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이후 그날처럼 서로가 그렇게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다. 솔직하지만 그 이면에 반발심이 깔린 그의 고백은 그녀를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물러나게 한 원인보다, 자기가 물러났다는 것 자체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얼마나 가까이 끌려가 있었는지 알게 됐고,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자, 그 물러남으로 인해 친밀감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연민과 더불어, 상대를 개조하고자 하는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생각들도 솟아났다. 여기까지 크게 발전해 온 이 미숙한 젊은이를 그녀는 구할 것이다. 그의 어릴적 환경이 내린 저주로부터 그를 구할 것이며, 그도 모르게 그를 그자신으로부터 구할 것이다. 이 모든 생각은 그녀로 하여금 매우 고상한 의식 상태에 머물게 만들었다. 그 이면에, 그리고 그 저변에 사랑의 질투와 욕망이 있는 줄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 P219
"그의 손이 떨려요." 수치심으로 여전히 얼굴을 어머니 무릎에 묻은 채 루스는 고백을 이어 갔다. "그게 가장 재밌고도 우스꽝스러워요.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안됐기도 해요. 그의 손이 너무 떨리고 눈이 너무 반짝일 때면, 나는 그의 인생과, 그가 자기 인생을 고친답시고 동원하는 잘못된 방법들에 대해 훈계해요. 그런데 그는 나를 추앙하거든요, 나는 알아요. 그의 눈과 손은 거짓말을 못 해요. 그가 나를 추앙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 나로 하여금 어른이 됐다고 느끼게 해요. 당연히 나의 것인 뭔가를 갖게 됐다고 느껴요. 다른여자애들처럼, 그리고 젊은 여자들처럼 말이에요. 예전에는 내가 다른 여자들과 같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어머니를 걱정시켰다는 것도요. 어머니는 걱정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끝내주게 해내고 싶었어요. 마틴 에덴이 말하는 식으로 표현하자면요." - P224
그런데 마틴의 힘과 건강은 신통했다. 그녀의 동부 체류 계획을 통보받자 그는 서둘러야 한다고 느꼈다. 루스 같은 여자에게 어떻게사랑을 고백해야 할지 그는 몰랐다. 그녀와 완전히 다른 수많은 아가씨들이나 여인들과의 경험은 도리어 장애가 됐다. 그 여자들은 사랑과 인생과 연애 행각을 알았던 반면, 루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의 기막힌 순진함은 그를 긴장하게 만들어서, 말은 딱딱하게 얼어붙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그 역시 이전에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방만하게 지내던 과거에 그는 여자들을 좋아했고 그 중 몇몇에게는 홀리기도 했으나,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내키는 대로 능숙하게 휘파람을 불기만 하면 여자들이 그에게 왔다. 그 연애들은 기분 전환용이었고, 부수적인 것이었다. 남자들이 하는 놀이의 일부, 그것도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그는 애걸하는 심정이었다. 과민하고 소심하며 확신이 없었다. 사랑의 방식도 언어도모르는 채 그는 사랑하는 이의 해맑은 순수함에 겁을 먹고 있었다. - P228
그래서 그는 루스를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충격을 줄까 봐 두려웠고, 스스로확신도 없었다. 자신이 그녀와 함께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가알았더라면! 사랑은 인간이 말을 또렷하게 하기도 전에 세상에 출현했고, 미숙한 채로 제 방식과 수단을 찾아냈으며 결코 잊지 않았다. 이런 오래되고 원시적인 방식으로 마틴은 루스에게 구애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자기가 그러는 줄도 몰랐다. 그녀의 손에 그의 손이 스치는 것이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어떤 말보다 강력했으며, 그녀의 상상을 이끄는 그의 감화력이 수천 세대 동안 연인들이 읊고 쓴 연모의 미사여구보다 매력적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의 판단에 얼마간 영향을 미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손의 스침, 그 찰나의 접촉은 그녀의 본능에 바로 가 닿았다. 그녀의판단력은 그녀 자신처럼 미숙했으나, 그녀의 본능은 인간 종족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노숙한 것이었다. 사랑이 어리면 본능도 어리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관습과 견해, 인류 역사에 새로 태어난 모든 것들보다는 현명했다. 따라서 그녀의 판단력은 작동하지 않았다. - P229
아름다운 가을날이 왔다. 따뜻하고 나른하며, 계절의 바뀜으로 잔잔히 설레었다. 태양은 뿌옇고, 부드러운 바람결이 대기의 선잠을 깨우지 않으면서 어슬렁거리는, 캘리포니아의 인디언 서머였다. 잘 짜인 직물 같은 자줏빛 안개의 막이 구릉지의 계곡을 가리고, 샌프란시스코는 고지에 몽롱한 연기처럼 누워 있었다. 그 사이에 가로놓인만은 용해된 금속의 둔한 광택을 띠었으며, 물에 떠 있는 선박들은 움직임이 없거나 느린 조류에 게을리 밀려갔다. 멀리 타말페이 산이 은빛 아지랑이 속에 거대한 자태를 어렴풋이 드러냈고, 그 옆에금문교는 저물어 가는 태양 아래 옅은 금빛 오솔길처럼 뻗어 있었다. 그 너머, 겨울의 거친 첫 날숨을 경고하며 내륙으로 넘실대며 밀려오는 구름을, 흐리고 드넓은 태평양이 수평선 위로 밀어 올렸다. 소거될 때가 임박했으나 여름은 꾸물거렸다. 언덕에서 서서히 바래져 갔으며, 계곡의 자줏빛을 짙게 했고, 기우는 기력과 충분히 즐 - P237
기고도 남은 황홀로 아지랑이의 수의를 자아내다가, 다 살았고 잘 살았다는 차분한 만족감으로 죽어 갔다. 구릉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둔덕에 마틴과 루스가 나란히 앉아 책을 함께 굽어보고 있었다. 브라우닝을 사랑한 여인의 연시를, 마틴은 큰 소리로 읽었다. 그토록사랑받은 남자는 드물 것이기에. 그러나 낭독은 시들해졌다. 주위를 지나쳐 가는 아름다움의 마법이 너무 강했다. 황금 같은 한 해가 시들어 갔고, 후회 없이 아름다웠던 방탕한 삶과 황홀경의 추억이, 그리고 만족감이 대기에 무겁게실려 있었다. 마법에 걸린 그들 또한 꿈을 꾸는 것 같았으며 정신력이 느슨해졌다. 그들의 도덕관념이나 판단력을 아지랑이와 자줏빛안개가 뒤덮어 버렸다. 마틴은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듯했으며 이따금 열기에 휩싸였다. 그의 머리는 그녀의 머리에 아주 가까이 있어서, 어슬렁대는 산들바람의 정령이 흐트러뜨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에닿으면 눈앞에 있는 책의 활자들이 헤엄을 쳤다. - P238
점원의 변변찮은 벌이로 자기와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어? 나는 자기에게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가장 최상의 것을 해 주고 싶고, 내가 그런 걸 원하지 않을 때는 더 좋은 게 나왔을 때뿐일 거야. 그러면 나는 그 더 좋은 걸 몽땅가져올 거야. 성공적인 작가의 수입에 비하면 버틀러 씨는 초라해 보일 지경이야. 베스트셀러 작가는 오만 내지 십만 달러를 번다고. 때로 더 벌기도 하고 때로 덜 벌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액수에 가까워"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실망했음이 역력했다. "어때?" 그는 물었다. "내가 원하고 계획한 건 다른 거였어. 내가 자기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건, 속기를 배워서.. 자긴 이미 타자를 칠 줄 알잖아. 우리 아버지 사무실에 들어가는 거야. 자긴머리가 좋으니까, 변호사로 성공하리라고 나는 확신해."
작가로서 마틴의 능력을 루스가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틴은 그녀를 달리 보거나, 폄하하지는 않았다. 휴식으로 그는 기운을 - P256
차렸고, 자기 분석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자신에 대해 훨씬 잘 알게되었다. 그는 자신이 명성보다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제 명예욕은 주로 루스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명예욕이강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해지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훌륭하다고 여기게끔, 자기식 표현으로, ‘끝내주게 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자신은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랑해서 아름다움을 섬기는기쁨만으로 보상은 충분했다. 그런데 그는 아름다움보다 루스를 더사랑했다. 그에게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 혁명을 일으켜 투박한 선원에서 학생이자 예술가로 바꿔 놓은 것이 사랑이었다. 셋 중에서 가장 멋지고 위대한 것, 배움과 예술적 숙련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랑이었다. 자신의 지성이 루스의 동생들이나 그녀 아버지의 지성을 능가했듯이, 그녀의 지성도 능가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학 교육의 모든 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문학사 자격증 앞에서도, 그의 지적 능력이 그녀의 지적 능력을 넘어섰다. 일 년가량의 독학과 작가 수업이 그녀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세상사와 예술과 인생에 통달하게 해 주었다. - P257
그는 이 모든 걸 알았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도,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판으로 손상시키기엔 사랑은 너무나 멋지고 고귀하며, 그는 너무나 충직한 연인이었다. 예술, 올바른 행위, 프랑스 혁명, 평등 선거권에 대한 루스의 견해가 그와 다르다고 해서 사랑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런 것들은 사고하는 과정이지만 사랑은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직관적인 것이었다. 그 - P257
는 사랑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 사랑을 숭배했다. 사랑은 이성의 저지대 너머 산꼭대기에 있었다. 존재가 승화된 상태, 삶의 최절정인사랑은 드물게 오는 법이었다. 그가 애독하는 과학적인 철학자들 덕분에 그는 사랑의 생물학적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과학적 추론을 정교하게 진전시켜, 인간의 생체는 사랑으로 그 최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랑은 따져서는 안 되고, 삶이 주는 최고의 보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인이 어떤 생명체보다 축복받은 존재라고 여겼다. 지상의사물들 위로, 부유함과 평가와 여론과 박수갈채 위로, 삶 자체 위로떠 오르면서 ‘입맞춤으로 죽어가는, 신이 선택한 연인‘들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이런 생각들 중 많은 것들은 이미 정리된 생각들이었고 일부는 나중에 정리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루스를 만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글을 쓰며 스파르타인처럼 살았다. - P258
작가 수업에 있어서 그는 진일보했다.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이 이룬 결실을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그들의 성공 비결인 내러티브, 설명, 문체, 시점, 경구를 알아냈다. 그리고 이 모두를공부 목록으로 만들어 두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방하지 않았다. 원칙을 파헤쳤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추려낸 효과적이고도설득력 있는 기법의 목록을 만들어, 기법의 일반적 원칙을 도출했다. 그럼으로써 자기만의 새롭고도 독창적인 기법들을 찾아냈고, 그 기법들을 재량껏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비슷한 방식으로 강렬한 문장들, 살아 있는 언어로 된 문장들, 산(酸)처럼 자극적이고 불길처럼통렬한 문장들이나, 일상 언어의 무미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서 빛나는 감칠맛 나고 달콤한 문장들의 목록을 모았다. 그는 언제나 그 배후와 저변에 깔려 있는 원칙을 찾으려 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를알고자 했다. 알아낸 후에는 스스로 해낼 수 있었다. 그는 아름다움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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