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와 먼 길 함께 가지 않았을 것이네
내 그대에게 채워줄 게 없었을 것이므로
물 한모금 나눠 마시며 싱겁게 웃을 일도 없었을 것이네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도시락 소풍


강물 위로 뭉게구름 지나간다 버드나무와 감나무 사이로 물까치떼 오간다

유년 시절 내내 같은 교문을 드나들던 내 친구 종대와 나는 어쩌자고 또 강변 느티나무 그늘 아래 붙어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유년의 교실과 칠판 낙서와 긴 복도와 벚나무 아래 그네와 풍금 소리까지 죄다 꺼내놓고 종대가 싸온 도시락을 나눠 먹는다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내 친구 종대가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나를 위해 들고 온 도시락, 커피에얼음까지 챙겨 왔어? 도시락을 다 먹은 종대와 나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상수리나무 그늘이 찰랑이는 바위에 올라앉아강물과 뭉게구름과 물까치떼를 바라보다가,

빈 도시락이 뛰는 가방을 메고 징거미 잡으러 가는 소년이 된다

남겨두고 싶은 순간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는
낡은 슈퍼마켓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살구나무를 두고 있는
작고 예쁜 우체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난 떨며 내세울 만한 게 아니어서
유별나게 더 좋은 소소한 풍경,

슈퍼마켓과 우체국을 끼고 있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 초승달 옆에 개밥바라기!

집에 거의 다 닿았을 때쯤에야
초저녁 버스 정류장에
종이 가방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곧 단념했다

우연히 통화가 된 형에게
혹시 모르니 그 정류장에 좀
들러달라 부탁한 건 다음 날 오후였다

놀랍게도 형은 가방을 들고 왔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있었다는 종이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오래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백련 백년


꽁꽁 언 연못 위로 눈이 내린다

너와 나는 연못으로 들어가
얼음을 지치다가 눈을 뭉친다

꼭꼭 누른 눈 뭉치를 던지는 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을 증명한다

그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눈 뭉치를 들고 서 있는 내게
너는 문득 눈 뭉치를 들고 다가왔다

너는 내가 들고 있는 눈 뭉치 위에
네가 들고 온 눈 뭉치를 올렸다

눈 뭉치는 눈싸움이 될 수도 있고
큰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작고 예쁜 눈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살 비비고 식는 사랑은 사랑 아니다

너와 내가 다시 찾은 연못엔
막 피어난 백련이 둥글고 뜨겁게 하얗다

둥근 연잎 위에 둥글게 쌓인 햇볕

너는 양손으로 끌어모은
햇볕 한뭉치를 연꽃잎 위에 올려
둥글고 하얗게 나를 흔든다

백련이어도 좋고 백년이어도 좋겠다
이게 사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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