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이끌고 걸어온이번 카미노는 나 자신이 끝없이 깎여나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조급했고, 서툴렀고, 여유도 없었다. 내 부족함을 직시하기보다는 함께 온 이들을 탓하는 일이 더 쉬웠다. 다른 곳도 아닌 카미노에서 나와 타인 모두를 긍정하기가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더 넓어지고, 더 착해지고, 더 깊어져야 하는 길에서 나 혼자 옹색하고, 초라하고, 어리석은 존재 같았다. 다음에는 좀 더 잘할 수 있겠지 믿으며 발랄하게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산책단과 함께 다시 카미노를 걸을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며 담담히 받아들인다. 다만, 혼자 가야만 좋은 길 같은 건 없다는 걸 이제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여길 뿐. 함께 걷는 꿈이 피어오르는 때가 온다면 나는 다시 카미노 위에 여럿이 함께 서게 될 것이다. - P84
론다에 들어서는 순간, 예감에 휩싸였다. 쉽게 이곳을떠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었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마음을 앗아갔다. 120미터 높이의 가파른 협곡 위에 자리한 작은 도시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올리브밭과 양들이 풀을 뜯는 초록의 들판이 이어졌다. 들판의 끝은높은 산들이 메우고 있었다. 세월을 잊는 일까지는 무리라해도 시름이나 서러움 정도는 잊힐 만한 풍경이었다. 스페 - P85
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하얀 마을 론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이 일명 꿈의 도시, ‘라 시우다드 소냐다‘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론다는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사랑한 마을이다. 역마살 제대로 낀 헤밍웨이는 지구 곳곳에 흔적을 많이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유럽이라면 단연 스페인이다. "신혼여행으로 혹은 연인과 함께 스페인에 간다면 론다에 가야 한다. 그곳은 마을 전체가 낭만적인 무대가 되어준다" 라고 그가 예찬했던 도시에 내가 서 있었다. 신혼여행은커녕, 연인도 없이, 역시나 이번에도 혼자서. - P86
나는 제자리에서 세상을 끌어당기는 존재들 사이를 이리저리 항해하는 유성 같은 삶을 살아왔다. 어느 쪽의 삶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나도, 그들도 자신을 살리는 길로가지 않았을까. 대신 그이들 덕분에 나처럼 부유하는 삶을 사는 이도 붙박인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언젠가 정착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나는 정원을 가꾸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고 싶다. 정원이야말로 정착한 삶의 확연한 증거 같으니까. 부유하는 삶이내게 남긴 게 있다면 머무는 삶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된 점이다. 이삼일마다 잠자리를 바꿔가며 남의 공간에 머물다 가는 삶을 살기에 변함없는 내 공간이 더 소중해졌다. 떠도는 삶의 자유로움만큼이나 머무는 삶의 안온함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제 여행만큼이나 일상도 애틋하다. - P93
젊은 날의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있는 힘껏 벌리고 싶었다. 그 사이가 너무 촘촘하게 느껴져 가끔은 숨이 막힐것 같았으니까. 그 시절에는 내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있을 줄 알았다. 아주 멀리 가서 살 용기는 없어서 숨을 쉬려고 밖을 떠돌았다. 그렇게 떠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타인을 향한 내 마음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저마다의 슬픔과상처를 품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살기 위해 애쓰고, 끝내 살아내는 모든 생명에게 측은지심이 생겨났다. 밖을 떠도는 삶이 내게 간절한 것이듯, 안에서 버티는 삶도 어떤 이에게는 애달프도록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 P102
어떤 길을 선택하든 모든 삶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큰 꿈이 사라진 후에야 작고 사소한 것들을 끌어안고 견디는 삶에도 시선이 갔다. 사는 일의 긴 고단함과 서러움, 찰나의 기쁨과 유쾌함이 어느 자리에나 고루 머문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타인의 온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사이를 존중하면서, 사이를 허물어 새로운 관계를 엮어내는 사람이 되고싶어졌다. 사람들 사이의 좁은 거리를 견디지 못해 밖으로 돌다가,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사람이 되었다고나 할까. - P102
그러니 어떤 일에서도 실패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심지어여행에서조차! 매사에 가성비를 중심에 놓고 살아갈수록삶은 팍팍해지지 않을까. 가성비만을 놓고 따진다면 내 인생은 정말 답 없는 삶이었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살아갈 것이다. 계산도, 계획도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하루하루를 사는 삶. 그런 삶이 가장 나다운 삶이기에. 그러니 여행도 가성비라는 잣대로 평가하고 싶지 않다. 무용한 것들에 헌신해보는 경험도, 쓸모라고는 없을 일에 시간을 낭비해보는 일도 여행이라면 좀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비생산적이고,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며 살고 싶다. 시를 읽고, 그림을 보러 가고(예술이야말로 가장 헛된 낭비니까), 꽃을 사는 일에 망설이지 않고, 지루하고 긴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음식도 만들어보고, 친구와 마주 앉아 온갖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P107
약자의 삶을 세심히 돌보는 나라는 언제나 부럽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쓸모와 경제력, 역할 같은 것과 상관없이 국민으로존중하고 지켜주는 나라. 나에게는 그런 나라가 선진국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선진국 진입을자랑하는 지금에도 장애인이 이동권 시위를 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장애인, 어린이, 노인, 여성,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본능적으로 내 마음이 가닿는 존재들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약자에게 내 시선이 멈추는 건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약자로 삶을 시작해서 사회적 약자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 P151
국경을 넘나들며 산길을 걷고 있지만 허리의 통증은 여전하다. 육체의 굴레에 갇혀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며 산을오르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신체적인 자유를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내 몸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만족. 한계라고 여겼던 지점을 넘어 확장되는 몸의 가용성을 확인할 때의 희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으로서의 몸 사용이 아니라, 잉여의 고통을 자초함으로써 얻는 기묘한 쾌락. 내 몸이 내 정신의 지평선을넓혀주고, 나를 한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있음을 깨닫는다. 쉰을 넘기고 나니 산에 오를 때마다 질문이 많아진다. 나는 언제까지 오를 수 있을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 마음껏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내 조카들이 성인이 되어 고모와 여행하고 싶다고 말하는 날, 그때도여행할 수 있는 체력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을까. - P187
무엇보다 산은, 지구는 언제까지 버텨줄까. 기후 위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은 빙하가 더 빠르게 녹고 있고, 몽블랑 산군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길, 위로라도 하듯 꽃들이 하늘거린다. 고개를 넘어 능선길에 접어드니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길 위에 색채를 더한다. 연보라색 꽃마리, 노란색 금매화와 기는 뱀무, 자주색 범의귀, 샛노란 노랑벌이와 동이나물, 진보라색 트럼펫 용담, 연분홍 솔채꽃과 진분홍 앵초와 알핀로제, 무리 지어 하얗게핀 알파인 데이지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걷다 보니어느새 오늘의 산장.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산장 앞 안락의자에 앉아 저무는 몽블랑을 지켜봤다. 바람결에 날아오는 워낭소리가 골짜기로 번져가는 시간이다. 산장에 머물러야만 누릴 수 있는 순간이다. 이토록 고요하고 아름다운저녁과 아침을 위해서라면 ‘국경 없는 코골이회‘의 중단 없는 밤샘 공격도 견뎌내리라. 다음 날 펼쳐질 고생은 생각도하지 못한 채 나는 몽블랑이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며 앉아있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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