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설리번 판사는 말하곤했다. "쉽게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내 법정에서는 믿음이 중요해.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이." 그는 자주 이렇게 선언했고, 그러고 나면 끙끙대다가 -판사는 굉장히 뚱뚱했다- 방에서 어정어정 나갔다. 주로 하루 일과, 적어도 설리번 판사의 일과가 끝날 때 보는 광경이었다. 판사는 퇴근길에 판사실에서 나와 재판연구원과 이야기를 나누러 와서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애매모호한 연설을 늘어놓았는데, 마치 거기 있는 재판연구원들이 서기라서 그가 하는 말을 받아 적어야 하는 것처럼 말 사이를 자주 끊고 쉬었다. 하지만 필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셋 중 판사의 충실한 신도이자 제일 보수주의자인 케리건마저 하지 않았다. 판사가 나가고 나면, 그는 방 건너편에 있는 토머스에게 싱긋미소 지었고 그러면 그는 뭐 어쩌겠느냐며 미안하다는 듯이 눈알을 위로 굴리곤 했다. 토머스도 보수적이었지만, 자기는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라며 "그런 구분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완전 우울하다"고 말했다. - P162
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그는 해럴드가 거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로스쿨 시절을 추억하고 그에 수반되는 활동인, 로스쿨 재학 당시 본인의 업적을 자랑하는 건 사무실 최고의 오락이었고, 수많은 동료들이 같은 학교를 다녔고 많은 수가 해럴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그리고 나머지는 그에 대해 들었기 때문예). 그는 때로 해럴드의 수업을 들었던 이야기나 얼마나 수업준비를 열심히 했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그러면 해럴드가 자랑스러웠고, 비록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지만, 그를 아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다음 해면 헌법에 대한헤럴드의 저서가 출판될 테고, 그러면 사무실의 모두가 헌사를읽고 그의 이름을 보게 될 테고, 그러면 그와 해럴드의 관계가밝혀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쩍게 생각할 테고, 그러면그는 그의 앞에서 해럴드에 대해 무슨 소리를 했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근심 가득한 얼굴들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자기 힘으로 사무실에서 자리를 굳힌 거라고, 시티즌과 로즈 옆에 자기 자리를 찾은 거라고. 마셜과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은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 P195
줄리아가 돌아왔을 때, 그는 해럴드가 그의 멍청하고 서투른 짓을 이야기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저녁식사때 해럴드는 평소 모습이랑 전혀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리스페너드 스트리트로 돌아가서 해럴드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진짜제대로 된 편지를 써서 부쳤다. 며칠 후 그는 정식 편지 형식으로 된 답장을 받았다. 나중에 평생토록 간직하게 될 편지였다. "주드에게." 해럴드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필요 없긴해도)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 P199
그러자 루크 수사는 일어섰고, 이번에는 좀 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드, 들어봐. 보여줄 게 있어. 같이 가자." 그러고는 온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뒤를 돌아보며 그가 따라오고있는지 확인했다. "주드." 그가 다시 불렀다. "같이 가자."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 온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너무나 잘 아는 온실인데도 마치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낮선 갈망이 솟아올랐다. 어른이 되어 그는 정확히 언제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짚어내는 데 집착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 순간을 동결시켜 - P227
세균배양기 안에 보존했다가 교실 앞에서 들고 가르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바로 그 일이 벌어졌던 때야. 이게 바로그 일이 시작된 곳이야.‘ 그는 생각하곤 했다. 크래커를 훔쳤을때였을까? 루크의 수선화를 망쳐놓았을 때였을까? 처음으로분노발작을 일으켰을 때였을까? 더 말도 안 되지만, 뭔지 모르지만 엄마가 날 그 잡화상 뒤에 버리게 만든 그 짓을 저질렀을때였을까? 그건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그날 오후 그 온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호위를 받으며 자기 발로 들어갔을 때, 루크 수사를 따라가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을 때였다. 그때가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 P228
"주디." 앤디는 오늘은 상냥모드일 테고, 어떤 연설도 하지않을 것이다. 그는 앤디가 이끄는 대로 텅 빈 대기실을 지나 아직 열지 않은 진찰실로 들어가, 그의 부축을 받으며 여러 시간을, 여러 날을 보냈던 진찰대 위에 올라가고, 심지어 앤디가 옷을 벗기도록 내버려둔 채 눈을 감고 그가 다리에서 붕대를 풀고 쓰라린 피부에서 흠뻑 젖은 거즈를 떼어내기를 기다릴 것이다. 내 인생,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내 인생.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고, 그저 그 말만 일부는 찬송처럼, 일부는 저주처럼, 일부는 확신을 바라는 것처럼ㅡ 반복 - P230
하다 그런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면 찾아가는 다른 세상으로, 자기 세상에서 결코 멀지 않지만 나중에 결코 기억나지 않는 그세상으로 스르르 들어갈 것이다. 내 인생. - P231
둘 다 자연을, 야외를 좋아했고, 둘 다 동물들을 사랑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 네가 주드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더니 주드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한쪽 신발의 풀어진 끈을 매주고는 다시 뒤로 가서 줄리아와 발맞춰 걷기 시작하더군. 정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별것 아닌 행동이었어.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줄리아 옆으로 다시 물러나는 것.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었어. 넌 아마 생각도 안 했을 거야. 심지어 하던 대화를 중단하지도 않았어. 넌 항상 주드를 지켜보고 있었지(하지만 너희들 모두 그랬어). 여러 가지 세심한 방식으로 보살폈어. 그 며칠 사이에 난 그걸 다 봤어. 하지만 이 일을 네가 기억할 것 같진 않네. 하지만 네가 그러고 있을 동안, 주드는 나를 봤어. 그때 주드의 표정이라니. 그 순간이 아니고서는 아직도 그 표정을 뭐라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안에서 뭔가가. 마치 너무 높이 쌓아 올린 축축한 모래탑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주드를 위해, 너를 위해, 나를 위해서도, 주드의 얼굴을 보며 난 나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어. 다른 사람을 위해그런 걸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우아하게 해줄 수 있는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표정을! 주드를 봤을 때, 난 제이컵이 죽은 후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 P234
같다는 말의 의미를, 뭔가가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다는 말의의미를 이해했어. 늘 지나치게 감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나는 그게 감상적일지는 몰라도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때 알았던 것 같아. - P235
물론 결국엔 걱정할 필요도 없었어. 주드는 그런 생각들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고, 옳고 그름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게 됐으•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도 좋은 변호사가 됐고. 하지만 나중에 종종 그를 생각하면,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 슬퍼졌어. 로스쿨을 그만두라고 강력하게 말했더라면 좋았을걸, 드래이먼 241호 비슷한 곳으로 가라고 말했더라면좋았을걸. 내가 준 기술들은 결국은 그에게 필요한 기술이 아니었어. 그의 정신이 있는 그대로 유연하게, 지루한 사고방식으로 스스로를 동여맬 필요가 없는 방향으로 밀어줬더라면 좋았을걸. 한때 개를 그릴 줄 알았던 사람을 형태만 그릴 줄 아는 사람으로 바꿔놓은 기분이야. 그에 관해서라면 난 많은 죄를 저질렀어. 하지만 때로 비논리적이게도 그중 가장 죄책감이 드는 일은 이거야. 내가 밴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 난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를 태우고 어딘가 황량하고 추운 무채색의 장소로 데려가서 거기다 두고 온 거야. 예전에 내가 그를 태웠을 때는 풍경이 온통 색으로 아른아른 반짝이고 하늘에선 불꽃이 쉬잇하고 터졌고,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던 바로 그 똑같은 장소에다가. - P250
훗날 그는 그 일을 일종의 지레받침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관계 사이의 경첩 같은 걸로 돌이켜보곤 했다. 제이비와의우정은 물론이고 윌럼과의 우정에 대해. 20대의 어느 순간,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도 순수하고 깊은 만족감이 들어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애정도 완벽한 그순간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아도 되도록 그 주위 세상이 그냥멈춰버렸으면 하는 때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 박자 후에는 모든게 움직이고, 그 순간은 고요히 사라져버린다. 이 일 이후 제이비가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영원히 줄어들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 같고, 너무 최종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믿게 된 사람들이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하게 됐고,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런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래도 인생은 쉼 없이 앞으로 나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실망시킨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적어도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 하나는 있었기 때문이다. - P262
그는 집에 돌아와 있다. 윌럼이 함께 있다. 그는 두 번째 성 주드 조상을 가지고 와서 부엌에 뒀다. 하지만 이 성 주드는 더크고 텅 빈 도자기 재질이고, 머리 뒤에는 기다란 홈이 뚫려 있어서, 하루를 마친 후 그들은 남은 동전을 여기 넣는다. 조상이다 차면 정말 좋은 와인을 사서 마시기로,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앞으로 그는 해럴드가 공언한 애정을시험하고 또 시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한결같은지 보려고 약속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절대 해럴드와 줄리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아무리 그렇다고 생각해도 그는그러지 못하고 결국엔 그들이 그에게 지칠 거라고 늘 확신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결국끝나고 나면 그걸 돌이켜보면서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올. 그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된 구체적 사건도 확실히 알게 될테니까. 그러면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뭘 더 잘할 수 있을지다시는 궁금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지금 그의 행복은 완전무결하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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