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무들마다 가득히 새들이 깃들였다. 대지는 어둠 속으로잠겨들기 전에 천천히 숨을 내쉰다. 잠시 후 첫번째 별이 뜨면 밤의장막이 이 세계의 무대 위로 내릴 것이다. 대낮의 찬란하던 제신神)은 그들 날마다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리라. 그러나 또 다른 신들이 찾아올 것이다. 더 많은 어둠을 위하여 그네들 황폐한 얼굴들이그 사이에 대지의 심장 속에서 태어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모래 위에 끊임없이 와서 부서지는 파도가 황금빛꽃가루들이 넘실대는 저 공간을 건너 나에게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 들판, 침묵, 이 땅의 향기, 이 모든 향기로운 생명으로 내 전신이 가득 차고 나는 이 세계의 벌써 금빛으로 익은 과일을 깨물며, 그 달고도 강렬한 과즙이 내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미칠 듯한 감동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다. 다만 세계로부터 나에게로 사랑이 태어나 이어지게하는 저 화합과 침묵이 중요할 따름이다. 나는 그 사랑을 오직 나혼자서만 누리려고 탐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태양과 바다로부터태어나서 그의 단순성 속에서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력에차고 멋을 아는 한 종족, 바닷가에 우뚝 서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식과 그것을 사랑으로 삼는 자부심이 내게 있으므로 - P-1
세상에는 정신 그 자체를 부정하는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정신이 사멸하는 곳이 있다. 내가 제밀라에 갔을 때 그곳에는 바람과 태양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또 다른얘기다.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인즉 그곳에는 무겁고 틈새 하나 없는 거대한 침묵이 어떤 저울의 균형과도 같은 그 무엇이 지배하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새들의 비명, 구멍이 세 개 뚫린 피리의 고즈넉한 소리, 염소들이 바스락거리며 발을 옮겨놓는 소리, 하늘에서울려오는 어렴풋한 소음, 그 하나하나가 다 그 장소의 침묵과 황폐함을 만들어내는 소리들이었다. 이따금씩 무언가 메마르게 탁 부딪는 소리,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는데 그것은 바로 돌들 사이에 가만히 엎드려 있던 어떤 새 한 마리가 문득 날아오르는 기척이었다. 밟아가는 길 하나하나, 허물어진 집터들 가운데로 난 오솔길들, 번쩍거리는 돌기둥 밑에 포석으로 덮인 대로(大), 언덕배기 위 개선문과 사원 사이에 있는 거대한 고대 광장, 이 모두가 제밀라를 사방으 - P-1
로 경계 짓고 있는 협곡들로 인도한다. 이러고 보면 제밀라는 끝없는 하늘 아래 숨김없이 뒤집어 펴 보이는 트럼프의 패나 다름없다. 하루 해가 점차로 흘러가고 산들이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더 커진것같이 보임에 따라 우리는 그곳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서돌들과 침묵의 얼굴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제밀라의 언덕에는•바람이 분다. 바람과 태양이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로 뒤엉키고 그로 인하여 폐허와 빛이 한데 뒤섞이는 그 엄청난 혼잡 속에서 무엇•인가가 다듬어져가지고는 인간에게 사멸한 도시의 고독과 침묵과더불어 인간의 정체를 측정할 수 있는 절도를 부여한다. - P-1
제밀라에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그저 지나가다가발길을 멈추거나 거쳐 가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다른 어느 곳으로 인도해주지 아니하며 어느 고장을 향하여 트여 있지도 않다. 그곳은 다만 갔다가 되돌아오게 마련인 곳이다. 그 사멸한 도시는 길고 꼬불꼬불한 어떤 길의 끝에 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제밀라가 곧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에 그 길은 더욱 멀게 여겨진다 마침내 드높은 산들 사이에 푹 파묻힌 빛바랜 어느 언덕배기에 마치 백골들의 숲과도 같은 누르스름한 그 잔해가 솟아나 보이게되면 제밀라는 오로지 단 하나 우리를 세계의 고동치는 심장부로인도해줄 수 있는 저 사랑과 인내의 교훈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을•핀다. 거기 몇 그루 나무들과 마른 풀잎 가운데서 제밀라는 천박한 찬미와 눈요깃거리만 찾는 호기심, 혹은 희망의 유희와 맞서서 저의 모든 산들과 저의 모든 돌들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 저 삭막한 찬란함 속에서 우리는 진종일 헤매고 다녔다. 하오의 - P-1
초장에는 거의 느껴질까 말까 하던 바람이 점차로 시간이 감에 따라 거세어지면서 풍경을 온통 가득 채워가고 있는 듯했다. 바람은멀리 동쪽으로 난 산들 사이의 협곡으로부터 일어나서 지평선 깊숙한 곳에서 달려와가지고는 돌들과 햇빛 한가운데에 폭포처럼 쏟아졌다가 솟구치는 것이었다. 쉴 사이도 없이 바람은 폐허 전체를 가르며 힘차게 불고 돌과 흙의 원곡(圓) 속에서 핑핑 도는가 하면비바람에 얽은 돌무더기를 뒤덮고 돌기둥 하나하나를 그 숨결로 휩싸 안다가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린 광장 위에 와서 끊임없는 비명소리를 내면서 퍼지는 것이었다. 내 몸은 돛대처럼 바람에 우지끈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위의 환경에 시달려 얼굴은 초췌해지고 눈은 불타는 듯하며 입술은 덜덜 떨리며 살가죽은 바싹말라 내 것 같지도 않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전에는 나는 바로 이살가죽에서 세계가 써놓은 필적을 판독하곤 했었다. 세계는 저의 여름 숨결로 살가죽을 데워주거나 된서리의 모진 이빨로 깨물면서거기에다가 저의 다사로운 애정이나 분노의 표시를 해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바람에 휘둘리고 한 시간이 넘도록 시달린 채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정신이 얼떨떨해지다 보니 나는 그만 내 몸이 그리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게되었다. 물살에 씻겨 반드러워진 조약돌처럼 나는 영혼 깊숙이에까지 바람에 씻겨 윤이 나도록 닳아버렸다. 나는 나를 허공에 떠 있게만드는 그 힘을 처음에는 약간, 나중에는 더 많이 닮아갔다. 마침내내 피의 고동과 도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심장의 엄청나고 요란한고동소리를 분간할 수 없게 되면서 나는 바로 그 힘 자체가 되는 것 - P-1
이었다. 바람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열화 같은 전라의 이미지에 따라 나를 다듬어가고 있었다. 덧없이 지나가며 나를 포옹하는 바이었다. 바람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열화 같은 전라의 이미지에람은 숱한 돌들 중의 어느 돌이 되어버린 듯한 나에게 여름 하늘 속에서 있는 하나의 돌기둥이나 한 그루 올리브나무의 고독을 옮겨주고 있었다. 이 치열한 햇빛과 바람의 목욕은 나의 모든 생명력을 다 소진시켜갔다. 내 속에는 겨우 저 스쳐 지나가는 날개소리, 저 신음소리를 내는 생명, 정신의 처 가냘픈 반항뿐. 곧 세상의 사방에 흩어지고기억도 흐려지고 나 자신도 망각해버린 채 나는 곧 저 바람이 된다. 바람 속에서 나는 저 돌기둥이며 저 아치며 만지면 따뜻한 저 포석이며 황량한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빛바랜 산들이다. 나는 한 번도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리를 유지함과 동시에 내가세계 속에 현존하고 있음을 이토록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다. 그렇다. 나는 현존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놀라운 느낌을 갖게하는 것은 내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마치 종신징역을 받은 사람처럼 ㅡ이리하여 그에게는 모든 것이오직 현재일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일 역시 다른 모든 날들과 마찬가지일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현존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더 이상 아무것도 미래에 대하여 기대할 것이란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풍경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천박한 풍경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고장 전체에 걸쳐서, 나의 것이아니라 이 고장 자체의 것인 그 무엇, 우리들에게 공통된 죽음의 맛 - P-1
과도 같은 그 무엇을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낀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돌기둥들 사이에는 불안한 분위기가 마치 상처받은 새들처럼 대기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자리에 들어앉는 저 삭막한 명(明) 불안감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싹튼다. 그러나 고요함이 그 살아 있는 가슴을 덮어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지혜의 전부다. 하룻날이 흘러가고 하늘에서 내리는잿가루에 덮여서 소리와 빛이 숨을 죽여감에 따라 나 스스로에게버림받은 나는 나의 내부에서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저 은근한힘들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을 느꼈다.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서 미래라든가 더 잘 되고 싶다든가출세라든가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마음의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다음에는 또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이 내게는 즐겁지 않다. 내게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門)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그저 내딛어야 할 한 발짝 발걸음이 아니라 끔찍하고 추악한 모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들이 내게 제안하는 것은 기껏 다 인간에게서 그의 생명 자체의 무게를 덜어주겠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제밀라의 하늘 높이 커다란 새들이 무겁게 나는 것을 눈앞에 보고 있노라면 내가 요구하고내가 얻어내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생명의 어떤 무게라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수동적인 정열 속에 송두리째 자신을 맡길 것.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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