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온유

2017년 장편동화 『정교」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유원」 「페퍼민트」 「경우 없는 세계」 등이 있다.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제44회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진은 소파 아래에 등을 기대고 영실을 유심히 살폈다. 영실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집스러운 얼굴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냉랭한 기운을 풍기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일까. 염색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인 백발의 머리는 관리하기 편하도록 짧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날렵한 콧대와 깊은 눈에는 아름다움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어릴 때부터 현진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할머니를 조금도 닮지 않은 엄마를바라보며 줄곧 아쉬움을 느꼈고 엄마의 얼굴과 할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자신 역시 큰 손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오십대 중후반까지도 할머니에게는 영화배우 같은 아우라가 있었는데, 현진은 그때 할머니를 선망하던 사람들과 시기하던 사람들, 그리고 의아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 P10

마치 학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달려오기라도 한듯 거머리의 엄마는 삼십 분도 안 되어 도착했다. 딸을 통해 현진의 집안사정을 진작 전해들은 모양인지, 현진의 볼에 피딱지가 앉은 것을 보면서도 미안해하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꽤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충분히 이기고도 남을 만한 상대(집안)라는 계산을 끝내서인 것 같았다. 자신을 보자마자 훌쩍홀쩍 눈물을 흘리는 딸을 품에 안은 채로, 애가 이 지경인데 너희 엄마는 어째서 빨리 오지 않느냐고 현진을 몰아붙였다.
그때, 상담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고 단정한 검은색 투피스 차림에 구두를 신은 할머니가 또각또각 걸어왔다. 현진은 마음속에 환한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영실은 손녀가 사고를 쳤다고 해서 집에 있던 차림새 그대로 허둥지둥 달려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갖춰진 모습으로, 예의 그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풍기며 나타나주었다. 어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짓누를 수 있다는 걸 현진은 그날 알게 되었다. 영실은 예의를 갖추면서도 단호하고 명확하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고, 현진의 볼에 난 상처에대한 치료비까지 그 안하무인의 여자에게 받아냈다. 그 과정에서 - P18

큰소리 한번 오가지 않았다. 또한 영실은 거머리를 향해 너는 다치지 않았냐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머리는 눈도 마주치지못한 채로 괜찮다고 우물쭈물 대답했다. 현진은 인상적인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그 모든 장면을 마음에 새겼다. 현진의 기억속에서, 영실은 나란히 걸을 때조차 손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만은 현진이 용기를 내 먼저 할머니 손에 깍지를 꼈다. 영실은 손에 힘을 주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잡혀주었다.
할머니가 외로움과 고독의 냄새를 풍기며 
자식들만 바라보고사는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가 현진의 마음에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다. 본받을 만한 부모는 없어도 우아하고 강인한 할머니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떠올리면 세상을 강단 있게 살아갈 용기가 조금 생기곤 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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