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책에 취미를 갖게 된 것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에서 얻은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 일고여덟 살 즈음에 그것들을 읽느라 다른 모든 재미를 잊었으니까요. 그 언어가 제 모어(母語)이기도 했고, 그것이 내가 아는 가장쉬운 책이었으며, 소재가 그 나이에 가장 알맞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호수의 랑슬로나 『아마디스」, 「보르도의 위옹 같은,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허접한 책들은 제목도 몰랐고 아직도 내용을 모릅니다. 그만큼 내가 받은 교육이 엄정했던 것입니다. 나는 책을 읽느라고, 주어진 다른 학과 공부에는 더욱 게을러졌습니다. 그 점에서, 이해심 있는 개인 교사와 공부를 한 것은 공교롭게도 나와 딱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 P323

우리의 옛 성직자들은 그들의 책에서, 음탕하고 무절제한사랑에 응하고 싶지 않아 자기 남편을 거부한 한 여인을 언급하며A칭송하고 있다. 요컨대 아무리 과도하고 무절제하게 추구해도비난받지 않을 만큼 정당한 쾌락이란 없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말해서, 인간이란 가련한 동물이 아닌가? 자신의 자연스러운 조건으로 딱 한 가지 온전하고 순수한 쾌락을 겨우 음미하는데, 이성으로 그것을 잘라 내 버리려고 애쓰기까지 하니 말이다. 인위적인 수단으로, 공부로, 자기의 비참함을 늘이지않으면 충분히 초라하지 않은지, - P362

우리는 운명의 비참을 불리는 데 우리 재주를 썼다.
프로페르티우스


인간의 지혜는 우리를 위해 부지런히, 고통을 색칠하고 단장해서 그것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려고 술책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어리석게도 우리에게 속한 쾌락의 가짓수와 달콤함을 줄이는 데도 재간을 부린다. 내가 만일 철학 학파의 권위자였다면, 다른 길, 보다 자연스러운, 고로 참되고 편하고 거룩하다고할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길에 한계를 둘 수 있을 만큼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P363

우리의 정신을 고치는 의사이건 마음을 고치는 의사이건, 마치 서로 공모라도 한 듯 괴롭힘, 고통, 고생을 주는 것 말고는 육체나 정신의 병을 치료할 다른 방법도 약도 찾아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밤샘 기도, 단식, 말총 속옷, 멀고 적막한 곳에서의 귀양살이, 종신 투옥, 채찍, 그리고 여타의 괴B롭힘이 치료의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그것들이 진짜 고통, 찌르는듯한 쓰라림을 지녀야 하며, 그것도 갈리오라는 자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결과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고 말이다. 갈리오는 레스보스섬으로 추방되었는데, 거기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고통을 주려던 처사가 오히려 그를 더 편하게 해주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을 바꿔 그를 아내 곁으로, 그의 집으로 다시 보내어 그 자리를 지키라고 명했다.
그가 느끼는 방식에 벌을 맞추려고 말이다. - P363

우리에게는 자기가 직접 가 본 적 있는 지역에 대해 정확한이야기를 해 줄 지지(地) 학자들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팔레스티나를 보았다는 것을 내세워 나머지 모든 세상의 소식마저 이야기해 주는 특권을 누리려 드는 게 그들이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것을 자기가 아는 만큼만 쓰면 좋겠다. 이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주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강이나 우물의 특성에 관해서는 특별한 학식이나 경험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것에대해서는 보통 사람이 아는 정도밖에 모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한 줌밖에 안 되는 지식을 내세워 보려고 물리학 전체에 대해 저술하려 든다. 이 악덕으로부터 심대한 과오가적잖이 생겨난다. - P371

이제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 사람들이 전해 주는 바를 새겨보니, 각자가 자기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면, 이 신세계에는 아무것도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세론과 관습이 보여 주는 본보기와 생각 말고는 무엇이 진리와 이성의 근거가 되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곳에만 항상 완벽한 종교, 완벽한 정치 체제, 삼라만상의 완벽하고 완성된방식이 존재한다는 식이다. 그들은 야만적이니, 자연이 그 자체의 - P371

힘과 그 자체의 평상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해 내는 과일들을 우리가 야생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런데사실은 우리가 인공적으로 변질시키고 평상의 질서에서 벗어나게만든 과실들이야말로 오히려 야만적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 아닐까. 전자에는 진짜일 뿐만 아니라 훨씬 쓸모 있고 자연 그대로인효능과 속성이 생생하고 힘차게 살아 있는 반면, 후자에는 우리의부패한 취향을 만족시키려고 적당히 다듬느라 퇴화한 모습으로남아 있다. ‘참으로, 경작도 하지 않는 이들 나라에서 자란 갖가지 과일들은 우리의 것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만큼 그 풍미며 미묘한 맛이 우리 입맛에도 빼어나기 그지없다. 우리의 위대하고강력한 어머니 자연을 누르고 기예가 명예를 차지한다는 것은 당치 않다. 자연의 작품들에 깃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은 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많은 허튼수작을 부렸던지 완전히 질식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결함이 반짝거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자연은 공허하고 얄팍한 우리의 기획을 놀랄 만큼 부끄럽게 만드니, - P372

담쟁이는 가꾸는 손길이 없을 때 더 잘 자라며,
산딸기나무는 인적 없는 동굴에서 가장 곱게 피어나고,
새들의 노래는 기교가 없어 더욱 달콤하기만 하네.
프로페르티우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 봐야 작디작은 새 한 마리가 지은 둥지마저 흉내 낼 수 없으니, 그 조직이며 아름다움, 적절한 쓰임새를 우리는 따라 할 수 없다. 미미한 거미가 잣는 거미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연 아니면 - P372

우연, 혹은 인간의 기예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자연이나 우연이 만든 것이요, 가장 미미하고불완전한 것들을 기예가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들 신세계의 민족들은 인간 정신에 의해 형성된 것이 거의 없고 아직도 그들의 원초적인 천진성에 아주 가까이머물러 있기 때문에 내게 그런 점에서 야만적으로 보인다.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여전히 자연의 법이며, 우리의 법에 의해 변질된 바가 매우 적다. 그들이 지닌 순결한 상태를 생각하면 나는 왜이들이 좀 더 일찍, 그들의 진가를 우리 시대보다 더 잘 평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살던 때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뤼쿠르고스나 플라톤이 이들을 몰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언짢다.  - P373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으로 이들 민족에 대해 알게된 사실들은 황금 시대를 이상화하면서 시인들이 그려 본 온갖그림이며,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상태를 꿈꾼 온갖 풍경은 물론, 철학이 구상하고 열망해 온 것 자체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게 된 그토록 순수하고 단순한 천진성을 고대인들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인간 사회가 그토록 적은 기예와 최소한의 인위적인 땜질로 유지될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없었다. 나는 플라톤에게 말하리라. 그 나라는 어떤 종류의 거래도 없는 곳이라고. 어떤 문자도 알지 못하며 어떤 숫자도 깨우친 바 없고, 판관이라는이름도 정치적 지배 계급도 없으며, 노예 제도도, 부유함과 빈곤 - P373

함이 습속이 된 바도 없다고. 어떤 계약도 없고, 어떤 상속도 재산분할도 없다고. 유유자적한 것 말고는 일이라는 것이 없으며, 모두가 모두를 보살피는 것 말고는 따로 친족을 따지지도 않고, 옷도 없고, 농사도 없고, 쇠붙이도 없고, 포도주나 밀의 사용도 없다고, 거짓말, 배신, 위선, 탐욕, 시기, 중상, 용서를 의미하는 단어들자체가 쓰인 적이 없다고. 그러면 플라톤은 자기가 상상했던 국가가 이 같은 완벽함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알리라. "신들의 손에서 방금 튀어나온 인간들." (세네카)

이것이 자연이 지어 준 최초의 법들이다.
베르길리우스 - P374

하느님은, 선인이라면 이 세상의 행불행이 아닌 다른 것을 희망해야 하고, 악인 또한 이 세상의 행불행이 아닌 다른 것을 두려워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해, 세상 일을 당신의 신비로운 뜻에 따라 조종하고 적용하여 우리가 어리석게 이용할 수 없게 하신다. 세상의 행불행을 인간적인 동기에 따라 이용하려는 자는 경박한자이다. 그런 자들은 찌르기 1점을 얻으면 반드시 2점을 잃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적수들에게 이 점을 멋지게 증명해보였다. 이것은 이성이라는 무기보다는 기억이라는 무기에 의해 결정되는 말싸움인 것이다. 태양이 광선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빛에 만족해야만 한다. 태양 자체에서 보다 큰 빛을 잡겠다고 눈을 쳐드는 자는 그 자만심에 대한 벌로 시력을 잃더라도놀라지 말라. "사람들 중 누가 하느님의 의도를 알 수 있으며, 누가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혜서 9:13) - P391

나는 사람들이 흔히 하듯 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잘못은 범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는 나와 다른 점들이 있으리라 쉽게 이해하는 것이다. 내 삶이 어떤 틀에 속해 있다고느낀다고 해서,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세상에 그것을 강요할 마음이 없으며, 살아가는 데는 서로 다른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이해한다. 그리고 너나없이 모두가 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사이의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내 의향이나 내 원칙으로 남을 구속하지 않으며,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 고유의 모습에 맞게 옷을 입히는 정도인 것이다.  - P409

그리고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만큼 더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판단할 때는각자 한 사람씩 따로 보고, 일반적인 틀에 맞춰 나를 재려 들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약하다는 사실이, 제대로 평가받아 마땅할 사람들의힘과 활력에 대해 내가 가져야 할 견해를 변질시키지는 않는다.
"자기가 따라 할 수 있을 만한 것 빼고는 아무것도 칭찬하지 않는사람들이 있다." (키케로)  땅바닥 맨흙 위를 기어가면서도 나는 저기 구름 위까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이 솟아 있는 몇몇 영웅적인 정신의 고매함을 알아본다. 행동은 그러지 못할 망정, 절도 있는 판단력을 견지하고 적어도 이 주요한 능력이 변질되지 않게 건사하는 것만도 내게는 대단한 일이다.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을때는 선한 의지를 갖는 것으로도 상당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적어도 우리의 이 땅은 너무나 우중충하여 덕성의 실천은 고사하고 미덕을 상상하는 일마저 드문 지경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학교에서나 떠드는 상투어일 뿐이다. - P410

덕은 농 속에 걸어 두거나 장식용으로 귀 끝에 매달듯, 혀 끝에 달고 다니는 싸구려 장식품이 되었다.
덕스러운 행동은 더 이상 식별되지 않는다. 덕의 얼굴을 하고 있는 행위들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덕의 정수를 담고 있지 않다. 이익이나 영예, 두려움, 습관 혹은 다른 엉뚱한 이유들이 덕행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행하는 정의나 용기, 너그러움 따위는 남이 보기에, 그리고 대중 앞에 드러나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는 있으나, 행하는 자 자신의 내면에서는 전혀 덕이 아니다. 의도했던 다른 목적, 다른 동기가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덕은 덕 자체에 의해, 그리고 오직 덕 자체를 위해 행해지는 것만 덕으로 인정한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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