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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경의 경주산책
강석경 지음, 김호연 그림 / 열림원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봄의 입구인 입춘의 아침이다.
먹먹하고 화도 나고 답답하고, 이렇게 잊어가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이 한없이 미안하기도 한 [눈 먼 자들의 국가]를 내려놓았으니 오늘은 뭘 챙겨 가 볼까? 책상 위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들여다보다가 오후에 제주로 떠나는 현주 생각이 나서 잡은 책이 [강석경의 경주 산책] 이다. 제주를 다녀온 지가 일 년이 훌쩍 지나 그리움은 오름처럼 부풀어 오르는데 능이라도 만나볼까 싶다. 제주든 경주든 나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곳이기도 하고.
책이 출간되었을 때가 2004년, 그 당시라면 이년 여, 꽤 경주를 들락거렸던 시절이다. 폐허의 황룡사지에서 해가 저물고 저녁이 내리는 모습을 만난 이후 몸살을 앓듯 그리워하다가 다녀오면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고는 했다. 남산을 비롯해서 능원 사이를 한없이 걷고 또 걷고 자전거를 타고 신라 속을 다니던 그 시절의 내가 산문집 안에 있었다. 감실부처를 만나러 가던 길, 신선마애불을 만나던 그 순간의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특히 잊을 수 없는 풍경이 하나 있다. 사천왕사지에서 호젓한 오솔길을 누군가 공들여 비질한 흔적을 따라 가다가 만난 선덕여왕의 능, 상석에 놓여있던 꽃다발. 소나무들이 호위하는 소박한 왕릉에서 만나는 꽃다발은 15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지귀처럼, 처용처럼 경이롭고 뭉클했다. 그런 뭉클함이 책 곳곳에서 살아난다. 거기다 더해서 이런 횡재를 하다니. 흠집 하나 없는 새 책 그대로의 모습에다가 김호연 화백의 정겨운 그림이 덤으로 담긴 이 책을 이렇게 싸게 결국은 만나버리다니 감동이 두 배다.
'천년이 지난 고분은 내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스산한 유택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류의 흔적이다.
근원적인 것을 보여주기에 능이 있는 고도의 풍경은 아름답다. 산 자와 죽은 자,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경주는 늘 나를 매료시키고, 내게 영감을 준다. 환상과 영감의 샘물인 경주와의 조우는 작가로서 행운이지만 정신의 고향을 갖게 되었으므로 한 자연인으로서도 행복한 일이다. 누구와의 만남이 내 인생에서 필연이었는지는 말하기 힘들지만 경주와의 만남은 그래서 필연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p21 (황룡사지에서)
경주와의 만남이 필연이라고 말하고 경주에서 살아가는 작가가 진정으로 부럽다.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선택을 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주변의 여건도 삶의 무게도 무시할 수는 없는 우리는 지극히 소심한 시민으로 살아가니까. 경주를 고향으로 두고 서라벌 여고를 다니고 여전히 신라가시내로 살고 있는 친구를 부러워했다. 능들 사이를 산책하고 분황사에서 지극 정성을 모아 절을 올리고 황룡사지를 걷는 그 친구의 걸음, 걸음에서 역사를 보았던 것이다. 동류의 부러움을 작가에게서도 느낀다.
'신라의 북방문화로도 알 수 있듯이 경주는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중세 아라비아 사학가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966년에 펴낸 [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의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주민의 성격이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신라인들은 실크로드의 당사자답게 이국 정취에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고 말하는 미술 사학자도 있지만 이러한 개방성이 경주를 국제도시로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관광도시로 만든 것이 아닌가.
언젠가부터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내세우지만 단일이라는 것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냄새를 풍긴다. 몇 년 전 46개 국가를 대상으로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력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최하위였다는 놀라운(?) 보고가 있었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력과 포용력의 결여이다. 가족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등 한국사회의 부정적 단면도 여기서 자생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는 섞이면서 진보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갖게 된다. 인도가 자랑하는 타지마할은 무슬림 통치자가 세운 것이고 음악으로도 잘 알려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을 보다 신비스럽게, 이국적으로 다가서게 한다. 19세기의 천재 안토니오 가우디의 환상적인 건축도 아랍문화가 섞인 그들 역사의 바탕에서 창조된 것이 아닌가.' p 25 (괘릉에서)
괘릉의 무인상을 보고 느낀 소회인데 생소하다. 괘릉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작가의 의견에 공감한다. 지금의 경주도 배타적인 대표도시가 되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언제고 괘릉을 간다면 작가의 시선이 얹혀 질 것이다. 그때 보는 풍경은 풍경으로만 그치지 않을 테고. 아는 것은 그런 것이다.
괘릉, 사변이지만 블로그 이웃인 '밥'이 아주 오래 전에 올린 글로 인상적인 지명이기도 하다. 어릴 때 그 곳 소나무 숲을 무서워하던 생생하게 살아있던 글, 그 친구의 글빨은 블로그에서 만날 수 없는데도 이렇듯 살아있는데 아이 키우느라 기진맥진인지 토옹 타전이 없다. 언젠가 그 친구의 글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체홉을 좋아하는, 신랑을 따라 영덕에 살고 있는 개구리밥의 괘릉.
'이제는 훌훌 털어버릴 준비를 해야 하건만 나는 왜 들 수도 없는 돌짐을 들여온 것일까.
비어 있음은 빈곤이 아니라 풍요이며 근원에 다가가는 계단이다. 가득 찬 것은 혼란스럽다. 영혼을 탁하게 한다. 집에 가득 찬 물질에서는 부패의 냄새가 나고. 가슴에 가득 찬 욕망에선 폐수의 냄새가 난다. 그릇을 보면서 그릇처럼 비우라. 집착도 분노도 비우고 새로 태어나 듯 공으로 돌아가라. 인연도 비우고 겸허하게 기다리라. 잎을 떨구고 늦가을 숲처럼 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해.
넉넉한 모양새가 자유로운 분청 그릇을 바라보며 언제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꿈꾸어본다. 맑고 고결한 백자 잔을 바라보며 백자 잔 같은 친구를 그리워한다.' p53(박물관에서- 그릇에 대하여)
찔끔했다. 무엇이든 잘 버리지 못하는 성정이 스스로 딱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이사를 앞두고도 어찌나 한심하던지. 이십여 년 전의 낡은 노트들과 별 소소한 것들을 끄적거려둔 매해의 다이어리들, 등산화사이에 끼어 온 첫 한라산 산행의 화산석 조각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각가지 기념품들, 하나하나 사연이 있다고 버리지 못한 필기구들, 고르고 골라 버리면서도 다시 남겨지는 것들, 읽지도 않고 계속 사들이는 이 책들을 생각하면 중증이다. 언제나 이런 집착에서 벗어날 것인가 싶다. 한심하다. 비워야 할, 버릴 줄 아는 나이임에도 채우려고만 하고 있으니. ‘인연도 비우고 겸허하게 기다리라’는 구절을 오래 만져본다. 온기가 느껴지도록.
박물관을 좋아하는데 특히 국립 경주 박물관은 볼거리로도 규모로도 상징성으로도 압도하면서 유혹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비 오는 오후 내내 거기 머물던 시간이 에밀레 종소리처럼 아슴아슴하다. 뒤뜰에 고선사지 탑이 장대비에 젖고 있던.
'천오백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이 된 고분이 예술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모방하지만 자연은 모든 본성을 포괄하기에 완벽하다고 하지 않는가. 예술을 모르고 살기는 해도 자연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이 무의식중 자연을 갈구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리라. 생명의 모태인 자연.
부드러운 능선이 가슴을 열게 하니 여름의 대지에 엎드리고 싶다. 능역을 산책하고 한 친구는 "여기서 죽고 싶다"고 취한 듯 말했지. 자연만이 주는 절대 평화가 죽음까지도 포용하게 하나보다. 인생의 유연함을 생각하면 권력도 명성도 덧없는 것. 이곳에 묻혔다고 추정되는 법흥, 진흥 두 왕은 불교를 일으키고 비약적인 국가발전을 이루었지만 말년엔 승려가 되었다. 영화의 헛됨을 알았기에 역사에 좋은 통치자로 기록될 수 있었으리라. 삶의 신고처럼 열기가 후끈 끼쳐오지만 형제처럼 정답게 솟아 있는 고분의 그늘 아래 걸어가니 몸도 마음도 허허롭다.' p78 ( 무열왕릉에서)
스스로 잘 했다고 '대통령의 시간' 운운하는 통치자를 가졌고, 스스로 잘하고 있으니 징징대지 좀 말라고 질책하는 통치자 아래에서 '눈 먼 자' 인 채로 살고 있어 부끄럽다. '가만히 있으라' 하니 가만히 살아가고 '귀 막으라' 하니 못 들은 척 살아가는 이런 어른이 되어 버린 무능이 부끄럽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처럼 보이던 구조를 간절함으로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그렇게 잠겨버린 배 안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걸 기다린 그들에게 단 하나의 기적이라도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숨죽이며 ‘세월’을 바라 본 눈 뜬 장님의 시간들이 부끄럽고 통치자인 그들을 기록할 역사에서 지나가는 행인1도 못되는 역할이겠지만 역사 속에 남을 그 상황들의 증인으로서 부끄러운 날들이다. 선거로도 이론으로도 엄중히 대처하지 못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1인으로 부끄럽다. 존경할 어른을 갖지 못한 불행한 시절, 어쩌면 그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을 것이다.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온 그 나날들이 결국은 이런 풍토를 만들어 버렸을 테니까. 이제 골프나 배우고 골프 치러 파르라니 다듬어진 잔디밭으로 나가는 것이 이 나라를 위하는 길일지 모르겠다.
'목책엔 갖가지 색깔의 깃발이 꽂혀 있고 조련사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말을 타고 있는데, 몽고의 겔 같은 둥근 비치 양산 아래 빨간 모자와 조끼를 입은 조련사들이 앉아 있었다. 폐허의 미를 느껴야 할 신라 궁터에 깃발이 꽂힌 목책이라니. 몽고에 온 것 같았다. 역사의 유적지를 관광이라는 경제논리로 유료 말 체험장을 만들고 유원지화 하다니. 이런 의욕과잉이 지방자치제의 살아남기 행정일까.
경주는 짓고 세울 것이 아니라 수도승처럼 비우고 비워야 할 도시가 아닐까. 고도의 환상을 깨트리는 고층 아파트는 하나 둘, 외곽으로 나가고 전선주조차 땅 밑으로 묻고 능원의 담도 허물어 방문객들이 천오백 년 전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폐허의 황룡사지와 계림 숲을 거닐며 자신의 원형을 발견하고, 달팽이집 같은 일상에서 비켜나 근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맞도록. 그것이 민족의 고향으로서 경주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p97 (서천에서)
첨성대 앞에서 계림으로, 반월성으로 오가는 마차를 본 것 같다. 그 이후 그쪽으로 걸음하지 않았지만.
문화의 보존과 개발은 양날의 검처럼 예민한 사항이지만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도 안타까운 일이 많다.지난 가을, 감은사지에서도 그런 징후를 보았다. 구불구불 추령재를 지나며 토함산을 일별하고 나면 가슴이 뚫리는 너른 들판과 대종천이 나오고 그 길 끝에 훤훤장부 같이 잘생긴 감은사탑을 만나는 설렘을 누릴 수 없었다. 도로는 이쪽저쪽으로 생기고 온통 공사현장만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외길의 끝에 가서야 탑을 볼 수 있게 도로는 바뀌는중이었다. 봉길리 앞바다의 집채만한 파도가 아니었다면 점심으로 먹은 전복순두부는 쳇증으로 얹힐 뻔 했다. 고유섭선생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봉길리 앞바다의 파도와 갈매기들만이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위대한 자연에 무릎 꿇는 순간이 바로 그런 때일 것이다. 오래오래 거친 바람을 맞았다. 다음 번에 찾을 때에도 그 바다가 여전했으면 싶은 간절함을 지극정성으로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의 등에 얹어두고 돌아오는 추령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친구며 연인을 추구하는 것도 닮은꼴인 영혼의 유전인자를 찾기 위해서이고, 위대한 작가의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도 예술을 통해 내 영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어느 때는 길을 잘못 들어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경험은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주어 결국은 제 길을 찾아가도록 해준다. 정신만 치열하다면 말이다.
사람도 거리도 복잡한 서울에서 보름 만에 돌아와 금빛 능을 바라보니 경주와의 만남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경주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직도 무국적자로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만 같다. 내면의 부름이 있었는지 필연같이 경주를 찾아오면서 나의 긴 방황도 매듭지어졌는데 이 땅의 무엇이 내 영혼을 강하게 붙드는 것일까.
천오백 년 전 거대고분의 주인공들인 신라인의 기상, 자유로움과 미에 대한 찬사, 대의를 위해 몸을 던지는 올곧은 충정과 바위마다 부처를 새긴 종교심은 늘 나를 고양시킨다. 내가 경주에 이토록 친화력을 느끼는 것은 내 영혼의 유전인자가 신라혼의 DNA와 같기 때문이고, 내가 경주로 돌아온 것도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온 회귀인 것만 같다.
또 한해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숫자란 그저 하나의 매듭일 뿐이지만 우리는 자신의 근원을 찾아 오늘도 흘러간다. p107 (세모의 거리에서)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읽고 이스탄불은 그런 작가를 가져서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근원 회귀의 고향으로 경주를 가졌으니 이제 경주도 행운을 가진 셈이다. 아니 이미 가졌는데 이제야 내가 알게 된 것인가. 언젠가 다시 경주를 산책한다면 이전에 만났던 경주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천오백 년 전의 신라인들은 이제 그들의 본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주는 여전히 慶州이리라. 금빛 능이 거기있고 그곳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서로를 찾으면서 만나는 순간들이 교차하고 있는 이상 우리들의 아름다운 고도는 古都로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길
-경주남산-
정일근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길 지도위에 새겨 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따라
돌속에 숨은 내사랑 찾아 가노라면
산은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 같은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길따라 내가 가네
그랬다. 눈을 감고서도 환한길. 이미 마음으로 다니고 보았던 길이요, 소나무였다.
그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경주 남산을 처음 만나고 인용했던 시와 적었던 부분이다. 그런 감동의 순간을 기억하는 한 언제까지나 경주는 경주로 남아있겠지.
곧 봄이다.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 시킬 봄.
꽃구름 속의 불국사, 온통 꽃 물결 사람 물결이 될 경주,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