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기억력이 있다. 오해는 마시길. 한 번 보기만 해도 고스란히 외워버리는 능력이 아니라, 같은 구절을 수백 번 읽어도 고스란히 잊어버리는 능력이 있다. 과장이 아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쓴 카피 한 줄도 못 외우는 카피라이터가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한 곡도 못 따라 부르는 팬이 되었고, 남편이 바로 며칠 전에 들려줬던 음악에 "좋다. 누구 음악이야?"라는 질문을 또 하는 아내가 되었다.
이건 너무하다 싶어 병원 검사도 받아보았다. ‘정상‘. 이 두 글자가 똑똑히 적힌 종이를 들고서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냥 나는 머리 - P6

가 안 좋은 것이었다. 머리가 안 좋아서 아무리 공부해도 역사 성적은 늘 그 모양이었고, 머리가 안 좋아서 그토록 외우고 싶었던 시한편을 못 외운 거였다. 머리가 안 좋아서 지난주에 본 영화의 줄거리를 못 기억하는 거였고, 머리가 안 좋아서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한거였다. 모두가 머리가 안 좋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정정하자.
머리의 다른 영역까지 다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독 ‘기억‘ 과 관련된 머리는 평균 이하임이 확실했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능력을 상실한 대신 나는 ‘성실‘이라는 능력을 얻었다. 말 그대로 나는 끊임없이 읽고, 듣고, 보고, 찍고, 경험하고, 배우는 부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인간 부류에 속한다. 한 선배가 농담처럼 말했다. - P7

"넌 나보다 열 배를 더 열심히 살지만 어차피 열 개 중 아홉 개는잊어버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나와 같은 분량을 살고 있는 거야."
나는 선배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선배의 말이 틀렸다고생각한다. 나는 내가 잊어버린 아홉 개가, 그러니까 내 머리가 ‘기억‘
하지 못하는 아홉 개가 내 몸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에서 내 머리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몸에는 그 눈물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좋아하는음악 앞에선 기꺼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난 후에도 그 줄거리나 주인공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 - P7

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그 책을 떠올리면 심장의 어떤 부분이 찌릿한 것은 내 몸에 그 책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었던장소, 그때의 바람, 설렘 등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이건 마치 자전거 배우기와 같아서 한번 강렬하게 몸에 기록된 경험들은어지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누구나 뇌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으니, 몸은 감정을 기록하는 일도 떠맡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내 몸은 유난히 나쁜 뇌 덕분에 유난히 고생이다.
‘몸에 기록한다.‘
이 문장 덕분에 나는 서른 살이 넘어 나의 기억력과 화해하였다. 더이상 나는 내 기억력을 책망하지 않는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꼭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니니. <죄와 벌>의 주인공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니. 나는 기억을 잘하는 나보다 눈물이나 웃음이나 심장소리로 순간순간을 몸에 기록하는 나를 더 좋아한다. 그러니 이 책은 그 기록에 관한 기록이다. 경이로울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 한 인간의 몸부림에 관한 기록이 될 것이다.
2015년 7월
김민철 - P8

물리적인 환경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적 환경에서도 나는 천혜의 환경을 누리고 있다. 남편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몸도 일으키지 않고, 안경도 끼지 않은 채로 침대 옆에 있는 책부터 펴는 사람이다. 책을 읽다 좋은 부분이 나오면 꼭 내게 읽어준다. 책을 다 읽고난 후에도 그 책을 정리한 글을 써서 내가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남편과 나의 책 취향은 꽤 다른 편인데, 내가 남편의 관심 분야에 무관심한 것과는 달리, 남편은 내 관심 분야에도 관심을 놓치지않고 괜찮은 책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꼭 선물로 사서 준다. 간혹내가 남편 분야에 관심을 보이면, 남편은 입문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책까지 차근차근 선물해준다. 자부한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책 친구를 나는 가지고 있다. - P16

이 환경은 회사에서도 계속되는데, 10년 넘게 한 팀에서 일하고있는 박웅현 팀장님은 좋았던 책이 있으면 꼭 권해주시고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신다. 그분의 독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결코우연이 아니다. 남편에 비해 팀장님과는 관심 분야도 꽤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게 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팀장님과 나는 서로 읽고 좋았던 부분을 정리해서 교환한다. 신기하게도 같은 책을 읽고도 좋아하는 부분은 꽤나달라서 팀장님이 내게 보내주시는 요약본을 보면 새롭게 그 책을 읽는 느낌까지 든다. 그뿐만이 아니라 좋은 책이 있으면 내게 무심하게 선물해주는 선배도 있고, 책 이야기로 술자리를 꽉 채울 수 있는친구도 있고, 어쨌거나 인간관계적으로도 나는 천혜의 환경을 누리고 있다. - P17

팀장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렇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 모두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기게도, 나는 이미 나를 포기했는데 말이다)그 부분을 책에서 찾아 보여주시지만, 역시나 나는 곤란하다. 내게 그 책은 ‘어떤‘ 부분이 좋았던 책이라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그러니까 ‘어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희뿌연 구름처럼, 뭔가, 어딘가, 좋았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만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백 권의 책을 읽고 단 열 권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가까스로 기억해내는 몇 권이 있다. 내게는 울림이 있었다. 이책들 때문에 알지 못하던 세계로 연결되었다. 이 책들 때문에 인생의계획을 바꾸기도 했다. 이 책들 때문에 회사 가는 일까지 즐거워졌던 아침이 있었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기억난다.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이 책들 덕분에 잠깐 동안이라도 변했던 나는 기억난다. 그게 내가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의 어쩌면 전부일 것이다. - P18

"내가 신기한 책 하나 보여줄까?"
그리고 남편은 책 한 권을 꺼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아니 수없이 본 책이었다. 우리 집에도 있는 책이었다. <자본론>이었다. 그런데 책이 이상했다. 책이 아팠다.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갖은 방법을 통해 고문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책으로 재현한다면 그 모습일 것 같았다. 아니, 고문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소중히 읽었다는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소중히 한 글자한글자 쓰다듬으며 읽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읽었으면, 얼마나 잘근잘근 씹으며 읽었으면, 얼마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좌절하며, 희망하며, 다시 좌절하며 읽었으면 책이 이럴까. 모든장이 손때가 덧입혀져서 부풀어 있었다. 종이 한 장보다 손때의 두 - P30

께가 두꺼웠다. 제본은 이미 오래전에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가다듬고, 다시 떨어지고, 다시 가다듬은 흔적들이 보였다. 너무 놀라서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시간을 산 것일까. 80년대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경제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그 청년은 어떤 시간을 견딘 것일까. 언제나 정중하게, 언제나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고, 말하기보다는 듣는 모습이 더 익숙한 선생님은 어떤 시간을 통과한 것일까. 아득했다. 몇 번 뵌 적도 없고, 오래 말해본 적도 없는 선생님이었지만 갑자기 선생님의 모든 시간을 다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책 한 권이 그랬다. 글자 한 자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책은 모든 것을 제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P31

그러니까 그날 밤 내가 ‘이해했다고 믿는 문장은 어쩌면 나의 철저한 ‘오독‘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다. 선생님의 설명은 안 듣고 내가 내 멋대로 해석하면서 내 세계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것이다. 그러나 모든 독서는 기본적으로 오독이지 않을까? 그리고그 오독의 순간도 나에겐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그 책은 나와 교감했다는 이야기니까. 그 순간 그 책은 나만의 책이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그때 나를 성장시켰든, 나를 위로했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든, 그 책의 임무는 그때 끝난 거다.
지금 우리 집 책장에는 오독의 임무를 다한 책들이 다시 한 번 오독의 기회가 오기를, 오독의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책들은 제발 자신에게 오독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책이 어느새 5톤에 달한다. 그 책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이 있을까?아마도. - P40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때론 단숨에 핵심에 도달하기도 하고,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최선의아이디어를 생각해내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엔 하나에 2만 원이나하는 사과를 사 먹는 사람들을 위한 카피를 써야만 했다. 다시 한 번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내가 껴안을 순 없어도, 각자에겐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다.
소설책을 편다. 거기 다른 사람이 있다. 거기 다른 진실들이 있다. 각자에게 각자의 진실을 돌려주려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좁고 좁은 내가 카피라이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 P51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 안에서, 일상적인 세계의 일상적인 업무에 불후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인물에게는 진실이 어울리지 않는다.

 마이클 커닝햄, 《세월》, 비채, 2012


그렇다면 나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 P71

그 일상은 바람이 살랑 부는 노천카페에서의 커피가 아닌, 한낮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회사 앞 식당의 점심 속에 있다. 그일상은 스탠드 불 하나 켜놓고 밤새워 쓰는 글이 아니라 창백한 형광등 빛 아래에서 작성하는 문서 안에 있고, 잘 포장된 초콜릿이 아니라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 사는 껌 속에 있다. 보고 싶은 책보다는 봐야만 하는 서류 더미에 더 많이 할애된 일상,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소통보다는 의무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소모되는 일상, 갓 갈아낸 자몽주스보다는 믹스커피에 더친숙함을 느끼는 것이 어쨌거나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 P72

그러니 나는 다른 일상을 꿈꾼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아침 바게트가 일상이 되고, 노천카페가 일상이 되고, 밤새워 쓰는 글이, 퐁피두 센터가, 세비야의 햇살이, 라인강변을 따라 달리는 기차가 렘브란트의 그림이 고흐의그림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자고, 모든 하루가 내 손에 고스란히 달려 있으며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생활이 일상이 되길 꿈꾼다. 파리가 일상이 되길 꿈꾼다. - P73

그러니 그건 나였다. 내 일상을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범인이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회사도 범인이 아니었고, 야근도범인이 아니었다. 물론 파리도 범인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이클 커닝햄의 이 구절이 내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나를 구원할 의무는 나에게 있었다. 매일은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그 깨달음에 앞의 글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무뎌질 때마다 내가 쓴 이 기이한 반성문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아직도 회사 책상 앞에는 파리 지도가 붙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위에 종이 한 장이 더 붙어 있다. 파리로 붕붕 떠다니는 내 마음을알고, 어느 날 박웅현 팀장님이 나에게 써주신 글귀다. 이제는 반성문 대신 이 글귀를 읽는다. 서른여섯 살에도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붕붕 떠다니니까. - P76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중국의 시 - P77

문장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내게 이런 가르침을 주는 책은없었다. <행복의 충격》을 읽으며 막연하게 수상하다 느꼈던 것이 이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으로 변했다. 언젠가 프랑스로 떠나기 위해 지금을 잘근잘근 씹어 견디고 있는 내게 이러는 건 반칙이었다. 그런내게 이런 가르침은 필요하지 않았다. 전혀.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던져졌다. 그다음은 홀린 듯 빠져들었다. 나는 카뮈의 《안과 겉>, <이방인>, <시지프 신화>까지 달음박질쳤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 찾아왔다.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라니. 출근은 내게 결코 화해불가능한 어떤 것이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6년을 매일 회사를 가면서,
그 6년을 매일같이 나는 회사에 가기 싫었다. 막상 도착하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할 거면서, 심지어 열심히 일할 거면서, 나는 매일아침 출근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 찾아온 것이었다. 명백히 시지프 신화> 때문이었다. 명백히 김화영과 카뮈의 짓이었다. - P83

이것이 처음 <행복의 충격>을 읽었을 때 내 마음속의 지진이었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나를 위한 공간은 지중해 어디에도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었다. <결혼, 여름>도, <안과 겉>도, <이방인>도, <시지프신화>에서도 같은 선언이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그곳에 살아남아 버티면서 멀고 구석진 고장에 서식하는 괴이한 식물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계속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일침을 놓고 있었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 책세상, 1998 - P85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오직 이곳만을 살아가는 것, 쉬이 좌절하지 않는 것,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다면 온전히 받아들아는 것,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일상을 살아나가는 것.
분명 프랑스를, 지중해를 알기 위해 책을 펼쳤었다. 그렇다. 나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중해를 만나고 싶었다. 태양과 구릿빛피부와 풍부한 해산물과 지금 행복한 사람들의 공간을 꿈꾸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국 도착한 곳은 정신의 지중해였다.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태양을 남김없이 사는 것.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히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지만,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시지프처럼. 자신의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깨어 있으면서 결국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한 시지프의 공간이 바로 지중해였던 것이다. - P86

술을 마셨고 가을이었고, 은행잎이 떨어지고 있었고, 노란 조명과 그 은행잎이 만나서 세상이 다 노랗고 예뻤고, 선선했고, 기분이좋았고, 젠장. 이곳이 지중해였다. 내가 지금, 여기를 이보다 더 오롯이 살 수는 없는데, 지구 반대편에 지중해가 무슨 상관인 건가. 여기가 지중해인데. 내가 지금 좋은데. 팀장님 말이 다 맞았다. 그런데 나는 가고 싶었다. 동시에 안 가고 싶었다.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나는 흔들렸고, 팀장님은 잡았고, 갔다 오라고 말하고, 얼마든지 갔다오라고 말하고, 술은 맛있고, 나는 흔들 흔들 계속 흔들,
그리고 나는 지중해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있는 휴가를 다 끌어모으고, 토요일, 일요일을 있는 대로 갖다 붙였다. 3주 반, 그러니까 거의 한 달에 가까운 휴가가 생겼다. 모두 지중해에 쏟아부었다.
혼자서 카뮈의 무덤이 있는 남프랑스 루르마랭과, 김화영이 70년대에 유학을 했다는 엑상프로방스와 파리와 아를과 니스로 떠났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그만두지 않은 것이다. 결국 머물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결혼을 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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