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있었다」 「없음의 대명사,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다독임」을 썼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수상했다. 작란 동인이다. - P-1

5월의 첫날, 오늘은 노동절이다. ‘근로자의 날‘보다는 ‘노동절‘이라는 말이 좋다.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이란 뜻이다.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말을 들었을 때, 벌레는 늦게 일어나야겠네!‘라고 생각했던나다. 근로에 담겨 있는 부지런함이 사용자의 강요 같아서 어느 순간 거리감이 생겨버린 것이다. 부지런함의 미덕을 저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 순간 부지런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강박은 필연적으로 삶의 여유를 앗아갈 수밖에 없다.


글쓰기 노동자로 산 지 오래됐지만, 어떤 이는 아직도 ‘쓰는 노동‘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몸을 써야 노동 - P12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상의 노동은 "몸을 옮직여 일을 함"이란 뜻이다.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은 얼핏 노동과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아도 머리는 얼마나 바삐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 뾰족하게 말하면 머리도 몸의 한 부분이고, 머릿속이라고 일컬어지는 뇌는 우리 몸의 사령탑이다. 한바탕 글을 쓰고 난뒤 어김없이 허기지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일은, 머리를 쓰는 일이다.

내처 한자리에 앉아 시를 쓴 적이 있다. 장장 세 시간 반동안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크게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를노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100킬로바이트가 채 되지않는 문서의 크기가 노동의 양과 질을 낮잡는 기준이 될 수있을까? 누군가가 보기에 이 결과물은 성과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맑은 눈으로 다시 볼 때 형편없는 시일 수도있고, 어쩌면 몇 차례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직 책으로 묶여 나오지도 않은 상태다. 파일 형태로 USB에 담겨 있는 것이니까. 아직은 나만 알고있는 것이니까.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 생각한 - P13

다. 노동 전후의 변화가 분명한 일도 있으나 일의 성과를자기 자신만 알아차릴 수 있는 때도 있다. 글쓰기 작업이지난배하고 지난 조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을 질질 끌며 미루는 일이 많으니 지극히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제 일어나서 정말 몸을 움직여야겠다. 동네를 산책하는 일은 글쓰기 앞뒤에 있는 루틴이기도 하다. 산책도 내게는 노동에 준하는 일이다. 걷고 발견하고 사색해야 하므로. 이따금 길을 잃기라도 하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므로, 그것이 또다른 쓰기로 연결될 것이다. 내친김에 일 년 가까이 연락하지 못한 친구에게 전화도 해야겠다. 잘 살아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어야지. ‘지금‘을 찌르는 대신, ‘지금까지‘를 어루만져야지.
이는 마음을 쓰는 일일 것이다.

모든 쓰기는 결국 마음 쓰기다. - P14

오발단: 봄물

오늘 발견한 단어는 ‘봄물‘이다. 봄물의 첫번째 뜻은 "봄이 되어 얼음이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이다. 봄물에 발을 담그면 얼어붙은 정신이 퍼뜩 깨어날 것이다. 봄물의 두번째 뜻은 "봄철에 지는 장마다. 봄물이 져야 마침내 봄가물(봄철에 드는 가뭄이 해소될 것이다. 봄물의 세번째 뜻은 "봄의 싱싱한 기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봄물이 오른 나무를 볼 때면 진작 닫혀버린 성장판이 다시금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고 싶어진다. 어떤 뜻으로 사용하든 봄물이 새 길을 열어준다는 점만은 틀림없다. 5월은 봄물이 봇물 터지는 달이다. - P15

오. 발. 단: 군것지다

오늘 발견한 단어는 ‘군것지다‘다. 시 속에서 지는 일을 너무 많이 했더니 후유증이 길어서였나. 접미사 ‘지다‘로 끝나는 단어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값지다, 멋지다, 건방지다, 기름지다, 덩굴지다, 그늘지다, 눈물지다, 주름지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지다‘ 안에 다 들어 있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문득 ‘군것지다‘와 마주쳤다. ‘군것질의 군것일까‘라는 짐작이 맞긴 맞았다. 보통우리는 군것을 "끼니 외에 먹는 간단한 음식"으로 알고있지만, 이는 군것의 두번째 뜻이다. 군것의 첫번째 뜻 - P20

은 "없어도 좋을 쓸데없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군멋지다"는 "없어도 좋을 게 쓸데없이 있어서 거추장스럽다"라는 뜻이다. 군것진 것에는 뭐가 있을까. 곧바로 미련이나 뒤끝, 혐오나 과욕 같은 게 떠오른다. 그러나군것질 없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다. 없어도 좋을 쓸데없는 것 덕분에 가없는 시간은 채워지기도 한다. 바스락바스락, 와그작와그작, 쪽쪽, 냠냠 등의 부사 친구들과 함께. - P21

삶을 이끄는 것은 동사임이 틀림없지만, 삶의 곳곳에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부사 같다. "나는 네가 좋아"보다 "나는 네가 정말 좋아"라는 말이 더욱 강력한 것처럼 말이다. 단어는 뜻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바대로 묵묵히 자신의 소용을 다한다. "난데없이‘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데려오고 ‘어칠비칠‘은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가지런히‘는 쓰는순간 나란해지고 ‘반드시‘는 발음하면서 결심이 더욱 단단해진다.

일상에서의 쓰임 때문에 운명이 달라진 경우도 있다. 너무 라는 부사가 그렇다. 이 단어는 본디 "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이었다. 언뜻 느끼기에도 부정적 의미가 가득 담긴 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좋다" "너무 맛있다"처럼 긍정의 상황에서도 ‘너무‘를 사용한다. 2015년 이사분기에 ‘너무‘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로 뜻의 외연이 넓어졌다. "너무 예쁘다"와 "너무 싫다" 를 모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무 추운데 너무 행복해"처럼 한 문장에 ‘너무‘를 두 번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 P27

생의 마지막에 만날 부사가 결국‘이 아닌 ‘마침내‘이기를바란다. ‘결국‘은 닥치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 발. 단: 어찌씨

오늘 발견한 단어는 ‘어찌씨‘다. 어찌씨는 부사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발음할 때 이미 의미가 한가득 느껴져쓸 때마다 왠지 흐뭇하다. 명사는 ‘이름씨라고 하고 대명사는 ‘대이름씨‘, 수사는 ‘셈씨‘라고 부른다. 동작이나 작용을 일컫는 동사는 ‘움직씨‘라 일컫고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는 ‘그림씨‘라 불린다. 관형사가 ‘매김씨‘로 자리매김할 때 감탄사는 ‘느낌씨‘로 흐느낀다. 퇴고할 때 마지막까지 고심하게 하는 조사는 ‘토씨‘라고 부른다.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의 바로 그 토씨가 맞다. 아홉 개의 씨를 모았으니 이제 심을일만 남았다. 씨를 심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싹트는 것은 아니다. 알아서 자라 열매를 맺는 씨도 없다. 아, 어렵고도 정직한 글 농사여. - P28

오. 발. 단: 간곳없다

오늘 발견한 단어는 ‘간곳없다‘다. 짐작할 수 있듯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온데간데없다"라는 뜻을 갖는다. 일상의 크고 작은 유레카 속에서 당장 다음날까지, 넉넉잡아 이듬해까지 기억나는 유레카는 거의 없다. 정보 위에 정보가 덮인다. 고해상도 영상은 초고해상도 영상 뒤로 사라진다. 역치도 덩달아 높아지기만 한다. 땅속에서 피어나지 못한 싹처럼, 아이디어는 머릿속 어딘가로 숨어버린다. 금세 간곳없어진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간곳없기에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취를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의 행방이 늘 묘연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오늘은 대체 휴일, 휴일이야말로 눈 깜짝할 새 간곳없어지는 게 아닐까.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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