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花樣年華 김사인(1956~)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걷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치며 - P172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P173
순간과 영원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였을까? 너무 아름다워서 시간이 오늘로 멈추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아마 제게는 그 순간이 어린 날의 어느 오월이었습니다. 오래 모은 용돈을 털어 누나와 놀이공원에 갔던 날.
별천지라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나 보던 장면들이 실재하는 듯한 광경. 저는 그때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큰돈을 주고 산자유이용권은 삶에 자유를 가져다준 듯했고 야간 개장 이후의 놀이공원 불빛은 마치 앞날처럼 빛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졌습니다. 차비만 겨우 남긴 채 돈은 떨어졌고 저녁을 허술하게 먹은 탓에 - P174
배가 금세 고파졌습니다. 무엇보다 다리가 아팠습니다.
만약 처음 놀이공원에 입장할 때의 바람처럼 저의 시간이 그날 멈췄다면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지금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그 놀이공원에 갇혀 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이킹 가장 맨 끝자리에 앉아 지루한 낮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불가능한 가정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날 이후 어떤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든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만큼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와 누나는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류장에 내려 걸으면서 우리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시간은 눈물겹도록 애달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도 했고 한 시절 슬픔 없는 나라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모를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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