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이 묘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세계‘다. 19세기 영국에서 아프리카인 남성이 댄디라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매일이 표상을 마주했던 주류 영국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어떤이는 불쾌하게 여기고 또 어떤 이는 공감했겠지만, 좋든 싫든 자국이 자행한 식민 지배의 사실, 그 상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죄책감은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설령 심기가 불편할지라도 마음속 깊이 헤치고 들어가 탈식민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이런 물음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파시즘 국가 중 전쟁 전과 같은군주의 가계를 줄곧 받들어 모시고, 같은 국가와 국기를 계속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영국과 같은 전승국조차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전쟁이 끝난 뒤로 옛 자국 식민지 민족들과의 ‘다문화 공생‘을 표방해 왔다. 그렇기에 쇼니바레와 같은 아티스트가활동할 공간이 생겼다. 이를 생각하면, 일본은 매우 특수한 나라 - P131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전반까지 인류 사회가 막대한희생을 대가로 손에 넣은 평화, 인권, 평등, 반차별 등의 지적·사상적 성취에 완고하게 등을 돌리고 국민 다수도 그 편협한 자기애自己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잉카 쇼니바레의 작품은 일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기껏해야 ‘포스트콜로니얼(식민지 이후) 아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지적으로 소비될 뿐, 그것을 자국의 입장에 옮겨 놓고 성찰하는 이는 얼마 안 될 게 분명하다. 지금 《잉카 쇼니바레 MBE: 찬란한 정원으로》전이 대구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의 관객은 그의 작품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132
니키는 팅겔리와 함께 1966년 스톡홀름근대미술관에서 〈혼Hon)이라는 작품을 제작해 전시했다. 그것은 길이 28미터, 너비6미터나 되는 거대한 ‘나나‘다. 관람객은 미술관 입구에서 다리를 벌린 채 그들을 맞이하는 이 여성상의 성기 안으로 들어가 몸속을 관람한다. 독일 하노버의 시립 공원에는 커다란 나나상이세워져 있는데, 이를 두고 시민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졌다고한다.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그곳의 노부인이 이 상을 가리키면서 "만일 총통이 건재했더라면……"이라고 몹시 불쾌한 듯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히틀러라면 그걸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니키의 예술이 지닌 가치를 역설적으로 대변하는 장면이다. 니키는 198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부지를 얻어 ‘타 - P137
로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타로 카드에서 구상을 얻은 <정의>, <악마> 등의 대형 조형물이 배치된 널따란 정원이다. 니키는 남성 원리가 전쟁과 환경 파괴의 원흉이라는 사상을 실천하면서 여성 원리와 ‘마술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타로 정원에는거대한 손 모양 조형물이 있다. 그 손은 그곳으로부터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원자력발전소 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원전이여, 멈추어라."라며 염력을 쓰는 것이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뒤 이탈리아에서는 격렬한 논란 끝에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 그것은 타로 정원의 손이 발휘한 힘 덕분이었다고 니키는 말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부터 불과 4년째인 올해, 많은반대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가고시마현 원전을 재가동했고, 나머지원전들도 잇따라 재가동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P138
니키가 ‘사격 회화‘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때로부터 이미 반세기가 지났으나 그의 작품은 아직 낡지 않았다. 이는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겉으로는 어찌 됐든)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일본은 국회의원의 여성 비율(8.1퍼센트)이 세계 129위인 나라다(16.3퍼센트인 한국도 87위로 낮다. 국제의회연맹 조사, 2014년11월 현재), 남성 원리가 의기양양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니키는 결코 낡을 수 없는 것이다. - P138
12월 1일 전시 개막식 행사에서 약 250명의 비교적 젊은 청중을 앞에 두고 나는 켄트리지와 공개 대담을 했다. "계몽의 프로젝트는 좌절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곧바로 "그렇게생각하지 않는다."라며 분명히 말했다. "자유, 인권, 평등, 민주주의, 이런 계몽의 프로젝트는 미완이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라고. 그에게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타도된 순간은 "축제와 같았다." 뒤돌아보면 우리 민족에게도 ‘축제‘와 같은 순간은 있었다.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순간, 군사정권이 타도된 민주화 실현의순간, 새해 첫날을 맞아 나는 이런 순간의 환희와 그 순간을위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을 다시금 기억하고자 한다. ‘9.11‘ 이후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요한 목표"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문화와 저항』). "중요한 목표"란 "자유와 해방과 계몽을 요구하는 모든 민족이 모이는 승리의 회합이다. 눈앞의 어둠은 짙지만, 식민 지배를 경험한 우리 민족 역시 "승리의 회합에 참가한다는 꿈을 잃어서는 안 된다. - P146
딕스의 동판화 <전쟁> 연작은 1924년에 간행됐다. 그해는 ‘반전의 해‘라고도 불리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고작 6년,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을 빨리도 과거로 흘려보내고 다음 전쟁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굴러가기 시작했다. 올미 감독의 영화 끝부분에서 설원에 높다랗게 선 나무가 포화 속에 불탄다. 나무는 숯이 되고, 무참한 파괴의 상흔이 펼쳐진다. 엔딩으로 양치기의 말이 흐른다. "언젠가 이 땅에 숲이 되살아나고, 여기서 벌어진 일은 믿어지지 않게 [잊히게] 되리니." 영화관을 나서니 초여름 햇빛이 넘실대는 간다의 거리를 남녀노소가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곧 치러질 참의원 선거도 개헌을 획책하는 집권 여당에 유리한 상황이라고 한다. 결국 일본국민은 헌법 9조(전쟁 포기 조항)를 스스로 내버리는 것일까. 숲은 되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재생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말일까? 불탄 자리에 잡초의 신록이 싹을 틔우듯 인간들은계속 나고 자란다. 비참한 일은 잊히고 참화는 거듭된다. 시간의흐름은 망각의 편이다. 시간의 여신과 전쟁의 신은 사이가 좋다. 레마르크, 딕스, 올미..... 예술가들은 이 무자비한 적과 승산이 희박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다. - P162
하지만 네루다의 매력은 그 ‘정치적 올바름‘에만 있는게 아니다. 이 영화는 그것을 잘 전해 준다.
풍만한 여인이여 살[肉]의 사과여 달의 불이여 짙은 해초 내음이여 빛에 단련된 진흙이여 어떤 어스름한 빛이 그 원주 사이로 열리는가 어떤 고대의 밤이 남자의 오감을 홀리는가 ㅡ「풍만한 여인이여」(『100편의 사랑 소네트』)에서 - P174
얼마나 거리낌 없고 관능적인 노래인가. 이는 지금도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군부 쿠데타 후 멕시코로 망명한 칠레의 영화감독 미겔 리틴Miguel Littin은 1985년 계엄하의 칠레에 잠입해 네루다가 오랫동안 산 이슬라네그라Isla Negra의 집터를 찾았다. 그곳에서 리틴이 마주한 것은 시인이 사망하고 방치된 집에 새로운 세대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광경이었다. 그곳을 찾은 젊은 연인들은 집 울타리에 낙서를 남기고 간다. 그중 하나는 말한다.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 장군이여, 아옌데와 네루다는 살아 있다. 1분의 어둠이 우리를 눈멀게 할 수는 없다." (<엄하의 칠레 잠입기 Acta General de Chile>, 1986)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네루다>는 보여 준다. 네루다의 시가 칠레 민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시의 위대한 힘을. - P174
칠레에서 이런 격렬한 투쟁과 비극이 진행되던 시기에 지구반대편의 한국에서도 유사한 현실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정권이 1972년 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 체제‘를 확립한것이다. 나도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범의 석방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간 캐나다의 지방 도시에서 칠레 망명자 가족이라는 소녀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는 쿠데타로부터 10년 이상이 흐른 뒤로, 여전히 피노체트 정권이 버티고 있어 망명자들은 귀국할 수없는 상황이었다. 나와 소녀는 말이 통하지 않아 이야기다운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으나 금세 서로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했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칠레의 역사는 우리 것이기도 하다. 네루다라는 존재는 우리 것이기도 하다. - P176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 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 가도다 진흙을 밥으로, 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드면, 단잠은 얽맬 것을 사람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
ㅡ이상화, 「가장 비통한 기욕析慾」(1925)에서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푸르른 대해大海. 하늘 높이 바닷새 한 마리, 자연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듯하다. 그 해면에 하나의 점 같은 배가 떠 있다. 카메라가 다가가니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로 빽빽하다. 지중해를 건너려는 난민들을 가득 실은 배다. 메마른 사막. 줄곧 차가운 비가 퍼붓는 변경의 철도역. - P177
군사용 철조망으로 무자비하게 나뉜 경계. 찬비에 젖은 채 멍하니 선 사람들, 주린 배로 추위에 떨며 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실로 "진흙을 밥으로, 해채[시궁창에 고인물]를 마"시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화의 시구가 뇌리에 떠올랐다. 1920년대 한반도에서 만주로 흘러든 숱한 난민, 2017년 중동에서 유럽으로 향한 숱한 난민, 두 행렬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한줄기로이어져 있다. 긴 행렬은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언제 끊일지도알 수 없다. 아아, "사람을 만든 검 [神]아 (...)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 - P178
그 영화는 아이웨이웨이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유랑하는 사람들)이다.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가자지구에서 여러 유럽 국가, 튀르키예,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이르기까지세계 23개국 40곳의 난민 캠프를 돌며 제작되었다. ‘난민 문제‘ 의 최전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대한 투시도. 그 영상은 아름답고 처절하다. 화면에는 때때로 감독 자신이 효과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예컨대 난민 캠프의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 모습,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서 오토바이를 탄 국경순찰대원에게 느긋한 말투로 말을 거는 모습. 고대 중국의 신선 같기도 하고, 시골 농부 같기도 하다. 그 모습이 이 영화의 주제가 가진 장대한 서사시적 척도를 실감하게 한다. - P178
‘민적‘은 일제가 통감부 시대에 조선 민족에게 강요한 제도다. 그것에 저항한 사람들에게는 ‘인권‘이 없었다. 현재도 난민이나 이민은 각종 증명서를 소지할 의무가 있어, 번잡한 절차와 굴욕을 강요받는다. 증명서가 없는 자(프랑스어로 ‘상 파피에sans-papiers‘, 즉 ‘종이가 없는 자)에게는 "인권이 없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난민들의 고통을 예견했다. 참으로 천재적인 통찰! 한용운과 제거스는 이어져 있다. 시인들에게 그런 통찰을 요구하는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더욱 정치精緻하고 가혹하게 이어지고 있다. 한용운은 8·15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제비 떼 까맣게날아오길 기다리나니"라고 노래했던 이육사는 중국 대륙에서항일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 - P182
에서 옥사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노래한 윤동주는 일본 도시샤대학에 유학하던 중 ‘독립 기도‘ 혐의로 검거되어 해방을 반년 앞두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 시인들은 그나마 시를 통해 가까스로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겼으나, 다른 많은 이들은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무참하게 목숨을 앗겼다. 3·1독립운동으로부터 100년 ㅡ나는 이른 봄 도쿄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생각한다. 아, 참으로 긴 난민들의 행렬. 참으로많은 눈물과 피. 그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 세계에서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역사수정주의자가 권력을쥐고 있고, 다수 국민 사이에 식민주의의 심성이 오히려 증식하고 있다.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 P183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 「아사히 저널」(1984년 9월 21일 호)이라는 잡지에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음악 이야기뿐 아니라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내 형들을 비롯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이야기도 담겨있었다. 해방 직후 ‘보도연맹‘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희생자들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정치범의 석방이 실현될 때까지 한국 정부가 요청하는 귀국은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나는다시금 크게 감동했다. 선생이 내 형들을 비롯한 정치범들에게마음을 썼다는 데 대해서만이 아니다. 그 인터뷰는 몹시도 지친몸으로, 제한된 시간의 1분 1초까지 작곡을 위해 쓰고 싶다는 심경일 때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정부의 비위를 거슬러 귀향의 꿈이 더욱 멀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선생은한국 사회 (그리고 인류 사회)의 개선이라는 목적에 자신이 할 수있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 P209
김영삼 문민정부 탄생을 전후해 한국 내에서 오래 계속되어온 윤이상 음악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완화되면서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제‘ 기획이 추진됐다. 그러나 선생은 한국 정부가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범민련‘의 해외본부장이라는 지위에 있었기에 귀국은 정치적 의미를 띨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행동에 반성할 만한 점도 있다." "앞으로 북과는 일절 관계를 끊겠다."라는 뜻을 표명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선생은 또다시 귀국을 단념했다. 그 뒤 선생은 미국에서 남북의 음악가를 모아 음악제를 여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북측 음악가의 참가가 취소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윤 선생의 마지막 작품은 교향시 <불길에 휩싸인 천사들>(1994)이다. 노태우 정권의 부정과 탄압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을 추념하는 음악이다. 1995년 12월 20일, 선생의유해는 베를린의 묘지에 안장됐다. 해방을 갈망했으나 차마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상처 입은 용의 생애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선생의 후두부에는 (머리카락에 덮여 보이지 않지만) 큰 거미나 게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흉터가 있었다. 1967년 7월 동베 - P210
틀린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하면서 고문실에 있던 무거운 금속제 재떨이로 제 머리를 내려친 상흔이다. 고문실에서의 굴욕, 고통, 절망이 얼마나 혹독했겠는가.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민족의 국가권력에 의해 말살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에 새삼 섬뜩해졌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말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그 심연에서 생활했을 뿐 아니라 참으로 놀랍게도 더욱 거대한 존재로 되살아났다. 지금 한국에서 그의 탄생100주년이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이런 경위를 깊은 아픔과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최근 알게 된 바로는, 박근혜 정권 시절의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윤이상평화재단‘도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를 등재한 자들은 윤이상의 음악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들어 본 적이 있을까?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런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 P211
숨을 삼킨다는 게 이런 걸까. 국도에서샛길로 빠져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자 돌연 눈앞에 작은 분지가 펼쳐졌다. 주위를 에워싼 산들은 화사한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그쳤으나 하늘에는 구름이 겹겹이흘러가고 있었다. 낮은 쪽 구름은 엷은 먹빛, 높은 쪽 구름은 솔로 싹 쓸어 낸 듯 희다. 강풍에 날려 가던 구름의 갈라진 틈새로화살 같은 햇빛이 대지에 내리꽂힌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요란하게 흔들자 붉고 노랗게 물든 잎이 어지럽게 춤춘다. 신화 세계의 광경이다. - P220
도쿄에 사는 나의 상상력은 피해지 주민들이 경험하는 불안에 닿지 못한다. 오사카나규슈 사람들의 상상력은 훨씬 더 닿기 어렵다. 한국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즉 방사선량뿐 아니라 상상력 역시 동심원적으로 멀어진다는 역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동심원 중심에 가까운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대한 실감이 그만큼 강하다. 그렇기에 "편리한 진실"(프리모 레비)을 찾아내서 거기에 매달리는 심리가 작동한다. 재난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중심을 향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중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사태의 본질을 냉철하게 인식해 재발을 방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사태이다. 우리는 이 ‘동심원의 패러독스‘를 의식해서 중심과 먼 사람들일수록 중심을 향한 상상력을 갈고닦고, 중심에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엄혹한 현실을 더욱 직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상상력이 시험받는 것이다. - P228
가해의 책임까지 분명하게 언급하며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사죄의 뜻을 표명한 점이다. 언제나 그렇듯 피해를 당한 사람들, 고통받고 있는 미약한 존재가 타자와의 진정한 연대를 추구하는지혜와 용기를 보여 준다. 타자를 해친 자들,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합천 대회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가니 거리는 비상경계 상태였다. 거리에서 지하철역까지 곳곳에 경찰 부대가 깔려 있었다. ‘핵안보정상회의‘ 때문이었다. ‘핵안보정상회의‘는 핵에 더해 부와 권력까지 쥔 자들이 앞으로도 핵을 ‘안전‘하게 독점하기 위한 모임이다. 그에 비해 합천은 핵 따위는 갖지 않은 미약한 사람들, 소수자들의 모임이었다. 어느 쪽에 ‘희망‘이 있는지는 명백하지 않은가. 이 글이 신문에 실릴 즈음이면 한국은 총선 직전일 것이다. 탈핵이라는 화두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한국 국민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수 있기를 기원한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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