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그림‘ 시리즈 중에는 색다른 그림 한 점이 있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개>라든가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있는 힘껏 급류를 헤엄쳐 건너는 것같기도 하고, 개미지옥의 흘러내리는 모래에 삼켜져 어찌할도리가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 개는 나야, 라고 생각했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는 때로 힘찬 물살처럼 빠르게 흐르지만 대개 기운이 빠질 정도로 느리다. 그리고 갔다가 되돌아왔다가 하는그 과정의 국면마다 희생은 차곡차곡 쌓여 가야만 한다. 게다가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번번이 낯 두꺼운 구세력이 가로채 간다. 하지만 그 헛수고처럼 보이는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떤 열매도 맺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모래에 묻히는 개」,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프란시스코 데 고야, <개(모래에 묻히는 개)>, 1819-23년, 석고 벽에 유채(현재 캔버스에 유채), 131.5×79.3cm, 프라도미술관 소장.
‘체감 시간‘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다. 이런 말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체감온도‘는 온도계가 표시하는 온도와는 별개로 사람이 느끼는 온도를 가리킨다. ‘체감 시간‘은 거기서 나온 연상으로, 시계나 달력상으로는 같은시간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것이 빠르다거나 느리다며 다르게 느끼는 걸 말한다. 나는 요즘 ‘체감 시간‘이 무척 빠르다.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인생의 끝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두렵다거나 슬프다는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원래 신슈信州 (나가노현)의 고원에 자그마한 산장을갖고 있었는데, 이번 봄에 고도가 조금 낮은 곳으로 옮겼다. 그래도 해발 1,200미터 정도는 된다. 숲속의 작은 집이다. 이제부터는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 P13
순식간에 지나가리라. 이 계절이 되도록 집 주변에는 눈이 수십 센티미터나 쌓여 자동차를 주차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로가 꽁꽁 얼어 스노타이어를 장착해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운전할 수밖에없었다. 그랬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나무들이 일제히 새싹을 틔우고 매화, 복숭아, 벚꽃,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등색색의 꽃들도 피었다. 순백이던 야쓰가타케 연봉(해발2,899미터의 최고봉을 비롯한 8개의 고봉이 늘어선 산)은 산꼭대기 부근에만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다. 저 추웠던 겨울은 한바탕꿈이었던가. 아니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꿈인가. 흡사 여우에 홀린 것 같다. - P14
연구실의 책을 버린다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아 학생들에게 가져가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막상 책을 처분하려니 쉽지않다. 오래된 책을 정리할 작정이었지만 1970~80년대에 손에넣은 책들은 귀중하다.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쓸데없이 그런 느낌이 든다. 내게는 현실의 기억과 얽힌 일들이 그들에게는먼 과거의 일이다. 예컨대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그렇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당시 읽었던 책을 책장에서 꺼내 한 구절 읽어주기도 한다. 읽은 뒤 문득 깨닫고 보면 그 책은30~40년 전에 입수한 것이다. 학생 시절의 나에게 누군가 해방(일본에서는 종전終戰이라 한다) 전의 책을 읽어 주는 격이다. 학생 시절의 나는 내 앞에 놓인 시간에 끝이 있다는 걸 개념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라는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언제까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인생을 상상하고는 조바심을 쳤다. 젊은이와 노인의 ‘체감 시간‘에는 그만큼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 P15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그래서 젊은이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식의 낙관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그 반대다. 노인이 된 내 경험과 감각이, 시간은 얼마든 넘쳐 난다고 생각(착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 P16
나는 1951년생이다. 그해 조국에서는 한국(조선)전쟁이 한창이었다. 사춘기 때는 베트남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한국은 군사독재의 절정기였고, 두 형은 투옥되어 있었다. 서른 살 이후의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사가 ‘임시적인 삶‘이었다. 중장기적인계획을 세우고 인생을 설계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쉰 살 가까이 되어 우연히 대학에 취직했을 때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주변 동료들이 정년 때까지의 수입과 지출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모습이었다. 사회조직 속에 편입된 머조리티(다수자, 주류)의 ‘안정‘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죽을지도 예측할 수없는데 노후를 대비한 양치질이라니, 무리였다. 이 나이 되도록 어떻게든 살아온 것은 수많은 우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일본 사회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일본에서 인생 마지막까지 보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당초 일본이라는 나라는 재일조선인을 배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1960년대 말까지 ‘국민 건강 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1년 뒤면 나는 만 70세다. 정년퇴직이다. 말 그대로 노인이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오래 - P19
살기를 바란 적도 없다. 애당초 장수를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가치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인생의 자기목적화라 할 수 있다. 인생의 가치는 그런 차원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 사람은 진실, 아름다움, 정의, 공정, 평화 등 개개인의 삶을 넘어선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게 아닐까. 젊은 시절부터 그런 생각이었다. 물론 그 ‘가치‘가 가짜이거나 왜곡된 것인 경우도 많다. 거짓 ‘가치‘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데에 이용되어 온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을 비판하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보편적 가치라는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원칙조차 내팽개쳐진 세계,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식조차 잃어 가는 세계다. - P20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함‘이라는 탁월한 고찰을 제시했다. 그것은 막대한 희생의 대가로 얻은 평화를 위한 고찰이다. 하지만 이 역시 크고 작은 아이히만들의 끊임없는 출현을 막을 힘이 되지는 못했다. 국회에서 태연히 거짓말을 지껄이는 정치인, 자료를 은폐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료, 그것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언론,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멍하니 사고 정지 상태에 빠져 있는 다수의 국민. 일본사회의 이런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일본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정년을 연장하려 하는 한편으로 의료비나 사회보장비는 억제하려 하고 있다. 켄 로치 KenLoach (1936~) 감독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묘사한 것처럼, 노인과 사회적 약자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 - P22
이 나이까지 살아남았기에 ‘악몽의 시대‘를 목격하게 됐다. 형들이 옥중에 있던 군사정권 시절에 "나는 그저 두 눈 부릅뜨고이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 속속들이 지켜보라고 스스로에게 명했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지금은 이 빠진 무력한 노인이 됐지만, 30년 전에 한 그 말을 다시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는 그렇다 치고, 눈만큼은 부릅뜨고 지켜볼 작정이다. - P22
지금 세계를 뒤덮은 불안은 ‘코로나 사태‘만이 아니다. 나는 얼마 전 뉴스에서 미얀마군이 자국 시민들을 폭행하는 장면을보고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광주다.‘ 다친 시위대를 구조하려던 구급대원 세 명을 군인들이 구급차에서 끌어 내려 곤봉과 총대로 마구 두들겨 패는 장면이었다. 그 구급대원들은 어떻게 됐을까. 목숨은 건졌을까. 그 뒤의 일은 모른다. 이런 무도한 폭력이 미얀마뿐 아니라 홍콩, 태국, 벨라루스, 러시아 등지에서 일상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정치 폭력이 ‘역병처럼‘ 세계에 만연해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시대인가.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앞으로 1년. 한국이 저 암흑시대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정년 뒤 조용한 은퇴 생활을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지만, 세계는 그것을 허락해 줄 것 같지 않다. - P28
화를 잘 낸다. 특히 컴퓨터나 휴대폰을 쓸 때 잘 다룰 줄 모르는 건 물론이고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 자체에 어두운 탓에 마음이 몹시 상한다. 내 패스워드를 잊어버리고, 신용카드 결제도 뜻대로 안 된다. 그런 자신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한다. 하얀천에 뚝뚝 떨어진 ‘늙음‘이라는 검은 얼룩이 서서히 번져 나가는느낌이라고 할까. 20년쯤 전에 독일의 뮌스터라는 도시에 갔을 때 공영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차체를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이는 모습을 봤다. 승객, 특히 고령자가 부담 없이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한 장치였다. 나와 아내는 거기에 감동해서 우리가 사는 일본의 도시에도 이런 장치가 어서 보급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는 우리가 그런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없이 고령자나 약자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 뒤 어느새 일본에도 그런 버스가 꽤 보급되었다. 지금은 그 버스를 반기며 감사히 노약자석에 앉게 됐다. 50대 무렵의 나는 고령자의 ‘타자‘로서 ‘타자‘인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내 몸에 ‘늙음‘이라는 낯선 타자가 비집고 들어와 나의 내부를 침식하고 있다고 느낀다. - P37
이 이야기는 ‘해방된 노인‘들이 떨치고 일어나 작금의 상황에 파문을 일으킨다는 꿈, 일종의 우화다. 현실의 많은 청년들은 자진해서 ‘회사 인간‘이 되어 안정을 얻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 가토의 ‘노학공투‘는 흥미진진한 꿈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런 우화를 나도 이야기하고 싶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려 하지 않는 꿈, 다른 인생의 꿈을 제시하는 것, 그 역시 노인이 할 수 있는 사회 공헌이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늙음이라는 타자‘와 끈기 있게 사귀고 대화해 나갈 작정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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