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달에 머무는 시인이 떠오른다. 낮달과의 대화도 한뼘이겠다. 고영민의 시공간에서는 일상과 온기가 서로 살고 있다. 서로의 계절이기도 하다. 현실의 상상력이면서 현실의 반대 혹은기억들인 온기는 일상을 울울하고 헐렁하게 포옹한다. 울울할때 시인의 말은 겸손해지고, 헐렁하다면 시인은 말을 줄인다. 예컨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송이 머리에 이고 와/한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자각하는 꽃의 제의/온기는 "왔던 길 되짚어갔을/꽃의 긴 그림자"(「적막)라는 떨림/일상과 같은 감정이다. 일상과 온기는 서로의 몸에 스며들기 위하여 서슴없이 너를 꽃이라 하는 곡진함을 발명했다. 그럴 때 고영민의 두 손은 드라이플라워의 형상이다. 그것은 바짝 말랐지만 생의 여러 지층에서 돋아나서 지금 도착했다. 이미 눈물을 헌정했기에 시인은 꽃의 의미를 다정하게 나열한다. 고영민의 시가 애틋한 소이연이 저러하다. 오래도록 시인은 날짜들에게 죄다 공손했다.
윤달이 필요할 때마다 고영민의 시집을 뒤적거려야만 했다.
송재학 시인 - P-1

고영민

196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문학사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구구』가 있다. 
지리산문학상, 박재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P-1

시인의 말


시집을 묶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고향에서 사과 농사를 짓던 서른셋 형이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어머니는 매일 저녁 아들이 지냈던 방에 불을 밝혀놓았다.
2년 넘게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몸져누웠을 때
어머니는 매끼 새 밥을 지어 올렸다.
채 몇숟가락 뜨지 못해 밥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시세끼 새 밥을 지어 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죄가 되고 한(恨)이 된다고 했다.
나도 시를 이렇게 써야 한다.

2019년 7월
고영민 - P-1

철심


유골을 받으러
식구들은 수골실로 모였다

철심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분쇄사가 물었다

오빠 어릴 때 경운기에서 떨어져
다리 수술했잖아, 엄마

엄마 또 운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분쇄사는 천천히
철심을 골라냈다 - P10

적막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갔을
꽃의 긴 그림자 - P11

봄의 정치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단단히 감고 있던 꽃눈을
조금씩 떠보는 나무들의 눈시울
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
나의 딸들은
새 학기를 맞았다 - P16

만두꽃


늙은 어머니
목련나무 가지에 앉아
만두를 빚네
빚은 만두를 한 손 한 손
나뭇가지에 얹네
크고 탐스러운 만두는
한입에 다 먹을 수 없네
볼이 터져라
나는 만두를 욱여넣네
세상 모든 목련나무의 만두는
늙은 내 어머니가 빚어놓았으니
목련나무마다
잘 쪄낸 만두꽃이 피었네
어머니, 이제 그만
내려오세요
어머니 나무 그늘 밑으로
툭, 떨어지네 - P32

꽃눈


나는 꽃눈을 보러 나오고
꽃눈은 무얼 보러 나왔나

내 눈 속에 꽃
꽃눈 속에 나

꽃이 피어나면
나 피어날까
나 피어나면 꽃도 피어날까

나는 꽃이 아니고 꽃도 내가 아니어서

나는 꽃눈을 보러 나오고
어린 꽃눈도
슬픈 나를 보았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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