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직 저 하나만을 위해 마련된, 제 일생 중 결코 흔치 않을 이 자리를 빌려, 저는 우선 저와 함께 본 명신고등학교의 설립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락을 같이 해온 여러 교육 동지 여러분, 그리고 우리 명신의 후원자이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명신을 아끼실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본교의 오늘이 있게 한 주역이신 강춘득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교직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외손 바닥은 울지 않는다는 말처럼, 저의작은 마음이 싹터 오늘의 명신이 있게 된 데에는 크든 작든 이 모든 분들의도움이 있었음을 저는 잘 알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임을다짐하면서 그 한 분 한 분들의 소중한 마음들을 평생 간직하고자 합니다.
돌이켜 보면 1983년 7월 2일 기공식 날,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논과 밭뿐인허허벌판이었던 이 초전 벌에 본교 건립을 위한 첫 삽을 꽂고 난 이후, 지나온 8년의 세월은 저로서는 일생 중 가장 뜻있고 즐거운 하루 하루였습니다. - P197

특히 본교가 처음 문을 열었던 1984년 3월의 첫 입학식 날은 마침 철 늦은 서설이 내려 본교의 개교를 축하해 주었고, 힘차게 교기를 흔드시던 강극영 초대 교장 선생님의 모습과 의지에 넘치던 젊은 선생님들의 활기찬 모습, 그리고 이 학교의 1회 졸업생이 되었던 그 학생들의 총명한 면면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 중에도 그때는 본관 건물이 아직 반쪽밖에 완성되지 않았고, 운동장은 아직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본교에 배정된 학생들은 신설 학교의 어설픈 모습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적잖이 가졌고, 학부모들 또한 우려를 감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 본교는 외형과 내실을 충실히 갖추어 본관 건물이 완성되고, 틈틈이 심었던 수목이 자라고, 그와 함께 학생들도 건강히 자라 대학 진학 면에 - P197

서도 기존의 명문을 능가하는 결실을 맺어 왔으며, 독립 도서관이 완공되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체육관 겸 강당이 완성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 8년이 저에게 힘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평소 하고자 했던일이고 그런 만큼 보람도 있었고 그 나날들은 곧 기쁨이 되어 저에게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저는 원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오직 가난 때문에 하고 싶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한약업에 어린 나이부터 종사하게 되어 작으나마 이 직업에서는 다소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욕심을 감히 내게 되었던 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즉, 내가 배우지 못했던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 P198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 - P198

해 보면 지금의 본교는 제 전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의 신조는 앞서 말씀드렸듯, 제가 거둔 금전적 이득은 제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 이상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 근검 절약의 결과로 쌓이고 쌓인 것이 바로본교인 것이고 또 그것은 금전적으로도 저의 전 재산이며, 정신적, 상징적으로도 제 전부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버려두고떠나는 이 자리에 서고 보니,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라 해서 아깝고 서운한 느낌이 없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마음은 향후의 본교에 대한 더 한 층의 애정으로 키워 나갈 생각입니다. - P199

마음은 향후그리고 다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새로운 것을 쌓아 올려 볼 생각도 해봅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또 반대하고 나무라는 의견이 있음을 저는 알고있고, 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학교의 공립화만이 학교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방책인가 하는 것이며, 또 본교가 가졌던 명문사학으로서의 긍지, 명신인이라는 그 따뜻한 울타리가 엷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일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아픔이 크다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뿐인 것입니다. 제가 계속 이 학교를움켜쥐고, 지원을 나름대로 해 나간다 하더라도 저의 생전이나 또는 사후에저와 또는 저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본교의 모습 또한현재의 발전적인 것을 영원히 지속되리란 보장 또한 희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공립화의 길을 걸어야 할 수밖에 없다면 시기는 바로 이때가가장 좋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곧 학교가 완전히 정상 궤도에 들어서 저의 큰지원 없이도 운영이 되게 되었고, 학교의 발전 또한, 어느 정도 탄력이 붙었기에 이제 제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시기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하는 것 - P199

입니다.
이러한 사정들로 해서 저는 일단 이 학교를 떠납니다마는 한 가지 죄송스럽고 가슴 아프게 생각되는 것은 바로 본교의 교직원 여러분들께 본의 아닌누를 끼치게 된 점입니다. 제가 이분들을 초빙할 적에는 본교에서 교육의 씨를 뿌리는 평생의 고락을 같이하자 하였고, 그러한 저를 믿고 본교에 오신분들이 대다수일진대, 이제 그분들께 저는 실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분들 또•한 생활환경이 달라짐에서 오는 제반 정신적 또는 물질적 손실을 보게 된것입니다. - P200

세상 일이란 게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저로서는 개인의 일을떠나 공익을 앞세운다는 것이 그만 교직원 여러분들께는 송구한 일이 되고말았습니다. 거듭 죄송하다는 뜻을 밝히면서 교직원 여러분들의 앞날을 위해서는 저는 또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강구해 왔고, 또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이일을 위해 진력할 것을 다짐 드립니다. 아울러본교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신 그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함께 올립니다. 그리고 우리 명신의 많은 졸업생 및 이 자리에 나온 재학생 여러분들도 다소 서운한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사립만이 가질 수 있는 전통과 그 긍지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모교를 가지고자 하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들은 본질적으로 본교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며, 그 애정은 곧 개인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그 마음들을 계속 간직해 달라고 오히려 당부하고 싶습니다.
학교의 체제가 다소 달라진다 하여도 우리의 모교는 영원히 우리의 모교인 - P200

것입니다. 변함없는 애정으로 늘 모교를 생각해 주시기 바라며, 또 모교의 창학이념인 ‘명덕신민‘의 정신을 영원히 간직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누이 들어아시겠지만, ‘명덕은 인간의 본성인 맑고 깨끗한 성품을 늘 밝히고자 하는 것으로 현세의 도처에 자리 잡은 모든 더러운 것과 그것에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겠고, 그럼으로써 나날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자는뜻이 바로 신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덕신민의 뜻이 우리 학교의 교훈인 성실과 결부될 때, 여러분들의 앞날은 창창히 열려 있다고 저는 감히 장담하고 싶습니다.
거듭 당부하건대, 부디 명덕신민의 뜻을 굳게 붙드시고, 성실로써 실행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을 남겨 두고 홀연히 떠난다는 자리의 인사가너무 장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구구한 사정 이야기가 되었으나 저의 심정을 - P201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이기에 널리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우리멩신과 인연을 맺은 모든 분들의 앞날에 더 많은 성공과 결실이 있기를 기원드리면서 이만 떠나는 인사말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8월 17일
학교법인 남성학숙 이사장 김장하


퇴임 인사말 중 우선 그가 학교를 설립한 이유와 헌납의 이유는 이문장에 압축돼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일이 곧 장학 사업이 되었던것이고, 또 학교의 설립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전후로 해서 본 명신고등학교는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 P202

즉,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왔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거나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그런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여태전(1961~) 전 상주중학교 교장이 2022년 2월 4일 김장하 선생에게 세배를 드리고 난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있다.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가 "명신고 이사장으로 계속 계시면서 훌륭한 선생님들 든든한 울이 되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어찌 그리 쉽게 공립으로 전환해버렸습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만 해도 한약방으로 돈도 많이 벌어 학교에 큰 도움이되었을지 몰라도, 나중에 나이들어 그럴 형편이 못되면 괜히 사사로운 욕심이 생길까 두려웠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못난 사학 이사장이 되어 선생님들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려 들 거고, 그렇게 되면 처음 내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첫마음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요. 교육이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사업을 하려면다른 일로 해야지, 학교를 갖고 사업하는 마음으로 하면 큰일 나는겁니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그냥 국가가 맡아 달라고 내어놓은 겁니다." - P203

어쩌면 김장하 선생에게 받은 돈을 갚은 사람은 여태훈 대표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이엠에프 이후 시기였다면 남성당한약방도 어려울 때였다. 아이엠에프를 계기로 한약방도 손님이 뚝 끊겼으니 말이다.
그냥 아는 사이라고 그런 큰 돈을 차용증도 없이 줬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진주시민의 문화공간으로서 진주문고의 공공재적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에게 그런 숙제를 주신 거죠. 자기는 부담감을 준 줄을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어쨌든 큰 숙제로 다가왔어요."
여태훈 대표에게 김장하 선생은 어떤 존재일까?
"한겨울에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이 몽롱할 때 정수리에 퍼붓는 한바가지 찬물 같은 분이죠. 정신이 혼미하거나 제가 중심을 못 잡을 때그분이 마치 뒤에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리저리 휩쓸리고 이리저리 계산하다가 제가 그 방향을 잃었을 때 또는 판단이 흐려져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막아주는 브레이크 같은 분이 김장하 선생님이죠." - P244

이듬해 5월 남성당한약방 폐업을 앞둔 2021년 12월 재단법인 남성문화재단이 해산절차를 밟았다. 남은 재산 34억 5000만원도 모두경상국립대로 이관됐다. 그중 현금이 6억 5000만 원, 서경방송 주식2만주(28억 원 상당)였다.
절차는 모두 끝난 상태였으나 경상국립대는 굳이 ‘남성문화재단 재산 수증증서 전달식‘을 열고자 했다. 행사를 열어 감사를 표시하고감사패라도 전달하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새기겠다는 것이다. 행사는 12월 9일로 잡혔다.
이보다 앞서 12월 4일 현장아트홀에서 마지막 진주가을문예 시상식이 열렸다. 남성문화재단이 해산하면서 가을문예도 자동 중단된다. 제27회가 마지막이었다.
이사장 직함으로 하는 마지막 인사말을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굵은 글씨체로 출력된 제목은 ‘모든 인연이 소중했습니다‘였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무엇인가가 기다려졌습니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시 구절이 있지만, 가을이 되면 늘 기다려지는 인연이 있었던 겁니다. 그 인연은 울긋불긋 단풍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서른 - P279

해 가까이 동안 늘 그랬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글을 생산하는 친구들이 있어 그랬고 그것이 진주가을문예라는 인연으로 맺어졌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속에서도 글쓰기는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번창했습니다. 문학은 모든 공포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고, 힘과 지혜라는선물을 인간한테 안겨주고 있습니다.
올해도 진주가을문예에 문을 두드린 문우들이 많았습니다. 당선의 영광을 안은 정월향 시인과 기명진 작가한테 축하를 드리면서 응모자 모두한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통해 많은 인연들을 만났습니다. 수상자들이 울면서 소감을 밝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수상자들이 가족처럼 우애 있게 지내는 걸 보고 또 다른 가슴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전국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진주가을문예에 보내는 애정도 컸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진주가을문예가 올해까지, 27회째 운영하고서 막을 내리게 되어저 또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동안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또 다른 문학공간에서 만남이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2021년 늦가을에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김장하" - P280

김장하의 유일한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는 명신고등학교 교지 《명신》 창간호에는 학생기자의 질문 중 이런 게 있다.
"이사장님의 인생관 혹은 생활신조를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김장하는 이렇게 대답한다.
"맹자(孟子)의 진심장구에 나오는 군자삼락(君子三樂), 모두 알죠? 그 중에서 제2락인 앙불괴어천(不愧於天)하고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을 나의 생활신조로 삼고 있어요."
풀이하자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고개를내려 사람들한테도 부끄러울 게 없는 삶을 뜻한다.
그러면 제1락과 제3락은 뭘까? 찾아보니 이랬다.
1락은 부모구존(父母俱存) 형제무고兄弟無故), 즉 부모님이 모두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함이 첫째 즐거움이요.
3락은 득천하영재(得天下)이교육지(而敎育之), 즉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쳐 기르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 P349

이에 대해 이곤정 이사장은 "김장하 선생님이야말로 세 가지 모두를 실현한 분"이라며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잘 모신 것은 물론 형제까지 자신이 보살폈고, 하늘 땅 모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으며, 수많은 장학생과 학교 설립을 통해 천하의 영재를 얻어 잘 길렀으니 다실현했다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3락 중 2락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고 대답한 것은 자신이항상 그런 자세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강호진 촬영감독이 국수를 좋아한다는 김장하 선생에게 우리밀 국수를 드린다는 핑계로 댁을 방문했다가 선생님이 좋아하시는말 한마디를 청해 받은게 있다. 「논어(論)」에 나오는 말이었다.
"인불지이불온人不知不)이면 불역군자호(不泰君子),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군자가 아니겠는가" - P350

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나는 ‘생활신조‘나 ‘좋아하는 말‘이 아니라 ‘삶의 지침‘이 뭔지를물어봤다. 그랬더니 또 다른 대답이 나왔다. 바로 ‘기소불욕欲)물시어인(勿於人)‘이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살아가면서 이것 하나만 지켜도 세상에 싸울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사천에서 고등어파스타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비란치아‘에 갔는데, 오너셰프 박영석(1978~) 씨가 김장하 선생을 방문했다가 받아온 글귀도 역시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었다.
명신고등학교 출신인 박 셰프는 김장하 선생을 
흠모하며 그를 닮으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비란치아는 이탈리아어로 양팔저울을 뜻하는데, 김장하 선생이 가장 실현하고 싶어하는 형평(衡平) 세 - P351

상의 상징물이다. 1923년 진주에서 결성된 형평사(衡平)도 이 양팔저울을 조직의 상징물로 썼다. 그의 레스토랑 입구에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후원회원 가입원서와 관련 서적이 비치돼 있었다. 가게 앞간판에도 양팔저울 모형이 걸려 있다.
"김장하 선생님을 닮고 싶은데 도저히 제가 따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목표를 바꿨죠. 김장하의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이라도 되자. 그렇게 100명의 김장하, 1000명의 김장하가 생기면 사람사는 세상이 좀 더 빨리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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