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신경 쓸 것 없고, 국 식기 전에 
들어요."
모두 수저를 든다.
"음, 과연 입에 붙는구먼."
여옥은 국을 마시고 나서 낙지찜을 집는다. 선혜는
"여기 앉은 사람들은 모두 음식맛 아는 사람들이지."
"그건 또 왜요?"
명희가 물었다.
"사대부 집안이 아니란 얘기야."
"음식맛 아는 것과 신분이 무슨 관계 있을까?"
"특히 양반들 종가의 음식이란 사람 
쳐다보지."
"언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지. 이치가 안 그러냐? 백결(百結)선생을 추앙했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그것도 모르니? 청백리 송곳똥 누는 것도 몰라?"
"해서요?"
"음식이야 중인들이 즐기고 중인들보다는 돈 있는 장사꾼이 더 잘해먹지. 아무리 돈 벌어봐야 먹는 재미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사실 그럴 거야."
여옥이 동조했다. 밥상을 물리고 과일이 들어왔다. 커피도 들어왔다. - P123

"남 낳은 내 자식 말예요."
농담으로 들었고 명희 자신도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는 양현을 생각했던 것이다. 못마땅한 듯 말이 없던 여옥은
"하느님밖에 없는 여자가 속세의 남의 행복을 시기라도 하는 것같아 조심스럽지만, 하기는 명희가 행복할 거라고 믿지도 않았지만도대체 여자들이 뭣 땜에 공부를 했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군. 욕을해주고 싶을 만큼 실망이다. 강여사,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어. 나도 동감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패잔병들의 은신처가 결혼이라는 거지 뭐. 여자가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요원해. 뭐 나야 별 재간도 없었던 여자지만 말이야. 결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혼자서는 견디어 배기기 어려웠다는 얘기가 될 게야. 배운 여자가, 하면 그건 언제나 질책이었고 어떤 때는 숫제 화냥년 취급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배운 여자가 나가야할 문은 한 군데도 열려 있지 않으면서, 철저하지 철저해, 조선 사람들 보수적인 것." - P126

노인이 되면 새벽잠이 없어진다. 젊은 사람들이 옅지만 달콤한 잠에 취하는 그런 시간 노인은 답답하고 외롭다. 금슬 좋은 아들내외에 시샘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조심을 하면서도 담뱃대를 두드리게 되고 받은 기침을 하게 되고 칙간을 들락날락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울컥 설움이 치민다. 늙어서 무력해지는 자신이 서글프고, 모두 잠들었는데 홀로 깨어 있다는 고독감 소외감은 지난 세월을 허망하게 되살린다. 억울하다, 한스럽다, 그런 감정의 여울로자신을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시샘할 자식도 짜증부릴 한 짝도 없는 영산댁에게는 지난 세월이 허망하다든지 억울하다든지 한스럽다든지, 과거를 헤맬 여지가 없다. 외로움, 다만 그 외로움에 사로잡힌 새벽을 되풀이해왔다. - P170

계산대로 윤국은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고 연도 연줄이 있어야 창공을 날지 연줄이 끊어지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지붕 위에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게된다고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나이가 어려, 목적은 크고 뚜렷하다 하더라도 방법은 캄캄절벽 아니겠느냐, 방법이란 분별이며 분별은 나이와 더불어 정교해진다, 어떤 사람은, 자리를 잃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소년은 본시 있던 그 자리에서 일하라, 호구를 위한 일자리를 구한다든지 고학을 해보겠다면 벌문제겠으나 학생운동도 학교를 잃고는 못해, 학교가 바로 현장이다. 노동자는 공장이 현장이듯 농민은 농토가, 룸펜은 도시 뒷골목이, 또 어떤 사람은, 덤빈다는 것은 나를 망치고 동지를 망친다고 했다. 또아리를 틀어 지금은 도사릴 때라고도 했다. 다 옳은 말이었다. 앞뒤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윤국은 너무 옳기 때문에 너무 앞뒤가 맞기 때문에 석연치가 않았다. 옳은 만큼 앞뒤가 맞는 만큼 그런 만큼 지혜롭고 순수할까 싶었다. 차라리 별말이 없었던 선우신이란 사람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들은 모두 내려가는 데 여비로 보태 쓰라하며 얼마간의 돈을 내밀었으나 윤국은 받지 아니했다. 그랬을 적에 그들의 눈은 둥그래졌다. 의외라는 표정들이었다. 윤국은 어떤사람에게도 자기 아버지가 김길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강 건너 대숲이 파아랬다. 대숲 그늘이 떨어진 강물도 녹색이다. 강물은 녹색도 되고 청람빛이 되기도 하며 하늘색 때로는 흰색에 가까워질 때도 있다. 그리고 아침에는 황금빛, 저녁놀에는 진홍빛, 우중충한 잿빛일 때도 있다.
‘그 빛들을 다 가져야지. 하늘의 빛 땅의 빛 모든 것을 내 속에 가져야지!‘ - P202

‘참 따뜻하다. 남쪽은 따뜻하다. 어차피 앞으로도 어머님은 속상해하실 거야. 자꾸자꾸 속상하시면 그것도 습관이 되어 견딜 만한 거구.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어머님도 보통 여성은 아니니까. 내 어머님처럼 의연한 여성을 나는 아직 못 보았다. 형은, 그래 형은 어머님 땜에 마음 아파하겠지. 그러나 내 행위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야. 형도 나처럼 하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나폴레옹은 불가능이라는 글자를 사전에서 빼버리라 했다. 나는 나폴레옹 같은 것 존경안 해. 그러나 저 높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에 내가 서 있고, 나는 어디든 걸을 수 있다. 나는 불가능을 향해 걸을 수 있다! 불가능이있기 때문에 불가능은 목표가 된다. 따뜻한 밥, 따뜻한 옷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매달리어 노예가 된다! 부자일수록 더욱더 노예가 된다! 내가 나에게 노예 되기를 거부해야만 남도 해방시킬 수 있고 내 나라도 찾을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은 뭔가 모르지만 훌륭한 말들은 하고 있지만 어째서 거미줄에 묶인 사람같이 보였을까. 나는 수관형이나 숙이를 보았을 때만큼 감동하지 않았다.
방법, 방법, 방법이라 했다. 자리, 자리, 자리라고도 했다. 나는 그것을 많이 생각해보아야 해. 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형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내 마음을 좀더 정확하게 전과는 다르게 전할 수 있었을 터인데‘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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