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에서 돌아온 혜관은 서둘러 채비를 차리고 떠났다. 윤도집도 사랑을 비운 채 출타중이었고 집안은 쥐죽은 듯 괴괴했다. 석이는 낡은 갓이 걸려 있는 벽을 쳐다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 했으니 해야겄지마는 어매는 아아들 데리고우찌 살 긴고...... 내가 나와부리믄 어매는 품을 더 들어야 할 긴데‘
속이 쓰라리다. 그러나 혜관과 윤도집이 자기를 인정해주었다는 느낌은 상당히 강렬한 것이었다. 어젯저녁 상면을 했을 때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그만하면 되었구먼."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 P188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한 일로 석이는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큰일을 위해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하는 것임을, 석이는뚜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를 누지르는 것 같은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결의한다. 어미의 가랑잎같이 야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손등에 피딱지가 앉았던 누이동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등잔불 밑에서 물레를 돌리던 젊은날의 어미 얼굴이 스치고 간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서 석아 니도 따라갈라나 하던 아비 모습이 스치고 간다. - P189

지신지신 걸어가며 혜관이 묻고 응칠이 대꾸한다. 그들 뒤를 따라가는 기화는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여전히 떨려오고 때론 머릿속이 화끈 달아올라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기도 하다. 오목한 뒤뜰이 있는 별채의 사랑 비슷해 보이는 방은 사람이 거처한흔적이 없는데 훈훈하고 따스했다. 한참을 기다렸건만 바깥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혜관과 기화는 무서운 침묵으로 빠져들어간다. 이때 서희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활자 하나하나는 선명하게눈에 보였지만 뜻은 모른 채 다른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응칠이가 사십 넘어 뵈는 중과 이십 안팎의 어여쁜 여자가 경상도에서 찾아왔다 했을 때 서희는 혜관과 봉순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직감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성명도 알아보지 않고 거래를 올리는 응칠의 실수를 나무랄 겨를이 없었다. 실상은 직감이 강렬했다기보다 한순간 감정이 강렬했었다 하는 게 옳을 성싶다. 엉겁결에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읽던 신문을 들여다본 채 생각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 할 수는 없다. 봉순아! 하고.
‘내가 이만 일로 마음이 약해져? 봉순이가 누구야? 내 곁에서 시중들던 아이 아니냐?"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서희에게 그것은 어려운 - P291

일은 아니었다. 확고부동한 권위 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봉순이...... 하인하고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거는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야. 이곳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나를 바라본다. 고향 사람들은 힐난의 표정으로 내 얼굴을 외면한다. 모두들 나를 격하(格下)하려 들고 있다. 봉순이 그 아이는 더욱더 그러하겠구나. 최참판네 가문이 시궁창에 던져졌다 생각할 게 아니냐? 시녀였던 그 아이가 사모하던 하인이 지금은 내 남편이야‘
서희는 웃는다.
‘그도 내 편에서 애걸복걸한 혼인이라면? 모멸의 시선 속에서 그러나 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게야. 나는 손상당하지 않어! 최참판 가문은 손상되지 않는단 말이야! 알겠느냐? 나는 지키는 게야. 최서희의 권위를. 최참판 가문의 권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게야. 영광도 재물도,‘ - P292

매번 뇌어보는 말이었으나 길상은 한 달에 적어도 한두 번은 상무로 회령에 오게 된다. 매번 고통을 느끼고 오지 말까부다 마음속으로 되면서, 굳이 싫다면 얼마 전에 채용한 서기를 보낼 수도 있는 일인데 굳이 자신이 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설까. 행여 옥이네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까. 만나서 어쩌겠다는 건가. 돈이나 몇백 원 집어주면, 그러면은 편한 잠을 잘 수도 있고 꿈에 보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길상은 고독했다. 고독한 부부,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로서의 자유는날갯죽지가 부러졌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동물인지 모른다. 그 콧대 센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길상은 다분히 거칠어졌는데 그래도 서로 사이에 폭은 남아 있는것이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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