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마 교과서 - 유럽 승마 교본의 정석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6
제인 홀더니스 로댐 지음, 김수현 옮김 / 보누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영국 [승마 교과서] 보누스, 제인 홀더니스 로뎀, 보누스, 2012

 

살아있는 말을 본 것은 초등학교 때이다. 조그만 눈으로 멀리 있는 말을 보며 서부 영화에 나오는 멋진 카우보이나 올림픽에서 본 멋진 영국 신사를 떠올렸지만, 말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은 시골 촌부였다. 촌부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를 피해 갓길로 말을 몰았다. 천천히 걷던 늙은 말은 치쳤는지 가로수 밑에서 쉬기도 하고 쉬면서 똥도 쌌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 조상이 그랬듯이 지금 말을 운송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말을 무협영화나 올림픽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말발굽을 깎거나 거기 맞는 편자를 부착하는 장제사가 유망직종이라고 한다. 한 장제사는 인터뷰에서 열심히 하면 억대 연봉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경마가 활성화되어서 그럴까? 경마 때문이라기보다는 승마가 생활체육의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활체육으로서의 승마는 운동이면서 재활치료라고 한다. 이 책의 역자도 재활승마 교관이다.

 

“말이 보여주는 리드미컬하고 입체적인 동작은 기승자들의 허리 부분과 척추 그리고 골반을 자극하여 그들이 실제로 걷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따라서 기승자는 말을 타고 있어도 자신이 직접 걷는 것과 진배없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운동 효과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보행이 힘든 사람들에게는 자동 승마 운동기구도 있고, 조금 움직일 수 있다면 수중 에어로빅이 좋고, 좀 더 움직일 수 있다면 사이클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운동을 통해서 같은 운동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승마는 기본적인 운동 효과와 함께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승마라는 것, 말을 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과 소통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처음 말을 타는 사람이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말馬에게 말語을 걸어보자. 차분하고 부드러운 톤의 목소리는 말과의 원활한 소통과 교감을 돕는 중요한 요소다. 반대로 크고 시끄러운 목소리와 빠르고 변덕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위협적인 자세는 말과의 소통에 방해가 된다.”

또한, 말馬은 말語없이도 분명하게 자기 의사표시도 한다고 한다. “말은 눈으로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동시에 귀로 여러 가지 감정을 드러낸다.” 책에서는 말이 귀를 통해서 표현하는 다양한 신호들을 적혀있다. 그냥 채찍으로 휘두른다고 말이 잘 달리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재활승마 교관인 역자가 승마 교과서로 이 책을 선택한 것도 단순히 말 타는 기술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승마의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일반인들이 승마를 체험하기는 어렵다. 말이 뛰어놀만한 공간이 있는 곳은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도심에 흔하게 접하는 스크린 경마장처럼 도심에서도 승마를 즐기는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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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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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서 에세이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실리어 블루 존스, 지식채널, 2012

 

“이 원고를 거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귀하께서 독자들에게 풀어낼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소설이란 이야기를 전해야 하고,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말씀드리고픈 요지입니다.”

 

이 글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대가 윌리엄 포크너에게 [소음과 격정](최초 번역이 [음향과 분노]로 알려져졌지만, 이것이 타당한 것 같다)을 처음 읽은 출판업자가 보낸 것이다. 다른 곳에서 책이 출판이 된 뒤에도 많은 비평가는 ‘포크너는 영문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혹평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시간은 흘렀고, 포크너는 노벨 문학상을 탔고, [소음과 격정]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물론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1장을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소설을 끝까지 읽겠지만, 나뿐만 아니라 보통의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범주를 넘어선 작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풋내기에 불과했던 포크너의 원고를 읽은 출판업자의 혹평도 이해할만 하다.

이 책에는 포크너와 당대를 살았던, 포크너와 전혀 다른 문체를 가졌던, 포크너가 신문기사 같다고 조롱했던 헤밍웨이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헤밍웨이 편은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누구였을까? 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포크너 편에서는 작가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 책을 출판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에 주안점을 두었을까? 출판사 서평처럼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의 뒷이야기에 주안점을 두었다. [거장처럼 써라]에 대가들의 작법 분석이 있다면, 이 책은 대가들의 소소한 뒷이야기와 스포일러성 ‘작품 엿보기’가 있다. 여기에 소개된 현대 고전의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작품의 줄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는 없다.

 

고전 문학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렇게라도 고전을 접해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즐겨 읽는 사람들이라면 고전을 읽다가, 고전이라는 것이 전범이 될 만한 옛 책일 수도 있지만 쓸 고苦자를 쓰는 고약한 책이기도 하니, 내 범주를 넘어선다고 느낄 때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대가들은 수없이 거절당했고 수없이 써내려갔다. 결국, 원고가 출판될 때까지 썼다는 것이다. 물론 첫 작품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고 평안한 삶을 살았던 작가도 있지만, 힘든 삶을 스스로 마감한 대가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를 떠났어도 그들의 작품은 우리 곁에 남았다.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날이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고전 읽는 시간이 그렇게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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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랑다르의 두 왕국에서 키눅타 섬까지 오르배 섬 사람들이 만든 지도책 4
프랑수아 플라스 글 그림, 공나리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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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동화 [닐랑다르의 두 왕국에서 키눅타 섬까지] 프랑수아 플라스, 솔, 2004

 

이 책에서 제일 재미가 있었던 것은 ‘바위투성이 사막’ 이야기다. 이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한 오르배 섬사람들의 탐험과 지도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책을 많이 읽어보려고 하는 나에게는 ‘바위투성이 사막’ 이야기가 와 닿았다.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바위투성이 사막’ 이야기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석질인들의 이야기다. 거대한 거북이를 타고 사막을 다니는 석질인의 이야기를 책(물론 이야기 속의 책은 두루마리다 형태다)으로 쓴 리탕드르는 제국의 관리인 코스마에게 부탁을 한다. 코스마 일행은 병에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싣고 사막으로 건너 제국의 도서관으로 향한다. “이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원시인들한테 책장을 비워주다니!” 결국, 제국 사람들은 책을 모두 불사르고, 코스마 일행은 빈손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바위투성이 사막’의 이야기 속에는 많은 것들이 함의 되어 있다. 사막에서 사는 석질인들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 제국인들의 편견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나는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책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리탕드르가 쓴 것은 석질인 개개인의 역사다. 석질인들의 수만큼 책도 많다.

 

제국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물론 그들은 그 책을 읽지도 않았지만, 검증받지 않은 책들은 무조건 도서관에 보관할 수도 없다. 석질인들에게는 소중한 삶이 녹아들어 있겠지만, 제국 사람들 눈에는 쓸모없다. 좀 더 비약하자면, 석질인들의 이야기를 쓴 리탕드르에게 문제가 있다. 요약하고 집약해서 좀 더 훌륭한 책을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타인이나 타문화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국인들은 석질인들의 책을 읽어보고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10년 전 어떤 비평지에 이런 제목이 있었다. “책 출판량은 선진국, 질은 후진국”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철만 되면 수 없이 많은 책이 쏟아진다. 물론 유력한 후보자의 정치적 견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지만, 정치인들의 책 대부분은 선거철이 끝나기도 전에 폐지가 된다.

 

정치인들의 책뿐만이 아니다. 공무원들의 책, 기업인들의 책 심지어 대학교수들의 쓴 책 중에도 상당 부분은 독자를 위한 책 아니라, 경력란에 한 줄 더 써넣기 위한 책이 있다. 그것이 책이란 이유로 다 읽어야 할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독자가 능동적으로 읽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책이든 책을 쓴 저자에게는 가치가 있지만, 모든 책이 모든 독자에게 동일한 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이지만, 부모들은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다. “우리 애가 책을 정말 안 읽어요. 무슨 책이 좋을까요?” 부모는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강권하고 아이들은 그저 책장만 넘긴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밖에서 뛰어놀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며칠 전에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을 책상 옆으로 옮겨 놓았다. 텔레비전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어서 내다 두었던 것을 다시 옮겨 두었더니 자꾸 리모컨으로 손이 간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것이 누워서 텔레비전 보는 것 아닌가? 엄마는 누워서 아니면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보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먼저 텔레비전을 없애고, 그 다음에 좋은 책을 찾아야 할 것 같다. 201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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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 나라에서 망드라고르 산맥까지 오르배 섬 사람들이 만든 지도책 3
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공나리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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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동화 [비취 나라에서 망드라고르 산맥까지] 프랑스와 플라스, 솔, 2004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시리즈로 된 책을 읽을 때면 앞에 읽었던 것을 되새기며,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된다. 1편보다 더 좋은 2편을 만들기는 어렵다는 말처럼 1편이 재미있어야지 2편이 만들어진다. 영화감독들은 관객들의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책은 영화가 아니다.

 

이 책은 6권으로 된 시리즈 중 3번째 책이다. 앞서 2권을 읽었으니, 책이 어떻게 구성되어있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갈지 대충 짐작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원하는 것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끝이 아쉽든, 무미건조하든 상관없다. 단지 미지의 세계에 살짝 발을 담그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진 멋진 그림과 이야기를 연결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시리즈를 읽는 재미다. 기대와 다르게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비취 나라’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다. 이야기보다는 그림이 문제였다. 수묵화에서 보았던 기암절벽과 그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몽골 텐트와 일본식 복장을 하고 일본식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등장인물 때문이었다. 첫 번째 그림에서 느낀 실망감은 이 이야기를 다 읽을 때까지 나를 편견으로 밀어 넣었다.

 

‘비취 나라’의 이야기와 그림은 동북아시아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혀 ‘작가가 동북아시아에 대해서는 조사를 많이 하지 않았나 봐’라고 결론을 내린다. 과연 이런 결론은 정당할까? 소설이나 동화가 허구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허구라는 것은 등장인물과 배경이 책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창조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판타지나 SF 소설도 기본적인 논리의 틀을 파괴하지 않는다. 새로운 논리의 틀 속에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긴 역사를 처음부터 쓰듯이 모든 것을 다시 설명해야하고 독자들에게 모든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것을 다 읽을 수도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비취 나라’의 이야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없다.

 

책에 대한 평가를 할 때 한 가지 더 감안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작가가 ‘어떤 독자들 염두에 두고 썼는가?’이다. 이 책의 작가는 분명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 비유럽권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유럽의 이야기도 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과 시간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유럽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취 나라’ 이야기에는 중국, 몽골, 일본의 공간과 시간을 뭉쳐져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전해져 내려옴 직한 이야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실망했던 것은 그림 속에 우리나라가 등장하지 않아서였다. 우리가 유럽인들이라면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을 떠올리듯이 유럽인들은 동북아시아라고 하면 중국이나 일본 몽골을 떠올린다. 우리가 네덜란드와 벨기에 대해서 잘 모르듯이 그들도 한국을 잘 모를 것이다.

 

짧은 동화를 읽고, 읽었던 시간보다 10배는 더 생각했다. 이런 것들이 책을 읽는 재미다.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이미지들은 넘쳐난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책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사유의 세계로 갈 수 있을까. 201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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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읽는 시간 - 오래 시선이 머무는 66편의 시
권혁웅 엮음 / 문예중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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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당신을 읽는 시간] 권혁웅 엮고 지은이, 문예중앙, 2012

 

우리는 꿈을 꾼다. 사람들은 꿈을 희망이라고도 부르고 이상이라고도 부르고 소원이라고도 부른다. 무엇이라고 불리던 어떻게 생겼던 소중하고, 어떨 때는 손에 닿을 듯 말 듯하고 어떨 땐 넘을 수 없는 벽 저편에 있기에 간절하다. 소중하고 간절한 꿈이지만 그 꿈을 현실로 당겨오는 사람도 있고 미래에 맡겨두는 사람도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시인 윤동주는 이런 꿈을 꾸었다. 그는 “주어진 길을” 걸어갔고 그 꿈에 다 닿았다. 그는 별이 되었고, 우리에겐 시가 남았다. 단 한 권의 시집에 한국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시를 남긴 윤동주는 꿈을 이루었고,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한다. 시인의 꿈은 詩다. 어쩌면 영원히 남겨질 한 편의 시다. 그 한 편의 시를 위해서 별이 바람에 스치듯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토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문학전문기자는 이런 기사를 썼는가 보다. “출판 시장에서는 요즘 베스트셀러 시집을 찾기 어렵다. 지명도 있는 시인은 초판 3000부, 신인급은 1000~1500부를 찍지만, 2쇄를 들어가는 작품이 드물 정도. 시장이 침체되면서 시적 경향을 둘러싼 날 선 비판도, 관심도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시를 둘러싼 논쟁들이 좀 더 생산적인 담론으로 이어져 시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기자의 말처럼 시장이 침체되었을까? 호메로스의 서사시 이래로 시는 항상 독자의 관심 밖에 있었다. 대기업 사원의 한 달 월급에도 못 미치는 시집 한 권의 인세가 오늘날만의 문제였겠는가. 물론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던 시절만 해도 시를 접하기가 쉬웠다. 라디오 DJ가 낭송하는 시를 들으면 갱지 연습장 표지에 있던 연애시를 연애편지에 옮겨 적으며 그렇게 시를 만났다. 그 당시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라는 시를 썼던 베스트셀러 시인은 이제 국회의원이 되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 시가 날 찾아 왔다” 라고 쓴 네루다도 정치를 했으니 그의 선택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시대가 변했고 시인이 변했듯이 독자도 시도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시도 좋다. 가려진 현실을 고발하는 시도 좋다. 미래파의 시도 좋고 신서정시도 좋다. 베스트셀러 시도 좋고 무명의 습작시도 좋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시는 내 삶에서 나오는 나를 위로하는 내가 쓴 시가 아닐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를 읽어야 한다. 소리 내서 읽기도 하고 장소를 바꿔 가며 읽기도 하고, 누군가와 함께 읽기도 해야 한다. 이 책에는 66편의 함께 읽을 시가 있다. 권혁웅 시인과 함께 읽는 시가 있다. 한쪽에 66편의 시가 있고, 한쪽에는 권 시인의 해석이 있다. 권 시인은 이병률 시인의 ‘마음의 내과’에 대한 해석의 끝머리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마음은 센티미터와 인치를 동시에 기록한 자. 그와 나는 애초에 기준이 달랐다.” 해석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한 편의 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시인들의 시를 묶어놓은 책은 많다. 시만 묶어 놓은 책도 있고, 엮은이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책도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읽으면 된다. 소개된 시를 읽고, 내 느낌을 맘 속으로 정리하고, 권 시인의 느낌을 읽으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지 않은가. 이렇게도 읽어 낼 수 있구나! 아니면 너무 오바하는 것 같아요, 권 시인. 아니면 이건 못 읽어냈군요. 어떤 답을 선택하든 상관없다. 엮은이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보다 시를 더 많이 읽어 꿈을 현실로 당겨왔을 뿐이다. 201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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