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지의 것들에 둘러싸여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됐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걸음걸이 때문에 어색하게 보인다는 걸 의식했으며, 제 모든 행동거지와 자질이 마찬가지로 나쁘게 보일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극도로 예민했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아서가 편지 너머로 자신을 훔쳐보는 눈길이 몸을 쑤시고 드는 칼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서의 재미있어하는 눈길을 보고도 내색하지 않았는데, 그건 절도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칼로 찌르는 듯한 시선에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그는 이곳에 온 자신을 저주했으며, 동시에 이왕 왔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버텨 내겠다고 결심했다. 표정은 단호해지고 눈에는 전의가 깃들었다. 그는 더욱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예리하게 관찰했다. 아기자기한 실내 장식이 그의 뇌리에 세밀하게 새겨졌다. 크게 벌어진 그의 두 눈은 시야에 들어온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빨아들이자, 두 눈에서 전의가 사그라들고 따스한 빛이 생겨났다. 그는 아름다움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으며, 이곳에는 호응할만한 것이 있었다. - P17
아서는 말했다. "루스, 이 분이 에덴 씨야." 집게손가락으로 책이 접혔다. 그들을 돌아보기도 전에 그는 처음 겪는 새로운 느낌에 전율했다. 젊은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남동생이 한 말 때문이었다. 에덴의 근육질 몸 안은 지독히 섬세한 감수성의 덩어리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외부 영향일지라도 그의 의식에 미치면, 그의 생각과 공감과 감정은 불꽃처럼 치솟아 하늘거렸다. 그는 유별나게 잘 받아들이고 잘 반응하는 성격이라서, 그의 뛰어난 상상력은 늘 유사성과 차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예민하게 작동해 왔다. ‘에덴 씨‘라는 말은 그를 전율하게 했다. ‘에덴‘이라거나, ‘마틴 에덴‘이라거나, 그냥 ‘마틴‘이라고 평생 불리던 그가, ‘씨‘ 라니! 그는 속으로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논평했다. 그의 마음은대번에 거대한 카메라 렌즈로 변했고, 의식 주변으로 끝없이 늘어서는 제 삶의 장면들을 보았다. 기관실과 선원실, 병영과 해변, 감옥과선술집, 열병 치료소와 슬럼가가,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그가 다 달리 불리던 호칭과 연계되어 떠올랐다. 마침내 그는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모습에 머릿속 환영은 사라져 버렸다. - P19
식사하는 동안 마틴은 ‘핑거 볼‘에 대한 궁금증에 내내 사로잡혀있었다. 그 상황에 적절치는 않지만 그는 끈질기게, 수십 번씩이나그것이 언제 들어올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했다. 이제 조만간, 몇분 후면 말로만 들어 왔던 그 핑거 볼이란 물건을 보게 될 것이다. 그그릇에 손을 씻는 높으신 분들과 함께, 아, 자신도 거기에 손을 씻을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의식 표면에 늘 도사리고 있는 문제는 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것이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는 끊임없이 그 문제와 씨름했다. 자기도 그들 가운데 하나인 척하자는 비겁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원래 기질에 맞지 않으니 그런 척해 봤자 될 리가 없으며 결국 조롱감이 되고 말 것이라는 더욱 비겁한 생각도 들었다. - P33
그는 하프였다. 그가 알고 의식했던 모든 삶은 현이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음악은 그 현들에 부딪혀 기억과 꿈을 울려 나오게 하는 바람이었다. 단순히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각은 형태와 색깔과 광휘를 입어, 그가 무엇을 상상하든 마술적인 방식으로 그 상상을 구체화시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였다. 그는 그 넓고 따뜻한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험난한 모험과 고귀한 행위들을 하면서 그녀를 향해. 아,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얻어 그녀와 함께, 그녀를 품에 안고 마음의 왕국을 가로질러 날았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그를 힐끔 돌아보았고, 그의 얼굴에서 이 모든 것의 기미를 발견했다. 완전히 달라진 얼굴이었다.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이 소리의 장막 너머 생명의 약동과 정신의 장엄한 환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쳤다. 미숙하고 쩔쩔매는 촌뜨기는사라졌다. 맞지 않는 옷, 상처투성이 손, 햇볕에 그을린 얼굴색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감옥의 쇠창살인 듯싶었다. 쇠창살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제대로 말할 능력이 없는 어눌한 입 때문에 말을하지 못하는 한 위대한 영혼을 그녀는 보았다. 이걸 본 건 오직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촌뜨기가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일시적 공상에 실소했다. 그래도 순간적인 일별의 여운은 남았다. 그가 머뭇대며 물러가려 할 때 그녀는 그에게 스윈번 시집과 함께 브라우닝 시집을 빌려주었다. - P43
그러나 그가 그녀의 눈에서 본 것은 영혼, 절대 죽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었다. 그가 아는 어떤 남자도 여자도 그에게 불멸이라는 메시지를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것을 주었다. 처음 그를 본 순간, 그녀는 불멸을 속삭였다.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직 영혼만이 지을 수 있을 듯한 연민과 상냥함이 담긴 미소를 짓는, 창백하고 진지하며 다정하고 예민한, 그가 결코 꿈도 꾸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순수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순수함이한방 먹이듯 그를 강타하며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선과 악을 알았으나 순수함은 존재의 한 속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이제 그녀로 인해 그는 순수함이 최상의 선함과 정결함이며, 둘의 합이 영원한 생명을 이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잡고 싶다는 야망이 즉시 밀려왔다. 그는 그녀에게 물을 떠다 주기에도 모자란 인간이었다. 그는 알았다. 그날 밤 그녀를 보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기적적인 행운과 환상적인 우연 덕분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얻을 자격이 마틴에겐 없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기분이 들었다. - P46
어느 정도 그는 도덕적 혁명을 겪었다. 그녀의 정결함과 순수함은 그에게까지 다다라서, 그는 제 존재가 깨끗해져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녀와 같은 공기를 숨 쉴 자격이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깨끗해져야 했다. 이를 닦았고, 부엌 솔로 손을 문질러대다가 약국 유리창으로 보이는 손톱 솔의 용도를 알았다. 손톱솔을 사려는데 그의 손톱을 본 점원이 손톱 다듬는 줄을 권했고, 그래서 그는 화장 도구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몸 관리에 관한 책을 우연히 읽고는 바로 아침마다 찬물로 목욕하는 취미를 개발하여, 짐을 몹시 놀라게 했다. 그런 야단스런 개념들에 공감하지않는 히긴보삼 씨는 몹시 황당해했으며, 마틴에게 추가로 물값을 물려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또 다른 진보는 바지에 줄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안에 눈을 뜬 마틴은 바지의 계급 간 차이에 신속히 주목했다. 무릎이 불룩한 노동 계급의 바지와 달리, 상위계급 남자들이 입는 바지는 무릎부터 밑단까지 똑바른 선이 내려왔다. 그는 또 그 이유를 알아냈고, 누나의 부엌에 침범해 다리미와 다림질 판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바지 하나를 완전히 태우고 다른 바지를 사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 지출 탓에 그가 바다로 나가야 할 날이 더욱 앞당겨지게 되었다. - P73
그는 깨어 있는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았고, 잠자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그의 주관적인 정신은 다섯 시간의 휴지기에 저항했고, 낮에 겪은 일들과 생각을 결합시켜서 기괴하고 불가능한 경이를 만들어냈다. 사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몸이 약하거나 두뇌가 덜 견고한 일반적인 경우라면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요즘은 오후에 루스를 보러 가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녀가 대학 과정을 끝내고 학위를 받아야 하는 6월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문학사! 그녀의 학위를 생각하면, 자기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녀가 저 너머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 P137
너는 누구야, 마틴 에덴? 그 밤 하숙방에 돌아와서, 그는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물었다. 자신을 오래도록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야? 무엇이야? 어디에 속해? 너는 당연히 리지 코놀리 같은 아가씨들에게 걸맞아. 너는노동 군단에 속하고, 낮고 천박하고 추한 모든 것에 어울려. 악취 나는 환경에서 소처럼 일하는 무리의 일원이지. 지금도 상한 채소의 냄새가 나. 감자가 썩고 있어. 그 냄새를 맡아, 빌어먹을 놈, 맡아 보란말야. 그런데도 너는 건방지게 책을 펴고, 고전 음악을 듣고, 근사한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고, 고상한 영어를 구사하고, 네가 속한 계급의 사람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을 하고, 노역자들과 리지코놀리로부터 자신을 억지로 떼어 내어 한 창백한 여인을, 너로부터 백만 마일은 떨어져 별들 속에 사는 여인을 사랑하지! 너는 누구지? - P147
뭘 하는 놈이지? 빌어먹을 놈! 끝내주게 해내겠다고?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는 침대 구석에 앉아서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런 뒤 공책과 대수학책을 꺼내 2차 방정식을 푸는 데 몰두했다. 시간이 흘러 별빛은 흐려졌고, 새벽의 여명이 그의 창에 밀려들었다. - P148
스펜서가 거의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한동안 납득할 수 없었다. "허버트 스펜서." 도서관의 사서는 말했다. "네, 그래요. 위대한 지성이죠." 그러나 사서는 그 위대한 지성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듯했다. 어느 날 저녁, 버틀러 씨도 동석한 식사자리에서, 마틴은 화제를 스펜서로 돌렸다. 모스 씨는 그 영국인 철학자의 불가지론을 통렬히 규탄했으나, 「제1 원리는 읽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버틀러 씨는 스펜서가 견딜 수 없이 싫고, 그의 책은 한 줄도 읽지 않았으며, 그런 책을 읽지 않아도 무척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마틴의 마음 속에 의혹이 일었다. 주관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는 일반적인 의견을 받아들여 허버트 스펜서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물에 대한 스펜서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펜서를 포기하는 것은 항해사가 나침반과 항해용 정밀 시계를 배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마틴은 계속해서 진화를 철저히 공부했고, 그 주제를 스스로 정복해 나갔으며, 수천명의 독자적인 작가들의 확인에 힘입어 믿음을 굳혔다. 공부하면 할수록 아직 탐구하지 못한 지적 영역이 바라다보였다. 하루가 스물네시간밖에 안 돼서 불만이라고 그는 입버릇처럼 투덜거렸다. - P1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