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안에는 바람 소리
삼동. 시퍼렇게 날 세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말갛게 개어 있던 밤하늘 어디에 숨어 있다가 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토록 바람은 맵차고 옹골스런냉기를 품고 있었다. 맨 처음 마을 뒷산 너머 섬의 북쪽에서부터 일어난 바람은 삽시에 뒷산 잔등을 타고 넘어 내달려왔고 이내 황지리(黃地里) 집집의 지붕을 새카맣게 덮쳐누르듯 쏟아져들어와 온 동리를 움찔움찔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몇 개 남은 이파리를 떨구며 뒤안 감나무를 뒤흔들다가 낡은 기와지붕 추녀 끝 험상궂은 귀면에 무턱대고 부딪쳐보기도 하고, 배암 감기듯 칭칭 뻗어나간 마른 담쟁이덩굴을 휘저어놓은 다음, 쇠똥이 여기저기 내갈겨진 좁은고샅을 잽싸게 핥고 다니기도 하면서 바람은 난데없이 나타나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흐리끼한 석유 등잔불 아래 엎디어 이런저런 별스럽잖은 얘기 몇 마디씩 나누다가 선잠이 - P150
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그 소란한 바람 소리에 깨어 일어나 방문을 빠끔 열고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소름끼치게 싸늘한 바깥 공기에 놀라 냉큼 문고리를 잡아채기도 하는 거였다. 논이 부족한 섬이라 볏짚을 구하기가 힘들어 올해도 지붕을 이지못한 채 겨울을 넘기게 된 집의 남자들은 가뜩이나 허름한 초가지붕을 새삼스레 걱정했고, 여자들은 내리감기는 눈두덩을 억지로 깨어 치켜올리며 마당으로 나가 장독대며 부엌 바깥쪽에서바람에 쏠려 달그락거리고 있는 자질구레한 세간 따위를 건성단속해두고는 진저리를 치며 도로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아따, 오늘밤엔 된통으로 큰 바람이 불랑갑네. 하늘 꼴새가 심상찮구먼, 눈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는디. 젠장맞을, 내일 식전 아적에 건장 보러 갈라먼 에지간히 춥겄다. 끄응. - P151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두터운 솜이불 속으로 뒤척뒤척 파고들었다. 문밖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이빨을 다다닥 맞두드리며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더러는 아랫목을 더듬어 발바닥을 쭈욱 뻗어보다가 거기서 방금 얼음통에서 건져낸듯한 누군가의 발과 맞닿기라도 했는지 깨액 비명을 지르며 발을 옴츠리기도 하였다. 지랄하고, 먼 놈의 발무가지가 그라고 차다이. 아, 발무가지좀 저만큼 치워. 으마마, 치운 디 나갔다 들어온 사람 심정은 모르고 속 펜한소리하고 있네이. 그렇게 한차례 어수선하게 동리를 뒤흔들어놓고 난 바람은 마을을 비잉 돌아서 이번엔 바다를 향하고 냅다 달려가버렸다. - P151
바다 쪽에서는 끊임없이 씨근덕대는 파도 소리가 세찬 바람의 틈을 헤집고 한층 더 숨가쁘게 들려왔다. 차츰 하늘 한쪽부터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구름이었다. 바람이 먹장떼 같은 구름을 왁자하니 더불고 내려오고 있었다. 스무이렛날. 구름이 손톱달 뾰족한 귀퉁이를 덥석 깨물어뜯더니 눈깜짝할 새에 통째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 틈에 겨울 하늘 가득히 흩어져 있던 별들이 물기를 머금고 오르르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 무수한 별들의 무리마저 구름이 달려들어 마저 해치우고 나자 하늘은 온통 먹통을 뒤집어쓴 듯 깜깜해져버렸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대고, 이따금 그 바람을 거슬러 뚫고 우우웅, 차르르르, 섬 기슭을 핥는 물소리만 숨이 가빴다. 얼핏 마을, 아니 섬 전체가 형체도 크기도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괴물의 가슴팍에 잔뜩 짓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 P152
밤이 꽤 깊은 시각. 구십여 호가 채 차지 못하는 황지리 마을에 아직 불을 끄지 않고 있는 집이라곤 고작 서너 채뿐이었다. 예전 같으면야 긴긴 겨울밤, 새끼도 꼬고 더러는 묵내기 화투다윷놀이다 해서 간간이 떠들썩한 웃음이 터져나올 법도 했지만 어느덧 그런 풍경을 마지막 본 지도 여러 해 지난 성싶다. 어수선한 세상은 이렇게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섬마을까지도 몰라보게 바꿔놓은 거였다. 마을 동쪽으로는 이웃 마을과 이어지는 작은 신작로가 서투른솜씨로 갈라놓은 가르마처럼 멀리 고갯마루까지 뻗어 있고, 그신작로가 시작되는 동구 밖 맨 끝 어귀에 허름한 초가집 하나가납작 엎디어 있었다. 돌담에 감싸 안기어 있는 유난히도 추레하게 낡은 집이었다. 지붕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내밀고 있는 말라 - P152
빠진 잡초 때문에 어찌 보면 엉성한 까치 둥지같이도 뵈고, 되는대로 풀어헤친 미친년 머리채 같기도 했다. 근처의 가장 가까운집과는 어느 정도 간격을 둔 외딴집인 데다가, 하고 있는 외양까지 그 모양이니 누구라도 대뜸 첫눈에 폐가나 빈집이 아닌가 여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집에서 명주실 같은 몇 가닥 흐린 불빛이호르르 새어나오고 있는 거였다. 문고리가 손가락을 쩍쩍 빨아대는 이 추운 겨울밤, 쉴새없이 윙윙거리는 독기 품은 칼바람을막아내기엔 그 집의 때묻은 창호지가 너무 허술하고 얇아 뵀다. 그래서인지 그을음이 켜를 이룬 문틈으로 우러나오고 있는 불빛은 임종하는 노인네의 사위어들어가는 숨결처럼 가냘프기만 했다. - P153
바람이 아까보다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삘릴리리, 헤어져 너덜거리는 문풍지가 피리 소리를 내다가 멈췄다. 불빛이 까마득자지러졌다가 되살아났다. 방안엔 두 사람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문 쪽으로 등을대고 누운 노모는 잠이 들었는지 흠뻑 뒤집어쓴 이불깃 새로 머리끝만 기웃 내밀고 있는데, 그 머리카락이 반이나 허옇게 세어있었다. 그 너머 모로 누운 아들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광대뼈 위로 움푹 패어 들어간 눈알이 불길한 꿈을 꾸는 사람의 그것처럼 매앵했다. 밖은 끊임없이 들이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섞여 날아오는 파도 소리가 미묘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삘릴리리, 또문풍지가 울었다. 바람이 방문을 제법 거칠게 흔들었고 잠겨진 - P153
문고리가 두어 번 달그락거렸다. 등잔불이 기우뚱 잦아졌다가간신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순간 아들은 천장이 한꺼번에 펄럭무너져내리는 듯한 환각을 일으켰다. 움찔 몸을 사리며 그는 겁에 질린 시선으로 천장의 구석진 네 귀퉁이를 주저주저 훔쳐보기 시작했다. "어, 어무니." 아들의 입에서 겨우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다급하면서도 팽팽히 담겨져 있는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무니, 어, 어무니." 그제서야 이불 속에서 노파가 머리를 들었다. 잠이 설 들었던 참이었는지 눈자위가 눈곱으로 뀌적뀌적했다. "왜 그러냐, 으응?" 못박힌 듯 뻣뻣이 굳어 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휑한 눈을 치뜨며 후두둑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그녀는 놀라 아들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을석아. 어디가 아프냐. 아파서 그러는 거이야?" 노모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 P154
우수수 떨어진 감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쏠려 뒤란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빈 외양간에선 털썩털썩 가마니 날리는 소리가 났다. 뒷산 대밭에선가. 수많은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어대는 것처럼 기묘한 소리가 이따금 바람 끝에 묻어와 툇마루에 흩어졌다. 지금 그 바람 속에서 아들은 어지러운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부시게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둠 저편에서 그들은 옷자락을 하얗게 너울거리며 흐르듯 춤추듯 가볍게 떠오고 있었다. 문득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 발소리, 확성기 소리. 소리. 아악, 별안간 비명이 아들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순간 아들과 어머니가 동시에 벼락치듯 튕겨 일어났다. 아들은 벌써 몸을 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악 뛰쳐나가려는 아들의 다리를 그녀의 두 팔이 억세게 그러안았다. - P156
이윽고 을석은 일어섰다. 내려가야 할 때가 된 거였다. 짧은순간, 그들 다섯 사람은 팽팽히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불길한 긴장감을 저마다 의식했다. 숨이 컥컥 막혀왔다. 을석은 깨달았다. 그들은 각기 을석을 저울질해보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에서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오직 그혼자뿐. 까마득한 벼랑 꼭대기에서 그들 넷은 지금 끝이 다른 네가닥의 밧줄을 을석의 손바닥 안에 건네주려는 거였고 그 밧줄끝엔 다름아닌 그들 네 개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벼랑 아래로 내려가기 전, 늦기 전에 자신들의 생명을지키기 위해서라면 밧줄을 쥔 배신자의 손목을 가차없이 잘라내버릴 수도 있을 거였다. 벗어나고 싶다. 어서 도망치고 싶다. 거의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을석의 두 무릎이 무섭게 떨려왔다. 한치 앞을 분간키어려운 암흑의 정적에 갇힌 채 그들 모두는 다만 다섯 개의 벌떡이는 심장의 고동과 거친 숨소리를 서로 헤아리고 있었다. 딸각, 사내가 있는 쪽에서 가볍게 총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 P167
어둠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마주하고 앉는다. 세 개의 서랍이 서로 제각기 끝을 물고 물린 채 옆으로 나란히 달려 있는 화장대는유난히 커다란 거울 때문에 늘 무너져내릴 듯 불안하다. 거울 속엔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릿단을 수건으로 꼼꼼히 받쳐 맨 여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막 세수를 끝낸 여자의 눈가엔 군데군데엷은 잔주름이 드러나 있고 귓불 언저리엔 버섯처럼 각질의 마른버짐도 몇 돋아 있다. 난 거울 속의 여자와 결코 눈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건 버릇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않기로 했던 것이다. 맞닿을 듯 가까이서 똑바로 나를 노려보고있는 거울 속 여자의 눈은 언제나 소름끼치도록 싸늘한 적의와간절한 파괴에의 욕구로 비수처럼 불길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것이 다만 나의 투영된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것과 마주하고 앉기만 하면 이내 새파랗게 공포에 질려버리곤 했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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