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서 내가 글을 쓴다면 ‘살고 감동하고 사랑하라‘가 되려나. 살아 있다는 감각이 솟구친다. 거리낄 것이 없는 완전한 자유 안에서 나는 젊은 사람들처럼 뛰었다가, 아줌마 아저씨들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가 또 내 마음대로 움직였다. 언덕 위에 올랐다가 호숫가로 내려가기도 했다가, 커다란 나무에 몸을 바싹 붙이고 앉기도 한다. 작은 반짝임에도 사소한 촉감에도 아낌없이 감동한다. 이러려고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공원 근처로 숙소를 고집했던 걸까.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던 아침 시간을 내 마음대로 써보고 싶어서. 평생을 한결같이미워했던 아침 시간들에게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고 싶어서. 아침부터 숨쉬듯 쉽게 행복해지고 싶어서.


살고 감동하고 사랑하고 있다.
이곳이 나의 매일이라는 것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들어낸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P203

미술관을 좋아하지만 미술적 지식은 부족한 나는 언제나 나의 느낌에 충실하다. 느낌이 오는 작품만 들여다보고, 느낌이오지 않는다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나는 다르다. 나는 유나 작가님의 오일 파스텔 제자. 작가님과 우리는 한 달간 꽃을 그릴 예정이다.
운명처럼 전시장 입구에서 밀레의 <데이지 꽃다발> 그림이나를 맞아준다. 덕분에 첫 그림부터 나는 좀처럼 떠날 수가 없다. 그림 앞에 딱 붙어서 하얀 데이지꽃을 표현한 파스텔의 선들을 유심히 본다. 뒤에 배치된 꽃과 전면에 나선 꽃이 어떻게다르게 표현되는지 들여다본다. 그늘 속에 잠긴 꽃들은 또 어떤 색으로 어떤 농도로 표현했는지도 유심히 살펴본다.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서 꽃을 클로즈업해 찍고, 따라 그려보고 싶은 부분들도 또 찍는다. 다음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 P219

도 다시 돌아와서 또 들여다본다.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밀레, 훌륭한 화가였구먼. 그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만종>이 아무리 유명하든 말든, 나는 꾸준히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담담한 <데이지 꽃다발)에나는 마음을 홀라당 빼앗긴다.
겨우 그 그림 앞을 떠나자마자, 또 바로 다음 그림에게 붙잡힌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하얀 강아지를 안고 있다. 나는 하얀 원피스의 레이스도, 하얀 강아지의 털 하나하나도 좀처럼 믿기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하얀데 그토록 또렷하게 구분되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는다. 분홍색 옷을 입고 검정 모자를 쓴 여자를그린 마네의 파스텔화는 또 어떻고. 들여다볼수록 머릿속에 물음표만 늘어났다. 여인의 머리와 모자를 표현한 검은색, 얼굴을 표현한 흰색, 입술 위의 빨간색, 옷을 표현한 분홍색, 바탕을 표현한 회색, 딱 다섯 가지 색으로 이런 그림이 가능하다고? 드가의 발레 소녀들은 또 어떻고. 영원히 토슈즈를 고쳐매고 있고, 영원히 무대 뒤에서 뛰어나가기 일보 직전인 소녀들. 영원히 보고 있어도 영원히 새로울 그림들. - P220

지쳐서 일찍 집에 들어온 어느 오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세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옆커다란 창을 활짝 다 열었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빗소리만들었다. 도로 위를 미끄러지는 차들의 소리가 지나가고, 빗속을 뛰어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다시 빗소리. 안과 밖의 선명한 풍경 차이. 포근한 침대와 시원한 비. 얇은 잠옷과 창밖의 흔들리는 나뭇잎들. 적막과 빗소리. 일상과 비일상. 경계에 누워 경계의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어떤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20년간 지속되어온 나의 일상과 지금 이시간의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너무나 일상적인 한순간처럼보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나의 일상이 아닌 곳에 일상인 양천연덕스럽게 누워 있다. 생의 이런 무게감은 너무나도 생소해서 이것이 나의 생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아직 밖은 밝았다. 뜨거웠던 공기가 진정이 되고 차가운 바람이 슥 불어 들어온다. 나는 창문을 닫을 생각이 없다. 이불 - P246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리 비현실이라도, 이 바람의 서늘함과 이 이불의 포근함은 너무나도 나의현실이다.


저녁이 되어 비가 그치고 난 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거실 창문을 다시 열고, 창문 앞으로 옮겨둔 나의 작은 책상에 저녁 식사를 차린다. 토마토를 썰고, 민트잎을 마음껏 따서 넣고 치즈도 썰어 넣는다. 샐러드 채소에는 블루 치즈를 마음껏 넣는다. 오이절임에도 딜을 아낌없이 넣는다. 세 가지 샐러드를 앞에 두고, 또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꺼냈다. 내 방식대로 내가 먹고 싶은 걸 가장 신선하게 먹는다. 가장 신선하게마신다. 음악을 틀고 창문을 더 활짝 연다. 마침내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살면서 나에게 가장 다정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 P247

이 안전은 우연이다. 우연히 내가 저기에 없었고, 우연히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 우연히 내가 안전하고, 우연히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다. 일상이라 단단히 믿고 있던 지반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이 모든 순간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나의 안전은 얼마나 수많은 우연이 결합해서 기적적으로 찾아온것인지. 이 안전에 필연은 없다. 도서관에서 읽던 책에 세월호이야기가 나와서 결국 울었던 며칠 전이 생각났다. 수많은 생이 가라앉는 순간을 모두 같이 목도한 기억이 우리에겐 있다. 이태원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몇 겹으로 짓눌린 날들도 있다. 오래 아팠고, 오래 슬펐고, 오래도록 죄스러운 날들이있었다. 나의 안전은 당연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을 일상이라 부르며 이것을 당연한 듯 누리고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것. 투명하도록 얇고 우연한 안전이 손에 만져졌다. 나의 안전이 누군가의 위험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누리는 모든 말 - P255

짱한 생활이 말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알 수 없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더는 음악 속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창문을 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안전을 빌었다. 그렇게 창가에 밤늦도록 앉아 있던 밤이 있었다. - P256

공연을 마치고 나와 지은 작가님과 카페에 앉아 오래도록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는 글을 쓰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본 나젤 장인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우리만의 작은 세계를 글로 지키고 있다. 책 읽는 사람이 드문 이시기에, 들인 노력과 받는 보상이 전혀 일치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못 떠나고 있다. 무슨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세상이니까 못 떠나는 거다. 파리까지 와서 한국어로 글 쓰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 우리의 같은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글을 쓴다는 정체성이 파리까지 와서 새로운 인연이 되다니. 한국에 돌아와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야, 지은 작가님에게 받은 그 모든 마음들은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특별한 유대감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한국이든 파리든 글쓰는 이의 고충은 한결같으니까. 매일 의심과 싸우며, 매일 가장 깊이 좌절하며 쓴다. 그 사실을 서로는 알고 있다. - P277

무엇을 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대답은 쉽다. 하루는 크루아상을 먹었고 뱅센느 숲을 갔죠. 또 하루는 공연장까지 걷다가 신기한 마을을 발견했어요. 하루는 한 문장 안에 간편하게 요약된다. 하지만 그렇게 요약 가능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나만의 작고도 사소한 모험이 있었고, 그 모험 끝에 나는 요상하게 생긴 나의 보물을 꼭 쥐고 돌아왔다. 객관적으로 예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시장에서는 전혀 값이 안 나간다고 평가받을지는 몰라도,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신비로운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나의 하루를 찬찬히 비추는 걸 보노라면,
그 빛 아래에서 드러난 새로운 나의 모양이 나는 참 반가웠다.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참 만나고 싶었지. 이토록 낯선 나를, - P295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번엔 몸을 일으켜 절벽 위로 올라가는 산책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야가 달라진다. 운이 좋았다. 들꽃 시즌에 이곳에오다니. 들꽃들이 작지만 강한 어조로 이 언덕이 자기들 땅이라 외치고 있다. 특히 절벽 끝엔 노란 들꽃들이 촘촘하게 피어서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화려하게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는 에메랄드색 바다 위로 앙증맞게떠 있는 노란색 부표. 해변엔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모습. 유난히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여수 향일암과 남해 보리암에 끝없이 가는 이유다) 프랑스에서도 한결같은 나의 취향을 확인한다. 왼쪽에 바다를 두고 한가롭게 절벽 위 산책 길을 걸으며 크게크게 호흡했다.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고깊이깊이 숨을 내뱉으며, 이 감각은 또 얼마나 오랜만인가 생각했다. 자연 속에서만 새롭게 깨어나는 감각들이 있다. 바다의 광활함이 주는 사고의 폭이 있고, 자갈의 재잘거림이 깨우는 청각의 예민함이 있고, 작은 들꽃들이 흔들어 깨우는 마음의 진동이 있다. 그것들이 동시에 나를 찾아와서 나는 그곳에서 아낌없이 행복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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