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이 가져서는 안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48세, 1991년 8월 17일 명신고등학교 국가 기증 선언 및 이사장 퇴임식에서 김장하가 한 말이다. 여기에 그가 장학사업을 비롯한 재산의 사회 환원을 결심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언제부터, 얼마나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지원했는지, 그 전체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학교재단 남성학숙 장학회를통해 공식 지원한 장학생 숫자와 명단은 학교의 공식 기록물 《명신30년>(2015)에 나와 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7년간 213명이었고, 그 중 21명은 졸업 후 대학 4년간(의과대는 6년)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았다. 재학생의 장학금은 입학금과 1년간 수업료 전액이었다. 또김장하는 학교 헌납 후 퇴임하면서도 5000만 원의 장학금을 추가로내놓고 떠났다. 덕분에 명신고등학교는 공립 전환 후에도 ‘명신장학회‘를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 - P105
지금까지 취재한 바를 바탕으로 김장하 장학금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학금 수여식 또는 전달식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진도 찍지않는다. ② 성적보다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우선하여 선발한다. ③ 가급적 1회성이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 전액 지원한다. ④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 등 각종 경비까지 지원한다. ⑤ 드물지만 재수생에게 입시학원비와 하숙비까지 지원한다. ⑥ 살 곳이 마땅찮은 아이는 아예 자신의 집에 들여 함께 살면서 자식처럼 키운다. ⑦ 그런 기록 자체를 남기지 않고 누가 물어봐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그렇게 지원한 학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앞서 남성당이 문 닫는 날 서울에서 찾아왔다던 그 장학생 김종명씨가 선생에게 말했다. 다. "제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선생이 이랬다고 한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 - P117
하고 있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 아! 그랬다. 돈·권력·명예보다 늘 ‘시시하고 소박한 삶‘을 강조했던 채현국 선생의 생전 말씀과 김장하 선생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오버랩되는 장면이었다.
우종원(1961~)과 이준호(1962~)는 진주고등학교 동기생이다. 둘다 공부를 잘했으나 공납금을 제때 내지 못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1977년 1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러 "너는 참 운이 좋다"며 김장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음을 알려줬다. 둘은 그렇게 1학년부터 3학년 졸업까지 전액 공납금 지원을 받았다. 3개월에 한번씩 남성당한약방으로 오라 해서 찾아가면 김장하 선생이 점심을사주며 봉투에 공납금을 넣어줬다고 한다. 둘은 졸업 후 각각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생물학과로 진학했다. 김장하 선생의 장학 지원은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됐다.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도 함께였다. 이준호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지원을 받았다. 우종원은 7년, 이준호는 9년 동안 장학금을 받은 셈이다. - P118
(...전략) 저는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태어났습니다.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졸업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업사로서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하여 경상남도에 기증하였고 수백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진주오광대복원사업, 경상대학교 남명관 건립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히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갚아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길을 찾는 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제가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헌법재판관에 임명되더라도 지금까지 간직해 온 저의 초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 P137
"선생님은 늘 듣기만 하셨어요. 말씀이라곤 ‘학교는 어떻노?‘ ‘뭐필요한 건 없나?‘ 묻기만 하시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걸 들어주셨어요. 저는 선생님이 지어주신 한약도 여러 번 먹었죠."(이준호) "선생님께서 과묵하신 것도 있지만 그때 젊은 저희들한테 해 주실말씀은 많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부러 안 하신 것 같아요. 왜냐면 선생님이 베푸는 입장이고 또 젊은 친구들한테 자신이 뭔가 말씀을하시면, 좋은 뜻으로 볼 때는 어드바이스나 격려가 될 수도 있지만 부담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생님께서 굉장히 자제를 하신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우종원) "제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그게 전혀 저를 위축시키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그럴까봐 선생님이 배려를 해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자유롭게 학생운동도 할 수 있었던 거죠." (권재열) "그러니까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승인해주신 거죠. 자기가 간섭하는 게 아니고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네가하고 싶은 걸 해봐라‘ 그렇게 하신 거죠."(우종원) 이준호 교수가 학문적 성취를 이뤄 언론에 알려졌을 때는 선생이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와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언론매체에 기사가 나온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받았더니 ‘김장하다‘ 이러는 겁니다. 놀랐죠. 선생님 웬 일이십니까? 했더니 ‘세계적인 연구를 했더라. 축하한다‘ 그러셔 가지고 제가 너무 감사했습니다."(이준호) - P153
가난했던 한 시민운동가는 아들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감일까지 마련하지 못하자 급한 마음에 염치불구하고 김장하선생을 찾아갔다.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의 도움으로 등록을 마치고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가 빠른 시일 내에 갚겠습니다." 그랬더니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 갚을 필요는 없고, 다음에 당신처럼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그때 그 사람한테 갚으면 됩니다." - P155
1982년 39세의 김장하는 필생의 사회환원 프로젝트 고등학교 설립에 착수한다. 자신은 끝내 진학하지 못했던 고등학교를 직접 설립,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당시만 해도 진주지역 고교 연합고사에서 매년 낙방하는 학생이 5500여 명에 이를때였다. 학생은 많은데 수용할 학교는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김장하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배움터를 마련해 주어야 하겠다.‘명신 30년>, 163쪽)고 결심했다. 1983년 7월 학교 신축 기공식을 거쳐 1984년 3월 2일 신입생488명의 입학식을 열었으니 바로 학교법인 남성학숙 명신고등학교였다. 학교 설립 동기에 대해 김장하는 명신고 교지 《명신> 창간호 이사장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기라면 먼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군요. 첫 번째는 다름 아닌 저자신의 배움의 ‘한‘입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중졸에 그쳐야 했던, 가난에 쪼들리는 농촌생활의 그 한맺힌 과거, 지금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여러분은 그 배움에의 갈망을 잘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또 빈 손으로 사회에 뛰어든 나였지만 부지런히 일해서 약간의 재산을 모았어요. 이 재물을, 나는 내가 모았기에 영원한 내 재물이다 라는 관념보다는 이사회나 국가의 재물을 잠시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사회로 환원하기로 결심한 거지요. 이것이 학교 설립의 두 번째 동기라 할 수있습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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