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으로 취해 가방도 잃어버리고 선배집에서 꼴아졌는데, 아침을 먹인 선배가 한심하다고 고시랑거렸다. 그만하라고 했더니 이번엔 불뚝거리는 내 성질이 문제라고 거기에 자만심이 그득하다고 실실 웃으며 딴죽을 걸었다. 노인네 같은 후배 한 놈이 옆에서 장구치며 장단을 맞춰주는데, 나는 몸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아프니 내몸도 아프다는 식의 싸가지 없는 자만은 내 몫이 아니다‘ 정도는 알고 있다. 언제 안 아픈 세상이 있었던가.
세상은 그저 세상이고, 나는 그저 나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 아니고, 나는 그저 내가 아니다. 아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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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애


아침에 눈을 뜨고 동네를 거닐다가 이르게 핀 꽃을 보았는데 그것이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 보여 애통하였다 점심에 사촌 내외가 찾아와 함께 식사하였는데 아이가 복통을 일으켜 황급히 병원에 갔다 저녁에는 오래도록 기다려왔으나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을 읽었는데 결국 다 읽지 않고 그만두기로 하였다

꿈에서는 기쁜 얼굴로 웃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것이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아 곤란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고 동네를돌다가 전날 본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났는데 꽃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니 치우지 않은 책상이 보여 그것을 정리했다 점심을 거르고 저녁을 배불리 먹었고, 상하기 직전의 키위를 꺼내어 잘라먹었다

종종 마당에 빛이 내려와 한동안 머물다 떠났다 자주 슬픔을 느꼈으나 까닭이 떠오르지 않았다 - P-1

봄의 반


나는 천변을 걷는다 천변에는 철쭉이 가득 피었고 나는 저 꽃을 너에게 줄까 생각하다 그만둔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나는 네가 봄볕 아래서 자지러지게 웃던 것을 생각한다 나는 그때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개 한 마리가 이쪽을 쳐다보다 떠나갔다 사람 하나가 이쪽을 여전히 보고 있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나는 하천 가운데 서 있는 새의 이름이 왜가리라는 것을 떠올린다 새는 두 마리 나는 그것을 보고 무엇인가를 은유하려다 그만둔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나는 별이 간지러워 그러니 물어도 네가 웃기만 하던 것을 생각하다 그만둔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천변을 따라 봄날이 영원히 이어지고 있다 나는 산책을 그만둔다 이 봄의 반절을 떼어 너에게 주기 위해 "저기요, 거기 들어가시면 안 돼요 빨리 나오세요" 두 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은유와는 무관하게 - P-1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옆집 감나무에는 아기 머리통만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누가 키웠을까 사람도 살지 않는데 산책하다 무심코 한말에 저걸 누가 키워 알아서 자라는 거지 그가 말했습니다

담장 위로 나란히 앉은 새들은 정답게 울고 겨울을 맞아 잔뜩 털이 올랐네요
과연 그렇군요 다 알아서 자라는 것이군요

언덕길 경사를 따라 햇빛 떨어지는 오래된 동네
새들이 햇살 아래 자주 웃고 떠든다는 생각

살기 좋은 동네 같아.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떠밀려오던날, 이삿짐을 풀며 그가 했던 말

그런 말을 듣고 보면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

인적 없는 집에도 감은 열리고
삶도 사랑도 그렇게 근거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일은 오고 - P-1

때때로 눈도 비도 내리겠지요

우리는 이 동네로 떠밀려왔고, 어느새 짐을 풀고 있었을뿐이지만

깨어도 꿈결 속아도 꿈결
꿈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가 늙었을 때,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동네에서 곱게 늙은 두 노인이 되었을 때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누구에게 해 끼치는 일도 없이 계속되어온 그저 선량한 우리 삶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깊어가는 가을

밤마다 옆집에서는 잘 익은 감들이 하나둘 떨어졌고
그때마다 사람 머리통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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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당신이 먹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2023년 6월
황인찬 - P-1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자
학교에서 봐 - P-1

학교를 안 갔어


일단 전철을 탔고
시를 벗어났어

다들 학교도 안 가고 회사도 안 가고
뭐하는 걸까

나에게는 변명이 많았지
현장학습을 하러 가는 날이에요.
집에 급한 일이 생겼어요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진 않았지만

전철은 달렸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들
강물에 반사되는 빛

기관사가 차내에 계신 분들께 알리는 소리
다들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나도 사람에게 할 말은 없었어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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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경아, 이렇게 생각해줄 수는 없겠니? 나 진숙은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단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고양이 양양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 유경 너야. 그래서, 그래서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너, 말투가 사무적이구나. 그래. 미안해. 언제나 나 혼자서 잘못한 거지, 뭐. 또 내가 머리가 나빠서 실수한 거니? 출근 준비 잘 하라구. 똑똑한유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
그리고 진숙은 탕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나 참. 뭐가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진숙의 감정 변화는 기복이 너무 심하다. 그 비합리적인 굴곡은 감당할 수가 없다. 어쨌든 나이 든 독신 여자친구란 정말 골치 아픈 존재라니까! - P33

자연이 결혼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집안의경제 사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연에 대해서 잘 모른다. 자연은 말이 없고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가난한 부모와 대학을 다녀야 하는세 명의 남동생들 때문에 무슨 사건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키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마도 자연은 우리들 중에 유일하게아직 처녀로 남아 있는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생화학 책을 펼쳤다. 글자들이 춤을 춘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글자들 위로 또다시 글자들이 겹쳐졌다.
독신녀는 무엇으로 사는가. - P84

결국 그 말이 맞았다.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춤추러 가거나 미장원에 갈 때는 몰라도 조금 더 진전되면 돈을 빌려주거나 병원에 같이 가주는 친구는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길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바보같이잊고 말았다. 나답지 않았다.
잠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길일까 싶어 걱정되었으나 지금은 길이 자기 집 안방 침대에서 와이프와 잠자고 있을 시간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자.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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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끝
이성복 「그 여름의 끝을 읽고


눈 속에서도 매화나무는
몇 구절 꽃줄기를 지켰습니다
서너차례 폭설에도 한번의 강풍에도
꺾이지 않고 눈보다 더 환했습니다

이 세상 무엇이
저렇게 눈부실까요

폭설의 한가운데 서서
매화를 보는 나의 눈빛이
오늘이 끝날인 것처럼 간절하였습니다

한그루 고결을 지키듯
매화나무 질긴 꽃들이
서너평 좁은 마음을 흰 자락으로 덮었을 때

기적처럼 나의 맹목은
끝이 났습니다 - P-1

아름다운 진보


산골로 피서 갔던 한 도시 소녀가
밤하늘에 가득 찬
별을 보고 울었다

스스로 빛나는 별자리가
거기에 있었다

언제나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밤하늘이 울부짖었다

별빛 안에는 수많은 빛이 있어
아름다움은 빛과 같은 것일까

소녀는 저를 뒤집는 힘으로
별자리 하나를 가졌다 - P-1

아침에 생각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지막으로 돈! 천국 외에는 다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문 배달 소년의 응모 시 한 구절이 아프게 생각난다 어둠은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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