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景利의 『土地』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그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갖고서 살아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관념이 조립한 평면적 인물들이 아니라, 집요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욕망의 변주로 생동하는인물들이다. 그들은 물론 한국근대사의 격동속에서 민족의 진로에 충격을 줄 이념의 투기를 온몸을 던져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각각의 선택은 작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꿈틀대는 욕망의 과정이나 결과로서나타난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인간의 욕망을 소설이라는 용광로에 넣고 실험한 세계 유수의어떠한 소설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만든다.

吳生根 서울대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 P-1

"화난 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난 영영 그만일 거야. 내가 부탁한다. 제발 내게 냉정히 대해주어."
어쩔 수 없는 연민이었다. 오랜 우정에서 우러나는 눈물만은 아니었다. 묵은 신화 같은 것, 세상을 모르고 살던 시절에 꿈꾸던 것,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은 공주가 맨발로 가시밭을 가는 석양, 연한 발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환상, 아픔이 여옥의 가슴에서 눈물이 흐른다. 감상을 배격해왔었고, 그 신화 같은 것에 화살을 날리던 여옥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선택받은 자의 전략은 더욱 처참하다. 불쌍한 아이, 불쌍한 명희, 너의 아름다움과 풍요한 환경과 어리석을 만큼의 순결함, 그런 특권은 너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과거의 그 특권은 그러나 지금부터네 발목에 물린 족쇄가 되어 너를 괴롭힐 것이다. 그 무게는 가는 길을 고달프게 할 것이다. 명희는 당분간 과거를 향해 구원을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행과 진주행을 거부했다. 확실한 것은 그것뿐 앞날은 캄캄한 안개, 바람만 불어도 부대끼는 감성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이애, 너도 나랑 함께 전도부인이나 - P106

되지 않겠니? 여옥은 그 말을 하려다 삼켜버린다.
"자유에 대한 갈망도 별로 없는 아이였다. 비굴하고 욕심이라도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의욕은 될 텐데… 저건 맹물이야. 저애야말로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꽃이 되든지 새가 되었든지……
선표를 끊은 뒤 여옥은 대합실 벽면에 붙은 긴 걸상에 앉았다. 벽면 위쪽엔 바다를 향한 창문이 있었다. 명희는 여옥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상 끝에 다리를 붙이고 서서 창 밖을 바라본다. 좀 일렀던지 대합실 안이 붐빌 정도는 아니었다. 부산을 출발하여 통영을거쳐서 오는 밤배는 이미 입항했기 때문에 대합실 밖에서 서성대는 지게꾼들 표정에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더러는 길 건너 점방처마 밑에 팔장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분신인 것처럼 지게를 지고 어쨌거나 부둣가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입항한 밤배로 인하여 시끄러웠던 여운도 남아 있었다. 서서히, 떠날 아침배를타기 위해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다. 떠날 사람 전송 나온 사람 짐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산다는 것은 결국 오고 가고, 뱃길이든 육로이든 인생은 길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인 성싶다.  - P107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저세상도 황천길.
저승길이라 하지 않는가, 길이 있기에 시간도 있는 겐가. 탄생은 시간을 가르고 나오는 것, 죽음은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가는 것, 해서 정거장이나 부둣가는 대부분 비애스런 곳이나 아닐는지. 영원한 정착이 없듯 떠남도 영원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멀리 점철된 섬위로 흰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날으는 갈매기처럼 삶 자체는 정착도 떠남도 아닌지 모를 일이다. 존재와 길, 그 자체가 애처로운 모순 비극이나 아니었을지, 무의식중에 지나가는 명희 생각이 통통거리는 기관 소리에 끊어진다. 조그마한 고깃배가 굴뚝에서 연기를 폭폭 내어뿜으며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그것도 배라고 너울이 인다. 방천가에 즐비한 전마선 돛배가 흔들거린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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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며 강쇠는 고개를 흔든다. 머릿속이 무거웠다. 허섭스레기 주워담은 이삿짐 실은 달구지처럼 머릿속에서 덜커덩덜커덩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저항을 느낀 것이다. 해도사뿐만 아니라 소지감까지 포함하여. 그것은 또한 유혹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대로가 좋다! 그 사람들맨크로 이것저것 많이 알 필요도없고, 나는 이렇기 사는 것이 몸에 맞은 옷 입은 것겉이 좋단 말이다. 내 자식놈도 마찬가지라. 유식이 비단옷 입은 꼴이 된다믄 우찌용나시를 하겠노. 범이 우리 속에 갇히서 고기나 받아묵고 그리 살믄 머하겠노. 나는 이대로가 좋다! 고대광실에 살고 접지도 않고업신여김 받지도 주지도 않고, 관수 그눔아아 맨날 삐딱하니 사람대하는 거를 나는 마땅찮이 생각했다. 나도 차츰 알게 되믄은 그리될 기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우째서 이리 간 곳마다 도랑일꼬."
말하면서 강쇠는 도랑을 하나 뛰어넘는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나뭇잎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실상 사람 사는 이치가 그리 어려분 것도 아닐 긴데, 많은 것도아닐 긴데 걸으믄 되는 거 아니까? 저승문이 열릴 때까지. 그런데와들 앉아서 그리 숨들이 가쁠고? 죽은 성님은 좀체 말을 안 했다. 안 했지마는 성님은 몸으로 늘 말해주었제. 그라고 말귀가 어둡고 못 알아들어도, 그러려니, 나는 갑갑하지 않았인께."
언덕을 하나 넘는다.
"초목이나 꽃 같은 거는 항상 거기 있었인께...... 흙도 항상 내 발밑에 있었인께, 내 것도 남의 것도 아니었던 기라. 흥!" - P-1

"나쁜 계집.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어리석은 여자. 바보 천치!"
중얼거렸으나, 신명 잃은 광대가 빈 북을 치듯, 바라보는 사람의 말이었을 뿐이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만은 아닌 성싶다.
바라보는 사람, 홍이는 이 몇 해 동안 뭔가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느낀다. 나이 탓이 아니다. 세월이 간 때문도 아니다. 스돌아홉, 잃을 나이는 아니다. 지난날 생모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파국으로까지 몰고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격렬한 시절의 아픔, 분노, 언제 그런 것들과 이렇게 먼 거리에 와서 있는가. 숱한 그 괴로움을 잃었다. 잊었다가 아니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절도(節度)와 미온(微溫)은 어떻게 다른가. 아니면 같은 것인가. 마치 병마처럼 밑바닥으로 몰아넣고 굳게 마개로 밀폐한 그 숱한 청춘의 갈등은 병마개를 따면 과연 터져나올까? 판술네 집에서 그것들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위기를 느꼈던 것은 한갓 기우였었는지 모를 일이다. 밀폐해버린 것. 그것들은 모순이며 회의이며욕망, 또한 절망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쓰라렸던 것. 그러나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 나뭇잎 뒤켠에 알을 까는 곤충, 나무는 비옥한 흙을 향해 뿌리를 - P271

뻗는 섭리다. 인간의 방편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망각과 상실의 강도 그 섭리에 속하는 것인가. 도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그르냐! 사람은 해바라기가 아니다. 곤충도 아니다. 한 그루 나무도 아니다. 그것들이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듯이 사람도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겠으나, 그게 바로 방편일 수는 없다. 방편은 오히려인위요 섭리에 반(反)한 것일 수도 있다. 홍이는 부친과 자신을 비교해본다. 영팔노인은 맺고 끊고 애비보다 훙이 대차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의 도리를 믿었고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자신을 다스렸던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보리밥 쌀밥의 차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먹고 사는 면이 있었다.‘ - P272

그 도리라는 것을 뚫고 진실을 보려고 허우적거리다가 돌아와서자신은 쉽게 자위 수단으로 이기주의를 취하지 아니했는가. 제 앞만 쓸고 사는 인간이 되었다. 피는 차디차게 식어버렸으며 먹고 자고 일하며 생식, 그것이 전부인 해바라기나 곤충이나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이. 지금 병마개를 딴다면 그 속은 텅하니 비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홍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 작별을 하고 판술네 집을 나섰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하늘가에 산허리가 금을 긋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썰렁해지는 아름다운 밤이다. 어릴 적에들었던 옛날 얘기, 천자(天子) 별인 자미성이 물을 머금었다던가,
하여 경각을 다투며 천자의 목숨이 위태롭고, 별이 떨어지는 것을보고 죽음을 안다던가. 사람들은 각기 하나씩 자기 별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배운 지식으로 말한다 할 것 같으면 사람의 머리론계산조차 어려운 아득한 곳에서 저 무수한 별들이 빛을 보내고 있다 하는데 한자 낙낙한 팔이 어찌 내 별을 잡아볼 것인가. 내 앞만 쓸고 사는 티끌 같은 삶, 티끌이 바늘귀 같은 인생의 출구를 빠져나가면 광대하고 무변한 공간, 아아 내 별과 나 사이를 가로지른무궁한 공간...... 티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꼬. 진리는, 진실은바로 하늘 어느 곳에선가 헤매고 있을 내 별 안에 있을 터인데. - P272

"소나무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워. 싫증이 나지 않아."
방금 중대한 집안 문제, 지에코와의 결혼 문제를 꺼내었고 그것을 거절당했는데 겐사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창문 밖의 소나무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소나무는 동양적이며 매우 일본적인 나무다. 곧게 뻗어 올라가는가 하면 굽어져 뻗기도 하고 그야말로 나뭇가지가 천태만상이거든.
안 그러냐?"
"일본적이기도 하지만 보다 조선적인 나무 아닐까요?"
오가다도 아무 일 없었던 것같이 대답했다.
"어째서?"
"이건 느낌입니다만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구부러지고 비틀어지며 자라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곧게 뻗은 소나무보다 구부러져서 자란 소나무의 풍치가 훨씬 좋다는 것은, 뭐 그런 탓도 아니겠습니다만 인고(忍苦)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시뻘건 땅에, 혹은암벽 사이에서 비틀어지고 구부러져서 견디는 소나무, 그것은 바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째 네가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이상한 일이로군."
겐사쿠는 경멸하듯 비틀었다. - P340

"인고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인간으로서 불명예스러울 이유가 없는 거지요."
"지능이 문제로구나. 바보 같은 놈. 인고라고? 그런 의식이라도있는 민족이면 제 나라를 왜 뺏겨. 희망 없는 인종이야. 비틀어지고구부러지고 그런 소나무나마 방치한다면 남아나기나 할 것 같으냐? 온돌인가 뭔가 하는 그놈의 야만적인 아궁이가 산을 다 잡아먹고 해마다 홍수, 자멸할밖에 없는 백성이다."
감정적으로 매도한다.
"편견입니다. 대단한 편견이지요. 일본이 먹기 전에도 조선은 수천년을 자멸하지 않고 그들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일찍이 나무를 땔감으로 삼지 않았던 민족이 있었습니까? 야만적인 온돌이라 하셨는데 저는 일본의 다다미야말로 야만적인 것으로생각합니다. 건초더미에서 자던 습성이 약간 정리된 것 아니겠습니까? 온갖 먼지를 흡수하고 벼룩이 들끓는 다다미, 일 년에 한두 번씩 걷어서 일광욕이나 하고 두드려서 먼지를 털고, 비오는 날엔 무릎이 끈적끈적할 만큼 습기가 차고, 물걸레질을 매일 했다간 썩지요. 저는 온돌이야말로 가장 정결한 거처라 생각합니다. 의자나 침대 같은 것도 매일매일 걸레질하며 사용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 P341

설령 커버나 시트로 덮는다 하더라도 안엔 먼지가 쌓이지요. 경험에서 알았습니다만 온돌이란 맨발로 밟으면 모래 알갱이 하나까지발바닥에 느껴지니까요. 거울같이 매끄럽고 딱딱하여 차게 보이지만 여름 한 철만 기분 좋은 냉기를 가질 뿐, 앉으면 따뜻하고 아무리 비가 와도, 오히려 비 오는 날의 실내가 더 쾌적합니다. 그들은대단한 문화 민족이며 온돌은 난방 작품 치고 매우 우수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너 그래도 되는 거냐?"
그러나 오가다는 계속했다.
"우월감 그 자체가 열등감이란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사실 우리가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조선이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조선이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우리가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일등 - P341

국민이다, 일등 국민이다. 구두선처럼 된다는 그 자체부터 일등 국민이 아닌 어릿광대지요. 개인에게도 품위가 있듯, 민족이나 국가에도 품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단히 훌륭한 신사가 민족이나국가에 관해서는 사리에 안 맞는 언사, 억지, 편견, 심지어는 살인자까지 된다는 것 어떻게 설명이 되야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자부심 아니겠습니까? 자기 존엄과 우월감은 분명히 다를것입니다. 너무 심합니다. 관동 대지진 때, 피에 굶주린 이리떼 모양으로 조선인 학살에 미쳐 날뛰던 일본 민중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민중을 그 방향으로 몰고 간 위정자들의 간지(奸智)를 저는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등 국민이며 우월감을 가져야하겠습니까?" !
"이 반역자."
하는데 겐사쿠의 목소리는 힘찬 것이 아니었다. 희미한 갈등 같은 것이 있었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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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경 쓸 것 없고, 국 식기 전에 
들어요."
모두 수저를 든다.
"음, 과연 입에 붙는구먼."
여옥은 국을 마시고 나서 낙지찜을 집는다. 선혜는
"여기 앉은 사람들은 모두 음식맛 아는 사람들이지."
"그건 또 왜요?"
명희가 물었다.
"사대부 집안이 아니란 얘기야."
"음식맛 아는 것과 신분이 무슨 관계 있을까?"
"특히 양반들 종가의 음식이란 사람 
쳐다보지."
"언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지. 이치가 안 그러냐? 백결(百結)선생을 추앙했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그것도 모르니? 청백리 송곳똥 누는 것도 몰라?"
"해서요?"
"음식이야 중인들이 즐기고 중인들보다는 돈 있는 장사꾼이 더 잘해먹지. 아무리 돈 벌어봐야 먹는 재미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사실 그럴 거야."
여옥이 동조했다. 밥상을 물리고 과일이 들어왔다. 커피도 들어왔다. - P123

"남 낳은 내 자식 말예요."
농담으로 들었고 명희 자신도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는 양현을 생각했던 것이다. 못마땅한 듯 말이 없던 여옥은
"하느님밖에 없는 여자가 속세의 남의 행복을 시기라도 하는 것같아 조심스럽지만, 하기는 명희가 행복할 거라고 믿지도 않았지만도대체 여자들이 뭣 땜에 공부를 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군. 욕을해주고 싶을 만큼 실망이다. 강여사,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어. 나도 동감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패잔병들의 은신처가 결혼이라는 거지 뭐. 여자가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요원해. 뭐 나야 별 재간도 없었던 여자지만 말이야. 결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혼자서는 견디어 배기기 어려웠다는 얘기가 될 게야. 배운 여자가, 하면 그건 언제나 질책이었고 어떤 때는 숫제 화냥년 취급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배운 여자가 나가야할 문은 한 군데도 열려 있지 않으면서, 철저하지 철저해, 조선 사람들 보수적인 것." - P126

노인이 되면 새벽잠이 없어진다. 젊은 사람들이 옅지만 달콤한 잠에 취하는 그런 시간 노인은 답답하고 외롭다. 금슬 좋은 아들내외에 시샘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조심을 하면서도 담뱃대를 두드리게 되고 받은 기침을 하게 되고 칙간을 들락날락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울컥 설움이 치민다. 늙어서 무력해지는 자신이 서글프고, 모두 잠들었는데 홀로 깨어 있다는 고독감 소외감은 지난 세월을 허망하게 되살린다. 억울하다, 한스럽다, 그런 감정의 여울로자신을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시샘할 자식도 짜증부릴 한 짝도 없는 영산댁에게는 지난 세월이 허망하다든지 억울하다든지 한스럽다든지, 과거를 헤맬 여지가 없다. 외로움, 다만 그 외로움에 사로잡힌 새벽을 되풀이해왔다. - P170

계산대로 윤국은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고 연도 연줄이 있어야 창공을 날지 연줄이 끊어지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지붕 위에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게된다고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나이가 어려, 목적은 크고 뚜렷하다 하더라도 방법은 캄캄절벽 아니겠느냐, 방법이란 분별이며 분별은 나이와 더불어 정교해진다, 어떤 사람은, 자리를 잃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소년은 본시 있던 그 자리에서 일하라, 호구를 위한 일자리를 구한다든지 고학을 해보겠다면 벌문제겠으나 학생운동도 학교를 잃고는 못해, 학교가 바로 현장이다. 노동자는 공장이 현장이듯 농민은 농토가, 룸펜은 도시 뒷골목이, 또 어떤 사람은, 덤빈다는 것은 나를 망치고 동지를 망친다고 했다. 또아리를 틀어 지금은 도사릴 때라고도 했다. 다 옳은 말이었다. 앞뒤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윤국은 너무 옳기 때문에 너무 앞뒤가 맞기 때문에 석연치가 않았다. 옳은 만큼 앞뒤가 맞는 만큼 그런 만큼 지혜롭고 순수할까 싶었다. 차라리 별말이 없었던 선우신이란 사람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들은 모두 내려가는 데 여비로 보태 쓰라하며 얼마간의 돈을 내밀었으나 윤국은 받지 아니했다. 그랬을 적에 그들의 눈은 둥그래졌다. 의외라는 표정들이었다. 윤국은 어떤사람에게도 자기 아버지가 김길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강 건너 대숲이 파아랬다. 대숲 그늘이 떨어진 강물도 녹색이다. 강물은 녹색도 되고 청람빛이 되기도 하며 하늘색 때로는 흰색에 가까워질 때도 있다. 그리고 아침에는 황금빛, 저녁놀에는 진홍빛, 우중충한 잿빛일 때도 있다.
‘그 빛들을 다 가져야지. 하늘의 빛 땅의 빛 모든 것을 내 속에 가져야지!‘ - P202

‘참 따뜻하다. 남쪽은 따뜻하다. 어차피 앞으로도 어머님은 속상해하실 거야. 자꾸자꾸 속상하시면 그것도 습관이 되어 견딜 만한 거구.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어머님도 보통 여성은 아니니까. 내 어머님처럼 의연한 여성을 나는 아직 못 보았다. 형은, 그래 형은 어머님 땜에 마음 아파하겠지. 그러나 내 행위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야. 형도 나처럼 하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나폴레옹은 불가능이라는 글자를 사전에서 빼버리라 했다. 나는 나폴레옹 같은 것 존경안 해. 그러나 저 높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에 내가 서 있고, 나는 어디든 걸을 수 있다. 나는 불가능을 향해 걸을 수 있다! 불가능이있기 때문에 불가능은 목표가 된다. 따뜻한 밥, 따뜻한 옷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매달리어 노예가 된다! 부자일수록 더욱더 노예가 된다! 내가 나에게 노예 되기를 거부해야만 남도 해방시킬 수 있고 내 나라도 찾을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은 뭔가 모르지만 훌륭한 말들은 하고 있지만 어째서 거미줄에 묶인 사람같이 보였을까. 나는 수관형이나 숙이를 보았을 때만큼 감동하지 않았다.
방법, 방법, 방법이라 했다. 자리, 자리, 자리라고도 했다. 나는 그것을 많이 생각해보아야 해. 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형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내 마음을 좀더 정확하게 전과는 다르게 전할 수 있었을 터인데‘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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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아 있든가요?"
"그러모. 아직은 정정하더라. 니 아부지 돌아가신 얘기를 한께 대성통곡, 내가 놀래서 말리니께 공노인께서 눈을 꿈벅꿈벅하심서, 없는 상막 앞에서 곡하는 거니께 내비리두어라, 그기이 저눔의 인사가 치리는 절차라 하시더마. 그래 아제씨도 돌아가시고 했이니 홍이도 쉽게 만주로 올 것이다, 내가 그랬지. 그랬더니 통곡을 하던 그 사람 입이 함박이만큼 벌어지믄서, 그래서 또 공노인한테 준통을 묵고, 그 사람을 보고 있이믄 슬프고 서러분 것도 우시개겉이생각이 되더마."
그때 광경이 생각나는지 한복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머라 하는고 하니, 내가 죽으믄 홍이가 염해주겠다." 
"염해주고말구요."
말하고서 홍이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언제 세월이 그리 흘렀는가. 이제는 주변의 죽음이 슬프기보다 하나의 의식(儀式)을 기다리는것 같은 심정이었는데 그러한 심정은 삶에의 끈질긴 집념을 안은채 죽은 어미의 모습과 만년에는 인생을 관조하듯 표표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아비, 그 두 죽음을 지켜본 데서 얻어진 것이었는데, 그랬었는데 내가 죽으면 훙이가 염해주겠다, 그런 말을 했었다는 주갑이, 홍이는 눈물이 흐를까 보아 천장을 쳐다본 채 앉아있다. 학같이 긴 두 팔을 펴며 춤을 추던 주갑이, 구만리 장천 대붕이 난다는 곳, 머나먼 지평과 하늘을 우러러보며 「새타령」을 절창하던 주갑이아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데 세월은 제마음대로 흘러 죽으면 염을 해달라고,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가. 어린 소년이었던 홍이는 두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간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 P74

‘나는 여기 살 기다‘
한복의 그 말이 새삼스레 놀라움을 안고 되살아난다. 홍이는 자신의 만주행을 도망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선 고향으로되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복의 경우는 분명히도망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그는 도망가지 않았고 수없이 갈아대는 칼날 밑에 수더분한 본래그 모습대로 숫돌이 되어 살아온 것이다.
홍이는 아비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물아홉 해의 정월초하룻날, 무덤의 마른 잔디 위로,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햇빛이 비친다.
‘아부지. 나중에 상의에미랑 다시 오겠습니다만 어쩐지 혼자 와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소나무 위에서 까치 한 마리가 장난스럽게 꼬랑지를 까딱까딱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내려다본다. 무릎으로부터 땅의 냉기가 스며든다. 오시시 몸이 떨린다. 추웠다. 그러나 추운 것에 쾌감을 느낀다. 나름대로 홍이는 아비 이용의 인간상이 자기 내부에서 하나의 소상(塑像)같이 완성된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인간 이용이, 홍이는 멋진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뇌리를 스쳐가는 간도땅에서의 수많은 우국열사들, 흠모하고 피가 끓었던 그 수많은 얼굴들, 그러나 홍이는 아비 이용이야말로 가장 멋진 사내였다고 스스럼없이 생각한다. 열사도 우국지사도 아니었던 사내, 농부에 지나지 않았던 한 사나이의 생애가 아름답다. 사랑하고, 거짓 없이 사랑하고 인간의 도 - P76

리를 위하여 무섭게 견디어야 했으며 자신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았던, 그 감정과 의지의 빛깔, 홍이는 처음으로 선명하게 아비 모습을, 그 진가를 보는 것 같았다. 사라져가는 아비 자취에 대한 마지막 전별(餞別)의 순간인지 모를 일이었다. 묘소 근처에는 병풍 같은 송림이다. 낙엽지지 않고 남은 솔잎들은 겨울을 용케 나고 머지않아 빛깔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해 용이 이곳에 묻혔을 때 검붉은소나무의 밑둥 사이로 보이던 큰 바위 하나, 푸른 이끼가 찬란하게끼어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긴 겨울은 가고 있으나 아직 봄은저만큼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 큰 바위엔찬란한 푸른 이끼가 온통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홍아."
"네?"
홍이는 소스라치듯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없다. 이름을 부르던 여자의 음성, 귀에 익은 옛날의 그 음성, 홍이는 사방을 둘러 본다.
"홍아."
"네! 어디 있어요?"
홍이 미친 듯이 다시 사방을 둘러본다.
"나 여기 있다."
파란 이끼 낀 바위 뒤켠에 월선이가 서 있었다. 흰 옥양목 치마에 옥색 명주 저고리를 입고 서 있었다.
"옴마!"
- P77

"나 이런 말 하고 싶었습니다. 장서방도 반대편에 서서 왜 너는 더 가졌느냐 더 가졌느냐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요. 배가 고파서 우는 사람 헐벗고 추워서 우는 사람 천대받고 우는 사람, 내 얘기는그런 차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둘러메고저항할 힘을 모으는 것, 그것이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힘이 약자를 누르고 소외하는 방향이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물론 내 처지에서 내 처지의 말을 한다 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어릴 때 일을 기억하는데, 외톨백이아이 하나가 사탕을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그랬더니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이는 외톨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이번에는 외톨이가 과자를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는 다시 외톨이가 됐어요. 얻어먹는 아이들은 항상 명령에 복종했어요. 명령에 복종하는 아이, 외톨이는 언제 없어지지요? 정말 역사가 그렇게만 되풀이되는 거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연학은 말없이 따라걷는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적개심, 분노, 슬픔, 그것이 순수하면힘이지요. 순수한 힘은 우월감이 아닙니다. 우월감을 쳐부수는 것이지요. 우월감을 쳐부수는 이론을 가지고 스스로는 우월감에 젖어있다면 이편에 서든 저편에 서든, 친구가 되든 원수가 되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리 있게 말도 못하고 조리 있는 생각도 못한다마는 니 말 뜻은 알겠다. 그러나 다 그런 거는 아닌께. 또 사람이 하는 짓이라 하느님겉이 완전할 수야 없제. 단을 내리믄 안 된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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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정희씨는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교사·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한 그는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1975년 「현대시학』의 추천을 받은그는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활동하면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 (1983),
「눈물꽃』(1986),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하나』(1991) 등의 시집을 냈다.
비극적인 오월의 봄에서 절망과 더불어 그 절망을 타넘을 열망을 뿜어올리는그는 銀이로되 그리움의 분노에 젖었지만 희망으로 진전할, 힘차고 당당한 서정으로 자신의 시적 언어를 고양시키고있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첨예한 대결로 그 자신을 밀고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가려는 그의 실천적 의지와 전망을 그가보여주고 있음을 뜻한다. 오염되고 타락하는 우리에게 있어 언어를 통한 이 의지와 전망의 형상화는 그가 우리 시단에기여하는 귀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 P-1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고고여전히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밝으면 우리가 다시걸어가야 할 길들이 가지런한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 길에 등등을 돌려서도 안 되며 우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꼭 울게 됩니다. 내게는 눈물이 절망이거나 패배가 아니라 이 세계와 손잡는 순결한 표징이며 용기의 샘입니다. 뜨겁고 굵은 눈물속으로 무심하게 걸어 들어오는 안산의저 황량한 들판과 나지막한 야산들이 내게는 소우주이고 세계 정신의 일부분이듯이, 그리운 이여, 내게는 당신이 인류를 만나는 통로이고 내일을 예비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함께 떠받치는 하늘에서 지금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무섭게 창틀 밑을 흔드는 계절일지라도 빗방울에 어리는 경건한 나날들이 詩의 강물 되어 나를 끌고 갑니다. - P-1

自序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불혹의 나이라는 마흔의 고개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띤 소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여의었다. 돌연한 어머님의 타계가 그렇고 스승의 죽음이 그렇고
문단 선배의 죽음이 그렇다. 또 어느 때보다도 많은 젊은이들이 가혹하게 민주주의 제단에 바쳐졌다. 나른한 어둠이 나를 덮치려 하고 있다.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이 살아 남은자들의 미래인데도......

1987년 가을 高靜熙 - P-1

땅의 사람들 1
ㅡ서시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낀 사람들의 등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 P11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 P37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 P-1

강물
ㅡ편지 1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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