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목소리의 개성에 나는 놀랐다. 대화할 때는 특별한 점을느끼지 못했는데, 노래하는 인아의 목소리는 무척 맑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맑기만 하던 그 목소리가 높은 음역대로 들어갈 때마다 미묘하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유리잔처럼 섬세한 그 목소리의 표면에, 기묘하게 처연한 슬픔 같은것이 자잘한 물방울들처럼 응결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 P69

인아의 말대로, 이런 날의 밤 산책은 나에게 환영의 숲이나 바다 아래를 걷는 것이다. 원피스를 입고 힐을 신고 진하게 화장을 하고, 내가 태어나 자란 도시의 번화가를 목적 없이 걷는다. 내가 아는 누구를 우연히 이 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휘황하고, 가슴 아프도록 절실해서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반보 앞에서 걷고 있는 인아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언저리의 뜨거움은 곧 식혀진다. 얼음이나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 옆얼굴을 뒤따라 나는 계속 걷는다.
눈부시던 번화가의 불빛이 차츰 성글어지다 문득 황량한본모습을 드러낸 거리의 끝에서, 인아는 걸음을 멈추며 나에게 묻는다. - P79

이런 날의 밤 산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선을 견디는 것이다. 편견과 혐오, 경멸과 공포의 시선들, 때로 노골적이고 더러 은근한 그것들을 감지하며 잠자코 앞으로 나아간다. 이따금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이 담긴 시선을 만날 때 인아는 나에게 말을 건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다. 활짝 눈웃음치는 눈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럴 때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짧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한 쌍의 레즈비언이 햇빛 환한 거리를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서로의 뺨과 어깨와 팔을 애무하며, 웃음과 입맞춤을 나누며 건물들의 모퉁이를 돌고 또 돈다. 십 분 가까이 침묵 속에서 그들의 다정한 오후를 비추던 카메라는 그들이 사라진 모퉁이를 뒤따라 돌아가, 둔기에 머리를 맞고 피 흘리며 죽어 있는 그들을 마지막으로 위에서 비춘다. 핏속에 나란히 누워 있는 그들의 몸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 P80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분수대 앞의 벤치에서 우리가 그 고백들을 주고받았을 때 인아는 결혼 생활을 막 청산한 상태였다. 얼마간의 위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ㅡ 역시 정확히 묻지 못했지만, 인아가 경험한 어떤 폭력이 환산된 금액인 것 같았다 ㅡ당장 생계가 쫓기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인아는 그 후 첫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했다. 대형 마트의 캐셔 일이 가장 먼저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급자의 눈에 들어 환불처리팀으로 옮겨갔는데, 한 번 더 부서를 옮기게 되었을 때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로는 수개월에 걸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까맣고 독한 액체 같은 게 뒤통수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아. 그럴 땐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잠을 잘 수도 없어.), 거의 위 - P81

험하게 느껴졌던 마지막 순간에 대학 시절 밴드를 함께 했던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당시 인아의 상태가 너무 나빴기 때문에, ‘일어나서 움직여봐‘라고 꾸준히 격려하는 중에도 나는결국 인아가 회복될 수 없을 거라고 몰래 예상했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화분에서 기이하게 선명한 꽃이피듯 인아는 되살아났다. - P82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도 인아다. 그런 순간 막연히 만나고 싶었던, 모르는 누군가의 희끗한 얼굴과 무심코 겹쳐지는 사람도 인아다.
인아의 얼굴에서 곧 웃음이 걷힌다. 나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10센티 굽의 에나멜 구두를 절름절름 끌며 더 걷는다. 물이 마른 우물 속처럼 비좁고 더러운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녀에게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말한다. - P87

(이제 난 늙어가고 있고, 앞으로 더 늙을 거야.)
인아가 입을 다물었다 뗄 때마다 가느다란 주름들이 입가에 패었다 지워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녀가 반년쯤 전 장기와 각막 기증 서약을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기운이 날 때마다 헌혈 차량의 비닐 침대에 누워 두 팩씩 피를 뽑아왔다는 것을,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수십 장의 헌혈 증서를 보고 알았다. 시체까지 의학생들의 해부실습을 위해 내놓을 거라고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을 때 나는 못 들은 척 눈을돌렸었다. 살이 다 발라진 인아가 꿈틀거리며 수술용 침대 위에서 몸을 뒤트는 환상 때문이었다.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 - P91

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무언가에 항의하는 것처럼 단호해진 말씨에, 나는 숨을 죽인채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네가 방금 물었던, 왜 그런델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이 아니야. 그 대답은 너에게 하고 싶지 않아.) - P92

주춤주춤 사과하듯 나는 말했다.
이젠 뭐 다 끝났는걸. 지금부터 사 년쯤 조심해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 언니 여행 이야기 해봐, 인도는 어땠어?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조금 웃었다.
글쎄, 이번엔 여행이 아니었어. 그냥 거기서 살았던 거지.
그러니까, 살았던 이야기를 해봐.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그때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내가 메뉴판을 펼치고 막 마실 것을 고르려는데, 은희 언니는 주변의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09

그 이야기 때문에, 그날 은희 언니가 들려준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잊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그때 처음으로 은희 언니를 닮은 어떤 여자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밝아지지 않은 새벽, 시체가재가 되고 덩이들만 하얗게 남은 자리에 여태 지글지글 끓는 심장. 그걸 내려다보다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는 어떤 여자. 그 여자가 고개를 들면, 무섭도록 낯익은 얼굴꺼진 눈, 두드러진 광대뼈, 검게 죽은 내 입술이 그을린 살갗 가운데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 P110

의사의 진단을 들은 직후, 내 인간관계는 계속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애써 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거의 직관적으로 빠르게 이뤄진 그 압축의 과정에서, 은희 언나는 내가 계속 만날 수 있다고 느낀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수술을 앞뒀던 늦은 봄, 이 길을 걸으며 은희 언니 생각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얼마 전 인도로 떠난 그녀를 다시 만날수 있다면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다. 발바닥을 지압하도록 산책로 끝에 깔려 있는 하얗고 뾰족한 돌들을 맨발로 밟아보게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윤이는 이 돌 모양이 새 같대, 언니 눈에도 그렇게 보여? 자주 연락하고 싶었는데, 언니 자신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게 어쩐지 겁이 나서 그러지 못했어. 주말에 불러내서 뭐든 먹이고 싶었는데, 찐새우를 고소한 찹쌀 전병에 말아주는 중국집에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러다 언니가 여행을 시작해서 좋았어,
움푹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 같았어. - P111

변명하고 싶다.

은희 언니를 닮은 어떤 여자에 대한 소설은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문장만을 써두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열대 지방의 느낌을 머리로는 상상할 수없어 회복된 뒤 처음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내 계획을 메일로 받아본 은희 언니는 흔쾌히 답장을 보냈다. 설렌다, 정말 여기로 네가 오다니.
어젯밤 편집자에게 넘기려 했으나 이제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그 어떤 여자에 대한 새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적당한 여행사를 검색해 항공권을 예매하고, 자료를 모으고, 여정을 짜고, 저녁마다 조금씩 짐을 꾸렸던 지난 한 달은 나에게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단순한 문장만큼이나 조용하고 밝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 순간의 내가 써낼 수 있었던 가장 가볍고 고요하고 환한 문장이었을 뿐이다. - P112

부질없는 심문과 대답 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결코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시간.
오직 삶을, 삶만을 달라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기어가구걸하고 싶던 시간.

그 시간들이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다. 모래톱 저쪽의 바다처럼, 아직 지척에서 일렁이며 소리를 낸다. 짠물이 덜 마른흙 같은 몸이 아직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한다. - P120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123

변명할 수 있을까.

그 꿈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이해했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은희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꿈을 듣고 이해한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 - P126

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 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그러나 그중 한마디 말도 나는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오래전에 단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꽉 안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다만 은희 언니가 제 힘으로 찾아가는 곳의 여름이 그녀를 구할 거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었을 어떤 말보다 강렬한 열기와 소낙비로, 물을 머금고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열대의 꽃과 나무로. - P127

저물 무렵에야 돌아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들었다. 윤이가 부르는 소리, 깨우지 말라고 동생이 달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생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얼핏 잠이 엷어질 때마다 숲의 산책로가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조금 더 버티면, 후회와 고통을, 깊게 찌르는 자책을, 안 지워지는 얼굴을 등지고 조금 더. - P128

조금씩 무엇인가 몸속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한 계절 한 계절의 시간들이 차츰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느낍니다.
지난해 여름 이곳으로 이사한 뒤 처음으로 운동장을 달렸을 때는 한 바퀴도 다 뛰지 못했습니다. 허파와 심장이 모두 터져버릴 것 같아서요. 아이가 있을 때는 아이와 함께, 아이 - P213

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는 혼자서 하루에 반 바퀴씩 늘려갔습니다. 다섯 바퀴를 쉬지 않고 뛰고 난 오후, 운동장을 빙 둘러 심어진 나무들을 세어보았습니다. 키 큰 자작나무들이 모두 스물두 그루였어요. 다 세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뭉클뭉클한 흰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림들에 제목이 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당신은 하늘이라고 대답했지요. 두번째로 입원했던 열두 살 때, 너무 심심해 종일토록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곳이 얼마나 가슴 뛰는 공간인지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평생토록 여행다운 여행 한번 해본 적 없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꿈틀거리며 변하는 형상과 색채들이 경이롭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늘을 보던 어느 순간, 영원과 무한 같은 것을 생각이나 느낌이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내가 말하자 당신은 심상하게 대답했지요.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리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가에 가득 잔주름을 만들며 웃었지요. - P214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 P214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랫벌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물어도 되겠지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 P215

잔멸치 떼를 만난 적이 있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일제히반짝이며 배 밑을 헤엄쳐 갔다. 빠른 속력으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헛것을 보았던 것 같았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 - P219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떠, 목의 늘어난 인대나 금간 척추는 어떻게든 회복 가능하나 왼손만은 완전히 으스러져버린 것을, 신경까지 손상돼 재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버릇대로 나는 통찰했다. 점점 크게 요동치는자동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열린 차창 밖으로 왼손을 뻗어올려 차체를 붙잡았던 나의 과오를.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 - P224

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첫 불운은 조용히 다른 불운을 불러왔다. 피를 많이 흘려 쇠약해진 데다 매사에 오른손에만 무리한 힘을 준 탓에, 퇴원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오른손의 관절들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악화될 때는 냄비나 주전자, 심지어 머그컵조차 혼자 다룰 수없어 일일이 남편을 불러야 했다.
무의미한 반성들은 그 과정에도 뒤따라왔다. 재활치료에 지나치게 열심이었던 것, 빠른 회복에 집착했던 것, 그래서 마치 완전히 회복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 개선되어야 할 내 습성은, 때로 균형을 잃을 만큼 맹목적인 의욕.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면 세 개는 해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범생 기질. 폐 끼치는 것을 정도 이상으로 싫어하는 결벽성. - P225

일 년 가까운 통원 물리치료를 끝낸 늦은 겨울, 나는 두 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왼손은 완전히 으스러졌고, 오른손으로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활만을 억지로꾸려갈 수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일 년만 두고 봅시다‘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동안오른손을 쉬어주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가사를 쉬고, 그림은 말할 것도 없으며, 무거운 것을 들거나 힘을 주거나 손목을 뒤로 꺾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 - P225

고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인체의 자연 치유력을 믿어보자는 것이었다.
회복된 뒤에라도, 손에 무리가 가는 일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의사가 당부한 일 년이 지났지만, 오른손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의사였다. 젊었고, 권위적이지 않았고, 환자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그런 의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말하자면, 지난 이 년간 내가 만난 유일한 행운이었던 셈이다. - P226

어떤 영원한 사람. 귀신처럼 어른거리는 사람. 흔적인사람. 그림자인 사람. 혹은, 오래된 집의 마룻바닥에 스민 누대의 일생들의 자취…… 그런데,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이 여자의 어딘가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과거 속의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이 년 전의 내 갈망이었다. 시간의 뒤편으로 들어가고싶어 했던 나, 낡은 마룻바닥 속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고 싶었던 나. 천천히 세월에 지워지고 싶었던, 눈비와 들쥐들과 바람 속에 폐가처럼 무너져 내려앉고 싶었던 나.
창문을 열었지만 실내는 몹시 덥다.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나는 일어선다. 벽 쪽으로 걸어간다. 더러는 비닐을 뒤집어쓰고, 더러는 먼지로 부예진 작품들을 둘러본다.  - P230

육송 널빤지를 일정한 폭으로 자르고, 못질을 해 붙이고, 사포질을 하고, 아교를 포수했었다. 벽돌을 곱게 가루내 분채와섞어 색을 내고, 늙은 세월의 느낌을 입혀줄 대두 기름과 잣기름을 직접 짜서 만들었다. 어깨를 결려가며, 손가락에 상처를 내가며 두 손, 두 팔로 이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며칠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이 년 동안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 한 남자의 골칫덩어리. 때로 오른손이 악화되면 자신이 쓴 물컵 하나 선반에 - P230

뒤집어놓을 수 없는, 철저히 쓸모없는 존재.
나는 그림들로부터 등을 돌려, 여자의 옆얼굴이 그려지다만 널빤지 앞으로 돌아와 앉는다. 이 얼굴의 이미지를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 마치 종교에 몰입한 사람처럼 나는 진정으로 매달렸었다. 이렇게 고요하게, 나는 침잠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이런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과연 아물 수 있을지,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다시 그린다면 나는 이런 고요 대신 울부짖고 싶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발을 구르고 싶다. 이를 악물고 동맥을 끊어, 솟구치는 피를 보고 싶다. 이 그림의 놀라운 고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느낌으로 고여 있는 평화가 나를 구역질나게 한다. 이 평화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 같은 공허, 황무지의 참혹함-그편이 나에게는 진실로 느껴진다.
천천히, 그러나 단호히 오른손을 뻗어, 나는 그 낡은 널빤지를 뒤집어버린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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