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P8
늙은 산
잎도 꽃도 남김없이 지워버린 뒤 눈도 그쳐 허름한 늙은 산
나무들 이름도 꽃모양도 잊어버린 산
그 산길 외진 바위 곁 잔설 위에서 얼어가는 깃털 하나를 보았다
아, 새였던가 - P11
길 위에서
신축공사장 폐유드럼통을 널름거리던 불꽃도 잦아들고 또 하루를 일당에 팔아버린 길은 갈 곳이 없다
피눈물 나는 쌍소리 속으로 미친 꽃들은 피어나고
차체부 이십년, 공장의 불빛은 지척인데 웬일로 친구들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거대한 담벽 그 너머 어두운 소문으로 몰려와 나를 부르는 소리 길 위에 내 몸을 눕힐 수 있는 곳 천막 농성장엔 아내가 있을 게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 P27
모를 일
저 모과나무 잎새 사이 꽃망울이 겨우내 험했던 바람 머금고 있다는데 아직은 모를 일 천둥 번개 치는 허공에 연둣빛 새움이 눈뜬다는데 내게는 멀고 먼 소식 저 꽃의 눈부심도 흙살 속 뿌리의 애착도 애초에 없다는데 - P62
아직은 바람 불고 길가 좌판 햇나물들 춥게 떨고
아, 내 안에 누가 살고 있는가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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