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말벌을 바깥에 버리고 창문을 닫자 마음이 약간 가라앉은 카헐은 아래층 화장실에서 소변을 한참 눴다. 변기뚜껑을 올릴 필요가 없어서, 다시 내리고 손을 씻거나 씻은척할 필요가 없어서 살짝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기쁨은금방 사라졌고, 그는 계단을 겨우겨우 올라갔다.
카헐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어느새 난간을 붙잡고 있었고, 뻣뻣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올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샴페인 탓이 아님을 알았지만 어느새 샴페인을 탓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읽은 끝에 관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쁘게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서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를 벗고 누웠지만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결국 눈을 감으니 옷장 문틈으로 비어져 나온 예복 셔츠의 흰 소매가, 뜯지도 않고현관 탁자에 쌓아둔 축하카드 더미가, 사빈이 그에게 굳이 - P48

보여주었던 웨딩드레스가, 그가 결코 갖지 못할 아들들이, 반품할 수 없었던 탓에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상자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환불 불가 다이아몬드 반지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또다시 아주 또렷하게, 그렇게 뒤늦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너무 늦은 시간  - P49

저 앞에 작은 만灣이 있고 흰 절벽 아래에 깊고 깨끗한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양 떼가 다니는 길을 따라서 만을 향해 걸어갔지만 길이 곧 사라졌고 가파르고 무서운 내리막이 나왔다. 그녀가 선 자리에서 전부 다 보였다.
완벽한 깊이의 웅덩이, 바위, 수면 아래 뒤얽힌 거무스름한해초 그녀는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 만 반대편으로 가서이탄지에서 흘러나오는 갈색 시냇물로 이어지는 다른 길을 찾아냈다. 평평한 갈색 돌을 조심조심 디디며 미끄러운길을 따라가자 하얀 햇살이 내리쬐는 만이 나왔다.
높은 파도에 쓰레기가 밀려들어 왔지만 그녀의 주변은 온통 표백된 돌들이 층층이 쌓여 반짝거렸다. 이렇게 예쁜 돌은 본 적이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델프트 도자기처럼 덜걱거렸다. 그녀는 이 돌들이 얼마 동안 여기 있었을까, 어떤 종류일까 궁금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그녀가 그러는 것처럼 이 돌들도 지금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 아무도 보이지 않자 옷을 벗고 물가의 거칠고 축축한 돌에 어색하게 발을 내디뎠다. 물은 상 - P60

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곳까지 걸어가니 미끈거리는 해초가 허벅지에 닿아서 오싹했다. 물이 갈비뼈까지 올라오자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뒤로 누워서 멀리 헤엄쳐 갔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이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어느새 진정으로 믿지 않는무언가를 향해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제 웅덩이가 넓어져서 바다와 이어지는 곳에 다다랐다. 그녀는 이렇게 깊은 물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더 멀리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참고 한동안 둥둥떠다니다가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와서 따뜻한 돌 위에 누웠다. 그때 저 높이 절벽 위에 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살갗이 마를 때까지 누워 있다가 얼른 옷을 입고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자동차로 돌아왔다. - P61

그녀는 그동안 알았던 남자들을, 그녀에게 청혼을 해서그때마다 승낙했지만 결국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것에대해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청혼을 왜 받아들였을까 약간 의아했다. 그녀는 돌아누워서 집 주변 덤불을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오늘 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모든 여자에게 가끔 필요한 것, 즉 칭찬이었다. 뻔뻔스러운거짓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칭찬을 자기가 먼저요구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나이에 말이다. 아무것도 배우질 못한 걸까? 그녀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끓였다. - P78

뵐의 서재로 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또 하루가 거의 지나갔지만 그녀는 어느새 책상 앞에서 그 유명한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바깥에 넓은 바다와 높은 산, 벌거벗은 언덕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의 종이 조각들을 보고 거기 적힌 메모를 읽은 뒤 한쪽으로 치웠다. 만년필 뚜껑이 빡빡했지만 결국 열고서 공책을 펼쳤다. 크림색 종이 - P78

를 실로 엮어 만든 새 공책이었다. 그녀는 종이에 만년필촉을 대고서야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애킬섬‘이라고 쓰고 날짜를 적었다. 그런 다음 잠시 멈추고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했다. 새벽 3시에 다리를 건넜던 것, 꽃이 지고 난잡하게 자란 진달래 덤불. 그녀는 절벽 너머로 몸을 던지던 통통한 암탉을 떠올리고 깔깔 웃은 다음 암탉이 어떻게 길을 건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려 애썼다. 그리고 흰 돌들과 따뜻한 물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글을 쓰다가 분명 뜨거운 돌이 해안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데웠음을 깨달았다. - P79

그녀는 돌 위에 누웠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걸어갈 때발밑에서 돌이 무슨 소리를 냈는지 썼다. 그녀는 절벽 위의 독일인을, 아래의 광경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했다. 그날 밤 그녀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쾌활하고 복잡하며결혼하지 않은 여주인공을 여러 번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많은 사람들이 여기 오고 싶어 한다던 독일인 교수의 말을, 그가 그녀의 케이크를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를 생각했다. 또 그의 성질을 생각했고, 교수의 아내가 그와 어 - P79

떻게 살았을지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자땅 위로 흘러드는 빛이 보였다. 햇빛을 보니 자고 싶다는생각이 잠시 간절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막그에게 이름과 암을 주었고, 그의 병에 대해서 고심하는중이었다. 그녀가 작업하는 동안 태양이 떠올랐다. 거기 앉아서 아픈 남자를 묘사하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느끼자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또다시 자고 싶다는 생각이 새로이 솟구쳤다 해도 그녀는 그 갈망과 싸우면서 고개를 숙이고 공책에 집중한 채 계속 써 내려갔다. 이미 그녀는 장소와 시간을 절개하여 기후를, 그리고 갈망을 집어넣었다. 여기에는 흙과 불과 물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와 인간의 외로움, 실망이 있었다. 이 작업은 왠지 자연의 힘이 느껴지고 단순했다. 이제 그녀의 주인공은 식욕을 잃었다. 그녀는 친척들을 등장시키고 그의 유언장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녀는아름다운 아내가 그에게 고깃국물을 주는 장면을 살펴보다가 문득 자신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리에서일어나니 몸이 뻣뻣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흔들리는덤불 너머 도로에 내려앉는 아침을 내다보고 잘 시간이 왔 - P80

다가 가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얹고 냉장고 깊숙이에서 케이크를 꺼냈고, 기지개를 켜면서이제 그의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 P81

마지막 작품인 「남극에서는 일탈을 꿈꾸던 
가정주부가 오랜 호기심을 실행에 옮기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평소 남편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던 주인공은 갖고 싶은 것이 없는지 계속 물어보고, 씻겨주고,
요리해주고, 설거지까지 혼자서 다 하는 낯선 남자를 만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작은 일탈은 주인공의 기대와 달리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둡고 심각하지만 키건은 오히려 엉뚱함과 유머를 더해 서술하고,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잉글랜드의 유서 깊은 소도 - P118

시를 누비며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착지에, 눈과 얼음의 땅에 도착한다.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을 통해 남녀 관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불균형한 권력관계, 엉뚱한 결말에 도달하는 작은 호기심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 결말은 씁쓸하거나, 귀엽거나, 섬찟하면서도 왠지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끝까지 읽는 순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진다는 점은 아마 똑같을 것이다. 처음 읽을 때에는 작가가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짐작할 수 없어서 더듬더듬 길을파악하는 데 몰두하지만 두 번째로 읽을 때에는 이미 지났던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꽃을, 조그만 웅덩이를, 따끔거리는 가시덤불을 가만히 서서관찰할 수 있다. 키건과 함께하는 산책은 평탄하지만은 않지만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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