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는 세상을, 고아처럼
김병익
한강은 우리 문단에서 가장 어린, 그러니까 이른바 ‘신세대‘에 속할 이십대 중반이다. 나이는 그렇지만, 그러나 『여수의 사랑』에 묶이는 그의 작품들은 전혀 ‘신세대적‘이지 않다. 그의 소설들에는, 그 또래의 소설이라면 자연스럽게 나올 팝이나 비디오, 영화나 만화가 조금도 비치지 않고, 섹스는 커녕,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도 없다. 서울의 거리와 아파트, 지하철 따위가 간간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현대적이라거나 도시적인 색조를 띠고 있는 것도아니다. 그의 작품 속의 세계는 오히려, 그의 아버지 세대가 지금의그의 나이로 살았을 196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에 속해 있을, 어둡고 간난스럽고 한스러운 세계이다. 그런 세계를 그의 인물들은, 고아처럼 떠돌고, 헤어지고 떠나며, 구역질하고 병들고, 혹은 죽음으로 포기한다. 그들은 역사라든가 변혁이라는 크고 무거운 짐을지는 대신, 그것보다 더 크고 무겁게, 세상이라든가 삶의 무게에 눌려 피로하고 외롭고 슬퍼하며 상처받는다. 그 모든 것들을 그려내 - P260
는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서정적이지만, 이즈음의 작가들처럼 관능적이거나 해체적이지 않고, 그의 감수성은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오늘의 세대처럼 경쾌하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그의 상상력은 자기시대 속으로 풀려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의 세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외 문학은 ‘포스티즘‘ 식의 새롭게ㅡ하기를 버리고 그래서 유행적인 것을 도모하지 않은 전통의 세계와 정통의 양식 속에서 그의 정서와 문화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한을 되는 그의 아버지인 모습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당대성을 거부하고 있다. - P261
적어도 겉보기로는, 풍요하고 밝고 미래는 한없이 열려 있는 듯한 이 1990년대의 중반에, 이 시절의 풍속에 어울려야 할 나이의 젊은 작가가 왜 그처럼 지쳐 있고, 헤매며 지치고, ‘이곳 아닌 어느 다른 곳‘으로, 그것도 아무런 ‘희망‘ 없는 길을 떠나서는, 어둠의세계 속을 표류하는 앞 세대의 고생스러운 길들을 밟고 있을까. 무엇이 그를 좌절시키고 게워내게 하며 광기를 일으키게 하고 삶에대한 피로 끝에 그것을 버리게끔까지 했을까. 이 가볍고 환한 세상에서 누가, 발랄해야 할 이십대의 그를 사랑도, 화해도 거부하게, 아니 그것에 다다르기조차 포기하게 만들고 설움 많은 노파의 표정으로 삶의 우수에 젖도록 만들었을까. 이제 와서는 보기 힘든 그 암울한 세상과 가혹한 정서들이 하필 이 신선한 나이의 여자 작가에게 깊은 음영을 드리우며 그의 정신과 영혼을 그늘지게 하고 있을까. 그는, 풍성하고 활기찬 이 시대의 모습이란 한갓 겉모습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직 그만이 겪고 혹은 상상하고 있는, 지금의 눈으로는 예외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세계를 드러 - P261
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혹은, 인정하기 두렵지만, 그가 그려내는 아픈 풍경들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인 모습으로 우리들 삶의 원형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근원적인 풍경인 것일까. 일곱 편의 길고 혹은 짧은 작품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깊은 괴로움을 받아들여가며, 무엇보다 먼저, 이 작가의 신상과 그의 문학의 속내를 더듬고 연결 짓고따져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답도 찾아내지 못했고 어떤 가름에 편들지도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작품이 내게 울려오는것들로부터,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슬프다, 슬픈 아름다움이다. 라는 느낌표만을 실속 없는 간투사처럼 되풀이하며 형체 없는 괴로움만을 키우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에서가 아니라가슴속에서, 그 울림들은 숱한 이랑을 만들며 널리, 멀리 번져갈 뿐이었다. - P262
나는 이 이명 속에서, 그의 이 세계를 어떻게 쑤시고 들어가고, 그 속에 어떻게 내 방식으로 길을 놓을 수 있을까, 나의 허튼방식이 내게 울려온 그 울림들을 깨진 쇳소리로 파투 놓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떠도는 그의 인물들처럼, 내 속도 그렇게여러 날을 떠돌았다. 그래서 나는 몇 날을 보냈고, 마침내 견디지못하고 이제 다시, 그의 작품들을 떠들어 펼친다. ‘여수의 사랑‘! 나는 마음을 냉랭하게 다잡고 속의 울림에 현혹되지 않기로 마음잡아 오직 작가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버리고 오직 그의 작품에만 매달리기로 해본다. 그러나 내 다짐처럼 나는 냉랭해질 수 있을까. 어떻든, 나는 그의 주인공처럼 내 마음의 여울에 따라,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나는 ‘여수의 사랑‘, 그 제목에서 다시 현혹된다. ‘여수‘? - P262
그것은 바다를 끼고 있는 땅의 이름이고 또 그곳을 향해 떠나는 서러운 마음의 이름이다. 여수(麗水)는 여수(旅愁)를 부른다. 어쩌면, 떠도는 사람과, 그들이 마침내 이를 물이 아름다운 고장은 같은것ㅡ곳일지도 모른다. ‘사랑‘? 그것은 붙안고 기쁨에 젖어 외쳐댈 수 있는 환한 마음가짐이기도 하고, 또 끝내는 이룰 수 없음을 너무나 분명히 알기 때문에 간절한 소망으로 새겨보기만 하는 어두운 느낌가짐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그래서, 이루어서든 이룰 수 없어서든, 아름답고 슬프다. 한강은 어떤 여수의, 어떤 사랑을 말하고있는가. 그곳은 어쩌면 자흔이 태어난 곳일지도 모르며 정선이 버리고 떠나온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사라져간 자흔의 온몸과 표정에는 짧은 생애임에도 한없이 떠돌며 살아온 사람의 피곤한 ‘여수‘가 깊이깊이 잠겨 있고, 스스로가 버렸다기보다는 그곳으로부터 쫓겨나 서울에서 힘들게 살아온 정선이 다시 가고 싶지않았지만 끝내는 그리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삶의 여수가 그녀를 떠밀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여수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 P263
분명히 사랑한다.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고, 그곳에서야말로 친숙하고 따뜻하고, 외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흔이는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라고 말하고 그 말을 껴안고 정선이도 밤기차를 타고 자기에게 멍울을 지워준 여수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것이란 말은 끝내 거기로는 가지 못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자흔이는 그리워만 할 뿐, 거기에 가지 못할 것이다. 여수를 향한 이 수줍은 그리움은 정선에게도 어두운 전조로 내비친다. 그녀가 여수역에서 기차를 내릴 때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혹독하게 - P263
후려치는 바람,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빗발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귀향이 고향과의 화해의 실현이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을 예고하는 것과 같다. 그녀와 자흔에게는 여수에 대한 사랑이란 어두움과 아픔을 점지하는 곳이기에, 아니, 끝내갈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르기에, 지치고 외로운 영혼이 속으로만 안타깝게 부르는 마음의 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수에 대한 사랑‘의 형태라는 점에서 자혼과 정선은 일란성 쌍둥이다. 두 여자는 우연히 한방을 쓰지만 전혀 상반된 성격과 태도를 갖고 있어서, 자흔이는 낙천적이고 둔감하며 금붕어를 돌보는것 외에는 살림살이가 허술하고 너저분하며, 그런 그녀를 못마땅히여겨 곧잘 심통 부리는 정선이는 분명하고 정갈하며 예민하고, 그래서 그렇지 못한 처지에 놓이면 구역질을 하고 위경련과 안두통의약을 먹고 이불이며 책 따위의 냄새들에 질력을 내며 씻은 손을 다시 씻는 결벽증을 부린다. - P264
이 엄연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정선은 두사람이 마찬가지로 "피로한 기색"에 빠져 있다는 공통점 (p. 24) 을발견한다. 두 젊은 여인들에게 공통되는 ‘피로의 기색‘! 그것은 한강의 인물들 모두가 공통으로 띄우고 있는 표정이지만, 그 피로는 바로 기구한 삶의 고단함에서 오는 피로이다. 자흔이는 그의 ‘기쁨‘의 글자로 만들어진 이름에도 불구하고, 여수에서 올라온 기차가 종착한 서울역에 갓난아기로 버려졌었고, 양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삶을 연명하고 있었고 한때의 꿈많던시절 한 대학생에게 속절없는 연정을 느낀 적이 있었고, 그러다 현재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정선과 한 해 동안 동거하면서 또 떠나야 한다는 집념을 갖고 있었다. - P264
다시 읽는데도 이 침잠에의 욕망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슬픔이다. 슬픔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때, 우리의 어떤 붙임말도 홈집일 뿐이다. 라는 생각을 내게 거푸 일으키게 한다. 그 슬픈 아름다움을 나는 오래전의 오정희에게서, 또는 근래에는 신경숙에게서 혹은 공지영에게서 느꼈었다. 그리고 이제 한강이라는 새 이름을 그 반열에 덧붙인다. 그런데 오정희에게서는 존재의 우수에서, 신경숙에게서는 사랑의 아픔에서, 공지영에게서는 지난날의 아픈 회고에서 그 아름다움이 오고 있다면, 한강은? 그녀의 슬픈 아름다움은 삶의 외로움과 고단함에서 온다. 그 삶은 비속한 일상의 결핍을 안고 있는 삶이고 그래서 그녀는 이 생활 세계의 좌절에 희망을 잃고 있지만, 그녀는 세속적 희망을 버리는 대신, 삶의 근원성으로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이끌어내고, 운명과 죽음에 대한 - P274
어두운 갈망과 그것들과의 때 이른 친화감을 키워낸다. 그 어두운친화감은 자연 또는 운명과의 친화감이고 그 점에서 그는 도시적이고 디지털적인 오늘의 젊은 작가들과 전혀 동떨어진, 아니, 상반된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서는 고전적인 세계관으로회귀하고 있지만, 이른바 ‘포스트모던‘적이라는 오늘의 삶에서도결코 비워낼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외로움의 자리를 짚어, 보여주고 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외양으로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를 잃어가며 바쁘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가짜이며 호도이고, 인간에 원천적으로 내재해 있는 그 슬픔과 외로움은 지울 수 없는 우리의 끈덕진 육체처럼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듯이. - P275
어떻든, 존재로부터의 벗어남, 그것의 두렵고 어둡고 깊은 절망에 대한 따뜻한 친화감이, 발랄할 이십대 중반의 상상력 속에서, 한밤중의 투명한 자의식 속에서처럼, 새록새록 자라나다니, 나는 끔찍하고, 전율한다. 나는 한강의 그 끔찍한 설움 속을, 이순(順)이 야금야금 다가오는 이 며칠 동안, 헤매고 있었고 내 안온한 일상의 바닥에 숨어 있는, 깊고 큰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진저리 속에서, 나는 일상 세계의 한강에게 말을 던져본다: 여기서 벗어나, 사랑을, 세속적인 사랑을 해보라. 그 사랑에서 기쁨과 고뇌를, 슬픔과 환희를 일구어보라. 그것이 기쁨이든 환희이든, 혹은 고뇌이든 슬픔이든, 사랑은 열망을 피우고 친화로 솟아나게 할것이다. 나는 그녀의 열망과 친화가 그녀의 나이를 되찾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1995] - P275
신판 해설
‘되삶‘의 고통과 우울의 내적 형식
강계숙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 오래 못 있을 것 같아요. 자흔의 마지막 독백을 들으며 나는 어렴풋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한강, 「여수의 사랑」
소설가 기형도
초판 해설에서 김병익은 『여수의 사랑을 가리켜 "전혀 ‘신세대적‘이지 않다"고, "그의 아버지 세대가 지금의 그의 나이로 살았을 196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시대에 속해 있을, 어둡고 간난스럽고 한스러운 세계"이며, "유행적인 것을 도모하지 않은 채, 전통의 세 - P276
계와 정통의 양식 속에서 그의 정서와 문학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고 말한다. 그리고 "적어도 겉보기로는, 풍요하고 밝고 미래는 한없이 열려 있는 듯한 이 1990년대 중반에, 이 시절의 풍속에 어울려야 할 나이의 젊은 작가가 왜 그처럼 지쳐 있는지, "이 가볍고환한 세상에서 누가, 발랄해야 할 20대의 그를 사랑도, 화해도 거부하게, 아니 그것에 다다르기조차를 포기하게 만들었을까" 묻는다. 「여수의 사랑』에 관한 한 이 물음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핵심적인 지적이다. 김병익은 "존재의 피로감, 희망 없음의 좌절감과 "고전적 낭만주의" 에서 답을 찾았지만, 삶의 원초적 고단함에서 발원하는 호소가 세대를 아우르는 정서적 교감을 낳는 보편성의 획득으로 나아간다는 설명에 충분히 긍정하면서, 이 소설집이 자리한 역사적 시간대를 고려하면 다른 답을 찾아볼 수도 있다. 가령, 긴밀히 상호 조응하는 동일한 이미지의 진눈깨비가 있다. - P277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기형도, 「진눈깨비」 부분
집채만 한 상선과 어선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항구 난간에 서 있는 동걸의 모습도 스쳐갔다. 콘크리트 바닥은 갯물로 젖어 있었다. 그의 손에서 그의 바수어진 젊음이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pp. 194~95) - P277
친구의 젊음이 위태롭게 소진되어가는 광경을 「야간열차의 영현은 접안렌즈로 들여다보듯 날카롭게 스치는 환영 속에서 감각한다. 영현의 눈앞에 떠오른 동걸이 그 순간 터뜨릴 독백은 「진눈깨비」의 저 읊조림일 터이다. 아니, 새벽신문을 돌리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쌍둥이 동생 곁에서 가장의 역할을 떠맡아 사는 동걸의 암담한 처지를 지켜보며 정체 모를 무력감에 휩싸여 삶을 탕진하는 영현야말로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어진 젊음‘의 상징으로, 생의 한 시절이 소멸되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는 ‘기형도적 인물‘이다. 동걸의 모습에서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는 토로를 읽는다면, 그것은 동걸을 대신한 영현의 뇌까림이다. - P278
실제로 영현은 까닭 모를 우울을 곱씹고 모든 것에 실망한 채겉늙었으며, 자신의 무력한 젊음이 헐거워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전히 껍데기였다"(p. 182) "나는 인생에관심이 없었다"(p. 114)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p. 184). 대체 이어진젊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젊음이 부서지고 있다고 여기는가? 가난한 생활고나 가족의 불행 때문에? 산다는 것이 본래 고행의 연속이어서? 아니면 타고난 성격이 우울질이라서? "무언가 사는 일을 귀찮아하는 듯한 그늘"(p. 115)을 거느린 동걸과 그런 동걸을 자기 분신으로 여기는 영현의 우울은 분명 기형도의 그것과 닮았다. 다시, 다음의 장면을 보자.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내가 깊이 잠든 사이에 자흔은 떠났다. 밑 - P278
창이 떨어진 단벌 구두를 꿰어 신고, 두 개의 볼썽사나운 여행 가방과 옷 보퉁이를 싸들고 갔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훤하게 밝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못에 걸리고 바닥에 널려 있던 자흔의 소지품들이 사라진 방은 낯설고적막했다. 온 방과 세면장이 안개 같은 정적으로 부옇게 젖어 있었다. (p. 56)
어둑어둑한 여름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 기형도 「그날, 부분 - P279
정선의 지나친 결벽증을 가학으로 느낀 자흔이 떠나고 난 뒤의 쓸쓸하고 적막한 방 안 풍경은 정선의 심리적 공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자흔의 외로움과 절망감, 부서질 듯 위태로운 앞으로의 행보까지 예감되는 안타까운 풍경이다. 그런데 「그날」의 ‘김‘을 ‘자흔‘으로 바꿔 읽으면, 방문을 열고 나가는 ‘김‘의 형상은 세상 밖으로 흩어지기 직전에 놓인 자흔이 된다. 어둑한 여름날 새벽녘 자흔은 아마도 ‘잠시 동안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걸어간 "젖은 길"은 정선의 "온 방과 세면장으로 이어져 "안개같은 정적으로" 그곳을 "부옇게" 적신다. 자흔과 ‘김‘, 자흔이 떠난후 여수로 향하는 정선에 의해 「그날」과 「여수의 사랑」은 기약 없 - P279
는 떠돎과 영원히 상실된 미래라는 주제로 한데 이어진다. 「여수의 사랑의 주인공들이 영현, 동걸, 정선, 자흔과 비슷한 질환을 앓고 있음을 떠올릴 때, 이 시절 한강의 소설 세계는 1990년대 중반 젊은 시인들의 내면을 차지했던 음울한 집단적 무의식을연상시킨다. 그러니 다시금 반추해보자. 그때 그 시절, 무슨 일이있었던가? 기형도의 시가 ‘상징적 죽음‘의 형식으로 이해되었다는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에서 특정 개인의죽음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죽음을 읽고, 그의 이름을 한 시대를 관류하는 문학적 아이콘이자 결절점으로 보았다. 그의 시와 죽음을 ‘무엇‘의 죽음을 대리한 표상으로 파악하였고, 그 ‘무엇‘이 내포하는 사회적·문화적 함의가 간단치 않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었다. - P280
문학에 관심이 있든 없든, 1990년대 중반 예민한 감수성의 젊은이들은 기형도와 상관없이, 기형도를 알지 못한 채로도, 기형도를 앓았다. 실체는 알 수 없었다 해도 ‘어떤‘ 죽음의 파장을 감지한 이들에게 꽤 오랫동안 ‘기형도적인 것‘이 머물다 가기도 했다. 세대적감성으로든, 집단적 무의식으로든, 젊은 축들은 문화적·사회적 죽음이라 칭할 만한 국면을 동시대적 사건으로 맞닥뜨렸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역사주의와 진보사관이 무너지면서 찾아온 ‘청년‘의 몰락을 그들은 앓았던 듯하다. 근대적 계몽 주체의 붕괴로 일반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계몽주의의 위기와 함께 도래한 주체의 죽음을1990년대 한국시는 ‘청년‘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드러내었고, 그 죽음은 몇몇 시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세대적 공통감각으로, 역사적 혼란과 상실감의 또 다른 얼굴로 내면화되었다. ‘청년‘의 구호와 호명은 여전했지만, 더 이상 누구도 ‘청년‘은 아니었으며, ‘청년‘으로 살 수 없는 젊은이들은 아팠고, 절망했고, 고독했고, 우울했다. - P281
"고통은 지속될 것이며 어디에서도 그것을 진정할 수 없으리라는 초조함"(p. 205)은 ‘시인‘의 몫으로만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이제와 보니, 『여수의 사랑은, 그리고 이 시기의 한강은 당시의 어떤 소설가보다도 이러한 동시대, 동세대의 망탈리테 (심성, mantalité)에 강하게 공명하며 육박하였고, 타고난 감응력으로 죽음이 난무를 추던 시의 통증을 소설적 버전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르 이월(越)의 이러한 유비적 조응을 통해 전통적 서사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신세대‘적이지 않고 ‘아버지 세대‘에 속해 있다고 독해되기도 했지만, 동세대의 고통과 절망을 기법이나 형식의 실험으로 환원하지 않고 정신과 감성과 육체의 전 영역 심각한 심인성 장애에 시달리는 ‘여수‘의 주인공들을 떠올려보라!에 걸쳐 오롯이 체현하는 인물들을, 그들의 삶의 내력과 치열한 아픔의 현장을 구상하고 구축해내었던 것이다. 그러니, 감히 이렇게 말하겠다. 『여수의 사랑』의 한강은 단 한명의 ‘소설가 기형도‘라고. - P282
그런 점에서 「여수의 사랑』은 각각의 개인이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안고 각자의 ‘여수(水)‘를 향해 느릿느릿, 그러나 마치주어진 운명의 수락을 조용히 거부하는 수난자처럼 자기 몫의 고통을 지고 회귀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이 앓는 병이야말로 삶에의 의지를 대신 표현하는지 모른다. ‘질병으로의 도피‘는자이를 위협하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방어책이기도 하다. 이들의 병은 생을 파멸로 이끄는 죽음충동의 소산이 아니라 자기를 파괴시킬지도 모르는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고자 의식과 무의식이 한판 싸움을 벌여 자아 내부에서 힘겹게 조율된 결과물이다. 그러니 ‘여수(旅愁)‘의 인물들은 죽고자 아픈이들이 아니라 살고자 아픈 이들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속력"(p. 68)은 의식의 부면으로 솟구치는 상처의 속력이자 상처에 - P292
지배받길 원치 않는 욕망의 속력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가리켜 삶의 욕동이자 에로스적 충동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되돌아간 ‘여수(水)‘는 결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다.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p. 58) 친다. 이들의 여정이 해피엔딩으로끝나기엔 치러야 할 삶과 죽음의 다툼이, 목숨의 치명적 회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 P293
그러나 우리에겐 젊은 영혼들의 이 길고 지루한 도정이 값지기만하다. 「여수의 사랑이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튼튼히 살아남을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은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오오 계절이여! 오오성(城)이여!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지만, 홈 있는 영혼들, 상처받은 영혼들은 살기 위해 때로 죽어야한다. 그것이 존재를 위협하는 죽음으로부터, 엄혹한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여수의 사랑은 그러한 역설의 진실을 소설의진정한 육체로서 실현한 우리 시대의 가장 젊은 ‘고전(古典)‘이다. [2012]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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