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씻겨서 흐르는 도랑물같이 상쾌해 보인다. 인실은 조용하를 쳐다보았다. 나이를 헤아릴 수 없게, 뭣인지 모르지만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것, 그리고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눈빛이다. 마음에, 육신에 숨죽이고 있을 치부를 엄폐할 여유를 주지 않는 눈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또 주량이 늘었기 때문인지 조용하의 안색은 병적으로 창백하였고 피부는 탄력을 잃었으며 최상급 박래품으로 여전하게 세련된 차림새였으나 양복에 감싸인 육체는 초라해져가고있었다. 금력과 세력과 명예?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한말의 명문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고 오늘날에는 비록 대일본제국의 귀족으로 탈바꿈을 했을망정 어쨌든 조용하가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이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으뜸에 속해 있건만 요즘 들어서 찬바람 같은비애에 침식되어가고 있는 그의 울울한 영혼을 인실의 눈은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힐난도 동정도 아니다. 타인의 눈이다. 하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서로의 존재, 피차간의 처지를 알고는 있었지만 만나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타인! 사람을 대할 적에 조용하는 늘 타인임을 과시하는 것으로 강자인 자신을 확신해온 사내였다. 냉담하다는 것은 그가 쓰는 칼 중에서도 예리한것이었다. 그랬는데 조용하는 지금 타인임을 웅변하는 인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구인데, 분노할여유도 주지 않는다. 명회는 거의 조용하를 정시하는 일이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정시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행실이라 하더라도 명희의 그것은 좀 철저하였다. 마음을 감추는 행위로 볼 수 있겠고상대를 거부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한때 명희는 조용하에게 결코 타인이 아니었다. - P185

"조선 사람 전부가 임금 노예로 떨어진다 할 것 같으면 상대적으로 조선 사람 전부가 결사대로 들어가자 그런 말도 나옴직한데 정복자나 피정복자 쌍방의 방향이 화살 가듯 그렇게 곧게 나 있는 것은 아니며 제아무리 욱일승천(旭日昇天)한다는 일본의 기세이기로,
또 한편 한 사람의 친일파도 없는 조선 민족이라 가정하더라도 말입니다. 역사의 역학적 방향과 인간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요?"
"절망적이군요. 침략하는 일본이나 짓밟히는 우리들 모두는 의지밖에서 역사에 희롱당하거나 혜택을 받는다 그런 얘긴가요? 저는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말살당하느냐 안 당하느냐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거구, 친일파의 존재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져 있었을 거예요. 길은 형편 따라 우회할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은 화살 가듯 곧아야 한다고 믿어요."
"생각이란 늘 이상에 기울기 쉬운 겁니다. 길과 같이 생각도 우회할 때는 해야 하고 지름길도 가야 합니다. 들판에서 식량을 생산해내는 농부가 싸움터에 병사를 보내어 의미 없는 죽음을 강요하는군주보다 훌륭하다, 이론으론 그렇지요. 또 그게 진실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가치관이 힘을 쓴 적이 있습니까? 지배자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까?"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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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도 한쪽으로 눕는다


대관령에 이르러 눈을 뜬다 높은 곳에 이른 귀 고막의 외마디 소리 때문이다 그래 가벼운 것들이 위를 향하지 문득 몸무게를 떠올려본다 왜 지나온 나이들은 무거워지는것일까 능선에 가까울수록 나무들은 한쪽으로만 몸이 기울었다 수평을 잡지 못하는 저들의 마음도 바다 쪽으로 향하는가 순간 나무들의 비명이 가파르다
그래 넋이 나간 게야 한쪽으로만 쓰러진 마음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과연 동해로 가는가 아름다운 것들은 스스로 대칭을 이룬다지만 대칭의 건너편에 늘 멀리 있는 사람이 있다
안개 속을 헤매인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풍경이 먼 휘파람처럼 손짓한다 꼭 그만큼의 거리가 여기까지 날 내몰은 것이다 수평은 아득하다 넘어갈 수 없는 선이 수평선을이룬다 결국 저 숨가쁘게 달려온 철길처럼 나는 끝내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 P14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놋숟가락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마련한 돈 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매달려 있었다지
마을 사람들이 그 돈으로 관을 마련하고 뒷일을 다 마쳤을 때 그만 넣어왔다 피붙이도 없던 그 놋숟가락 언젠가 이가 부러져 솥 바닥을 긁다가 목이 부러져 내 눈 밖에 뒹굴던 것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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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은 그 대화를 반추해본다. ‘가슴에 못을 박아놨십니다.‘ 그것은 외로움인가 외로움, 그것은 아픔이다. 외로움보다 더 짙은 한일것이다. 예수의 그것은 더욱 더 짙은 것, 절대적인 것, 그리고 고토쿠에게는 선택의 여지는 있었다. 하기는 침묵했어도 외로웠을 것이지만 어떤 형태 어떤 상황이든 그것은 모두 사랑이 빚은 외로움이요 아픔인 것은 공통이다. 윤국은 숙이를 바라본다. 몇 번이나 빨랫방망이 밑에서 견디었는가. 숙의 하얀 무명 적삼은 얇고 낡아 있었다. 걷어올린 소매 밑에 드러난 팔목이 가늘다. 저 가는 팔로 매일 부지런히 쉴새없이 일을 하며 그러고도 항상 차림새는 단정하다. 숙이 때묻은 버선을 신고 있는 것을 윤국은 본 적이 없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울지 않기 위해 그런 것 같았다.
‘순결하구나, 들꽃 같구나. 나는 느낄 수 있어, 너 마음이 슬픔에 가득 차서 깨끗하게 씻겨져 있는 것을.‘
빨래를 끝낸 숙이는 빨래통에 빨랫방망이를 찔러놓고 그것을 머리에 이면서 일어섰다. - P129

남자라는 자각에 주먹질을 당한 것만 같았다. 별안간 자기 자신이 왜소해진 것을 느낀다. 여자라면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런 화제에 동요하는 것이 상식이다. 최서희라는 여자는 예외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묘해진다. 대단한 여자다. 구마가이같은 베테랑도 공략하기 어려운 여자다. 서장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구마가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새삼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느낀다. 말이 신랄하다든지 의미가 깊다든지 그런 것보다 서희가 자아내는 분위기에는 생래적(生來的)인 당당함, 그것이 구마가이를 위압했다. 당당함뿐이랴. 발톱을 감춘 암호랑이같은 영악함이, 언제 앞발을 들고 면상을 내리칠지 모른다는, 그것에는 다분히 선입견도 있었다. 분통이 터진다. 그러나 터뜨리지 못하게 서희의 말에는 잘못이 없었고 허식이나 수식이 없다. 허식도 수식도 없다는 것은 괘씸하다. 일본서는 최상급에 속하는 여자를 내보였는데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오히려 불쾌해하다니, 일본이 모욕을 당하였다. 조선 사람 거반이, 친일파만 빼면,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무식꾼조차 일본을 모멸하고 비웃는 것은 다반사가 아니던가. 구마가이 경부는 그것을 모르는 바보인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의 모멸이나 비웃음은 원성이요 약자의 자위다. 그러나 서희는 원성도 자위도 아닌, 조선의 문화, 그 우월의 꽃 속에 앉아 허식도 수식도 할 필요가 없는, 제 얼굴을 내밀고 있으니, 날카롭고 예민한 사내다. 엷은 그 입술이 상당히 깊게 넓게 느낀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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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景利의 『土地』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그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갖고서 살아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관념이 조립한 평면적 인물들이 아니라, 집요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욕망의 변주로 생동하는인물들이다. 그들은 물론 한국근대사의 격동속에서 민족의 진로에 충격을 줄 이념의 투기를 온몸을 던져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각각의 선택은 작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꿈틀대는 욕망의 과정이나 결과로서나타난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인간의 욕망을 소설이라는 용광로에 넣고 실험한 세계 유수의어떠한 소설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만든다.

吳生根 서울대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 P-1

"화난 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난 영영 그만일 거야. 내가 부탁한다. 제발 내게 냉정히 대해주어."
어쩔 수 없는 연민이었다. 오랜 우정에서 우러나는 눈물만은 아니었다. 묵은 신화 같은 것, 세상을 모르고 살던 시절에 꿈꾸던 것,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은 공주가 맨발로 가시밭을 가는 석양, 연한 발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환상, 아픔이 여옥의 가슴에서 눈물이 흐른다. 감상을 배격해왔었고, 그 신화 같은 것에 화살을 날리던 여옥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선택받은 자의 전략은 더욱 처참하다. 불쌍한 아이, 불쌍한 명희, 너의 아름다움과 풍요한 환경과 어리석을 만큼의 순결함, 그런 특권은 너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과거의 그 특권은 그러나 지금부터네 발목에 물린 족쇄가 되어 너를 괴롭힐 것이다. 그 무게는 가는 길을 고달프게 할 것이다. 명희는 당분간 과거를 향해 구원을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행과 진주행을 거부했다. 확실한 것은 그것뿐 앞날은 캄캄한 안개, 바람만 불어도 부대끼는 감성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이애, 너도 나랑 함께 전도부인이나 - P106

되지 않겠니? 여옥은 그 말을 하려다 삼켜버린다.
"자유에 대한 갈망도 별로 없는 아이였다. 비굴하고 욕심이라도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의욕은 될 텐데… 저건 맹물이야. 저애야말로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꽃이 되든지 새가 되었든지……
선표를 끊은 뒤 여옥은 대합실 벽면에 붙은 긴 걸상에 앉았다. 벽면 위쪽엔 바다를 향한 창문이 있었다. 명희는 여옥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상 끝에 다리를 붙이고 서서 창 밖을 바라본다. 좀 일렀던지 대합실 안이 붐빌 정도는 아니었다. 부산을 출발하여 통영을거쳐서 오는 밤배는 이미 입항했기 때문에 대합실 밖에서 서성대는 지게꾼들 표정에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더러는 길 건너 점방처마 밑에 팔장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분신인 것처럼 지게를 지고 어쨌거나 부둣가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입항한 밤배로 인하여 시끄러웠던 여운도 남아 있었다. 서서히, 떠날 아침배를타기 위해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다. 떠날 사람 전송 나온 사람 짐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산다는 것은 결국 오고 가고, 뱃길이든 육로이든 인생은 길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인 성싶다.  - P107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저세상도 황천길.
저승길이라 하지 않는가, 길이 있기에 시간도 있는 겐가. 탄생은 시간을 가르고 나오는 것, 죽음은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가는 것, 해서 정거장이나 부둣가는 대부분 비애스런 곳이나 아닐는지. 영원한 정착이 없듯 떠남도 영원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멀리 점철된 섬위로 흰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날으는 갈매기처럼 삶 자체는 정착도 떠남도 아닌지 모를 일이다. 존재와 길, 그 자체가 애처로운 모순 비극이나 아니었을지, 무의식중에 지나가는 명희 생각이 통통거리는 기관 소리에 끊어진다. 조그마한 고깃배가 굴뚝에서 연기를 폭폭 내어뿜으며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그것도 배라고 너울이 인다. 방천가에 즐비한 전마선 돛배가 흔들거린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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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며 강쇠는 고개를 흔든다. 머릿속이 무거웠다. 허섭스레기 주워담은 이삿짐 실은 달구지처럼 머릿속에서 덜커덩덜커덩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저항을 느낀 것이다. 해도사뿐만 아니라 소지감까지 포함하여. 그것은 또한 유혹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대로가 좋다! 그 사람들맨크로 이것저것 많이 알 필요도없고, 나는 이렇기 사는 것이 몸에 맞은 옷 입은 것겉이 좋단 말이다. 내 자식놈도 마찬가지라. 유식이 비단옷 입은 꼴이 된다믄 우찌용나시를 하겠노. 범이 우리 속에 갇히서 고기나 받아묵고 그리 살믄 머하겠노. 나는 이대로가 좋다! 고대광실에 살고 접지도 않고업신여김 받지도 주지도 않고, 관수 그눔아아 맨날 삐딱하니 사람대하는 거를 나는 마땅찮이 생각했다. 나도 차츰 알게 되믄은 그리될 기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우째서 이리 간 곳마다 도랑일꼬."
말하면서 강쇠는 도랑을 하나 뛰어넘는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나뭇잎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실상 사람 사는 이치가 그리 어려분 것도 아닐 긴데, 많은 것도아닐 긴데 걸으믄 되는 거 아니까? 저승문이 열릴 때까지. 그런데와들 앉아서 그리 숨들이 가쁠고? 죽은 성님은 좀체 말을 안 했다. 안 했지마는 성님은 몸으로 늘 말해주었제. 그라고 말귀가 어둡고 못 알아들어도, 그러려니, 나는 갑갑하지 않았인께."
언덕을 하나 넘는다.
"초목이나 꽃 같은 거는 항상 거기 있었인께...... 흙도 항상 내 발밑에 있었인께, 내 것도 남의 것도 아니었던 기라. 흥!" - P-1

"나쁜 계집.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어리석은 여자. 바보 천치!"
중얼거렸으나, 신명 잃은 광대가 빈 북을 치듯, 바라보는 사람의 말이었을 뿐이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만은 아닌 성싶다.
바라보는 사람, 홍이는 이 몇 해 동안 뭔가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느낀다. 나이 탓이 아니다. 세월이 간 때문도 아니다. 스돌아홉, 잃을 나이는 아니다. 지난날 생모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파국으로까지 몰고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격렬한 시절의 아픔, 분노, 언제 그런 것들과 이렇게 먼 거리에 와서 있는가. 숱한 그 괴로움을 잃었다. 잊었다가 아니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절도(節度)와 미온(微溫)은 어떻게 다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마치 병마처럼 밑바닥으로 몰아넣고 굳게 마개로 밀폐한 그 숱한 청춘의 갈등은 병마개를 따면 과연 터져나올까? 판술네 집에서 그것들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위기를 느꼈던 것은 한갓 기우였었는지 모를 일이다. 밀폐해버린 것. 그것들은 모순이며 회의이며욕망, 또한 절망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쓰라렸던 것. 그러나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 나뭇잎 뒤켠에 알을 까는 곤충, 나무는 비옥한 흙을 향해 뿌리를 - P271

뻗는 섭리다. 인간의 방편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망각과 상실의 강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도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그르냐! 사람은 해바라기가 아니다. 곤충도 아니다. 한 그루 나무도 아니다. 그것들이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듯이 사람도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겠으나, 그게 바로 방편일 수는 없다. 방편은 오히려인위요 섭리에 반(反)한 것일 수도 있다. 홍이는 부친과 자신을 비교해본다. 영팔노인은 맺고 끊고 애비보다 훙이 대차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의 도리를 믿었고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자신을 다스렸던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보리밥 쌀밥의 차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먹고 사는 면이 있었다.‘ - P272

그 도리라는 것을 뚫고 진실을 보려고 허우적거리다가 돌아와서자신은 쉽게 자위 수단으로 이기주의를 취하지 아니했는가. 제 앞만 쓸고 사는 인간이 되었다. 피는 차디차게 식어버렸으며 먹고 자고 일하며 생식, 그것이 전부인 해바라기나 곤충이나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이. 지금 병마개를 딴다면 그 속은 텅하니 비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홍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 작별을 하고 판술네 집을 나섰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하늘가에 산허리가 금을 긋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썰렁해지는 아름다운 밤이다. 어릴 적에들었던 옛날 얘기, 천자(天子) 별인 자미성이 물을 머금었다던가,
하여 경각을 다투며 천자의 목숨이 위태롭고, 별이 떨어지는 것을보고 죽음을 안다던가. 사람들은 각기 하나씩 자기 별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배운 지식으로 말한다 할 것 같으면 사람의 머리론계산조차 어려운 아득한 곳에서 저 무수한 별들이 빛을 보내고 있다 하는데 한자 낙낙한 팔이 어찌 내 별을 잡아볼 것인가. 내 앞만 쓸고 사는 티끌 같은 삶, 티끌이 바늘귀 같은 인생의 출구를 빠져나가면 광대하고 무변한 공간, 아아 내 별과 나 사이를 가로지른무궁한 공간...... 티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꼬. 진리는, 진실은바로 하늘 어느 곳에선가 헤매고 있을 내 별 안에 있을 터인데. - P272

"소나무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워. 싫증이 나지 않아."
방금 중대한 집안 문제, 지에코와의 결혼 문제를 꺼내었고 그것을 거절당했는데 겐사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창문 밖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소나무는 동양적이며 매우 일본적인 나무다. 곧게 뻗어 올라가는가 하면 굽어져 뻗기도 하고 그야말로 나뭇가지가 천태만상이거든.
안 그러냐?"
"일본적이기도 하지만 보다 조선적인 나무 아닐까요?"
오가다도 아무 일 없었던 것같이 대답했다.
"어째서?"
"이건 느낌입니다만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구부러지고 비틀어지며 자라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곧게 뻗은 소나무보다 구부러져서 자란 소나무의 풍치가 훨씬 좋다는 것은, 뭐 그런 탓도 아니겠습니다만 인고(忍苦)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시뻘건 땅에, 혹은암벽 사이에서 비틀어지고 구부러져서 견디는 소나무, 그것은 바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째 네가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이상한 일이로군."
겐사쿠는 경멸하듯 비틀었다. - P340

"인고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인간으로서 불명예스러울 이유가 없는 거지요."
"지능이 문제로구나. 바보 같은 놈. 인고라고? 그런 의식이라도있는 민족이면 제 나라를 왜 뺏겨. 희망 없는 인종이야. 비틀어지고구부러지고 그런 소나무나마 방치한다면 남아나기나 할 것 같으냐? 온돌인가 뭔가 하는 그놈의 야만적인 아궁이가 산을 다 잡아먹고 해마다 홍수, 자멸할밖에 없는 백성이다."
감정적으로 매도한다.
"편견입니다. 대단한 편견이지요. 일본이 먹기 전에도 조선은 수천년을 자멸하지 않고 그들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일찍이 나무를 땔감으로 삼지 않았던 민족이 있었습니까? 야만적인 온돌이라 하셨는데 저는 일본의 다다미야말로 야만적인 것으로생각합니다. 건초더미에서 자던 습성이 약간 정리된 것 아니겠습니까? 온갖 먼지를 흡수하고 벼룩이 들끓는 다다미, 일 년에 한두 번씩 걷어서 일광욕이나 하고 두드려서 먼지를 털고, 비오는 날엔 무릎이 끈적끈적할 만큼 습기가 차고, 물걸레질을 매일 했다간 썩지요. 저는 온돌이야말로 가장 정결한 거처라 생각합니다. 의자나 침대 같은 것도 매일매일 걸레질하며 사용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 P341

설령 커버나 시트로 덮는다 하더라도 안엔 먼지가 쌓이지요. 경험에서 알았습니다만 온돌이란 맨발로 밟으면 모래 알갱이 하나까지발바닥에 느껴지니까요. 거울같이 매끄럽고 딱딱하여 차게 보이지만 여름 한 철만 기분 좋은 냉기를 가질 뿐, 앉으면 따뜻하고 아무리 비가 와도, 오히려 비 오는 날의 실내가 더 쾌적합니다. 그들은대단한 문화 민족이며 온돌은 난방 작품 치고 매우 우수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너 그래도 되는 거냐?"
그러나 오가다는 계속했다.
"우월감 그 자체가 열등감이란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조선이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조선이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우리가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일등 - P341

국민이다, 일등 국민이다. 구두선처럼 된다는 그 자체부터 일등 국민이 아닌 어릿광대지요. 개인에게도 품위가 있듯, 민족이나 국가에도 품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단히 훌륭한 신사가 민족이나국가에 관해서는 사리에 안 맞는 언사, 억지, 편견, 심지어는 살인자까지 된다는 것 어떻게 설명이 되야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자부심 아니겠습니까? 자기 존엄과 우월감은 분명히 다를것입니다. 너무 심합니다. 관동 대지진 때, 피에 굶주린 이리떼 모양으로 조선인 학살에 미쳐 날뛰던 일본 민중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민중을 그 방향으로 몰고 간 위정자들의 간지(奸智)를 저는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등 국민이며 우월감을 가져야하겠습니까?" !
"이 반역자."
하는데 겐사쿠의 목소리는 힘찬 것이 아니었다. 희미한 갈등 같은 것이 있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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