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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처음처럼’ 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처음'의 순수성과 설렘은 '첫'의 특별함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특히 신영복선생의 붓글씨, '처음처럼'을 처음 보았을 때 목소리가 멋진 사내를 만난 것처럼 한 눈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쐬주도 '처음처럼'만 마시고. 아, 아니다. 제주에 가면 '한라산' 하얀 거 마신다. 윽~ '한라산' 그립다.
어쩌면 무엇 무엇처럼 이라는 말 자체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보다 뛰어난 그 무엇을 향한 갈망이 그런 자연스런 현상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처럼' 이라는 직유법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모두 있다. 교사이자 반면교사인 것이다. '누구처럼 되어라.' '누구처럼 되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반면교사도 교사라고 생각한다. ‘정희진처럼 읽기’라는 제목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책을 읽는 방식이 있다. 다만, 나는 이렇게 읽는다는 뜻이다. 물론, 그 ‘이렇게’가 사회적 의미와 내용이 없다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는 편인데, 나의 독서 방법을 일반화하려는 의도는 당연히 없다. 많은 방식 중의 하나라는 의미에서 정희진처럼 읽을 수 있는 뜻이다. 나는 나 자신 목소리를 대변할 뿐이다.
'~처럼' 이라는 비유에 담긴 속내를 이렇게 풀어놓았다. ‘~처럼’에 담긴 복잡한 내 속내를 그대로 듣고서 쓴 글이네, 싶을 만큼 적확하다. 무서우리만큼 똑똑할 법한 저자는 내게, '정희진'하면 페미니즘이고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연결 된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너무 어렵게 읽었다. 내용이 난해했다기보다는 소재들의 발상이 신선하면서 충격이었고 나의 무지들이 어마무시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페미니즘을 ‘다른 목소리’라고 말한다.
다른 목소리’는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풍요롭게 해주며 자기중심주의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다른 목소리’의 잠재적 주인공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여성주의를 공부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특히, 논쟁이나 글쓰기, 말하기에 관심 있는 이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길 권한다. 논쟁은 승부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지식)과 그러한 입장이 형성된 과정을 교환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p11-
페미니즘이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인 이유는 젠더가 “개별 학문이 아니라 일종의 관점이자 세계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페미니즘'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진짜 페미니즘이 뭔지 살짝 알 듯도 알 듯도 했다. '논쟁이나 글쓰기, 말하기에 관심 있는 이'에 속하면서도 이런 권유를 받고도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력이 이쯤에 머물러 있구나 생각한다. 저자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아직까지도 현역 활동가(이런 표현이 맞는다면?)다. 내가 이쪽 끝 변방의 세계에 속해 있다면 저 쪽 끝 변방에 속해 있어서 우리가 마주할 확률은 로또 당첨만큼이나 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9년만의 신작이 덜컥 반가운 것이다.
나는 순수한 활동가를 만난 적이 없다. 노조 일을 할 때 순수한 운동가라고 생각한 이들도 지내고 보면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인물들이었다. 또 순수를 유지하고 있다 해도 주변에서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유능할수록 회유와 협박을 많이 당하고 결국은 변절자로 몰리거나 그들과 합류해 정치적인 인물로 둔갑한다. 시작은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힘이 실리면 권력이 된다. 단체는 곧 권력이 되는 것이고 단체를 움직일 힘은 정치성에서 나와 더 큰 권력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대표주자가 '김문수', '이재오'등이 아니던가. 그러나 세상의 변방에서 묵묵한 활동가들이 건재하기에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살만한 것이라고 또한 믿는다. 책을 펼치면서 또 나의 무지를 확인 사살할 일만 만들었구나, 했다. 저자가 읽고 논한 79편의 제목 중 내가 읽은 건 고작 십여 편, 그것도 정독을 한 것은 없어보였다. 그래도 샀으니 어쩌랴, 읽어버려야지. 길게 읽기엔 무리가 따를 테니 가게에서 짬짬이 읽기로 했다. 한 꼭지씩 읽다보면 언젠가는 다 읽겠지 싶었다.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책은 나를 이룬다.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 이전의 내가 있고, 이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독후의 감(感)이다.
책 표지부터 암시하는 저자의 이번 책은 그렇게 읽은 ‘책들에 대한 책’이다. 그런데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라니. 책을 읽을 때 책이 내 몸을 통과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정신이나 영혼이 투영된다고 생각했지, 몸으로는 아니었다. ‘몸’을 무시하고 살아온 습성 때문이고, 오래 몸을 부려 밥을 얻고, 술을 얻고, 생활을 얻고, 책을 얻으면서도 몸보다는 고상한 척, 영민한 척, 머리로만 살아오고, 머리로만 느끼고, 머리로만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는 결국 몸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우리는 몸 중에 부분에 속하는 머리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또한 몸으로 먹고 사는 삶을 부끄러워했구나, 싶다. 고개를 크게 끄덕거려 본다. 맞다. 격하게 공감한다. 生의 어떤 한 권의 책은 뢴트겐 광선처럼 내 몸에 빛을 새기면 지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다른 목소리‘를 알았다면 이번 책에서는 ‘다르게 읽기’와 ’다르게 만나기‘를 알게 되었다. 거침없이 솔직한 저자의 문장들에 이끌려 읽지도 않은 책들에 빠져든다. 흡사 같이 읽고 토론이라도 나눈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책의 모양새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애지중지, 책에 관한 한 침도 안 바르고 구기지도 않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밑줄도 긋지 않도록 주의하는 내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면 필사를 하는 내가, 가게에서 읽느라 필사는커녕 포스트잇으로 정리도 못하고 접기 시작한 부분이 책을 저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즐거움(樂)에 풀잎을 얹으면, 약(藥)이 된다. 책은 즐거움이자 풀잎이자 약물이다. 나의 일상은 외롭고 지루한 노동의 연속이다. 자극이라고 해봤자, 우리 사회 대부분의 서민들처럼 분노와 스트레스가 고작이다. 내가 옴싹달싹 못하고 '을'이라는 현실에서 비참함을 느낄 때, 푸코를 읽으면 내 상황이 상대화 된다. p12
이런 문장을 만날 때 어찌 페이지를 접지 않을 수 있으랴. '나의 일상은 외롭고 지루한 노동의 연속'이고 뉴스는 온통 분노 유발 스트레스만 가중 시킬 뿐인데. 나와는분명 다를 지식인인 저자가 젠체하지않고 써나가는 책을 통한 일상은 말 그대로 일상처럼다가온다. 보여주기 위한 제스츄어가 아니라 삶으로서의 일상.
성장 동력, 이번 정부가 쏟아낸 말이다. 성장도, 동력도 무섭다. 날선 기계가 굉음을 내며 맹렬히 돌아가는 느낌이다. 꺼지지 않는 엔진, 철야, 24시간 영업, 과로사, 강철 체력…….흔히 "압축적 성장"으로 불리는 우리 근대화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돌진'이다. 목표가 너무 간절해서 신앙으로 승화된, 생각이라면 질색하는, 어떤 힘센 사람이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밀어내며 전진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슬픔이나, 아픈 사람은 짜증 차원을 넘어 '방해', '억압'으로 느껴질 것이다. 국가보안법 같은 것이 그들의 심정을 제도한 것 아닌가.
선거나 청문회 때 후보의 이력에 대한 이 사회의 태도는 불감증이 아니다. "그 정도면 양호"로 합의한 지 오래다. 부동산 투기, 병역 비리, 표절, 위장 전입, 탈세…….모두 구비한 인물이 워낙 많기에 한두 가지 정도면 청렴 반열이고, 이를 비판하면 "넌 깨끗하냐?"라는 분노가 되돌아온다. 여당이 과반을 넘긴 선거 결과에 우울하다는 지인이 많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해 이 땅에서 진보와 보수는 국가 선진화 속도에 대한 견해차일 뿐이다. 때문에 과반의 경계는 허물어질 수도 있고 '덜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나를 좌절시킨 것은 몇몇 후보의 당선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표현대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고통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비된 고통이 불러올 고통이 끔찍한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는커녕 '더욱 열심히 뛰겠다.'고 한다. 썩지 않은 시체에 항생제를 붓는다. 인간이 인격체가 아니라 방부제인 사회, 절망할 기력조차 없다. p48
속이 시원해지는 페이지다. 격주로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들이라니, 이런 글들에 달렸을 덧 글들이 궁금하다. 덧 글 알바들이 가만히 두었을 리 없는……. 거품 물었을 것 같은데. 책이 점점 재미있어진다. (p234에 나온다. '걸레', '술집*' 따위의 비난과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이는 공개적으로 비난의 글을 올렸다한다. "모르는데 아는 척 하지 않았으면"하고. 저자의 반박이 유쾌하다.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인'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는 게 맞다.는 이 부분에서 혼자 깔깔거리고 웃었다.)
차별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을 배려한다. 그래서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는 분열된다. 또 분열되어야만 한다. 모든 말하기, 글쓰기가 협상인 이유다. 원래 이 자아 분열 개념은 나치 학살의 생존자들이 자기 경험을 믿어주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자아를 조정하는 고통에서 발전했다. 지금은 모든 담론 행위에 공통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말의 수위와 표현은 달라진다. 조절하지 못하는/않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신이 너무 순수해서 아픈 이들이요, 다른 하나는 전현직 대통령처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권력자다. 두 경우가 아니라면, 협상의 고통을 정치적 에너지로 삼아야 한다.
나는 증언 형태의 책을 읽을 때, 말하는 사람의 갈등을 가장 주의 깊게 살핀다. 이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실천이 민주주의다. 이 책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는 정치적, 문화적, 윤리적으로 말하기와 듣기의 모범이다. 말하는 사람은 차별 경험을 본질적 자아로 환원하지 않으며, 듣고 쓰는 12명의 저자들의 지성과 성찰은 안쓰러울 정도로 치열하다. 내용은 '슬프지만' 방식은 독자를 위로한다. 앎과 삶을 위해 필독을 권한다. p54
'앎과 삶'을 위해 바로 장바구니에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언제 도서관에 가면 찾아보려고 제목을 메모해두었다. [수신 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인권운동사랑방 엮음] 내게는 생기지 않았으면 싶은, 일어날리 없다고 믿던 어떤 일들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방관이 피해자를 더 아프게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 침묵한다는 것은 방관이다. 아무 짓도 안했다고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방관자는 가해자에 가깝다. 무의식의 습(濕)으로 한 행동의 어떤 면이 약자인 누군가에게 차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 또한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밑으로 쭈욱 밑줄 긋고 싶은 부분들을 옮겨 둔다.
나는 이 책의 수치를 믿지만, 믿지 않는다. '모든 통계는 거짓말'이지만 성(性)과 성별 사안은 계량화가 불가능하다. '여성 문제'는 인식 부재에다 주로 비공식 영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 실태는 일단 축소보고(under report)된다고 보면 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나를 소수자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수자 개념의 문맥을 설명하고 이렇게 되묻는다. "저를 소수자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제가 당신과 다르다면 그 차이는 누가 정한 건가요?"
'객관적', 이론적, 정치적으로 어떤 개념이 맞지만 경험자가 그 명명을 거부할 때 바람직한 '해결'방식은 무엇일까? 특히 그 개념이 사회적 낙인일 때. '일본군 위안부'는 흔히 정신대라고 부르는 역사에 대한 임시 용어다. 정확히 말해,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전쟁 범죄는 성 노예(sexual slavery)지만 이 단어를 반길 '할머니'는 없다.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인생은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내용의 호오가 본질이 아니다. 어머니 숭배와 '창녀' 혐오는 모두 남성 사회의 판타지다. 섹슈얼리티를 기준으로 여성을 이분하여 시민권 박탈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성은 '아버지와 남창', '곰과 여우'로 구분되지 않는다. p70
두 가지 현실은 인식론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생각대로 사는 삶과 몸에 근거한 삶이 그것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라? 내가 몹시 경계하는 말이다. 턱뼈 탑은 한국 사회에서 생각한 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종착이고, <손무덤>은 삶을 재현하고 생각한 예술이다.
'불필요한' 성형 시술은 사회적 요구를 몸에 실현하여 체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은 '지금 자기'를 부종하고 욕망을 따르는 가치 지향적 삶이다. 그 가치가 바람직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이 말은 경쟁 사회의 자기 다짐이고, 다이어리의 첫 장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경제적 성취든 인격과 실력 배양이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은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몸은 사회적 위치성과 당파성의 행위자다. 예를 들어 '산업 재해를 당한 몸', '노동하는 몸', '성 폭력 겪은 몸'에서 시작하는 삶. 이것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몸과 의식은 하나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것은 모두 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공상('空'想)이다. 생각은 몸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안 따른다는 말은 이상하다. 머리(의식)도 몸이다. 의식은 몸의 어느 부위인가? 그런 부위는 없다. p74
혼자가 곧 외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로움과 타인의 존재는 관련성이 없지 않다. 관계가 형성되면 나는 타인과 섞이고 동시에 확장된다. 외로움은 무균, 증류수 같은 결정(潔淨)적이고 결정(結晶)적인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관계는 그 단단함과 순결성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사랑한다는 것은 약점이다. 사랑이 내 몸에 거주하는 것은 축복이지만 연결되고 싶은 욕망은 지옥이다. 이 마음 자체가 '을'인데 만일 성별, 나이, 계급, 외모 같은 자원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p80
재활용 운동을 하는 시민 단체의 포스터가 있는데 그 단체를 지지하지만, 볼 때마다 불편하다. "두면 고물, 주면 보물." 매우 잘못된 말이다. 노동, 특히 여성들이 하는 노동을 무시하고, 비 가시화하는 말이다. 남에게 줄 선물 고르는 일도 상당한 노동인데 중고품을 나누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대로 기증하는 게 아니다. 정리, 청소, 수선은 필수. 드라이클리닝, 다림질까지. 남은 음식은 그냥 주기 미안해서 새로 음식을 더하기도 한다.
고물이 보물이 되려면 사람의 마음과 일이 필수적이다. 내게 별로 득이 되지 않으면서 '주고 욕먹을' 가능성이 많은 일이다. 그게 귀찮아서 다들 그냥 버리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에겐 물건을 새로 사는 게 재활용보다 편하다. 자원을 아끼고 나누는데는, 노동이 요구된다. 나는 이 노동이 자본주의를 구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이 이미 체제다. 변화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다. p137
'위어조자 언재호야(謂語助者 焉哉乎也)'.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조사를 모르면 글을 쓸 수 없다. 문장의 성립은조사로만 가능하니, 문장은 결국 조사의 기술(art)이다. 글자와 조사의 관계를 실과 바늘, 나사와 볼트처럼 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고 불가분이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소용없다.
그러나 이들은 동등하지 않다. 사실은 조사가 더 '우월'하다. 글자들의 관계, 즉 문장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 있는 글자가 아니라, 뜻이 없는 글자, 조사다. 무의미는 모든 의미다. 뜻의 무게를 진 자(字)는 사용이 한정되지만, 조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문자를 배치하고 지배한다. 의미(권력) 없음이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다. p157
지식의 수준은 헌신한 노동의 시간과 질에 의해 결정된다. 사유자체가 중노동이다. 획기적인 문제의식은 노동의 산물이다. 여기에 선한 마음이 더해진다면 인간의 기적이요, 공동체의 축복이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빼어난 글을 쓰는 방법? 책상에 여덟 시간 이상 앉아 있을 수 있는 몸이 첫째다.
경쟁 사회에 국한하면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욕망을 다루는 도인이 되거나 욕망을 달성하거나. 평생 욕망을 관리하느라 몸부림치는 것보다 (구조의 제약이 따르긴 하지만)달성하는 편이 더 쉬울지 모른다. 욕망을 이루려면 노력해야 한다. 특히 지식인, 운동선수, 예술가는 부자나 권력자와는 달리 혼자만의 노동, 자신과의 결투가 성공에 절대적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이르는 노고와 박사가 되기 위한 노동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잘하는데 후자는 어렵다? 전자는 운동선수고 후자는 지식인이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공부다.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운동선수도 지식인도 아닐 가능성이 크다. p209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p215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계속 옮기면 "너 빨갱이지?" 할 것만 같다. ㅎ~ 더 옮기고 싶은 부분은 많은데 몇 꼭지는 전문을, 나머지 문장들을 더하면 너무 길어지겠다. 꼭꼭 씹어 먹을 것처럼 옮겨 적는 필사를 해보고 싶은 부분은 따로 만들어보아야겠다. 그냥 덮기에 이 책은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그리고 이런 책의 특성은 한번 놓으면 다시 잡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충동처럼 다시 읽고 싶은 어느 순간이 아닌 다음에야 책꽂이에서 나올 일이 거의 없다.
'교양인'에서 나올 다음 '정희진'의 책들이 벌써 기다려진다. '정희진처럼 쓰기'를 비롯해서 '교양인'출판사는 그의 출판 목록 표를 책의 뒷날개에 올려놓았다. 그래도 아직 정신이 총총할 때 읽는 행운을 누리고 싶다.
참 좋은데……. 참 좋은데 ……. 산수유 광고처럼, 좋은 책인데 내 주변의 현역들에겐 선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이런 책들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는데 인테리어용으로 전환하기도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희진'이라는 여성학‧평화학 연구자이면서 글쓰기와 강의를 병행하는 현역활동가를 내주변의 현역 노동자들이 모르는 이유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잠정적 규정에 있다. 읽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관도 한 몫 할 테고. 바깥의 노동과 가사를 병행하는 바쁜 그들의 일상을 알면서 책 안 읽는다고 질책할 수는 없다. 쓰잘데 없는 책 목록이 넘쳐나는 시절에 그들의 삶이 곧 책이라면 나무의 목숨을 지키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녀들이 박수를 받아 마땅한데 좀 끄적거릴 줄 안다고 그녀들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내가 부끄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