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늦잠 잘 때 내린다
낮잠 잘 때에 내린다

어머니 목소리 창가에 듣는다
하이고ㅡ
게으름쟁이 잠 자알 오게 비가 오신다 잉 - P38

환상박피
사월 유사


거대한 오름과 오름 사이, 마을이 하나 있다
마을 끝 오래된 후박낭 울타리 집엔
굳고 푸른 그늘 같은 남자가 있다
어느날 후박 이파리에 홀린 여자가
지나가지 못하고 나무 아래 잠이 들었다
남자는 바로 사랑에 빠졌고
여자는 술에 빠져 있었다
남자는 가장 아름답고 넉넉한 나무를 둘러
둥그렇게 평상을 만들고
여자는 그늘에 앉아 술을 마셨다
동네 술꾼들도 모여들었다 아무리 취해도
죽었으나 죽어도 죽지 않는
죽음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술이 안 깬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있을라치면
경쟁하듯 댓바람부터 다시 시작했지만
여자는 유독 몰살당하듯 온몸으로 마셨다
술이 깨면 야윈 사람들은 더 야윈 여자를 보며 안심했다
뼈만 남긴 여자가 무섭게 흔들렸을 때에야 술꾼들이 흩어졌다 - P44

사흘이고 열흘이고 돌아오지 않던 여자가
지칠 대로 지쳐 후박낭 아래 잠들면
남자는 가만히 그 곁에 누웠다
여자에게선 분화구의 안개 냄새가 났고
어느 때는 쑥대낭 냄새, 귤꽃 향을 풍겼다
그 냄새에 불안해하다가 아릿한 꿈을 꾸는 것도 잠시
사월 식게가 끝난 뒤로 여자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평상이 놓인 나무를 시작으로
나무들 허리에 낫을 그어 깊고 넓게 껍질을 
벗겼다
환장한 듯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남자가
박피한 후박낭 허연 몸통에 술을 부었다
가죽만 남은 여자의 몸을 닦듯 경건하게
잔인한 유산처럼 오래 전해온 울타리가
서서히 아주 천천히 기어이 말라 죽자
흔들흔들 홀로 사라지는 남자가 있다
신성한 오름과 오름 사이로
흔적 없이 사라진 작은 마을이 있었다 - P45

가수리


작년 꽃가지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피어나 흔들린다
산맥은 일제히 연두를 켜서 흘려보내고
물든 강물 어느결에서 웃는 여자가 있다
꽃잎 듣는 자리마다 입질하는 물고기떼
맑은 허기로 연주하는 물결의 선율
그 어느결에서 십년 뒤로 흘러내려가
우는 여자가 있다

천년 동안 물속에 드는 느티나무 그늘
강을 닮아 흐르고 흐른다 이곳에선
물속으로 단명한 목숨도
떠난 것들이 아주 떠나가지 않는 기억도
흐르기로만 한다
등 뒤에 선 세화가
온다 간다 말이 없이 흐르는 것처럼
조양강 물빛에 목이 쉰 사내는
백년도 더 흘러간 얼굴을
꽃진 자리에 놓고 간다 - P56

누군가 가다가 아픈,
누군가 울다가 가는 가수리(佳水里)
그 자리에서 되돌아보면 어느 결에
강과 나무와 사람의 경계가 지워지고
어느 결로 사라지는 천년의 시간이 있고
봄빛이 가장 환해지는
우주의 한 시절이 문득,
있다, 멈춰 있다 - P57

가수리 2


온통 물들었다
천년 느티 아래에도 물이 올랐다
아리고 부시다는 여자의 얼굴에서
봄빛을 쓸어내던 사내
갑자기 입을 맞춘다
저만치 벤치에 앉아 이 연놈들 두고 보자 두고 보자며 지팡이를 쥔 염소수염 노인의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입속 꽃잎은 더더 더듬어 들어가는데 백주대낮 같은 수염 부들부들 떨리는 바람에, 사방에서 덩달아 뜨거워진 꽃잎들 참견하고 싶어 환장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사태져내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입술을 떼고 토끼눈을 한 남녀와 눈이 딱맞은 노인이 먼 데를 바라보는 척 피하는 바람에, 남아 있던 꽃잎들도 박장대소로 깔깔깔 쏟아지는데

토끼눈들에도
염소수염의 볼에도 주섬주섬
노을이 내려오는 조양강변
열없다는 듯 염소한마리 고개를 돌린다,
천번째로 저무는 봄빛 - P108

청춘인지 노년인지 모를 세화의 한잎을
느리게 씹는다 곰곰
싱겁게 반추한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