 필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스웨덴의 역사에 관한 책이 한 권이 없다. 단지 지엽적으로 복지국가나 양성 평등 등 특정 주제를 가지고 스웨덴을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 책을 죽으라고 안 읽는 국민의 잘못도 있지만, 돈 안 되는 책 한 권 만들지 못하는 출판계의 현실이나 역사도 모르면서 스웨덴식 복지를 말하는 게 정치의 현실이다. 201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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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라! 세상의 벽을 향해 던진 연설 32 거꾸로 읽는 책 35
유동환 엮음 / 푸른나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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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 [세상의 벽을 향해 던지 연설 32] 유동환, 푸른나무, 2012

 

32편의 연설문을 엮어 놓은 책이다. 편자는 “우리는 어쩌면 너무 멀리 비켜서서 피를 흘리며 저항했던 역사를 동화처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아직도 진행 중인 사건으로 선악의 판단을 떠나 극적인 대립을 독자들에게 보여 주려는 의도”로 편집했다고 서문에 적어놓았다. 한 번 읽어보고 편자의 깊은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너무 일방적이거나 가끔은 일방적인 흐름에 벗어나는 연설문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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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와 지젝의 [문제는 민주주의야]로 시작해서, 아들 부시의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며]와 바로 뒤 오사마 빈 라덴의 [거짓말을 명분으로 삼지 마라]에서 정점을 찍고, 한동안 너무나 유명했던 스티브 잡스의 [내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로 끝난다. 마지막 연설문 [내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 바로 앞 페이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세운 창업자 중 한 명인 스티브 워즈니악. 엔지니어인 그는 애플 제품을 만든 실질적 두뇌였다. 그는 끝까지 부와 명예에 집착했던 스티브 잡스와는 정반대로 (하략)”이런 편자의 일방적인 의견을 미리 읽고 잡스의 연설문을 읽으니, 나 혼자만의 느낌일 수도 있지만, 연설문이 잡스가 “끝까지 부와 명예에 집착”했던 것에 관한 구차한 변명을 읽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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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의 말처럼, 현실을 直視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들 부시와 오사마 빈라덴의 연설문을 순차적으로 편집한 것은 극적효과도 주고, 대립하는 주장을 읽어봄으로써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편자의 개입이다. 책 전체를 흐르는 특히 책 앞부분에서 두드러지는 ‘반자본주의’성향은, 좀 더 오독을 하면 ‘반미’성향은 극적효과를 넘어서, 편자의 주관적인 의견의 개입으로 연설문 자체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란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자본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이러한 거대 담론에 대한 논의를 접어두더라도, 마지막 연설문 앞에 삽입해놓은 문구처럼, 명백하게 연설문을 오독하게 만드는 편자의 개입은 아쉬움을 넘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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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니악은 초기 애플 제품, 정확하게 말한다면, 초기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든 실질적 두뇌였던 것은 나처럼 초기의 매킨토시를 사용한 세대가 아니더라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을 많은 독자, 젊은이들은 매킨토시보다는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애플이나 잡스의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그 제품과 워즈니악을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워즈니악의 우수한 능력을 알아본 잡스의 능력과 판단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잡스 연설문 바로 앞에 넣어둔 워즈니악의 사진과 그 문구가, 편자의 말처럼 “선악의 판단”을 떠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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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자가 제기하는 자본주의나 환경파괴 문제에 전적으로 공감을 한다. 문제는 논리가 치밀하지 않으면, 역습을 당한다는 것이다. 맞서 싸울 상대가 99%의 다수를 압박하는, 권력과 자본을 모두 가진 1%라면 더 치밀하고 촘촘하게 이론을 세워 정당성을 확보해야 힘없는 99%의 연대가 일어나 전통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치밀하고 촘촘한 이론이 없다면 진실성으로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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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연설문 앞에 이태석 신부님의 편지가 있다. 톤즈에 도착한 후 신부님이 지인에게 처음 보낸 편지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혹시 주위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뜻을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으면 연결해 주길 바란다. 없는데 절대 억지로 찾지 말고.”사제로서 의사로서 그가 그곳에 이런 부탁을 하면서까지 그곳에 머물렀던 이유가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을 읽을 독자라면 이 편지부터 먼저 읽고 고민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순차적으로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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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도하지 1%’가 아니라, 99%인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말라가는 나무에 물 한번 준다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무엇을 얼마나 바꿀 수 있겠는가. 누구나 그 정도는 생각한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자신을 희생한 후 조심스럽게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한 몸 희생하기 싫어서 더러운 정치판에 선뜻 뛰어들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뭘 생각하고 뭘 바꾼단 말인가. 바뀐다고 믿는 사람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201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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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의 가출 다독다독 청소년문고
미셸 바야르 지음, 행복나무 옮김 / 큰북작은북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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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청소년 소설 [열다섯의 가출] 미셀 바야르, 큰북 작은북, 2012

 

오늘은 베아트리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날인가 보다. 아침에 다시 읽어보려고 책상에 놓아둔 [신곡], 오후에 본 영화 [일 포스티노], 저녁에 읽은 이 책 [열다섯의 가출]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베아트리체가 등장한다. 매력적인 베아트리체를 책과 영화에서는 만났지만, 현실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알리기에리 단테’라는 이름과 함께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을 기억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연인 베아트리체는 “떠나버린 나의 사랑아”라고 애틋하게 부르는 조용필의 [슬픈 베아트리체]처럼 단지 아름답고 순결한 연인이 아니다.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는 사랑하는 연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곡]은‘하느님의 참다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목적을 전제하고, 지옥에서 시련을 겪고, 연옥에서 회심을 한 단테가 만나는 베아트리체는 신의 은총이자 신의 본질을 상징한다. 현대 이탈리아의 문화적 정초를 세운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를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도 만났다. 영화에는 두 명의 베아트리체가 등장한다. 섬마을의 무능한 청년 마리오 루폴로도 알만큼 정형화되어버린 단테의 베아트리체와 그 청년을 메타포의 세계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 루소다.

 

인터넷에 떠도는 영화평을 보면, 네루다와 마리오의 우정만을 강조하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의 우정도 중요하지만,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메타포로 상장되는 詩 라고 본다면,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그 나이였어”라는 네루다의 시처럼, 어느 날 마리오에게 베아트리체 루소가 다가왔고, 그는 詩를 통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마리오에게 메타포를 통해 詩의 본질을 설명하는 네루다보다, 마리오가 詩를 통해서 만나려고 하는 베아트리체 루소가 더 종요한 것이 아닌가. 마리오가 처음 읽은 詩가 처음 쓴 詩가 어쩌면 유치한 사랑타령에 불과할지라도, 詩를 만나 詩를 통해서 “죽음보다 더 끔찍한 사태가 존재”하는 현실을 직시하면 진정한 詩는 완성된다.

 

‘그 무엇’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 무엇’을 통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實在를 관조하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성을 가지게 된다. 詩를 통해 현실을 재구성한 [일 포스티노]는 [신곡]에서 많은 부분을 가지고 왔다. 네루다가 베길리우스이고 마리오의 현실이 단테를 신 앞에 안내하는 베르나두스이라면 메타포는 詩 그 자체이면서 詩의 천국으로도 볼 수 있지만, 베아트리체는 베아트리체다. 이 책에도 베아트리체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이혼 때문에 고민하는 스테파니와 엄마의 지나친 관심에 힘들어하는 아델은 가출한다.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불쾌한 현실과 직면하지만 베아트리체를 통해 벗어나고 싶었던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베아트리체가 상징하는 부모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된다. [일 포스티노]가 [신곡]을 능가할 수 없듯이, 이 책 [열다섯의 가출]과 [신곡]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설픈 [신곡] 다이제스트 판보다는 이 책이 훨씬 좋은 것 같다. 201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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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 아라키 노부요시, 사진을 말하다 1
아라키 노부요시 지음, 백창흠 옮김 / 포토넷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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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필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 포토넷, 아라키 노부요시, 백창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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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사진의 발달사와 자본주의 변천사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 변천사가 어떻게 되었던 현대 사회에서 사진과 자본주의를 벗어나서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지만 아직 그 정체가 명확하게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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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이 쓴 [사진의 작은 역사]를 보면, 1826년 프랑스의 니에프스 세계최초의 사진촬영에 성공했다고 한다. 자본주의 변천사에서도 그 시기는 중요하다. 1825년 영국에서는, 자본주의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증기기관차가 처음 달리기 시작했고, 공장법이 제정되고, 최초의 자본주의적 공황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우연처럼 보이는 역사적 사실보다 초기 사진에 찍힌 대상이 대부분 부르주아였다는 점에서 사진과 자본주의를 연결하기도 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7월 혁명과 2월 혁명을 거치면서 귀족들의 자리를 부르주아들이 차지한다. 부르주아들은 귀족들의 모든 관습을 부정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화가들이 그렸던 초상화 대신, 초상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최신 기술에 당시 원판이 은을 재료로 했던 만큼 비싼 대가를 주고 사진을 찍었던 부르주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사진도 없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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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나 자본주의의 역사가 어쨌든, 우리는 그것들이 만든 세계에 살고 있고 그것들을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상상한 것의 대부분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오직 돈을 벌기 벌해 만든 상업 광고,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물론 필멸의 인간 아킬레우스를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리 구전 설화를 떠올리는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이것들도 모두 상업적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나만의 고유한 그 무엇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벤야민은 아우라 상실의 시대라고 어렵게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그냥 거대한 사회의 의미 없는 조그만 부속되어, 내 존재는 희미해지고, 타인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 어쩌면 사진에서 시작된 단절을, 아라키는 반대로 “사진은 관계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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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으러 왔습니다’가 아니라 거리에 녹아들었다는 느낌이어야 합니다. 염탐꾼이 되든가,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드러내든가,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삼각대를 세우고 4x5인치 대형 카메라로 일부러라도 확실히 찍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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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탐꾼이 되라는 말은 촘촘한 시간과 공간 속에 녹아들어 나만의 순간을 포착하라는 의미일 것이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라고 하는 것은 나만의 순간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고 만들어내라는 말인 것 같다. 보통의 독자들이라면, 모든 것을 장악하기에는 돈이 없기에, 아라키처럼 녹아들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녹아들기 위해서는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결국 좋은 관계를 통해서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 내가 먼저 친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에 다가가야 한다. 아라키는 이 관계에 카메라를 포함시킨다. 아라키는 어떤 카메라에 어떤 필름을 가지고 찍느냐에 따라서 대상과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표현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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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에서 2001년에 출판된 것이고, “사진은 촉촉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 반대로 디지털은 촉촉함이 없어요. 뭔가 퍼석퍼석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바로 지우고 또 바로 찍을 수 있어서 기개가 없어요.”라고 말한 아라키이니,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는 우리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단지 그가 즐겨했던 방법을 상상하며 비슷하게 해보는 수밖에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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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의 예술이라는 것은 신이 만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보통의 인간들이 시간과 공간의 한순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줌렌즈가 아니라 대상에게 다가가 찍으라는 아라키의 말처럼 우리는 대상에게 다가가 나만의 순간에 스위치만 누르면 된다. 아라키가 즐겨 쓴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우리 손에 항상 들려있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뭐가 다른가. 좋은 카메라가 아니라, 아라키가 찍어본 만큼은 찍어보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그 다음 카메라를 선택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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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아라키가 즐긴 한국기생관광에 편찮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니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폴라로이드 임신부 누드사진도 작품이니 이해를 하지만, 도대체 분홍에 표지에 구멍 뚫어놓고 엿보게 만드는 이 특이한 패티쉬는 누구의 아이디언지 정말 궁금하다. 차라리 일본 원서 표지처럼 점잖게 만들었다면, 글이 깊이가 더했지 않았을까. 칠순이 넘은 아라키가 이 표지 아이디어를 좋아할까. 201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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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사과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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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김춘미 역, 사과나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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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사나이’가 등장한다. ‘사나이’이라고 말하면 ‘마초’를 떠올리고, “여자나 게이한테 인기가 있으면 끝장입니다. 그런 치들 덕분에 먹고 산고 생각하면 나는 죽고 싶어집니다.” ([소설가의 각오] 중에서)라고 말하는 마루야마 겐지는 ‘마초’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마루야마 겐지는 ‘마초’가 아니고 ‘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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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늙어 버렸다. 이게 이제 며칠 있으면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하려는 사나이일까?” 서두에 나오는 이 글이,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겨우 서른 번째 생일을 앞둔 사나이가 왜 늙어버렸을까? 를 염두해 두고 소설을 읽으면 된다. 사나이’는 무엇일까? 책을 읽는다고 해서 수학문제의 정답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독자들에게 ‘사나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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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유행가에서나 나옴 직한 ‘사나이’이란 말을 대신해서 요즘은 ‘마초’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마초는 ‘남존여비, 남자다움의 과시 등’ 부정적인 의미를 含意하고 있는 스페인어 Machismo에서 나왔다고 한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부터 12까지만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산악 달리기나 산악 오토바이를 즐긴다는, ‘여자와 게이’를 혐오하는 마루야마 겐지는 ‘마초’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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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는 일명 ‘문단’이라고 하는 곳과 교류도 하지 않고, 매스컴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소설가다. 그는 오직 소설만 쓰면서도 ‘책이 얼마나 팔릴까?’걱정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친절하지도 않다. 아무리 빨리 써도 1년에 한 권 정도 밖에 소설을 쓰지 못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니 재판 삼판으로 늘어나는 인세 수익도 없이, 처음 소설을 출판하고 받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면서, 최대한 절약해 살면서 다음 소설을 준비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당히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보면 그는 터프하고 거만하고 자존심 강한 ‘마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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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는 소설을 쓸 때 상정하는 독자를 “목적을 갖고 전력투구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나,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여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남자들이다.”라고 [소설가의 각오]에서 말했다.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는 ‘소설’만 있을 뿐이고, 소설가는 오직 ‘소설’로 말해야 한다는 신념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자기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 위해, 겐지는 산골에서 구도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가 말한 것은 여성이나 게이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일치다. 그가 말하는 ‘사나이’의 의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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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속의 아버지가, 어쩌면 토요일 저녁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내 아버지가 ‘사나이’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아끼지 않는다. 아버지 노릇을 하는 데 있어서는 그저 그런, 말이라는 것에 거의 의지하지 않는 이 사나이는, 헛되이 흘러가는 시간도, 그다지 의미도 없이 마모되어 가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다.”한평생 작은 고깃배를 타고 강으로 바다로 나아가 가족들을 위해 물고기를 잡는 어부처럼, 어떤 위대한 신념도 명예도 돈도 없지만, 묵묵히 가정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 ‘사나이’고 이 소설은 그런 ‘사나이’를 위해서 그런 ‘사나이’가 썼다.

자신의 발표한 소설보다 자신의 쓴 시보다 더 많은 글자로 트윗질 하는 者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소한 소설가는 소설로, 시인은 시로, 학자는 논문으로 가려진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가에게 공무원에게 변호사에게 기업가에게 숨겨진 진실을 글로 문자로 알려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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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겐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책을 눈에 띄는 대로 다 사모으면서도, 왜 이렇게 매끄럽게 읽히지 감탄하면서도, 감각적인 글솜씨에 놀라면서도, 책을 읽을 때마다 부끄럽고 또 부럽다.

201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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