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자연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자연만이 아니라이 나라 사람들이 만든 풍경도 그랬다. 스위스의 자연은 철저히 인간이 통제하고 꾸며놓은 자연이라더니 과연그렇구나 싶었다. 수려한 자연과 함께 살아가다 보니 그들은 현실 세계도 아름답게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인간이 만든 것도 알프스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했던 융프라우 역. 눈에 거슬리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게 가꾸어진 그림 같은 마을들. 그 풍경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화사한 색상의 산악열차. 미관을 해칠 수있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생활의 자잘한 법규들(예를 들면같은 날에 모든 발코니가 빨래로 가득 차면 보기에 좋지 않다는이유로 일요일에는 건물 밖에 세탁물을 내걸 수 없다).  - P274

심지어 이들은 죽음의 풍경마저 바꾸고 있다.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처럼 의료 장치의 전선에 포획되어 삶을 마무리하지않겠다, 우린 아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듯이. 스위스는 존엄 있게 죽을 권리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나를 매혹하는 나라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생의 전 여정이, 눈에 닿는모든 세계가 아름답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걸까. 모든 게지나치게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이발소에 걸린 그림 같은 스위스에서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검은돈. - P274

기자 출신의 에릭 와이너가 쓴 《행복의 지도》 스위스 편에 따르면 이 나라에서는 밤 10시 이후 변기 물을 내리거나(인간의 기본적인 생리현상에 관한 규제라니 도저히 이해가안 돼서 찾아봤다. 불법은 아니지만 밤 10시 이후에 변기 물을내리면 강력히 비난받는단다. 스위스 정부가 밤늦게 변기 물을내리는 소리를 소음 공해로 간주했기 때문이라나) 일요일에 잔디를 깎는 일조차 금지한다고 했다. 심지어 이 나라에서는 기니피그나 앵무새, 말, 금붕어를 한 마리만 키우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사교적인 동물이라 고립시키는 것은 학대 행위로 보기 때문에 적어도 두 마리를 적절한 울타리 안에 두어야 한다.  - P275

이토록 지독한 규칙 성애자에, 동물권마저 지극히 존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터폴이수배 중인 범죄자들에게는 그토록 관용적일 수 있는 걸까. 정말이지 길 가는 시민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이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나요? 당신이 누리는 부와 복지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나요? 스위스 시민들이 자국의 부조리한 금융산업에 반대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뉴스가 있었던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제네바 시민들의 얼굴에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아이히만이 겹쳤다. 명령대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던 아이 - P275

히만은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다. 예루살렘에서 그의 재판을 본 한나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이들의무능과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국가적 공식 행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합리한 일에 그저 순응하고 살아간다면 그 나라는 그대로 괜찮은 걸까. 스위스의 두 얼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혼란조차 스위스가 내게 남겨준 선물인지도, 여행을 통해 풍경만이 아니라 풍경이 품고 있는 것, 풍경 너머의 것까지 보기를 원해왔으니,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여전한 혼란을 품고 나는 스위스를 떠났다. - P276

루마니아에서는 시를 읽는 밤이 자주 찾아왔다. 아무도 가지 않는 나라여서 루마니아에 오고 싶었다는 K쌤 덕분이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차분히 읽어주시는 시 한 편이 우리의 밤을 환하게 밝히곤 했다. 안젤리카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K쌤은 미리 인쇄해온 종이를 한 장씩 나눠줬다. 고정희 시인의 <쓸쓸함이 따뜻함에게>라는 시였다. 장작불이 지펴진 난롯가에 모여 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시를 읽었다. K쌤은 낭송이 끝난 후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기 루마니아까지 여행을 올 수 있었던 우리는 그래 도따뜻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니까, 쓸쓸한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주며 살아가면 좋겠어요."
정원의 사과나무 가지를 휘돌아온 바람이 부드럽게 창을 두드리는 밤이었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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