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거리며 강쇠는 고개를 흔든다. 머릿속이 무거웠다. 허섭스레기 주워담은 이삿짐 실은 달구지처럼 머릿속에서 덜커덩덜커덩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저항을 느낀 것이다. 해도사뿐만 아니라 소지감까지 포함하여. 그것은 또한 유혹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대로가 좋다! 그 사람들맨크로 이것저것 많이 알 필요도없고, 나는 이렇기 사는 것이 몸에 맞은 옷 입은 것겉이 좋단 말이다. 내 자식놈도 마찬가지라. 유식이 비단옷 입은 꼴이 된다믄 우찌용나시를 하겠노. 범이 우리 속에 갇히서 고기나 받아묵고 그리 살믄 머하겠노. 나는 이대로가 좋다! 고대광실에 살고 접지도 않고업신여김 받지도 주지도 않고, 관수 그눔아아 맨날 삐딱하니 사람대하는 거를 나는 마땅찮이 생각했다. 나도 차츰 알게 되믄은 그리될 기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우째서 이리 간 곳마다 도랑일꼬." 말하면서 강쇠는 도랑을 하나 뛰어넘는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나뭇잎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실상 사람 사는 이치가 그리 어려분 것도 아닐 긴데, 많은 것도아닐 긴데 걸으믄 되는 거 아니까? 저승문이 열릴 때까지. 그런데와들 앉아서 그리 숨들이 가쁠고? 죽은 성님은 좀체 말을 안 했다. 안 했지마는 성님은 몸으로 늘 말해주었제. 그라고 말귀가 어둡고 못 알아들어도, 그러려니, 나는 갑갑하지 않았인께." 언덕을 하나 넘는다. "초목이나 꽃 같은 거는 항상 거기 있었인께...... 흙도 항상 내 발밑에 있었인께, 내 것도 남의 것도 아니었던 기라. 흥!" - P-1
"나쁜 계집.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어리석은 여자. 바보 천치!" 중얼거렸으나, 신명 잃은 광대가 빈 북을 치듯, 바라보는 사람의 말이었을 뿐이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만은 아닌 성싶다. 바라보는 사람, 홍이는 이 몇 해 동안 뭔가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느낀다. 나이 탓이 아니다. 세월이 간 때문도 아니다. 스돌아홉, 잃을 나이는 아니다. 지난날 생모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파국으로까지 몰고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격렬한 시절의 아픔, 분노, 언제 그런 것들과 이렇게 먼 거리에 와서 있는가. 숱한 그 괴로움을 잃었다. 잊었다가 아니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절도(節度)와 미온(微溫)은 어떻게 다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마치 병마처럼 밑바닥으로 몰아넣고 굳게 마개로 밀폐한 그 숱한 청춘의 갈등은 병마개를 따면 과연 터져나올까? 판술네 집에서 그것들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위기를 느꼈던 것은 한갓 기우였었는지 모를 일이다. 밀폐해버린 것. 그것들은 모순이며 회의이며욕망, 또한 절망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쓰라렸던 것. 그러나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 나뭇잎 뒤켠에 알을 까는 곤충, 나무는 비옥한 흙을 향해 뿌리를 - P271
뻗는 섭리다. 인간의 방편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망각과 상실의 강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도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그르냐! 사람은 해바라기가 아니다. 곤충도 아니다. 한 그루 나무도 아니다. 그것들이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듯이 사람도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겠으나, 그게 바로 방편일 수는 없다. 방편은 오히려인위요 섭리에 반(反)한 것일 수도 있다. 홍이는 부친과 자신을 비교해본다. 영팔노인은 맺고 끊고 애비보다 훙이 대차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의 도리를 믿었고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자신을 다스렸던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보리밥 쌀밥의 차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먹고 사는 면이 있었다.‘ - P272
그 도리라는 것을 뚫고 진실을 보려고 허우적거리다가 돌아와서자신은 쉽게 자위 수단으로 이기주의를 취하지 아니했는가. 제 앞만 쓸고 사는 인간이 되었다. 피는 차디차게 식어버렸으며 먹고 자고 일하며 생식, 그것이 전부인 해바라기나 곤충이나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이. 지금 병마개를 딴다면 그 속은 텅하니 비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홍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 작별을 하고 판술네 집을 나섰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하늘가에 산허리가 금을 긋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썰렁해지는 아름다운 밤이다. 어릴 적에들었던 옛날 얘기, 천자(天子) 별인 자미성이 물을 머금었다던가, 하여 경각을 다투며 천자의 목숨이 위태롭고, 별이 떨어지는 것을보고 죽음을 안다던가. 사람들은 각기 하나씩 자기 별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배운 지식으로 말한다 할 것 같으면 사람의 머리론계산조차 어려운 아득한 곳에서 저 무수한 별들이 빛을 보내고 있다 하는데 한자 낙낙한 팔이 어찌 내 별을 잡아볼 것인가. 내 앞만 쓸고 사는 티끌 같은 삶, 티끌이 바늘귀 같은 인생의 출구를 빠져나가면 광대하고 무변한 공간, 아아 내 별과 나 사이를 가로지른무궁한 공간...... 티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꼬. 진리는, 진실은바로 하늘 어느 곳에선가 헤매고 있을 내 별 안에 있을 터인데. - P272
"소나무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워. 싫증이 나지 않아." 방금 중대한 집안 문제, 지에코와의 결혼 문제를 꺼내었고 그것을 거절당했는데 겐사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창문 밖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소나무는 동양적이며 매우 일본적인 나무다. 곧게 뻗어 올라가는가 하면 굽어져 뻗기도 하고 그야말로 나뭇가지가 천태만상이거든. 안 그러냐?" "일본적이기도 하지만 보다 조선적인 나무 아닐까요?" 오가다도 아무 일 없었던 것같이 대답했다. "어째서?" "이건 느낌입니다만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구부러지고 비틀어지며 자라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곧게 뻗은 소나무보다 구부러져서 자란 소나무의 풍치가 훨씬 좋다는 것은, 뭐 그런 탓도 아니겠습니다만 인고(忍苦)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시뻘건 땅에, 혹은암벽 사이에서 비틀어지고 구부러져서 견디는 소나무, 그것은 바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째 네가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이상한 일이로군." 겐사쿠는 경멸하듯 비틀었다. - P340
"인고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인간으로서 불명예스러울 이유가 없는 거지요." "지능이 문제로구나. 바보 같은 놈. 인고라고? 그런 의식이라도있는 민족이면 제 나라를 왜 뺏겨. 희망 없는 인종이야. 비틀어지고구부러지고 그런 소나무나마 방치한다면 남아나기나 할 것 같으냐? 온돌인가 뭔가 하는 그놈의 야만적인 아궁이가 산을 다 잡아먹고 해마다 홍수, 자멸할밖에 없는 백성이다." 감정적으로 매도한다. "편견입니다. 대단한 편견이지요. 일본이 먹기 전에도 조선은 수천년을 자멸하지 않고 그들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일찍이 나무를 땔감으로 삼지 않았던 민족이 있었습니까? 야만적인 온돌이라 하셨는데 저는 일본의 다다미야말로 야만적인 것으로생각합니다. 건초더미에서 자던 습성이 약간 정리된 것 아니겠습니까? 온갖 먼지를 흡수하고 벼룩이 들끓는 다다미, 일 년에 한두 번씩 걷어서 일광욕이나 하고 두드려서 먼지를 털고, 비오는 날엔 무릎이 끈적끈적할 만큼 습기가 차고, 물걸레질을 매일 했다간 썩지요. 저는 온돌이야말로 가장 정결한 거처라 생각합니다. 의자나 침대 같은 것도 매일매일 걸레질하며 사용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 P341
설령 커버나 시트로 덮는다 하더라도 안엔 먼지가 쌓이지요. 경험에서 알았습니다만 온돌이란 맨발로 밟으면 모래 알갱이 하나까지발바닥에 느껴지니까요. 거울같이 매끄럽고 딱딱하여 차게 보이지만 여름 한 철만 기분 좋은 냉기를 가질 뿐, 앉으면 따뜻하고 아무리 비가 와도, 오히려 비 오는 날의 실내가 더 쾌적합니다. 그들은대단한 문화 민족이며 온돌은 난방 작품 치고 매우 우수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너 그래도 되는 거냐?" 그러나 오가다는 계속했다. "우월감 그 자체가 열등감이란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조선이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조선이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우리가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일등 - P341
국민이다, 일등 국민이다. 구두선처럼 된다는 그 자체부터 일등 국민이 아닌 어릿광대지요. 개인에게도 품위가 있듯, 민족이나 국가에도 품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단히 훌륭한 신사가 민족이나국가에 관해서는 사리에 안 맞는 언사, 억지, 편견, 심지어는 살인자까지 된다는 것 어떻게 설명이 되야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자부심 아니겠습니까? 자기 존엄과 우월감은 분명히 다를것입니다. 너무 심합니다. 관동 대지진 때, 피에 굶주린 이리떼 모양으로 조선인 학살에 미쳐 날뛰던 일본 민중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민중을 그 방향으로 몰고 간 위정자들의 간지(奸智)를 저는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등 국민이며 우월감을 가져야하겠습니까?" ! "이 반역자." 하는데 겐사쿠의 목소리는 힘찬 것이 아니었다. 희미한 갈등 같은 것이 있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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