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 있든가요?"
"그러모. 아직은 정정하더라. 니 아부지 돌아가신 얘기를 한께 대성통곡, 내가 놀래서 말리니께 공노인께서 눈을 꿈벅꿈벅하심서, 없는 상막 앞에서 곡하는 거니께 내비리두어라, 그기이 저눔의 인사가 치리는 절차라 하시더마. 그래 아제씨도 돌아가시고 했이니 홍이도 쉽게 만주로 올 것이다, 내가 그랬지. 그랬더니 통곡을 하던 그 사람 입이 함박이만큼 벌어지믄서, 그래서 또 공노인한테 준통을 묵고, 그 사람을 보고 있이믄 슬프고 서러분 것도 우시개겉이생각이 되더마."
그때 광경이 생각나는지 한복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머라 하는고 하니, 내가 죽으믄 홍이가 염해주겠다." 
"염해주고말구요."
말하고서 홍이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언제 세월이 그리 흘렀는가. 이제는 주변의 죽음이 슬프기보다 하나의 의식(儀式)을 기다리는것 같은 심정이었는데 그러한 심정은 삶에의 끈질긴 집념을 안은채 죽은 어미의 모습과 만년에는 인생을 관조하듯 표표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아비, 그 두 죽음을 지켜본 데서 얻어진 것이었는데, 그랬었는데 내가 죽으면 훙이가 염해주겠다, 그런 말을 했었다는 주갑이, 홍이는 눈물이 흐를까 보아 천장을 쳐다본 채 앉아있다. 학같이 긴 두 팔을 펴며 춤을 추던 주갑이, 구만리 장천 대붕이 난다는 곳, 머나먼 지평과 하늘을 우러러보며 「새타령」을 절창하던 주갑이아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데 세월은 제마음대로 흘러 죽으면 염을 해달라고,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가. 어린 소년이었던 홍이는 두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간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 P74

‘나는 여기 살 기다‘
한복의 그 말이 새삼스레 놀라움을 안고 되살아난다. 홍이는 자신의 만주행을 도망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선 고향으로되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복의 경우는 분명히도망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그는 도망가지 않았고 수없이 갈아대는 칼날 밑에 수더분한 본래그 모습대로 숫돌이 되어 살아온 것이다.
홍이는 아비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물아홉 해의 정월초하룻날, 무덤의 마른 잔디 위로, 막 솟아오르기 시작한 햇빛이 비친다.
‘아부지. 나중에 상의에미랑 다시 오겠습니다만 어쩐지 혼자 와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소나무 위에서 까치 한 마리가 장난스럽게 꼬랑지를 까딱까딱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내려다본다. 무릎으로부터 땅의 냉기가 스며든다. 오시시 몸이 떨린다. 추웠다. 그러나 추운 것에 쾌감을 느낀다. 나름대로 홍이는 아비 이용의 인간상이 자기 내부에서 하나의 소상(塑像)같이 완성된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인간 이용이, 홍이는 멋진 남자였다고 생각한다. 뇌리를 스쳐가는 간도땅에서의 수많은 우국열사들, 흠모하고 피가 끓었던 그 수많은 얼굴들, 그러나 홍이는 아비 이용이야말로 가장 멋진 사내였다고 스스럼없이 생각한다. 열사도 우국지사도 아니었던 사내, 농부에 지나지 않았던 한 사나이의 생애가 아름답다. 사랑하고, 거짓 없이 사랑하고 인간의 도 - P76

리를 위하여 무섭게 견디어야 했으며 자신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았던, 그 감정과 의지의 빛깔, 홍이는 처음으로 선명하게 아비 모습을, 그 진가를 보는 것 같았다. 사라져가는 아비 자취에 대한 마지막 전별(餞別)의 순간인지 모를 일이었다. 묘소 근처에는 병풍 같은 송림이다. 낙엽지지 않고 남은 솔잎들은 겨울을 용케 나고 머지않아 빛깔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해 용이 이곳에 묻혔을 때 검붉은소나무의 밑둥 사이로 보이던 큰 바위 하나, 푸른 이끼가 찬란하게끼어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긴 겨울은 가고 있으나 아직 봄은저만큼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 큰 바위엔찬란한 푸른 이끼가 온통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홍아."
"네?"
홍이는 소스라치듯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없다. 이름을 부르던 여자의 음성, 귀에 익은 옛날의 그 음성, 홍이는 사방을 둘러 본다.
"홍아."
"네! 어디 있어요?"
홍이 미친 듯이 다시 사방을 둘러본다.
"나 여기 있다."
파란 이끼 낀 바위 뒤켠에 월선이가 서 있었다. 흰 옥양목 치마에 옥색 명주 저고리를 입고 서 있었다.
"옴마!"
- P77

"나 이런 말 하고 싶었습니다. 장서방도 반대편에 서서 왜 너는 더 가졌느냐 더 가졌느냐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요. 배가 고파서 우는 사람 헐벗고 추워서 우는 사람 천대받고 우는 사람, 내 얘기는그런 차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둘러메고저항할 힘을 모으는 것, 그것이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힘이 약자를 누르고 소외하는 방향이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물론 내 처지에서 내 처지의 말을 한다 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어릴 때 일을 기억하는데, 외톨백이아이 하나가 사탕을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그랬더니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이는 외톨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이번에는 외톨이가 과자를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는 다시 외톨이가 됐어요. 얻어먹는 아이들은 항상 명령에 복종했어요. 명령에 복종하는 아이, 외톨이는 언제 없어지지요? 정말 역사가 그렇게만 되풀이되는 거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연학은 말없이 따라걷는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적개심, 분노, 슬픔, 그것이 순수하면힘이지요. 순수한 힘은 우월감이 아닙니다. 우월감을 쳐부수는 것이지요. 우월감을 쳐부수는 이론을 가지고 스스로는 우월감에 젖어있다면 이편에 서든 저편에 서든, 친구가 되든 원수가 되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리 있게 말도 못하고 조리 있는 생각도 못한다마는 니 말 뜻은 알겠다. 그러나 다 그런 거는 아닌께. 또 사람이 하는 짓이라 하느님겉이 완전할 수야 없제. 단을 내리믄 안 된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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